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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기생 정군파 논란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 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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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8기생 정군파 논란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 전력"

[김재홍의 '박정희 권력의 DNA']<13> 정군파의 역사흐름 외면

1960년 4.19혁명이 발발하자 사회 각 영역에 '혁명'바람이 불었다. 정치권에서는 독재권력에 빌붙었던 구악 정치인을 퇴출시키자는 쇄신운동이 일었고 사회 각 영역에서 기성세대의 무기력한 순종문화를 탈각하자는 구호가 등장했다. 4.19혁명 시기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감은 한국의 현대사회사에서 첫 세대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는 혁명바람이 유행처럼 번지자 혁명을 운위하기 어려운 특수사회인 군에도 예외 없이 바람이 불었다. 군은 1948년 공식 창설된 지 12년 밖에 지나지 않아 역사가 짧은데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자신의 재선을 위한 직선제 헌법개정에 군을 동원하는 등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면서 자긍심이 훼손당하고 있었다. 군의 정치적 중립과 명예를 지키려는 직업주의도 확립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창군 과정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걸은 군 인맥이 여러 갈래 파벌을 형성하면서 알력과 갈등이 심각했다.

부패비리 지휘관일수록 부정선거 등 상부명령엔 맹종
병사들 숯 굽고 벌목 시켜 불법 축재…정군운동 발화


고위 장성 중엔 미국의 군사원조를 자신의 재산으로 가로채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대대장이나 연대장 등 영관 장교는 숯을 굽거나 벌목을 시키는 개인적 돈 벌이에 부하 사병들을 노무자로 동원하는 파렴치행위가 허다했다. 병사는 배곯는데 사치생활을 즐기는 부정축재 장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이렇게 부패비리를 저지르는 지휘관일수록 위에서 하달되는 명령은 부당한 것이 있어도 앞장서서 이행했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부정선거도 군부대 내에서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군내 쇄신바람은 불가피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부정선거에 앞장 선 장교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큰 명분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과 시민이 몸 던져 4.19혁명을 폭발시키자 주로 육군본부 등 서울지역에 근무하던 군 장교들은 이것을 평소 품어 온 군 수뇌부에 대한 불만 척결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한 부정선거 연루 장교들에 대한 징벌론이 명분으로 작용했지만 실제로는 군내 승진적체와 장래불안으로 인한 발화요인이 더 강했다. 승진적체 등 인사 불만이 가장 강했던 8기생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것도 그런 증거 중 하나다. 이것이 4.19 혁명 후 5.16 군사반란 이전까지 벌어졌던 이른바 정군(整軍)운동이다. 정군운동은 자신들의 요구를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육군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 심지어 국정최고책임자였던 총리에게까지 전달하고 압박하면서 하극상으로 치달았다.

4.19 혁명 당시 서울 육군본부에는 육사 8기생이 120여 명이나 근무하고 있었다. 대부분 중령이었으며 대령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4월26일 이승만도 물러난 지 얼마 후인 5월 초 어느날 혁명의 열기기 뜨거워지자 이들 사이에서 사발통문이 돌았다.

"군내 부조리와 부정부패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8기생 모임을 갖고자 하니 일과 후 용산 우체국 옆의 중국집에 모여주기 바랍니다."

첫 모임에 6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시국 상황과 군내 불만요소들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였다.

"이 대통령이 물러나는 바람에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만 영웅 됐어. 송 장군이야말로 무능하고 안일무사한 양반인데 말이지. 시위대에 발포명령을 안 내린 것은 책임전가였고."
"맞아 서울로 투입된 계엄군 지휘관인 15사단장 조재미 준장(육사2기) 쪽 얘기를 들어봐도 송 사령관이 일절 지침을 안 내려 준다는 거야. 그래서 해당 부대의 지휘관들이 발포를 안 하기로 했고 시위 진압은 물 건너 간 거지."

언론들이 연일 쏟아내는 혁명과 민주화 분위기에 군 장교들도 편승하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학생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우리 할 일이 김 빠졌어"

"어쨌거나 학생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김 빠졌어."
"우리가 시민학생과 혁명 경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군에서 우리가 할 일은 따로 있는데, 학생들보다 먼저 선수를 못 쳤다고 의기소침할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군내 정화, 정군운동을 하자는 거군요."
"바로 그거야. 부패분자들을 싹 쓸어내야 해. 군 수뇌부가 똑바로 해야 전쟁이 나도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거 아니요."

이른바 정군운동이 불붙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2차 모임은 숫자가 20여 명 남짓으로 줄었고 이어 3차 모임은 10여 명만이 동참했다. 정의감도 좋고 명분이 있었지만 개인으로 돌아가 보면 자칫 잘못 될 경우 감당해야 할 위험부담이 보통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처자가 있는 처지여서 위험을 감수하고 나서기는 쉽지않았다.

그러나 숫자가 적어진 후 오히려 대화 내용은 깊어졌고 동지의식이 생겼다. 마지막엔 8기의 정군파 8명그룹이 형성됐다. 그래서 붙여진 명칭 '8-8그룹'이 1차 정군운동파였다. 김종필 김형욱 신윤창 길재호 옥창호 석정선 최준명 오상균이 그들이다.

8-8그룹의 리더는 김종필로 논의의 내용을 정리하고 행동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군내부의 부조리들을 학생과 시민이 들어와서 척결해 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 스스로 나서야 할 상황이지."

이들은 5월8일 정군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작성해 동조세력을 모으고 민주당 과도정부의 국방장관인 이종찬(일본육사.이승만 정부 육군참모총장)과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정군 건의문 작성은 김종필이 맡기로 하고 정군의 대상자는 장군들의 명단을 놓고 선정하기로 했다. 정군 대상의 기준은 첫째, 정치관여자 둘째, 부정축재자 셋째, 축첩자 등으로 정리했다.

8-8그룹 리더격인 김종필은 정군운동을 당시 군수기지사령관으로 군내 불만 제기가 많은 박정희 소장과 연결시키려 했다. 김종필의 이 같은 계획을 간파한 정군파는 박정희의 전력에 대해 지적하고 나섰다. 정군 주동자들 중엔 이북 출신이 많았고 반공 면에서 확고한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박정희가 남로당의 군사프락치로 1948년10월 여순반란 사건 때 구속돼 옷 벗었던 일에 대해 논란을 벌였다. 또 김종필이 박정희의 조카사위라는 사적인 관계 때문에 그를 내세우려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표출됐다.

그러나 영관급 장교인 자신들의 처지에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군내에 울타리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장군들 몇 명을 업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박정희와 함께 서울지구 계엄분소장인 조재미 준장에게도 자신들의 뜻을 전하고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 5.16 군사반란의 주동세력인 육사8기생 정군파와 박정희의 결합에는 그의 조카사위로 정군파 리더였던 김종필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67년 7월 안양에서 열린 공화당 의원 연찬회에서 김종필이 가수 이미자의 노래를 아코디언으로 반주하고 있다.

박정희는 4.19혁명 편승 군내 비판수위 높이며 기회만 엿봐
김종필 등 정군운동파 8-8그룹 전원 육본 방첩대에 체포

박정희는 김종필이 맡기로 하고 조재미에게는 8-8그룹 중 가장 먼저 대령이 된 최준명이 찾아갔다. 최준명은 조재미에게 간곡히 진언했다.

"저희 8기생들이 군내 정화운동에 나서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부디 군이 바로 서기 위한 정군운동에 사단장님께 울타리가 돼 주시고 지도해 주십시오."

그러나 조재미는 정치군인이 아니며 강직한 장군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라가 뒤숭숭한 판에 중요한 위치에 있는 중견 장교들은 자중해야 하는데 무슨 짓이야. 경거망동해서 분란을 일으키면 안되네."

이같은 조재미에 비해 박정희는 달랐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나서 군내에서 비판적 발언을 해온 그는 정치성향과 권력의지가 강했다.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 한 판 들어엎을 생각으로 호시탐탐 노려 온 정치군인 박정희와 승진불만이 극에 찬 8기생 정군파는 이렇게 궁합이 잘 맞아떨어졌다. 박정희는 자연스럽게 이들 정군파의 보스로 옹립된다. 여기서 김종필의 연결역도 중요한 몫을 했다.

한편 조재미는 계엄업무차 만난 육본의 소장급 장성에게 별 악의 없이 8기생들이 대표를 보내 왔으며 자신이 타일러서 돌려보낸 일을 얘기했다. 이것은 고스란히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됐다. 그러자 송요찬은 육본 헌병대에 조사를 지시했고 이들 8-8그룹은 전원 국가반란음모죄로 체포당했다.

그러자 육본에 근무 중인 8기생을 중심으로 반발 분위기가 형성됐다. 군내 부정부패를 척결하고자 건의문을 올리려다 체포당한 동료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얘기들이 나돌았다. 더구나 4.19 혁명열기가 타오르고 있던 와중이어서 과도정부와 군 수뇌부는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4.19혁명이 발발한지 한 달 만인 5월19일 밤, 송요찬은 체포된 정군운동파 8기생 8명을 유치장에서 불러냈다.
"나도 귀관들의 군내 정화의지엔 뜻을 같이하네. 그러나 장교가 집단행동을 하는 것은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오해 소지가 크니 자제해야 하네."

박정희 1관구사령관으로 좌천당하자 정군파 분기탱천

8-8그룹은 송요찬의 지시로 전원 석방됐다. 그리고 송요찬은 다음날 스스로 육군참모총장직을 사퇴하고 전역하고 만다. 4.19 혁명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지도 불투명하려니와 군내 정군운동도 막 발화하는 양상 아닌가. 자신을 임명한 이승만도 하야했고 혁명열기를 제어하기엔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송요찬이 물러나자 군 고위장성인 백선엽과 유재흥 등도 옷 벗고 예편했다. 이는 일련의 4.19혁명 여파였다.

8기생의 정군 소동으로 송요찬이 물러나자 허정 과도정부는 후임 육참총장에 최영희 중장을 임명한다. 그러나 최영희는 8-8그룹이 지목한 정군 대상 중 한 명이었다. 문제가 더욱 악화할 수밖에 없었다.

신임 육참총장 최영희는 군내 불만세력으로 정군운동파인 육사8기 그룹을 달래기 위해서 그들이 업고 있는 보스 박정희에게 육군본부의 핵심요직인 인사참모부장 자리를 제의했다. 이에 박정희는 조건을 제시하고 나선다. 부정부패한 장성들을 정리할 실권을 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인사참모부장은 참모이지 장성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군 장성의 인사권은 대통령과 국방장관에게 있으며 육군참모총장은 제청권만 행사할 뿐이다. 박정희의 요구는 육참총장이 받아들이기엔 턱 없이 가당찮은 것이었다.

그러자 육참총장 최영희는 군수기지사령관이던 박정희를 1관구 사령관이란 한직으로 좌천시켰다. 이에 분기탱천한 정군파는 내부 숙의를 거듭했다. 그러는 사이 8월19일 허정 과도정부가 물러나고 민주당 장면 정부가 들어선다. 4.19혁명의 성과로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새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군내 불만세력인 정군파는 역사의 흐름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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