다음은 8월 12-15일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제6회 세계한민족포럼에서 발표될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의 발제 논문이다.
광복과 분단 60주년을 맞아 세계 각지의 학자와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민족번영과 국제협력 문제 등을 논의하는 이번 국제학술회의는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둔 국제한민족재단(KOREA GLOBAL FOUNDATION, 상임의장 李昌柱 아메리칸대 교수)이 주최하고 <프레시안>이 후원한다.
이번 학술회의는 지난 2000년 시작된 세계한민족포럼(WORLD KOREAN FORUM: WKF)의 6번째 행사로 이번 회의는 주제는 '통일 한국, 세계 속의 한국(UNIFIED KOREA & GLOBAL KOREA)'이다. <편집자>
***1. 해방 60주년과 과거청산**
올해는 일제가 패망한 지 60년 되는 해이고, 그것은 곧 한국이 해방된 지 60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60년, 환갑은 한국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태어난 해의 간지가 다시 돌아온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난 60년 동안 우리는 과연 완전히 일제 식민지 과거를 정리하고 새 국가로 태어났으며,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이제 우호적 이웃으로 거듭났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이제 새로운 평화공동체가 구축되었는가? 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일본은 과거사의 잘못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고이즈미 총리가 신사참배를 하고 교과서를 왜곡하는 등 더 노골적으로 우경화되고 있고, 중국과 한국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태도를 비판하는 대규모 반일시위가 발생하고 있다. 한편 일제 식민지 지배의 한 귀결로서 남북한은 분단되어 적대하고 있으며, 중국과 대만의 적대도 계속되고 있다. 중국의 발전과 군비강화와 북한 핵문제로 인해 동아시아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전쟁 발발 위험성이 높은 지역이다. 그래서 독일과 프랑스가 과거사를 정리해서 유럽통합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동아시아에서는 아직도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런데 일본에게 과거청산은 인근 식민지 국가를 침략했던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의 문제라면 중국과 한국에게 과거청산 문제는 자체 내의 과거 친일세력과의 단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만과 마찬가지로 냉전체제 수립 과정, 그리고 수립 이후 이루어진 전쟁과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 명예회복과 진상규명 문제이며, 오키나와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물러가고 미국이 진주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각종 민간인 희생의 청산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이들 국가에게는 일본에게 철저한 반성을 요구하는 만큼 국가 내부의 과거청산 문제도 안고 있다. 어쩌면 일본에 의해 저질러진 피해보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곧 미국의 점령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폭력과 상처, 그리고 일본에 협력했던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지배구조와 제도가 가져온 부정적 유산이 그것 못지않게 크다고도 볼 수 있다. 즉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에게 해방 60년은 일본과의 관계 문제를 재점검하는 환갑이기도 하지만, 60살이 된 근대 국민국가의 오늘을 재점검하여 국가와 정체성을 세우고 그것을 통해 동아시아 질서를 새롭게 만들어갈 비전을 만들어가는 환갑이기도 하다.
특히 2004년 광복절 이후 올해까지 한국에서는 과거청산 정국이 계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3년 8월 15일 경축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포괄적 과거청산'의 필요성을 밝힌 이후 한국 정치사회에서는 과거청산 문제가 큰 화두가 되었다. 가장 뜨거운 논란이 된 것은 친일 진상규명 문제였다. 2003년 2월 한나라당이 다수 의석을 점하던 제16대 국회에서 통과된 친일진상규명법이 진상규명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누더기 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17대 국회에서 다수당이 된 열린우리당이 이를 개정하기로 방침을 정한 이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부친이자 전 대통령인 박정희의 친일경력이 크게 논란이 되었으며, 과거청산 작업이 야당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정치공세가 아닌가 하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결국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은 2004년 가을 국회에 다시 상정되어 이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어 군사정권 하의 의문사 진상규명을 포함하는 과거사법(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안)이 지난 5월 3일 국회를 통과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국정원, 경찰, 군 등 정부기관은 자체의 과거사 위원회를 구성하여 지난 군사정권 하에서 저질러진 공권력 남용과 탈법 사례를 진상조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한국은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자체의 과거사를 정면으로 돌아보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 선두주자가 되었고, 그 작업이 한국, 남북한관계, 한미관계, 그리고 동아시아 국가 간의 관계에 미치는 파장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2. 과거청산의 의의**
1949년 반민특위 활동의 실패 이후 아직 한국에서 제대로 과거 친일파 처벌과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벌어진 각종 국가폭력의 피해와 의문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 피해자 명예회복 등 과거청산 작업을 수행해 보지 못했다. 물론 90년대 들어서 관련 피해자와 사회운동 단체들이 줄기차게 제기되어 입법화된 5.18 특별법은 법률적ㆍ제도적 수단을 통해 과거의 반인륜적 범죄나 학살범죄를 청산하려는 모범적인 시도로서 평가를 받고 있지만, 피해 당사자는 물론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여전히 미흡한 점이 많다. 그래서 지난 한국 현대사는 과거청산의 실패의 역사라 볼 수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청산되어야 할 세력이 권력을 잡아서 거꾸로 양심세력을 완전히 거세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기억을 조작해온 역사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에서 역대 한국 정부는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결여, 그리고 반복되는 역사왜곡과 망언에 대해 강력한 시정을 요구할 수 있는 도덕적 명분을 결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과거는 흘러갔다"는 담론은 과거청산 작업의 현재, 미래적 의미를 계속 폄하한다. "과거는 해석의 대상이지 진실규명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일부 학자들의 비판 역시 일면의 타당성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영복이 주장하듯이 시간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의 형식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통일체이다.(신영복, [강의], 돌베개, 2004, 149쪽) 미래는 현재, 혹은 과거와 무관한 그 무엇도 아니고 또 완전히 새것도 아니다. 현재 혹은 과거를 거론하지 않은 채 밀레니엄을 운운하는 한국사회의 담론들 상당부분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미래를 들먹이며 과거청산을 거부하는 논리 역시 단지 과거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아니라 현재 혹은 미래에 대한 입장 및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동아시아의 미래와 공동체 구성에서도 최대의 걸림돌은 바로 일본과 여타 국가 간의 과거청산, 그리고 자국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이다. 특히 일본과 중국, 한국관의 관계가 우호적인 관계로 변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도 일본의 침략과거사 은폐에 기인한다.
우리가 과거를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과거 국가권력에 의한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 그리고 그것을 통한 부당한 권력 장악과 지위획득을 들추어냄으로써 굴절된 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고, 사회정의를 세우고 나아가 사회 통합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즉 과거청산이 만병통치약은 아니고, 많은 부작용을 낳을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과거를 제대로 대면하거나 청산하지 않고 법과 정의를 말할 수는 없는 것이고, 또 화해와 용서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과거의 반인권,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세력은 페어플레이라는 정신을 모르는 집단이기 때문에, 이들의 잘못에 대한 공개와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것도 언제나 위협에 처할 것이다. 구 제3세계 국가에서 민주주의 공고화 문제는 언제나 과거청산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민주화가 질적으로 심화 발전되는가 문제는 이 과거청산 작업의 성공 여부에 달려있을 것이다. 동북아시아 3국, 그리고 동아시아 여러나라가 과거사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아기 하고 화해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한국이 이 점에서 모범국가가 국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2. 한국에서 '미해결된 과거사'의 내용과 그 해결 방안**
일본 제국주의 지배, 냉전과 분단, 전쟁, 군사정권 등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 과정에서 수많은 국가폭력과 인권유린이 자행되었고, 그 피해자의 수만 해도 수백만을 넘을 것이다. 중국, 대만, 필리핀 등의 나라와도 같은 처지에 있는 일제 시기의 강제동원과 종군위안부 문제는 모두 일본의 책임 영역 속에 있고, 국가수립 이후의 극우반공주의체제 수립과정에서 발생했던 백색테러와 반인권 사태는 일단은 일차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책임영역 안에 있으나 그 역시 유사한 고통을 겪은 대만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동아시아 질서 재편이라는 정치적 우산 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한국에서 8.15 이후 미해결된 과거사 역시 단순히 대한민국의 책임영역에만 있지 않다는 특성이 있으며, 그 해결 역시 현재의 국가권력이나 정치권의 의지만으로 충분히 감당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선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한 조선인 강제동원, 그리고 한국인 중 친일분자 진상규명 문제가 과거청산의 범위에 포함되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일제 식민지 하 조선 백성들의 고통은 식민지 상황, 주권의 상실, 책임 있는 공권력의 부재라는 상황이 초래한 것으로서 식민지 체제를 극복, 청산하려는 이후의 독립된 국민 국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과거 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데서 초래된 자기민족 구성원의 고통, 그 실태와 규모, 그리고 그러한 피해와 손실에 대해 인근 침략국가에 대해 응분의 사과와 배상의 청구를 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 남북의 분단,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군사정권의 등장, 그리고 경제성장 지상주의와 국민동원의 역사를 반세기 겪어오면서 대한민국은 이러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최근 확인된 것처럼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일제하 강제동원 이후 사망, 혹은 피해를 입은 조선인의 고통을 몇 푼의 청구권 자금으로 무마했으며, 오히려 한국정부는 추후 한국인 개인이 일본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길까지 막았고, 피해 실태와 규모에 대한 기초조사 조차 게을리 하였다. 이것은 그 동안 국가가 국민의 국가로서의 기본 임무를 방기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일제하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필요해진 것이다.
친일파, 부일협력자 규명 문제는 그들이 반공을 무기로 이후 지배층이 되면서 사실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완 상태에 있는 핵심 과거청산 과제이다.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협력하여 동족을 죽음과 고통으로 내몬 죄과에 대해서는 해방 당시의 시점이라면 당연히 처벌 대상이지만 지금의 시점에서는 이미 당사자가 거의 사망하였으며, 그들에 의한 피해 역시 특정 사회 구성원 개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 민족 전체에 관한 것이므로 단지 누가 어떤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반민주, 반인권적 일제의 파시즘적 지배정책에 부역했는지 밝히고, 그러한 행위의 내용을 철저하게 밝히고, 그들을 단죄하지 않음으로써 지난 60년 동안 한국역사에 어떤 해로운 결과가 나타났는지를 규명하는 선에서 머물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 친일경력이 있는 구체적 개인에 대해 OX 식의 판정을 내리는 것은 적절치 않고, 식민지 협력의 양상을 보여주고 '생계형 친일'과 '출세형 친일'을 구분하여 국민들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생계형 친일과 출세형 친일의 구분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당시의 직급에 따라 구분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역시 충분하지는 않다. 말단 경찰이나 군인이라고 하더라도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여 동포를 고통에 빠트린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의 당시 역할과 이후의 모습 등을 추적하여 역사적 평가를 함으로써 이후 세대들에게 교육 자료로서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60년 이상 지난 과거사이지만 한국에서는 사실 친일파 문제가 언제나 뜨거운 쟁점이 되는데, 그것은 언론이나 정치권이 박정희와 관련지어 사안을 정치화시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와 관련된 국가폭력 사태들보다는 이러한 반민족 인사에 대한 도덕적 비판이 훨씬 더 쉽게 공감을 얻을 수 있기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6대 국회에서부터 그러했지만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이 여려가지 명분을 들이대면서 친일진상규명법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반대를 한 것을 보더라도 친일진상규명 문제가 여전히 한국에서 '과거사'가 아닌 현실 정치적 의미를 지닌 사안임을 거꾸로 보여주고 있다. 즉 친일진상규명 작업이 지나치게 정치화되는 우려의 표시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지난 50여 년 간의 기득권 세력인 반공주의세력과 그 뿌리인 친일세력의 저항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은 2003년 9월 통과되었는데, 친일여부 판정 과정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모두 빠졌다.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전세계적 냉전체제의 수립과정에서의 극우정권이 수립된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대만, 그리스, 베트남에서 발생한 학살과 가장 유사하다. 한국전쟁 과정에서의 학살은 미국의 전후 동아시아 전략 속에서 일본의 전범에 대한 사면과 자본주의 성장 지원 전략, 남한에서의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의 유지 존속과 직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미국이 그리스(Greece) 등에서 그러하였듯이 대 소련 반공전선 구축을 위해 구 파시즘 세력을 재등장시키게 되자, 민족주의 세력 및 민중들에 이들에게 저항하고, 이들 구 기득권 세력이 저항세력의 공격에 직면하여 강대국의 지원을 받아서 정치적 반대세력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량 학살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미국이 이러한 학살의 전 과정을 지휘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의 냉전전략 그 자체가 이미 냉전체제 구축과정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예비하고 있었다. 스페인, 그리스와 베트남에서는 모두 전선이 계속 이동하여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불분명한 내전적 상황, 혹은 국내 정치폭력 과정에서 학살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의 경우와 대단히 유사하다.
광주 학살의 경우 군부의 재집권을 위해 특정 지역민, '불순분자'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 등장기의 학살, 니카라과 소모사 정권 등장 이후의 우익 테러와 학살, 과테말라의 학살, 남아공의 인종 차별과 학살 등과 유사한 성격을 진니고 있다. 전쟁상황이 아니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이 역시 한국전쟁기의 학살과 마찬가지로 극우반공주의 체제의 유지라는 정치적 환경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4.19 발포와 광주 학살을 제외한다면 60년대 이후 한국 군사정권 하에서의 국가폭력과 학살은 제3세계 여러 나라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피해 규모가 작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군부정권이 다른 나라의 극우독재정권에 비해 더 민주적이었거나 인권 옹호적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한국전쟁이라는 큰 산을 넘으면서 제거해야할 내부의 적은 거의 제거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극우세력과 저항세력 간의 갈등이 내전 형태를 지니면서 45년 이후 수십년간 지속된 다른 제3세계 국가와 달리 한국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미 내부의 적을 거의 완벽하게 청소하였고, 그 이후 백색정권을 수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이후의 학살은 사실상 새롭게 태어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며, 고문, 구타, 전향공작 등의 국가폭력의 형태로 80년대 말까지 유지되었다.
무장한 군인들이 상대방 군인만을 적으로 삼지 않고, 주민 전체를 적으로 간주하여 사냥하듯이 학살하거나 '초토화'시키는 집단 살상이 과연 근대 제국주의 일반, 혹은 바우만(Bauman)이 말하는 것처럼 근대 합리주의와 동전의 다른 면을 이루면서 근대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일본의 군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 지배체제에 독특한 것인지에 대해서 향후에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대체로 알제리, 베트남, 중국 등 제국주의의 식민지 저항세력에 대한 탄압이나 게릴라전 진압 과정에서 이러한 유형의 학살의 방법이 빈번히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극우 반공주의를 내세운 제국주의 지배체제 자체에 이러한 학살의 개연성이 잠복되어 있으며, 구 파시즘 세력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반공주의, 인종주의 담론과 더불어 이러한 집단 살상의 방법이 동원된다는 점이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정부의 사상범 통제와 이후의 처형 작업, 제주 4.3, 그리고 전쟁 발발 후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은 '극우 반공주의' 하에서 저질러지고 정당화되었지만 사실상 한국에서는 類似 인종주의( "빨갱이" 담론)적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내전이라는 전쟁 자체의 물리적 성격과 더불어, 일본과 한국에서의 냉전의 구축과정에서 구 파시즘 세력이 부활하는 것과 같은 맥락 속에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는 전쟁 상황에서 발생한 군ㆍ경ㆍ준군사조직의 민간인 살상, 혹은 여타의 반인도적인 가해 사실을 밝히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미 거창, 노근리, 제주 4.3 관련 명예회복, 진상규명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이것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전쟁 피해 진상규명 사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현재 북측의 협력 없이 남측에서 작업을 진행하는데서 한계가 있기는 하나 당시 좌익, 인민군에 의한 피해 사실도 조사되어야 한다.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은 남북간의 분단 및 대한민국의 존립의 기초가 되어 왔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 민감한 영역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전쟁 중 한국 측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 폭력, 반인권적인 사태역시 21세기 인권국가를 지향하는 한국이 그냥 미루고 넘어갈 수는 없는 사안이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 있기 때문에 가해 책임자 규명 문제는 대단히 신중해야 하지만 육하원칙에 따라 억울한 피해의 모든 정황을 밝혀내고 한반도에서 또 다른 전쟁이나 유사 전쟁 상황이 도래할 경우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군사정권 이후의 공권력에 의한 피해 문제는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지니고 있지만 이미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진행한 바 국가권력에 의해 발생한 각종 의문사, 피해 사건을 축으로 하여, 각종 간첩 조작으로 의심되는 사건, 법살(法殺) 즉 법적인 절차를 거쳤으나 그 수사 및 형 집행과정이 극히 심각한 의혹을 갖는 사건 들이 모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시기의 과거사 문제와 달리 여기서는 군사정권 등장 이후 본격적으로 민간인 사찰활동을 한 각종 공안기구의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질 가능성이 높고 부차적으로는 군과 경찰의 역할의 진실을 밝히는데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이 중에서 광주 5.18 학살 사건은 특별법을 통해서 어느 정도 과거청산 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차후 추가적인 진상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다소 논란이 예상되고, 지난 의문사위원회를 통해 진상규명 작업이 시도된 80년대 민주화 관련 의문사 사건 역시 미진한 부분에 대해 추가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민주화와 무관한 각종 의문사로 범위를 넓혀야 할 것이다. 군사정권 하에서의 국가폭력 문제는 현재의 권력구조 및 지배질서와도 직결되어 있는 사안이며 가해자가 대부분 생존해 있거나 현직에 있기 때문에 조사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억압기구로 군림해왔던 공안기구가 진정으로 국민의 보호자로서 거듭나고, 민주주의를 역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정리해보면 한국에서 과거청산의 대상과 범위는 우선 정부수립 이후 공권력의 반인권적, 반인륜적 행사로 인한 국민 피해사실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해석이나 학술적 성격규명 논란이 요구되는 과거의 모든 사건, 그리고 군사정권 하의 각종 의문사건 등 미제사건이 모두 과거청산에 포함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공권력에 의한 국민 피해의 사실이 분명하고, 가해의 정황이 어느 정도 드러난 사건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대상 시기는 일제 강점기부터 권위주의 정권의 붕괴기인 90년대 초까지 잡아야 할 것이다. 92년 문민정권 이후의 군의문사 문제 등은 현재 통과된 과거사법 개정을 통해서 조사되거나 별도의 특별법을 통해서 조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각종 의혹사건 예를들면 1987년의 KAL 858기 폭파사건 등이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에 포함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20세기 한국 현대사 과정에서 발생한 반인권 사태가 일본 제국주의, 그리고 미국의 개입과 극우파 부활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일제 강점 하 강제동원이나 친일진상규명 작업 같은 경우 일본의 협조를 얻지 않을 수 없고, 한국전쟁기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미국 측의 협조가 불가피하다. 특히 미군정기의 경우는 한국의 국가주권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 발생한 공권력 피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숙제로 남는다. 그리고 한국전쟁 기처럼 중국군에 의한 한국인 피해 문제 역시 과거사 진상조사 대상에 포함될 수는 있으나 일제시기, 미군정기처럼 대한민국의 국가권력이 그에 관한 자료를 갖지 않고 있으며 또 일차적으로는 책임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우선 국내 가용자료나 생존자들을 통해서 피해의 규모나 피해 실태를 먼저 조사하고 관련 자료 조사는 이후 해당 국가와의 협조 하에서 진행해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은 지난 세기 일본, 미국과의 관계에서 단지 피해자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베트남과의 관계에서는 가해자로서의 관계도 맺고 있다. 베트남 전쟁 참전이 한국의 독자적인 판단과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참전 한국 군인들이 작전과정에서 베트남 양민들을 학살한 사례가 있다. 그래서 민간 차원에서 베트남 양민학살에 대한 참회와 사회 운동이 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이 보다 진전되기 위해서는 참전군인과 정부 차원에서의 진상조사와 필요시 사과조치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3. 과거청산과 한국의 민주주의**
80년대 이후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일종의 과거청산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고, 2000, 2004년 시민단체가 주도한 낙선낙천 운동 역시 일종의 과거청산 운동이었다. 제국주의, 독재의 억압, 반민주 반인권 정책에 부역했던 인자들을 공직에서 추방하거나 사회적으로 그 죄과를 들추어내는 것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출발점이다. 그래서 파시즘, 독재로부터 민주정부로의 이행기에는 언제나 과거청산이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독재, 권위주의 시대의 주역을 정치무대에서 몰아내는 효과를 갖기 때문이고, 이차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부각시켜서 국가운영의 표준으로 삼고, 사회정의를 세움으로써 법의 지배와 대중의 자발적인 정치참여를 촉진시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과거 국가폭력의 주역을 처벌하거나 그 죄악을 밝히지 않는다면, 그러한 일이 재발할 가능성이 있고, 대중들은 여전히 도덕적 허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2차대전 전범처벌에서부터 시작된 과거청산은 각 나라에서 구세력의 저항으로 격렬한 정치투쟁의 일환이기도 했고, 또 과거청산을 주도하는 세력은 그것을 일종의 국민 정치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각 나라의 사례를 보면 여러 형태의 진실위원회를 통한 과거청산이 만족스럽게 추진되어 민주주의가 공고화되고 사회통합이 달성된 예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90년대 이후의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대만, 아르헨티나의 사례를 보면 구세력의 집요한 저항으로 과거청산이 중도에 좌초되거나 굴절되고, 구세력이 변형된 형태로 집권하거나 국론이 양분되는 일도 있었다. 특히 경제불안이 지속될 경우 이들 구세력은 그것을 빌미로 하여 과거청산 작업 자체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을 하기도 한다. 이내영.박은홍, [동아시아 민주화와 과거청산], 아연출판부, 2004,21쪽 그래서 아시아 여러나라는 아직 민주화 이행(transition problem)를 아직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역시 외국인들의 눈에는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성공한 사례로 평가되고 있으나,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작년 이후 친일진상규명법과 과거사법 제정과정에서 '국가 정통성 수호' '친일 불가피론'이 줄기차게 제기된 것처럼 구세력의 집요한 방해와 재뿌리기는 끈질기다.
한국의 민주화는 여타 제3세계 국가와 마찬가지로 사회운동의 동력에 의한 민주화로 볼 수 있고, 군부독재정권의 몰락 역시 사회운동의 힘이 그 일차적인 동력이었다. 그런데 이 민주화 운동은 그 자체만으로는 군부독재 뿐만 아니라 그를 지탱하는 정치경제 질서 이란을 붕괴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군부정권의 몰락은 한국의 6.29와 같은 형태의 위로부터의 양보에 의해 가능했다. 그것이 바로 양김의 분열과 87년 대선에서의 노태우의 당선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운동은 민주화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지는 못했고, 이러한 한계가 이후의 과거청산에도 그대로 연결되었다. 즉 90년대의 과거청산은 분명히 사회운동의 항의와 문제제기에 의해 가능했지만, 그것을 입법화하는 당사자는 청산해야할 그 세력이 다수를 점하는 국회, 그리고 구세력과 연합한 민주화 세력이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각종 과거청산법은 여타 아시아 국가에서 과거청산 작업이 방해를 받은 것과 유사하게 언제나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한 진실의 규명에 대단히 미흡한 법안이 되고 만다. 그래서 구세력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지 않은 채 살아남게 되고, 청산과정이 제도의 개혁과 국민들의 의식변화에 미치는 효과 역시 미미했다.
즉 청산되어야 할 세력이 청산을 위한 입법의 주체가 된 이 딜레마는 해방직후 반민특위 활동의 좌절처럼 실제로는 과거청산 작업을 기존의 권력구조의 변동에 영향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즉 철저한 민주화를 차단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유도하였다. '화해'를 거론하고 실행해야 할 주체는 사실상 피해자이고, 그 전제는 가해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사과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들이 먼저 화해를 언제나 앞세우는 역설이 여기서 나온다. 87년 대선 무렵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설치하여 광주문제를 화합 문제로 접근하였으며, 그것은 이후 노태우와 민자당이 1990년 8월 6일 단독처리한 '광주보상법'의 바탕이 된다. 이러한 화합과 보상의 논리는 국가폭력 행사의 정당성은 그대로 인정하고 가해자의 처벌과 진상규명 등은 포기하거나 묻어둔 채 사태를 봉합하자는 취지에서 진행된다. 이영재, "과거청산과 민주주의", 5.18 연구소, [민주주의와 인권], 2004년 제4권 2호, 249쪽이처럼 사태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이 없는 '위로부터의 과거청산'은 가해자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운동진영을 분열시킴과 동시에, 사건에 대한 재해석을 어렵게 만들어 결국 국민 정치교육의 효과도 달성하지 못한다. 5.18 진상규명이 5공 정치세력과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철저하게 청산하지 못하고 5.18을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으로 기념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청산 작업이 분명히 운동의 형태로 진행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거의 가해세력에 의해 굴절될 경우, 운동 세력의 동력이 분산되는 효과가 나타나고 그것은 과거청산을 더욱 뒤틀린 형태로 나타나게 만든다. 제일 심각한 것은 바로 피해 '당사자'와 '대변자'의 분열, 혹은 '당사자' 내부에서의 분열이다. 과거청산운동은 언제나 피해자와 대변자라는 양 주체에 의해 진행되는데, 피해자의 아픔이 없이는 운동의 동력이 형성되지 않고, 피해자들만으로는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다. 피해자의 고통은 객관적으로 파시즘, 군부독재, 반민주 반인권 정치세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피해자가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러한 정치질서의 유제를 청산하고 확실한 민주화를 이루어야 하지만 피해자들은 대체로 민주화 운동가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의 해결을 재발방지 장치 마련 즉 정치적 민주화라는 큰 대의와 직접 연결시키지 못하고, 당장의 억울함을 풀거나 경제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데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이 사실상 운동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수와 관계없이 이들의 목소리는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이 경우 구세력이 던지는 미끼, 즉 '보상 혹은 명예회복을 통한 화합'을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한 민주화' 앞세우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고, 이 경우 과거청산 작업이 뒤틀리게 된다.
물론 여기서 대변자들의 역할과 도덕성이 대단히 중요하게 된다. 대변자들은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를 일반화, 보편화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과거청산을 통해 구세력을 청산하고 제도개혁을 통해 민주주의 공고화 작업에 나설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피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과거청산을 운동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위험성이 있고, 또 때로는 과거청산 작업이 제도화되고 그 기구가 정부기구의 하나가 될 경우, 애초의 운동의 목표를 포기하고 관료적 접근에 안주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이들 대변자들은 진상조사 작업, 기념사업 등의 담당 세력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의 활동이 제도화되는 순간 그들은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한 민주화'보다는 '사업의 성공적 완수'라는 관료적 목표의 포로가 되기 쉽다. 그 중 일부는 자신의 과거청산 운동의 경력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출세와 기득권 확보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과거청산 작업이 운동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구 가해세력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정치사회적 민주화 운동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변질될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다.
과거청산이 민주주의의 철저화로 나아가지 못한 한계는 과거청산 운동의 주역들이 그것을 주로 입법화의 문제로 고정시킨 데서 초래되기도 한다. 즉 과거청산은 과거의 국가폭력의 진상 규명과 당사자 처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법 제도 개혁으로 완수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실 진상규명 작업은 그것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폭력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관료기구, 언론, 지식인, 그리고 수동적이고 복종적인 시민의 무언의지지 없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법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고, 입법이후에는 곧바로 독재 혹은 권위주의 지배의 억압기구의 개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기반의 극복에 나서야 한다. 과거의 국가폭력의 대행자이자 사법 판단을 권력의 의지에 종속시켰던 각종 공안기구, 검찰, 법원 등의 변화가 제도적 차원에서 민주주의 공고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임은 분명하다. 5.18 당시, 그리고 전두환 정권 하에서 폭력과 고문으로 억지 자백을 받아내고 그것에 기초해서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그리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을 이끌어낸 사법부가 이에 대한 공식 해명과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 의문사위 핵심 권고안을 각 정부 부처가 거의 수용하지 않은 사실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90년대 이후 문민정권의 등장과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국가기구의 민주화, 국가정보의 공개는 여전히 지난한 과제다. 이러한 제도, 영역에서의 민주화가 제대로 진척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과거청산 작업이 보다 철저하게 진행되지 못한데 기인한 것이며, 동시에 가해자 징벌이라는 개인적 청산에서 그러한 국가폭력과 반인권을 가능하게 했던 제도의 청산으로 관심의 축을 이동시키지 못한 운동세력 내부의 역량 한계도 지적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은 역시 지식인과 언론이었기 때문에 언론개혁은 과거청산과 민주주의 공고화의 핵심 영역에 속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러하듯이 한국에서도 과거의 일제 식민지 지배, 군사정권의 등장, 그리고 5.18 당시의 학살과 이후의 반인권 범죄에 동조하였던 언론이 자기반성을 전혀 하지 않고 있으며, 그러한 방식으로 현재의 과거청산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일보]는 5.18 당시 사설을 통해 "국군이 선량한 절대다수 광주 시민 곧 국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이번의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김삼웅, [독필로 본 대한민국 50년], 1995)고 학살을 은폐하고 군의 진압 작전을 찬양한 바 있으며, '김대중 내란음모'를 모두 기정 사실화 하여 보도하였다. 조선일보는 군의 정치개입을 일관되게 지지하고 또 부추겼으며 전두환 등극의 '사기극의 홍보병 역할을 충실하게 했기 때문에(최영태, "1980년도 기사를 통해본 조선일보의 정체성", [민주주의와 인권], 2004년, 제4권 2호) 사실상 5.18 학살의 방조자이자, 적극적인 가해자의 일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전두환과 주변의 신군부 세력은 비록 형식적이나 구속까지 되었으나 [조선일보]는 아무런 법적, 사회적 처벌을 받지 않았으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무혐의로 판정 난 이후에도 잘못된 보도에 대한 정정조치 조차 없었다. 바로 이 조선일보가 2004년 이후 친일청산 및 여타 과거사법 제정에 가장 앞장서서 반대하고 나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셈이다.
즉 과거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과거청산의 시도는 구 가해세력을 결집 자극시켜, 그들에 의한 복수를 초래하기도 한다. 5.16 쿠데타도 4.19 직후 비등했던 한국전쟁 피학살유족회 활동에 위기의식을 느낀 구 가해세력의 반작용 혹은 반격의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과거청산이 민주주의 공고화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기 위해서는 법적 청산을 넘어서서 사회적 청산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을 통한 과거청산을 넘어서 시민사회가 이를 완수해야 할 의무가 있고, 이 점에서 시민사회는 국가라는 틀을 넘어서서 동아시아 시민사회 구축의 전망 속에서 과거청산 작업을 추진할 수 있다.
***4. 한국의 과거청산과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
동아시아에서 일제의 죄악상을 충분히 공개하고 일본의 사과를 받아낼 수 없었던 최대의 요인은 냉전이었으며, 직접적으로 말하면 미국의 새로운 개입 때문이었다. 일본에서의 전범의 부활, 한국에서의 친일파의 집권, 미군의 오키나와 점령, 한국 대만에서의 대량 학살, 대만과 한국에서의 군부독재의 지속과 계속되는 국가폭력과 반인권 사태들, 한국에서의 5.18 학살, 이 모든 것은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반공기지 건설 전략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간접적인 효과라 볼 수 있으나 중국에서의 사회주의 혁명 후의 우익 처벌과 문화혁명의 광기 역시 이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중국 사회주의 국가가 국민들을 폭력의 희생양으로 만든 사건들이다. 그런데 미국의 우산 속에서 경제도약을 이루고 세계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일본이 자신의 죄과를 반성하지 않거나 과거사를 왜곡 은폐하고서 또다시 군비강화를 서두르고 있는 것은 미 청산된 과거가 어떻게 새로운 청산의 과제를 남김과 동시에 현재와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과거가 현재를 규정해온 동아시아에서 국가차원에서 과거청산에 가장 적극적이고 선도적인 자세를 취해온 나라가 한국이다. 그것은 한국의 강한 민주화 운동이 과거청산의 동력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과거청산은 가장 가까운 과거, 즉 광주 5.18 진상규명 작업에서 시작되어 군사정권 하의 각종 의문사와 의문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로 나아갔고, 곧이어 한국전쟁 전후 국군과 미군에 의한 학살 진상규명 요구, 그리고 일제 하 강제동원 진상규명과 친일파 진상규명 요구로 확대되었다. 즉 과거청산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책임추궁 문제에서 시작되어 곧바로 그러한 정권을 지탱시켜준 반공국가 형성과 전쟁, 그리고 그러한 정권을 수립하도록 만들어준 미국과 과거 제국주의 일본의 책임 문제로 발전되었다. 일제 하 강제동원 진상규명 문제는 곧바로 1964년 한일 국교정상화 논의 과정에서 한.일 대표가 비밀리에 이들에 대한 보상, 배상 문제를 밀실에서 타협한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로 발전되었으며, 노근리 학살 사건 문제는 단지 미군의 우연한 실스로 인한 민간인 피해에 대한 책임 추궁 문제에서 머문 것이 아니라 전쟁 중 미군이 저지른 다른 수많은 형태의 학살과 전쟁을 빌미로 한 한국인 인명 살상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켰다. 일본, 중국과 달리 한국은 국가가 앞장서서 이러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가장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택동이 일본이 죽인 수보도 더 많은 중국인을 죽였다"는 일부 반체제 중국인들의 비판은 이러한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June 8, 2005)
즉 1945년 이후 미청산된 과거사를 끄집어 내기 시작하면 마치 고구마 줄기에서 고무마가 줄줄 매달려 올라오듯이 미국과 일본의 직. 간접적 개입 문제가 확인된다. 우선은 한국에서의 식민지, 분단 시기 역사의 재구성은 일본의 과거사 왜곡에 대한 시정의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만천하에 드러난 난징 대학살의 사실을 부인하고 있으며 쥬청산, "난징 대학살 사건의 왜곡의 역사", 동아시아평화인권 한국위원회, [동아시아 근대의 폭력2- 국가폭력과 트라우마], 삼인, 2001 조선인 성노예 동원도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활동이 시작된 일제하 조선인 강제동원의 규모와 과정이 밝혀진다면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더 이상을 부인으로 일관하기 어려울 것이며, 만주에서의 조선인 대학살과 남경대학살의 사실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성과 폭력성이 정리되어 일본 우익 파시즘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현재 반복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를 막을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사건 진상규명은 특히 중요하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은 냉전적 시각으로만 포장되어 온 기존의 미국 주도의 한국전쟁 시각을 교정해서 동아시아에서 한국전쟁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미국이 한반도 전쟁에 개입한 결과 남한 이승만 반공체제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지만 100만 민간인 학살이라는 댓가를 지불했어야 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침략을 빌미로 한 남한에서의 학살과 백색테러는 대만에서의 백색테러의 명분으로 작용했고, 중국 사회주의 권력의 급격한 좌경화와 이후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가져온 배경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미국의 동북아 지역에서의 국가주의, 우익독재의 수립과 맞물려 있다. 특히 한국전쟁기 미군의 폭격과 국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은 1965년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미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살상의 전사를 이루고 있어서 이 두 별개의 사건이 어떻게 하나의 고리를 이루고 있는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70년대 이후 각종 인권유린과 학살, 의문사 사건 등은 인도네시아 대만, 등지에서 발생한 백색 테러와 같은 궤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보다 철저하게 이루어 진다면 90년대 이후 진행되고 있는 동아시아 각 나라의 민주주의 공고화에 기여할 것이다. 이미 한국의 광주 민주화 운동이 동아시아 각 나라의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큰 자극을 준 것이 사실이고, 광주 5.18 과거청산 작업 역시 이들 국가의 사회 운동가들에게 큰 격려가 된 것이 사실이지만, 이번에 통과된 과거사법에 의해 80년대 각종 의문사 사건이 좀더 철저하게 진상규명된다면 그것의 국제적 파장 역시 대단히 클 것이다. 특히 군부독재 하의 인권유린 사태에 대한 진상규명이 아직 지지부진한 대만과 인도네시아 등에게 자극이 되어 동아시아에서 극우 파시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일본사회의 우경화를 막을 수 있는 제동장치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특히 현재 중국에서는 급속한 시장경제 도입과정에서 각종 탄압과 인권유린 사태가 빈발하고 있는데, 중국민들이 과거 한국과 같은 개발독재 시기의 반민주 반인권 사태를 반복하지 않고 동아시아에서 민주적 리더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여타 국가의 과거사를 반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중국이 일본의 과거 전쟁범죄는 비판하면서도 현재 자국의 국민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반인권 정책을 정당화한다면 결코 중국은 아시라의 리더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한국에서 과거청산 작업이 진행되는 것과 더불어 지금 학계, 시민사회 일각에서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는 한중일 공동 교과서 편찬 사업, 그리고 공동기념사업, 평화공원과 기념관 조성 사업 등도 더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비판하지만 한국의 교과서가 일본의 대다수 교과서보다 훨씬 더 일국주의적이고, 민족중심적이며, 냉전적 시각을 갖고 있다.(김성보, "한국. 일본 교과서의 현대사 서술 비교", 일본 교과서바로잡기 운동본부. 역사문제연구소 엮음, [화해와 반성을 위한 동아시아 역사인식], 역사비평사, 2002) 그래서 우선은 한국 교과서의 전면적인 개편 작업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에는 한중일 공동교과서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다수의 기념관 역시 한국은 훨씬 일국중심적이다. 현재 한국의 나눔의 집 등을 모델로 하여 대만에서 위안부 테마 전시관 건립을 시도하는 것처럼 한국에서 한국전쟁 피해자 기념관, 그리고 군사독재 하의 각종 반인권 사건 기념관 등을 만든다면 이것이 현재 오키나와 대만 인도네시아 등 유사사건을 경험했고, 한국의 사건과 사실상 동일한 맥락 속에 있는 나라들의 기념관 건립을 촉발시키거나 기존의 기념관과 교류하면서 동아시아 평화, 인권 질서를 모색할 수 있는 산 역사교육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모색될 동아시아 공동체는 일차적인 경제적인 동기와 필요에 의해 추동되겠지만, 그것의 진전속도와 심화 가능성은 오직 기억의 공유, 정체성의 확립에 달려있을 것이고, 기억과 정체성은 바로 과거청산 작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일본의 오만한 자세, 그리고 미국의 대리자로서의 역살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일본의 적극적인 보상조치와 국가 정체성일지 모른다. 그러나 타이완과 중국의 긴장 문제, 남북한 통일 문제 등은 이들 지역에서 '정상 국가'가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그 자체가 과거청산 작업의 일환이고,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고 피해자에 대한 응분의 보상조치를 실시하는 등 진정한 의미의 '보통 국가'가 되는 것과 더불어 동아시아에서 과거청산 작업은 마무리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청산 작업은 바로 20세기 동아시아를 비극으로 몰아넣었던 제국주의, 국가주의, 서구주의의 미망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면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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