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여름,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당시 토요타의 회장 오쿠다 히로시를 방문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토요타처럼 높은 수익을 올리며 오랫동안 번영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오쿠다 회장은 한마디로 "높은 수익을 계속 유지하려면 기업이 어떻게 사회에 공헌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합니다. 사회공헌에 적극적이지 않은 기업은 결코 오랫동안 번영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 이건희 회장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삼성과 정치자금**
토요타와 삼성은 두 말할 것 없이 일본과 한국의 대표기업이다. 세계의 자동차와 전자산업을 주도하며 두 기업 모두 최근 10조원이 넘는 순익을 창출해내고 있다. 또한 재미있게도 둘 모두 창업주의 가족이 기업경영에 참여하는 우리로 치면 재벌식의 기업이다. 그러나 최근 토요타와 삼성을 보는 세간의 눈은 사뭇 달라 보인다.
한국에서는 삼성의 정치자금 지원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정치, 관료, 언론, 재벌 등 나라를 지배하는 이른바 파워그룹들의 유착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겠지만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다시금 국민들에게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사과상자니 오리알 몇 개니 하며 재벌들이 정치권에 자금을 갖다 바쳤다는 것은 별반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리에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지 개혁을 맨날 외쳐대도 정작 돈과 권력이 유착된 최상위층의 부패는 웬만해선 변하지 않는 듯하다.
특히 소위 '삼성공화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돈으로 세상을 압도하려 하는 한 재벌의 무소불위의 힘에는 많은 이들이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정의로운 '깨끗한 손'으로 일할 것이 기대되던 몇몇 법조인들도 이제 그 회사를 위해 일하고 있는 현실 아닌가. 수백 개의 도청테이프를 모두 공개하라는 외침은 그것이 설령 나라가 흔들릴 만한 내용일지라도 이를 통해 검은 돈으로 거래되는 그 오래고 질긴 부정부패의 관행을 근절하기 위한 바램일 것이다.
***토요타 방식 혹은 토요타의 길**
눈을 돌려 이건희가 감탄한 그 토요타를 잠시 들여다보자. 최근 전세계를 막론하고 '도요타 배우기'가 한창이다. 이미 오래전 토요타 방식의 생산시스템이 전세계의 작업장을 휩쓸었고 최근에는 세계의 모두가 자동차업계의 무한경쟁 속에서도 눈부신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토요타의 성공에 대해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GM이나 포드가 파산 직전의 위기에 빠진 미국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도 토요타의 강점에 대해서 관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종업원 수 약 26만, 그리고 50년이 넘도록 연속흑자를 기록한 토요타는 이미 2004년 전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포드를 제치고 두 번째로 큰 기업이 되었고 미국시장에서도 GM과 포드를 뒤쫓고 있다. 내년 판매목표 850만 대, 몇 년 내로 GM을 따라잡아 세계 자동차산업의 1인자로 떠오를 것이 예상되고 있는 거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타도 토요타'를 외치며 언제나 위기의식이 필요하고 대기업의 성공에 안주하면 안된다며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는 기업.
이미 80년대부터 학자들은 토요타가 작업장에 유연한 '적기생산(just in time)' 시스템을 도입하여 서구의 자동차 공장을 월등히 능가하는 생산성을 보여주었고 노동자의 자발적 제안에 기초한 끊임없는 카이젠(개선)에 기초하여 비약적인 성과를 보여주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노동자를 쉽게 자르고 채용하는 서구식의 수량적 유연성과 달리 노동자 스스로의 숙련과 여러 작업에 대한 능력을 높이는 기능적 유연성에 기초한 것이라고 지적된다.
물론 이것도 보다 노동자를 생각하는 스웨덴 등의 생산방식에 비해서는 한참 비인간적이며 지독한 생산성도 노동강도를 강화시켜 최대의 성과를 뽑아내는 과정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이는 일본의 노동자가 압도적으로 수동적이고 약한 현실에 기초하고 있으며 혹자는 토요타의 공장을 '자동차 절망 공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도 토요타의 성공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업의 역할과 상생의 문화**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성과가 안정적이고 협력적인 노사관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토요타는 여전히 종신고용을 고수하고 있으며 지난 50여 년간 한번도 정리해고를 실시한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60세 정년이 보장되며 많은 노동자들이 정년 때까지 회사에 충성심을 지니고 근무한다.
창업주가 물러날 정도의 위기를 겪은 1950년 노동자의 거의 20%가 해고되는 뼈아픈 경험을 겪으면서 이러한 전통이 확립되었는데, 지난 1998년 무디스가 토요타의 신용등급을 떨어뜨리겠다고 경고했을 때 당시 토요타 사장이 "정리해고를 하기 전에 사장이 먼저 할복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위기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던 우리에게도 무척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한 토요타는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훈련을 엄청나게 강조하여 노동자들에 대한 현장교육과 평생학습체제의 구축을 위해 불철주야 힘쓰고 있다. 그리고 종신고용과 함께 실적에 따라 보상을 받는 성과주의도 함께 도입하여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실제로 2003년 발표된 재무성의 연구도 종신고용과 성과주의를 결합한 기업의 성과가 높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경기가 나쁠 때는 모두가 함께 인내하며 경기가 좋으면 보너스로 성과를 배분하는 이러한 나눔의 정신은 노사관계만이 아니다. 토요타에 납품하는 여러 중소기업들과도 상생의 문화에 기초해 이익을 나누기 위한 노력이 적지 않다. 얼마 전 제주를 방문한 오쿠다 히로시 토요타 회장은 부품업체가 제품개발을 통해 이익이 나면 반 정도는 부품업체에 돌려주고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결국 기업은 노동자에게 장기고용과 교육을 제공하고 노동자는 숙련의 향상에 기초한 생산성 상승으로 보답하는 안정적이고 협조적인 일본식 노사관계가 토요타에서 현대적인 모습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에는 계약직 노동자들이 생산직의 30%에 이르고 있지만 여전히 이러한 관계를 지켜가기 위한 노력의 중요성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이는 역시 노동자를 단지 비용이 아니라 가장 핵심적인 생산요소로 생각하며 기업의 주인이 주주만이 아니라 노동자를 포함한 다양한 이해당사자이며 기업의 책무는 바로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라는 철학에 기초한 것이다.
***후진적 기업지배구조?**
토요타의 성공은 또한 토요타 창업주의 역할과 이들에 대한 신뢰와도 큰 관련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토요타가 일본 내에서도 가장 일본적인 기업이라는 점이다. 소니 등 전자업체들이 미국식 경영과 지배구조를 도입하고 닛산이 외국인 경영자를 CEO로 앉히며 구조조정에 매진하는 것과는 달리, 종신고용과 협력적 노사관계 게다가 창업주 가족의 경영참여까지 어찌보면 토요타는 가장 비서구적 방식의 경영으로 일본경제를 이끌고 있다.
소유구조를 봐도 우리의 재벌과 마찬가지로 창업주의 아들 토요타 쇼이치로의 지분은 현재 0.4%에 불과하며 가문의 전체 지분도 2%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 한국의 재벌처럼 총수일가가 계열사 지분에 기초해서 전체 그룹을 통제하지는 않지만, 그 기업지배구조도 기업간의 안정적인 상호주식보유로 자본시장의 감시가 극소화되고 사외이사의 역할도 미미한, 적어도 미국식으로 본다면 무척 후진적이라 할 만하다.
회사 이름 자체가 창업주 토요타 기이치로의 성으로, 우리로 치면 삼성전자가 '이'전자인 셈이다. 창업동지였던 동생을 물러나게 하고 친족의 경영참여와 임원 자제의 입사조차 칼같이 배제하고 있는 혼다와는 달리 토요타에서 창업주 일가의 파워는 '천황가'에 비교될 정도로 엄청나다. 실제로 창업주 이후 그 사촌동생, 그리고 창업주의 아들 쇼이치로가 사장을 지냈고 또 그의 아들이 현재 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계열사에도 친척들이 포진하고 있다.
오쿠다 히로시나 조 후지오 등 전문경영인 출신 사장들이 훌륭한 경영수완을 보이기도 했지만 주로 이들은 기업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창업주 가문을 보조하는 구원투수의 역할을 했다. 실제로 지난 6월 새로 사장으로 취임한 와타나베 사장 이후에는 경영권이 다시 창업주의 손자 토요타 아키오 부사장으로 넘어가는 '대정봉환'(메이지유신 전야인 1867년 당시 집권세력이던 도쿠가와 에도막부(幕府)가 통치권(大政)을 교토의 일왕가에게 되돌려준(奉還) 것을 일컫는다)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창업주의 역할과 책임**
그러나 많은 이들은 토요타 가문의 역할은 사내의 파벌 대립을 방지하고 전체기업의 구심력을 높이는 순기능을 한다고 지적한다. 더욱 중요한 점은 무능한 창업주의 가족들이 능력의 검증도 없이 경영권을 물려받는 일이 없도록 하는 여러 노력들이 기업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90년대 후반 불황에 처한 토요타를 살려내고 렉서스 신화를 이끈 전문경영인 출신 오쿠다 회장은, 창업자 가문은 존중하지만 인사는 공평하게 하겠으며 토요타 일가라도 임원까지는 기회를 주지만 그 다음부터는 실력에 따라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피는 시간이 지나면 흐려진다며 언제까지 토요타 일가에 의지만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즉 토요타 가문이 아니더라도 최고경영자에게는 오너의 간섭 없이 강력한 전권이 주어지며, 많은 이들은 실질적인 경영과 소유는 분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92년 명예회장, 회장, 사장 모두를 창업주 가족들이 맡았을 때는 언론과 일부 임원들의 비판도 높았지만 한국 재벌과 같은 족벌경영이라는 강도 높은 비판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무거운 책임을 자각하는지 경영권 승계를 둘러싸고 한국의 재벌들처럼 친족간의 갈등이나 대립이 나타난 적도 없다.
물론 토요타도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이고 여러 이해자집단의 이해조정과 일본정부와의 협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94년 토요타 회장이었던 쇼이치로는 일본 게이단렌 회장을 맡기도 하며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요타 가문에 대한 일본인들의 생각은 한국의 재벌가에 대한 그것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삼성이 배울 교훈**
다시 우리의 재벌들을 들여다보자. 재벌에 대한 찬반양론은 이미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많이 들어 왔다. 현실에서 소유권이 집중된 기업들은 세계적으로도 일반적이고 오너의 강력한 리더십과 그룹형 구조는 고도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우리의 재벌이 한국경제에 기여한 점도 부정하기 어려우며 위기 이후의 미국식 구조조정은 이들을 너무 약화시켰다는 우려도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위기 이후 재벌의 문제점, 방만한 경영과 특히 창업주 일가의 왜곡된 경영지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여전히 높다. 재벌개혁은 분명 재벌의 잘못된 구조와 행태를 바꾸기 위한 것이었고, 문제 많은 미국식 주주자본주의가 아니더라도 보다 투명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재벌의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노력은 필수적일 것이다.
그러나 온갖 개혁의 말잔치에도 불구하고 재벌가의 불법적인 상속이나, 가족간의 경영권 분쟁, 하청업체에 대한 횡포 등 구태의연한 모습은 오늘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어떤 재벌은 노조조차 허용하지 않고 많은 재벌들의 노사관계는 아직도 적대적이고 언제나 불안하며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대우는 너무나 심각한 현실이다. 게다가 요즘은 정부의 열의조차 그나마 실종된 듯하고 재벌공화국이 되어가고 있다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 터져 나온 삼성의 정치자금 문제는 재벌과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에 불을 붓는 형국이다. 이쯤 되면 다시 한번 삼성은, 그리고 한국재벌들은 토요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상생과 협력의 노사관계, 그리고 창업주의 책임과 기업의 사회적 공헌, 토요타에게 우리 재벌들이 배울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기업이 사회에 공헌하는 길은 정치자금을 통해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투명한 경영을 통해 가치를 창조하고 그것을 전 사회와 함께 나누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삼성의 모토도 '나눔경영'이 아니던가.
2004년 토요타의 회장을 만났을 때 이건희 회장이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삼성은 다시 한번 토요타를 자세히 들여다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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