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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 행진'에 동원되고…'인민위원회'에 불려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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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 행진'에 동원되고…'인민위원회'에 불려가고…

KBS <8.15의 기억> ② '대구폭동사건' 도기영 옹

1945년 8월 15일 정오. 36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해 온 히로히토 일왕의 떨리는 음성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완전한 패배 시인. 한반도에 새 역사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해방공간은 헐벗고 굶주린 민중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그 해 9월부터 남쪽에서는 미군정이 들어섰지만 어처구니없는 실정이 이어지면서 민중들은 하루 한 끼조차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해방 1년 뒤인 1946년 9월, 마침내 좌익진영의 극좌적 모험이 시작됐다.

1946년 10월 1일. 이날 전국노동평의회(전평)의 9월 총파업 지시로 경북도평의회는 파업을 알리는 현판을 걸려고 했다. 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이날은 무사히 지나갔으나 다음날 노동자 피살 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대구는 물론 경북 전역이 술렁거렸다. 경북대를 비롯한 학생시위대의 데모가 대구경찰서 앞 연좌농성으로 이어지면서 시위대는 1만여명으로 급속히 확대됐다. 이 때, 다급해진 한 경찰관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를 신호로 경찰들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18명이 현장에서 쓰러졌다.

피를 본 시위대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가족들을 구타하는 등 시위가 격렬해지자 미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면적인 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시위대는 대구를 벗어나 영천, 의성, 군위, 왜관 등으로 이동하면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나중에 '대구 10월 폭동사건'으로 명명된 이 유혈사건은 현재까지도 정확한 집계가 나와 있지 않지만 시위참가자 230만여 명, 사망자 수천 명으로 추산된다. 경찰·경찰가족의 인명 피해도 사망 1만54명, 부상자 2만여 명에 달했다. 한국 현대사의 좌우대립 과정에서 피의 보복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게 만든 뿌리의 일단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지금도 진보-보수가 대립하는 국면에서 서로의 폭력에 의해 부모·형제를 잃은 이들의 뿌리 깊은 '원한'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다음은 당시 경북 칠곡의 한 정미소에서 도정기술자로 일하면서 풍족하게 살다가 대구사건 때 시위대열에 휩쓸려 살육 현장을 목격했던 도기영(80세) 옹의 증언이다. 도기영 옹의 구술을 통해 해방 전후 민중들의 생활고와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대구사건, 그리고 좌우대립의 '출발점'을 살펴보자. 도 옹의 증언을 경상도 사투리를 그대로 살려 소개한다. <편집자>

***"해방되니 모든 게 자유인기라, 자유"**

-해방 소식을 들었던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해방? 라디오로 듣고 알았지. 천황이 일본말로 항복하데. 그리 들어가지고 우리는 만세, 만세 이렇게 했지. 일본사람은 아무 말 안 해. 사흘 전에 나가노 신에따로라는 일본놈이 신문을 가져 와가지고 '개끼 갠시 바꾸당 사요오까', 적이 원자폭탄 사용한다고 신문에 크게 났다고 하데. 그리고 사흘 만에 항복했는데, 일본 천황이."

- 원자폭탄이 사용된다는 얘기를 듣고 일본이 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나요?
"그렇지, 우리는. 그러나 금방 해방이 올 꺼는 모르고. 정미소 일본직원이 듣고 '잔넨다', 원통하다 이케. 왜냐하면 인원 많지, 군비축조 많지, 마 미국사람이 원자폭탄 하는 바람에 그리 항복했거든."

- 일본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나요?
"전부 쥐죽은 듯 조용하고, 전부 물건 꾸리는 게 일이라. 간단하게, 간단하게. 그렇기 때문에 조선사람은 일본놈 야바, 밤에 가만히 가가지고 옷 짓는 털도 사가고, 약도 사가고, 단스도 사가 오고, 밤으로 많이 사가 왔지. 항복하고 나서는 마 저그 일본 갈라고, 저그 준비만 했지. 우리한테 모 냉정하게 하는 것도 없고, 모 다른 거 없어. 그냥 그래."

- 해방되고 나서, 만세 부른 이야기 좀 해주세요.
"시내에 나가니께, 이제 모 '왜놈들 항복했단다' 전부 그 소리지 모. 우리는 저저 도정시장 공장에서 밖에 안 나가고, 그저 해방됐다칸 거 그것만 알았어. 일본군이 항복했다캉 그것만 알았고, 거리에 나가도 안 했어. 그기 있었어. 공장 안에. 계속 일했지. 태극기는 나도 첨 봤는데, 며칠 후에 아마 봤지. 첨 봤어, 태극기."

- 심정이 어떻던가요?
"그때 모 왜놈이 항복했으니께 우리나라가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되노, 정부 수립 해가지고서 이제 헌법을 해가지고서 우에 나가노 하는 거, 그런 거 생각하다가 그만이지 모. 관심이 없었어, 관심이 없었다카이."

- 직장을 잃을까 걱정되진 않으셨나요?
"아니 우린 기술잔데. 우리 아니면 현미하고 백미하고 쌀 뺄 사람이 없지. 안 돼. 우린 일류 기술잔데 아주 일류기술자야."

- 일본인이 가고서 직급이 올라갔나요?
"내가 서기로 임명받았지. 서기. 저기 공장장이 오늘부터 너는 서기로 임명한다 하고, 서기로 임명받았어. 내가 오래 있었거든, 왜정 때부터. 마 저기 왜놈 가고 나서도 모 우리 손에 익힌 거 그대로 했지. 일류 기술자니께. 현미도 빼고, 백미도 빼고, 기계도 고치고. 우리 아니면 안돼. 우리 아니면 몬 고친다."

- 해방되고 나서 쌀값은 어떻게 변동됐나요?
"전부 자유지. 전부 자유라 마. 곡물시장에 마 쌀도 나오고, 보리도 나오고, 밀도 나오고 마. 대구에 부속 사러 가면 서문시장, 지금은 큰 장이라 칸다. 대구에. 서울 이남에서는 제일 커요. 거 가면 쌀밥을 해가지고서 밥그릇 위에 소고기 국에 한 그릇 막 사먹었는데 모. 그래 먹기는 처음이라. 대진동에 가면 전부 밥장사라. 그렇게 모 자유 됐으니께."

- 일제 때 다 숨어 있던 것들이 해방되니까 나온 건가요?
"술 해가지고 왜놈하고 조선 사람하고 들키면 벌금 나오면 평생 갚아도 못 갚아. 벌금. 밀주해가지고 들키면, 몇백 원 나오면 무슨 돈으로 다 갚아? 해방 전에는 음식이 많이 없었지. 밥이 어딨노, 소고기국이 어딨노. 참말로 요새 아들한테 옛날 먹는 거 말하면 모 하러 그렇게 배 곯아요, 라면 사 묵지, 그런 사람 한 가지라."

- 일제 때 안 나오던 음식들이 해방되고 왜 갑자기 나왔을까요?
"곡물도 전부 자유고, 소도 전부 자유. 막 잡아 묵었거든. 돼지도 막 잡아먹고, 술도 막 해가지고 먹고. 사람들이 해방되니 '잘살게 됐구나' 이렇게 생각했지. 처음엔 그리 생각했지."

- 그러다가 이듬해 되니까 쌀값이 점점 올라간 거군요?
"우리가 정미소에서 약목(주: 경북 칠곡군 소재) 곡물이 자유시장이거든. 나락을 팔아가지고 서울로 빼면(주: 매점매석) 우리가 모리배라고 때려 죽인다 캤어. 때려 죽인다 캐서 경상도 여긴 벼 안 팔고 돈을 모 그때 배낭에 이빠이 내가 넣어가지고 전라도 갔어요. 거 가면 돈만 주면 하루 만에 쌀 한 곱배로 되고, 서울로. 서울 그 만리동 거. 하루 매일 고마 한 곱배씩 붙이지."

- 쌀 살 돈은 어디서 난건가요?
"합동 정미소. 여덟 사람들이 다 부자거든. 그 사람들 전부 저저 은행에 저당신청, 논하고 집하고 저당신청해서 꺼냈지. 머리가 그때 여덟사람 다 비상이라 비상. 저당해가 돈 꺼내가지고 그래 전라도 갔지. 난 월급 받는 직원이고."

- 없는 사람은 점점 살기 어려워졌겠네요
"그래도 자유, 자유로 막 노동해가지고서 팔아먹으니까. 왜정 때매크로는 안 됐지. 왜정 때는 주는 대로(주: 배급) 갔어. 쌀값이 올라가도 농민들은 가축, 돼지 한 마리 팔면 쌀 몇 말 사고 그래 다 지내 나왔어."

***"신탁데모? 폭동? 이유도 모린다. 그저 직인다케 했다"**

- 신탁통치 반대 데모하는 거 보셨나요?
"우리도 같이 약목 시내에 전부 농민들 신탁통치 반대 이카면서 시가행진했지. 다 했어. 나도 했는데."

- 왜 반대하셨나요?
"신탁통치 반대? 우리들 스무 살 먹어서 그랬는데 무슨 의민지 그건 잘 몰랐어. 나오라카이. 지금 시가행진 하는데 다 나오라카이. 그래서 다 나왔지. 거 주모자들. 여게 국민회가 있었고, 국민회는 지금 여당이고."

- 이승만 박사 추대하던 '독립촉성국민회' 얘기인가요?
"그게 아니고 국민회는 여당(우익)이고, 인민위원회는 이북에 김일성이파고. 그래가지고 당파가 갈리가 있었어. 약목에, 여 면소재지에도 갈리가 있었다 카이. 반대데모 국민회에서 주동했지. 잘살고 못살고, 그거는 떠나서 나오라카면 나가고, 시가행진 하면. 그랬어. 아무 의미도 몰랐어. 하마."

- 주로 좌익 인민위원회는 누가 했나요?
"그거는 비밀인데, 여기 후손들이 살고 있거든, 약목에. 농사짓던 사람. 여기 모 농지 분과위원장, 모 이래도 있었고 다 있었지. 배운 사람도 많지."

- 그러다 '대구사건'(10.1사건)이 났는데….
"10.1사건 일어날 적에 그날 밤에도 그 공장에 사장 부사장, 합동 여덞 사람이 나한테 '너 오늘 저녁에 공장 비우지 마래이. 응? 누가 오던지 잠도 자지 말고, 대문도 열어주지 말고 누워 자거라. 우리 묻거들랑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캐라.' 그래예, 나는 뭣도 몰랐지. 예. 밤중 되니께 한 대문을 두드리고 우리 어머니가 '자나? 자나?' 그러니께 대문을 열어 놓으니 '우엔 잠이 이렇게 들었노? 지금 막 지서 불 다 지르고, 순사들 다 내빼고, 이런데. 너 우엔 잠이 그렇게 들었노' 이렇게 해."

- 지서 가보니 어떻게 됐던가요?
"지서 가보이 전부 서로 꺼내가지고 그 앞에 논에 다 태워. 태우고 우리는 여덞 사람(정미소 사장들)이 전부 우파고, 국민회인데 이편도 못 들고, 저편도 못 들고 남감해요. 기양 멀리서 그림만 봤지. 보니 전부 서로 꺼내가지고 불태우고, 순사는 전부 다 내빼고 없고."

- 누가 주동하고 있던가요?
"인민위원회. 지금 말하면 빨갱이지. 그래 가지고 그 우리보다 너댓 살 더 먹은 사람이 내보다 '여게 나오는 사람은 전부 다 아니께 만약에 오늘 저녁에 왜관 안가고 여기서 새면 너그 가족들 전부 몰살시킨다, 직인다' 카데. 어느 놈이 딴 데 가겠노. 그 사람들 세상인데. 그래 가지고 조금 있으니께 덕산에 막 동네사람 전부 올라 와가지고. 몽딩이. 요요 요고만한 몽딩이. 나도 하나 들었지. 안 들면 직일라카니께. 어느 용으로 말을 안 들어."

- 그 뒤 사람들이 몰려가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수백 명은 낙동강 쪽으로 내려가고, 수백 명은 저 미8군 있는 쪽으로 그리 갔는데…. 왜관은 인민위원회 사람들, 거짓말 대장이라. '지금 왜관서 약목 지원부대 오라고 요청을 해서 우리가 왜관 가야 된다' 이런 거짓말을 했는기라. 왜관 가니께 왜관 잠잠해. 폭동이 안 일어났어. 이래가지고 여기 모이는 사람들이 전부 와서 다 때리 안 부섰나. 닥치는 대로 짝대기 해서 유리도 깨고, 나는 안 깨고. 경찰서 앞에서 사정 밖이었지. 그래서 밖에서 교회 있는데 담 있는데, 거기서 멀리서 봤지."

- 경찰들은 다 도망간 상태였나요?
"다 도망갔지. 그래 순경 하나 못 내빼가지고서 붙잡혀 가지고서 벚꽃나무 아래서 쇠몽둥이 가지고 맞아 죽는거, 길가에 그쪽에 그 교회 담인데 그 멀리서 봤어. 막 이래. 누워 있었는데 그거 보고 나는 막 사박사박사박 해가지고 피해가지고 약목으로 걸어 올라왔어. 여기 마을 사람들 그날 약목지서 부술 때 그 사람들 왜관 지서 다 갔지. 한사람도 빠짐없이 여게.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갔다 와서 '너네 가족 몰살한다' 카는데 어느 장사로 안가? 의부정시부정 그런대로. 전부 다 갔지."

- 왜 경찰관을 공격했나요?
"마 순사라 카면 다 싫어 했어. 순사 카면 마 지서 순경이 너 찾더라 카면 나 아무 것도 나쁜 짓 안했는데 왜 나를 찾아, 마 이 맘이 먼저 들어. 그 맘이 먼저 든다카이. 촌에는 더 하지. 도시보다. 일제 때 순사 하다가 계속 순사 하던 사람이 많았지. 왜정 때 순사 하다가 형사도 있고, 순경도 있고, 취조계도 있고, 조사계도 있고. 왜정 때 하던 사람 많이 했지."

- 쌀 부족 때문에 그랬다던데요?
"그러면 마. 일본놈들 직이지, 순사를 와 죽이노. 일본놈을 직이지. 뭐한데 죄 없는 순사는 와 죽이. 안그래?"

- 경찰이 언제 다시 돌아왔나요?
"사흘 만에. 충청도 부대. 그래 와가지고 여여 낙동강 저 중간에 여기 한 그때 가을껜데, 나락이 누런데. 한 다섯시쯤 됐는데 저서 '빵' 그러며 총소리가 나대. 여서 '빵' 그러며 나고. 그리 약목면이 전부 포위 다 했어. 충청도 부대가. 약목시내에 닥치면 마 무조건 쐈으니께. 이래 가지고 나는 저 두만지 삼만리에 저 밤에 안 피했어. 그래도 누가 죽었다, 누가 총 맞았다, 누가 죽었다 카는 거 삼만리까지 밤중에 중간중간 들어오대."

- 경찰들이 마을에 와서 데모 참가자를 잡아내기 시작했나요?
"그건 몬봤지. 우리 친구 하나는 그 길로 내빼 50년간이나 아주 약목 안 들어오는 사람도 있는데. 별로 행동 안 해도 겁이 나가지고. 그 당시에 잡힜으면 재판 받아가 징역 살지."

- 경찰들이 많이 죽었으니 복수심에 불 타 있었겠네요.
"충청도 부댄데 모. 충청도 부대. 여기 사람이 아니고…. 나중에 소문 들으니까 서북청년회. 경찰 옷 입히가 사가왔다 카더라. 워낙 다급하니께. 전부 우익이지. 이승만 패지. 이승만 패라."

- 여기서 왜 많은 사람이 흥분해서 그랬을까요?
"그건 모르지. 나도 모르지. 나오라 캐서 나왔고, 여서 한 사람이라도 왜관 안 가면 가족 몰살한다 캐서 몽딩이 요만한 거 하나 들고 갔지. 그 이유는 모르지. 뭐 때문에 한지."

- 그 사건을 겪고 사람이 어떻게 변하던가요?
"이승만 패에 붙을라 카는 사람이 많았지. 그리 붙어야 살거든. 우리는 원래 우익인데 모. 공장 사장 여덟 사람이 다 우익인데 모. 마을 좌익도, 하이고 힘 빠져. 전부 마 6.25때 보도연맹에 가입해가지고 나오라 캐서 칠곡경찰서 가면 여여 김천 송환명령 내렸을 적에 전부 태워가서 미께루 광산, 저 광산에 그런데 가서 전부 없애뿟는데 모. 약목도 수십명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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