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일본이 패망할 거라는 얘기…난 몰랐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일본이 패망할 거라는 얘기…난 몰랐죠"

KBS <8.15의 기억> 미리보기① '일제 순사' 홍순복 옹

끝간 데 없이 펼쳐질 것 같던 일제 36년 굴종의 세월이 막을 내린 1945년 8월 15일을 떠올릴 때 우리의 시선은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몰려나온 민중들의 열광하는 모습에 고정되곤 한다. 그 앵글을 당시의 '해방'이 민중 개개인에게 어떻게 다가왔으며, 그들은 이 조국의 '광복'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에 맞추지 못해 왔다는 얘기다. 지금까지 8.15 광복은 오로지 역사학자들의 학문적 연구와 위인 중심의 평가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KBS 광복60년 프로젝트팀(프로듀서 이욱정)이 '조용한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 당대를 살았던 일반 민중들의 기억을 망각의 시냇물 저편에서 불러내 해방 전후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에 나선 것이다. 프로젝트팀은 8개월 동안 국내는 물론 해외를 돌며 각종 직업에 종사했던 150여명의 구술자들을 발굴해 그들의 인터뷰를 고스란히 <TV구술사-8.15의 기억>(8월 9~12일 저녁 10시 KBS 1TV 연속방영)이라는 4부작 프로그램에 담아냈다.

<프레시안>은 이 방대한 인터뷰 가운데 △일제시대 신갈주재소 순사부장을 지낸 홍순복 옹 △1946년 '대구 10월사건' 당시 정미소 도정기술자로 일했던 도기영 옹 △60년만에 해후한 좌익계열 간부 이수갑 옹과 우익 테러조직 서북청년단 간부 손아무개 옹의 격정토론 등의 3편을 미리 소개한다. 이 3편의 내용은, 그것의 옳고 그름을 넘어서서, 우리가 평상시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관점을 담고 있으며 오늘날과의 인식의 격차를 보여주는 데에도 꽤 유용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프레시안>은 KBS가 이번 프로그램에서 전문가 인터뷰에 의존하지 않고 구술자의 기억을 그대로 풀어내는 실험적 영상을 시도함에 따라 가급적 프로그램의 색채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글 구성 또한 구술자들이 직접 말하고, 또 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처리했다. 예컨대 제1회인 '일제 순사' 홍순복 옹 편도 일제시대의 순사를 거쳐 공산당 토벌, 현재 우익단체 활동에 이르기까지 그 개인의 삶 속에서 이데올로기와 현실이 교호해 온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별도의 설명이나 오늘날 관점에서의 해석을 달지 않고 그의 구술내용 그대로를 소개했다. 내용이 워낙 방대해 일부는 중략하거나 압축했다.

소실되어 가는 귀중한 기억들을 복원해 역사의 반열로 올리고 이를 통해 우리의 역사인식을 더욱 풍성하게 하려는 이같은 시도가 성과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란다.<편집자>

***"순사한테 따귀 맞은 게 분해 순사가 됐죠"**

저는 홍순복입니다. 옛날 이름은 홍학규였죠. 족보에 나온 이름을 따라서 홍순복이라고 고쳐서 지금은 그렇게 행세하고 있습니다. 제가 낳기는 황해도에서 출생해 그곳에서 열 몇 살에 초등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로 전학을 와가지고 효창공립보통학교,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다녔습니다.

당시는 왜정시댄데, 학교 나온 뒤 바로 할 일이 없어 고향에 가서 조부모 도와 농사를 짓다가 마침 면서기였던 형님의 권유로 면서기가 됐습니다. 한 1년 이상 했습니다. 그 뒤 황해도 신도면에서 서무주임을 하다가 다시 서울에 와서 면서기를 1년 했습니다. 그 뒤 경찰관 시험을 보게 됐죠.

경찰관이 된 것은 신도면 서무주임 때 한 사건이 계기가 됐습니다. 면사무소 위에 주재소라고 있었는데 어느날 여기에 숯을 보내게 됐는데, 소사하는 친구가 여기에 숯을 한 섬 보낸 모양입니다. 그 며칠 뒤 올라오라고 해서 가봤더니 나이 40 넘은 조선사람 순사가 있더라고요. 내가 지금 이름도 안 잊어버립니다만, 조정팔이라는 그 순사가 그 전에 일본헌병대 헌병보좌관인가로 있다가 경찰관이 됐는데, 고맙다고 인사할 줄 알았는데 날 창고로 데려가더니 "고레와 쓰미까 스나까?"(이것이 모래냐, 숯이냐)하며 귓방망이를 한 대 후려갈기더라고요. 대항할 여지는 없고 그렇게 돌아와 사표를 썼죠.

당시 면장이 말려 기회를 보고 있다가 보통문관시험을 보러 서울에 갔었죠. 마침 총독부 앞을 지나다가 경찰관 채용시험 공고문이 붙었더라고요. 순사한테 매 맞은 생각이 떠올라 '이놈의 경찰관이라는 게 도대체 어떻게 생긴 직업인가'하는 생각으로 다음날 바로 접수를 시켰습니다.

본래 저희 집안에서는 할아버지 때부터 동학신자예요. 지금 천도교입니다만 그전엔 동학인데, 동학사상이라는 게 본래 일본민족을 아주 싫어하는 종교적 신앙이 두터운 종교입니다. 그런 관계로 반대가 심했지만 보통문관시험도 떨어지고 해서 경찰관 시험을 봤죠. 나로서는 그 순사와는 다른 길을 가고 싶었던 겁니다. 소화 15년(1940년) 스물세 살 때 그렇게 경찰관이 됐습니다.

순사 교습소를 1등으로 졸업한 뒤 처음 부임 받은 곳이 서울 종로경찰서였어요. 종로서로 가서 3년이 덜 됐을 때 왜놈 순사하고 같이 근무하다가 시비가 붙어가지고 유치장 근무로 제껴 내려갔다가 몇 달 뒤 느닷없이 경기도 이천경찰서로 발령이 났죠. 종로서 근무 때 김두한이를 알게 됐죠. 김두한이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건 그때 우린 몰랐고, 해방 뒤에야 알았죠.

왜정시대에는 조선 형사령에 의해서 사흘 동안은 검속을 하게 돼 있었죠. 형을 받아서 되는 게 아니라 3일 안에 신체를 구속했다가 3일 안에 풀어주는 겁니다. 그런 검속에 의해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일년도 검속을 통해 처리해 나가는 거예요. 주로 사상적으로 의심이 있어서 조사를 해야 될 사람들, 김두한이 같은 거리의 폭력배들, 이런 사람들이 주로 검속됐죠. 그리고 대학생들, 사상적으로 좌경되어 있다던가 이런 학생들을 장기간 조사하기 위해서 증거가 나올 때까지 장기간 검속을 했죠.

***"일본의 패망, 본격적인 좌우대립의 시작"**

소화18년(1943년) 지상 감시근무(유치장 근무)를 할 때 조봉암 사건이 있었죠. 제2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라는 거예요. 고등계에서 하여간 대학생들, 사상적으로 관여하던 사람들을 굉장히 많이 잡아들여오는 것을 봤어요. 밤중에 데려다가 무도장에다 잡아넣고 순경들이 감시하고 고등계 올라가서 조사 받고…. 그런 상황을 지켜본 적이 있죠.

제일은행 본점이 종로경찰서 자리예요, 옛날에. 뒷마당에다 책을 풀어 놓고 학생들 데리고 고등계 올라가고 조사를 하다가 이 사람들이 내려와서는 무도장에서 고문을 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 고문하는 걸 보니까 그냥 두들겨 패는 게 고문이야. 한번은 오카무라라고 하는 고등계 주임이 있었는데 고등계 경부예요. 그 사람이 취조하는 걸 내 본 일이 있는데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뒤에다가 포승을 끼워 넣고 수갑을 채워놓고, 뭘 묻는데 대답이 시원치 않으니까 그냥 내려 패는 거야. 죽도를 들고. 저 검도하는 죽도를 들고서 그냥 내패면서 "코노야로(이 자식아)" 그러는 걸 봤죠. 머리 같은 덴 때리지 않고 어깨, 등 이런 데를 내리치고 다리 이런 쪽을 쳐요. 기가 막힌 얘기야.

고등계엔 조선인 직원들이 꽤 많았죠. 사람들도 다 출중하고 뭔가 아는, 상식적으로도 보통 경찰관들보다는 더 우수하죠. 사상적으로는 그게 뭐 역시 일본 놈한테 매여서 그런 걸 해야 하니까, 그 중에도 민족을 위해서 한 사람도 있겠지만 순간적으로 다 거기 따라가지. 하는 일은 뭐 하여간 일본을 해치고자 하는 조선의 민족운동을 한다든가 조선의 독립운동을 꾀한다든가 그러한 사람들을 색출해 내는 거죠. 조선 독립을 위해서 한다는 그런 부류를 다 잡아내는 것이 고등계 형사의 책임이죠. 고문은 고등계 형사들은 별로 그걸 안했는데 이 수사과 계통에 있는 형사들이 고등계 형사보다 더 지독했어요. 우린 보진 못했는데 그때도 주전자로 물 먹이고 하는 식이 수사과 계통에서 있었다는 그런 얘길 들었어요.

식자들은 사상을 다루니까 일본 사람들을 백안시해서 보지만, 일반 서민들은 그런 거 없었어요. 평화스럽죠. 겉으로 보기에 아주 평온하고 무슨 문제가 났다 하면 경찰력을 동원해서 금방 진압이 되고 그러니까 별다른 저게 없었어요. 아주 평온해요. 특수한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일본 경찰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진다든가 하는 분위기가 없었어요.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는 거? 난 몰랐죠. 8월 8일 포츠담회담에서 무조건 항복하기로 한 내용을 총독부를 통해 주요 간부들은 미리 다 알고 그랬는데 얘들 만나서 의논을 했겠지. 일체 얘기하지 말아라. 오죽하면 8월 15일 대낮에 일본 천황이 항복 방송으로 통하지 않았어요? 더군다나 매월 15일은 훈련하는 날이어서 16일 아침에야 알았어요. 와보니 일본놈 순사는 경찰서에 있는 수배서류 불태우느라고 북새통이고 조선놈 순사는 도망가 버렸고. 가족도 같이 밤에 다 나갔대. 우린 알지도 못하고 파출소에 식구들 그대로 놔둔 채 있었죠.

불안함 마음이 들죠. 파출소로 돌아 왔는데 동네 노인네들이 다 모였어요. 주로 식량이 모자라니 이걸 군에다 얘기해서 식량배급을 빨리 줘야겠다는 얘기 등등이 오갔죠. 16일 오후 본서에 들렀다가 오는데 신둔면이라는 주재소에서 오츠카 고로우라고 일본순사가 임신 중인 자기 마누라 죽이고 자기도 할복을 했더라고. 나중에 알고 보니 지방 빨갱이들이 '친일파 다 죽여야 한다'는 플래카드 내세우고 폭동도 일으켰더라고. 여주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나서 여주경찰서가 불타고 이런 일이 있었고, 남쪽에선 그런 일이 그렇게 많진 않습니다. 북에서는 평안도, 황해도 쪽 왜정 경찰서가 모조리 불 살라지고 했죠. 좌익세력의 영향을 받은 결과가 그렇게 된 거죠.

해방이 되고나서 순사부장이 나 하나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없어지고 주변에 있는 여러 분들이 나를 추대해서 할 수 없이 이천에 남았죠. 9월 10일쯤 됐나? 와그너란 소령이 짚차를 타고 나타나서 군정이 시작됐습니다. 주민들은 '미 해방군 만세' 이렇게 써서 붙이고 그랬죠. 그러는 동안 한 20일 되니까 일본놈들 무도관에다가 합숙시켜놓고 살림살이 도구도 전부 다 무도관에다 모아놨다가 트럭 다섯 대인가 여섯 대를 동원해서 부산까지 실어다 줬어요.

***"노덕술 등 北경찰관들, 좌익 피해 남하"**

이북에서는 벌써 좌익세력이 전부 주동적인 역할을 하며 공무원이나 경찰은, 특히 조선민족을 박해한 사람들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다 여기(남쪽)로 넘어올 수밖에…. 고위직 같은 경우 해방 이후 미군정에 경찰로 간 사람도 많았죠. 노덕술 씨 같은 분. 노덕술 씨는 종로서에서 내가 늘 결재를 맡으러 가고 그랬어요. 노덕술 씨 같은 사람은 말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조병옥 씨가 군정 경무부에 불러 근무를 하게 한 거 아닙니까? 왜놈 경찰 30년 동안 그 방식이 있지 않습니까? 민심수습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고급 간부들은 알죠. 그러니까 그런 분들은 다시 채용을 하고 이 박사(이승만)가 다 모아가지고 이젠 대동단결해야겠다는 정책 밑에서 다 채용이 된 걸로 알고 있어요.

내가 볼 적에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이미 왜정 때 관여했던 모든 관공리, 또 행세했던 사람들을 싹 쓸어서 숙청해 버렸어요. 거기서 살아남고 꾀가 있는 사람들이 몰래 남쪽에 와서 행세를 하는 것뿐이지 북쪽에서는 다 없어진 사람들이야. 북쪽에서는 누가 했느냐면 결국 좌익세력들이 집권하면서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거거든요.

왜 이북이 저렇게 망했느냐, 행정적으로 뒤떨어졌나 하면 다 내쫓았으니까 할 놈이 없어. 그냥 길거리에서 주워 모으는 거야. 지게꾼, 국수판 메고 다니는 놈들 다 모아 보안서에다가 보안관이니 뭐니 해서, 요새로 말하면 남쪽은 경찰관이지, 이렇게 만들어가지고 처음에 그냥 몽둥이 찜질 하면서 지주 했던 놈들 마냥 두들기니까 질서가 안됐고, 사람이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거 아니에요. 그러한 처지에서 북쪽에 정치적인 생각은 전혀 제로야. 남쪽에선 그게 아니고, 인간의 본능을 살려가면서 이걸 하자는 것이 남쪽의 정책이고. 그래서 정책이 달라지는 겁니다. 공산주의 체제라는 게 그렇게 해서 어쨌든 자기네 체제만 유지하면 되는 거예요. 오늘날 김정일 체제가 바로 그런 거예요.

공산주의? 일제 때는 그런 거 생각 못했어요. 솔직한 얘기가. 학생들, 일본 친구들, 일본대학에 다니는 사람들이 와서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이런 걸 떠들고 그랬어요. 관심이 없었죠. 솔직한 얘기가. 종교적인 면에서도 그랬고. 순수한 민족이라는 생각만 했지 사상적으로 돌아간 생각을 못했습니다. 난 오히려 경찰관으로 계속 남아 있으면서 경기도 안성, 지리산, 제주를 돌며 공산당 재건 움직임을 토벌했습니다.

***"친일? 그거 이제 들쑤셔 뭐합니까"**

물론 과거에 일제에 협력을 하고 민족에 박해를 주고 그러한 사람들의 죄상을 밝혀내야겠죠. 그러나 지금 박해받은 사람들도 죽고, 하던 사람들도 다 죽었지 않아요? 이제 와서 다시 들고 일어나서 조사를 한다고 해도 무엇이 나옵니까. 신기남인가. 그 사람 아버지가 진상사령부에 사령관하던 사람이에요. 신상묵이라고. 내가 잘 아는 사람이야. 내가 존경하고. 그 진상사령부에서 대대장 하던 사람이야. 늘 만나고, 참 호탕하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사람이야. 그 사람이 세상 떠나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야. 그 아들이 자라서 이 시대에 시류에 좇아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인데 그걸 아버지가 그거라고 해서…. 도대체가 유치한 생각이라고 난 봐요. 그거 지금 따져서 뭐 하겠다는 겁니까.

법을 만들면 옛날 순사부장 했던 나도 걸리죠. 더군다나 나는 조선총독부 경부보에 임명을 받은 사람이예요. 나도 걸려. 날 지금 조사해서 뭘 할 건지. 내일모레 90에 다 죽게 된 사람을 잡아다 불러다가 뭘 할 건가요? 난 당당하게 일본 치하에 있었으니까 일본 사람의 명령에 움직인 건 사실이지만, 민족을 해쳤다든가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오히려 민족을 어떻게든지 보호하고 그 사람들 탄압에서 어떡하면 평화스럽게 이걸 유지해나갈까 걱정을 했을 따름이지 일본 사람들하고 같이 섞여가지고 민족반역자니까 저놈 잡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일 하지도 못하고 감히 생각할 수도 없어. 왜놈 치하 경찰 공무원이나 행정공무원들 마찬가지겠지만 다 민족정기, 민족정신 가지고 있어요. 개중에 나쁜 사람도 있겠지.

그러나 그 정치가 얼마나 됐습니까. 36년 동안인데…. 우리가 해방되고 60년이에요. 60년 지나온 세상을 생각하면 36년 반밖에 안 되죠. 일본에 충성하기보다 직업으로 했다는 겁니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일본에 팔려간 사람은 100% 없다고 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운동에 관여했던 광복회 사람들은 국가에서 공로를 인정해 살림을 지원해주고 보훈행정 해 나간다는 걸 고맙게 생각하고 점잖게 있어야죠. 그걸 들고 일어나서 싸워서 뭘 하자는 건지….

***"386세대, 그거 뭐하는 놈들입니까"**

제가 공산당을 싫어하는 이유요? 해방되고 나서 사찰주임을 하면서 공산당들 잡아서 취조를 하고 공산당의 취지라는 것도 듣게 되고 하다보니 전 세계 공산화가 목표더군요. 사실 북한 60년 동안에 뭘 했어요? 김일성, 김정일이 자기 우상화만 해서 사진만 걸어놓고 자기 대접만 해달라고 하고 말이죠. 그놈들 가져다주고, 또 먹여 살려주어도 고맙다는 얘기 한번이라도 들어봤어요? 그런 정치가 김대중 정치부터 내려온 거야. 우린 마땅치 않다 이겁니다.

386세대? 이건 뭐하는 놈들이죠. 김정일이 지하 침투해 386세대가 놀아나는 겁니다. 젊은 양반들은 '그것도 사람이 하는 거지', '공산주의면 어때 밥 먹고 사는 거지'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안 됩니다. 그나마 시청 앞에서 와와 할 때 늙은이들만 모여요. 재향군인회, 재향경우회다 우익단체들…. 늙은이들 악악 해봤댔자 젊은이들 돌아보고 꿈도 안 꿔. 무슨 꼬라지입니까. 당장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젠 주지도 말고, 감시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슨 해결이 날 겁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