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전쟁의 영웅이자 카리스마가 넘치는 노장군(老將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노장군은 전쟁터에서 한쪽 눈과 한쪽 팔, 그리고 한쪽 다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노장군은 자신의 전신상(全身像)을 후세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화가(畵家)를 초빙했습니다.
그런데 이 유명 화가라는 작자가 그린 그림에는 외눈박이에 팔도 하나요, 다리도 하나인 볼썽사나우면서 늙은 군인 하나가 서있었습니다. 노장군은 격노하여 그 유명 화가를 단칼에 찔러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 후 다시 다른 화가를 불렀습니다.
새로 온 화가는 전임 화가가 죽은 것을 알고서는 노장군의 모습을 아주 멋있게 그리기로 작정합니다. 그래서 젊은 얼굴에 한쪽 팔도 살려내고, 두 눈을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를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굳건한 두 다리로 힘차게 대지(大地)를 서 있는 그림을 완성하였습니다.
이 그림을 본 노장군은 큰 소리로 말합니다. “이 놈아, 이 그림에 있는 녀석이 도대체 누구냐? 내가 아니지 않느냐? 너는 사람을 능멸하느냐?”라면서 불같이 화를 내더니 또 화가를 죽이고 맙니다. 노장군은 다시 다른 화가를 불렀습니다.
다시 불려온 화가는 도대체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죽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그 화가는 노장군의 옆모습만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팔과 다리 하나가 없는 것도 표시가 나지 않고 눈 하나 없는 것도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본 노장군은 크게 만족합니다. 그리고는 화가를 불러서 가르치듯 말합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똑 같은 것을 그리더라도 방향만 잘 잡으면 되지 않겠어?” 라고 말입니다.
***(1) 고구려, 민족의 방파제**
동북공정이 노골화된 이후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무척이나 커졌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들도 고구려에 대해서 상세히 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삼 고구려 자체에 대해 거론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듯합니다. 그리고 고구려에 대한 세부적인 이야기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듣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왜 진작 그러지 않고 이제 와서 이 난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지속적으로 추진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과거에도 중국인들은 “고려에서 하는 일은 사흘 만에 바뀌지[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 : 고려의 정책이나 법령은 사흘 만에 바뀐다는 뜻]”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고려에서는 나라의 정책이나 법령이 일관성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말은 조선이 그대로 계승해서 인조 때 유몽인(柳夢寅)의『어우야담(於于野談)』에 “조선의 나라 일이라는 게 사흘이면 바뀐다[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 는 말로 정권의 이름만 바뀝니다. 옛날이야기에 보면 정책이나 법령이 하도 자주 바뀌니까 공문을 보내도 그 배달꾼[역리(驛吏)]이 공문을 보내지도 않고 사나흘 기다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흘 뒤면 다시 바뀔 텐데 아예 바뀌거든 가지고 간다는 것이죠.
이와 같이 우리는 일을 할 때 신중히 하고 반대가 있더라도 소신껏 밀어붙이는 힘이 약한 것이 문제인데 이번만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아셔야 할 것은 고구려 역사를 지키면 우리 역사를 지킬 수 있다는 착각은 버리라는 것입니다. 마치 한국의 사학자들이 고구려만 지키면 자신의 역할을 다 한 듯이 시끄럽게 떠들지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역사 교과서 전체를 범쥬신의 관계사로 바꾸어야만 해결될 문제입니다.
요즈음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는 고구려 관련 단체를 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이런 시도들보다는 차라리 말갈 민족 연구나 숙신ㆍ동호 등에 대한 연구 단체를 만드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고 바람직 할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문제도 한국과 일본 양국의 학자나 정치가들이 겸허하게 쥬신의 입장으로 돌아갈 때만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지금처럼 자기 입장만 내세우고 서로 소모전만 되풀이 한다면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으며 동족(同族)으로서의 우호관계를 회복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고구려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아니지요.
제가 이제부터 거론할 부분은 고구려가 쥬신의 역사에 미친 중요한 영향에 관한 것입니다.
고구려는 흔히 지적되는 말로 ‘민족의 방파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윤명철 교수는 고구려는 ① 우리 민족의 자아를 찾고 확립할 수 있는 원형이 되며, ② 한민족의 반도사관을 극복할 수 있는 근거를 주고, ③ 미래를 발전시키는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윤명철, 『역사전쟁』(안그라픽스 : 2004) 193쪽].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교과서나 학교에서 일반적으로 가르치듯이 백제나 신라의 역사가 온전하게 거의 7백년 이상을 유지한 것이 고구려 덕분이라고 보는 생각에는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존재는 단순히 한반도의 역사를 수호해 내는 역할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민족의 방파제라는 말은 맞지만 그 민족은 반도 쥬신이 아니라 바로 범쥬신(Pan - Jüsin)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구려가 요동과 만주의 입구를 방어함으로 하여 만주와 한반도의 쥬신들이 중국의 역사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를 쉽게 비유하자면 쥬신의 원조 브랜드(상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화의 그늘’에서 보셨다시피 한(漢)나라 성립 이전까지는 현실적으로 한족(漢族)과 쥬신을 뚜렷하게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점은 ‘민족을 먹는 하마, 중화의 그늘’에서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한나라 초기에는 흉노가 강성하여 사실상 한나라가 조공을 바치는 상황에서도 한나라는 스스로를 중원의 주인으로 자처하였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세계의 주인, 즉 천자(天子)는 가장 세력이 강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중국은 강할 때나 약할 때나 모두 천자(天子) 노릇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큰 모순이지요.
중국이 충분히 강할 때, 가령 한무제(漢武帝 : 재위 B. C. 141~87)의 치세에서는 중국인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데 별 문제가 없었겠지요. 힘도 강하고 중화사상을 이론적 기반으로 하니 아무 문제가 없지요. 그래서 중국인들이 한무제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최근 중국에서는 한무제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대한천자(大漢天子)’가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림 ①] 중국 드라마 ‘대한천자’ 선전 포스터
그런데 남송(南宋)과 같이 문화적으로는 강한데 힘이 없는 경우는 어떻게 될까요? 그럴 경우에는 중화사상에 따르면 응당 강자에게 중원을 물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중국인들은 끝까지 항전하고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인 특유의 불패사상(不敗思想)입니다. “이기면 확실히 이긴 것이고 지더라도 진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입니다. 바로『삼국지』의 주인공 유비(劉備)가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결국 중국인들은 항상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이죠. 성리학(性理學)에서 말하는‘이승기필패론(理勝氣必敗論)’도 바로 이것이지요. 마치 유태인들의 생각과 종교를 보는 듯합니다. [그림 ②] 남송 시기의 쥬신(금나라와 몽골)
사실 따지고 보면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 될 리도 없지만 과거 중원이라고 지칭되는 곳은 쥬신족과 한족이 서로 각축을 벌이던 지점입니다. 이 지역을 때로는 한족(漢族)이 장악하기도 했고 때로는 쥬신족이 장악하기도 했지요.
그러나저러나 한족(漢族)들에게 정답은 하나입니다. 세상의 주인은 한족(漢族)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한족(漢族)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이 견고해질수록 주변 민족들은 더욱 오랑캐가 되어갑니다. 그러면 주변민족들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세 가지가 있게 됩니다. 첫째는 과거 양쯔강 남쪽의 초(楚)나라나 월(越)나라와 같이 한족(漢族)에 동화(同化)되어버리는 것이지요. 둘째는 일정한 외교형식을 갖추면서 적당히 중국의 비위를 맞추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셋째는 중국과 대적하거나 중원을 정벌하여 중국을 경영하는 것입니다.
쥬신족의 역사를 보면 둘째, 또는 셋째의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요?
초나라[현재 중국의 후난성(湖南省), 쟝시성(江西省)]는 완전히 중국화되었고, 민월[현재의 져장성(浙江省), 푸젠성(福建省)] 이나 남월[현재의 광둥성(廣東省)] 등은 완전히 동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쥬신의 근거지인 요동 - 만주 -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은 견고하게 자신의 역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1949년 이전까지는 말입니다. 단순히 거리가 멀다든가 아니면 자연 지리적으로 특별한 천연요새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여기에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쥬신족이 한족의 군사적 위협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 물리력(military force)을 가지고 있다는 점.
② 쥬신족은 문화적으로 중국의 한족들과는 결코 동화(同化)할 수 없는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cultural difference).
③ 고구려의 존재, 즉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쥬신족의 대표 주자인 고구려가 요동 - 만주를 견고하게 방어하여 한족의 정치ㆍ군사ㆍ문화적 침입으로부터 요동 - 만주 지역을 보호했다는 점(the existence of national guard).
등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조망해 보면, 중국이 요동 - 만주 일대를 제대로 지배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모택동(毛澤東) 이후 중국은 가장 강력하고 철저하게 쥬신의 지역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모택동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이미지와 화하족[한족(漢族)]의 시조 황제(黃帝)의 이미지를 동시에 가진 한족(漢族)의 영걸(英傑)입니다. 모택동은 황제(黃帝) -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 -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 -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을 잇는 한족중흥(漢族中興)의 영웅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은 쥬신의 역사와 문화의 대표적인 파괴자들입니다.
모택동의 현대 중국 정부는 과거 부여ㆍ금ㆍ몽골의 지역에 엄청난 한족(漢族)들을 이주시키고 식민(植民)하여 쥬신 지역의 사람들을 한족(漢族)으로 동화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내몽골 지역에서 이를 거부하는 엄청난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중국은 일본 파시스트들의 대표적인 만행(蠻行)인 남경대학살(南京大虐殺 : 1937)을 핏대를 높이며 책임을 추궁하고 비난하면서도 티베트나 내몽골 지역에서는 수만 명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1959년 중국 지배를 반대한 티베트인들에 대하여 중국정부는 사흘동안에 무려 1만5천명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에 더 이상 티베트는 없습니다. 중국의 일개 주인 시짱(西藏) 자치구만 있을 뿐이지요. 제가 보기엔 중국은 남경대학살을 비난할 자격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랩니다.
지금은 만주 쥬신을 구별하기 힘들지만 모택동 정부가 들어서기 이전에만 해도 쥬신족들은 여러 면에서 한족(漢族)과는 달랐습니다. 한족이 쥬신족들을 서로 이간질하여 약화시키려고 한 것은 이들이 가진 기동성과 전투력 때문입니다. 쥬신족들은 워낙 광대한 지역에 분포하면서 자유로운 유목생활을 하여 복잡한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간계(離間計)에 쉽게 넘어가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쥬신은 한족(漢族)보다는 쥬신끼리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죽하면 이이제이[以夷制夷 : 쥬신을 이간질하여 쥬신을 이용하여 쥬신을 제압함으로써 한족(漢族)을 보전한다]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쥬신은 부족연맹의 상태에 있다하더라도 어느 한 부족에서 영걸(英傑)이 나타나면 그 멀리 흩어진 부족들을 신속히 통합하여 하나의 세력화(勢力化)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이것의 정신적인 기반은 쥬신이 가진 한사상(Kahn ideology : 汗思想, 또는 韓思想) 때문입니다(이 부분은 이 강좌의 후반에서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바로 이 점이 중국에게는 엄청난 위협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한족(漢族)들은 쥬신을 경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서워하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뭉치지 못하게 하도록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니 같은 민족이라도 이리 나누고 저리 나누고 하여 서로 다른 민족으로 보이기 위해 온갖 책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네들은 웬만하면 모두 한족(漢族)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한족들은 부계(父系), 즉 아버지만 한족(漢族)이면 모두 한족(漢族)으로 분류합니다. 그리고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도 심하니 대부분은 가급적 한족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쥬신을 큰 하나의 민족으로 대단결시킨 분들을 모아볼까요?
전설적인 제왕이기는 하나 치우천황(蚩尤天皇)을 시작으로 무두루 대단군[모돈(冒頓 : 전한대의 단군임금)], 텡스퀘이 대단군[단석괴(壇石塊)], 고구려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 재위기간 391~412), 요나라를 건국한 태조 야루아버지[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 재위기간 916~926)], 금나라의 태조(아이신자오뤄 아골타 : 愛新覺羅阿骨打 : 재위기간 1115~1123), 원나라 태조 칭기즈칸(成吉思汗), 청나라 태조(아이신자오뤄누르하치 : 愛新覺羅 奴兒哈赤) 등입니다.
칭기즈칸이나 청 태조의 영광도 사실은 고구려가 있음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을 오랫동안 견고하게 지켜왔으며 당시 세계 최강이라고 평가되던 수나라ㆍ당나라의 군대를 격파한 저력을 가진 국가였습니다. 이러한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음으로 하여 후세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왕조는 고구려를 자칭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대고구려(발해 : 후고구려)가 그러했고 고려가 그러했습니다. 대고구려는 바로 금나라와 후금(청)의 전신이었고 고려는 조선의 전신이죠.
요즈음 중국 정부는 마치 자신들이 후금, 즉 청(淸)나라를 계승한 듯이 떠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를 계승한 사람들이 왜 청나라(만주 쥬신)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합니까? 세상에 이런 계승자가 있을까요? 만주(滿洲)라는 말도 없어지고 동북(東北)이라는 말만 남았습니다. 현재 만주에는 만주쥬신·몽골쥬신 들이 있지만 한족(漢族)이 이미 90%를 넘어서 쥬신은 이미 이 지역에서 극소수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지 오랩니다. 한족(漢族)은 청나라 말기, 즉 19세기 말과 모택동 정부의 수립 이후 대대적으로 만주로 이식되었습니다. 티베트가 사라지듯이 주위의 침묵 속에 만주도 사라져간 것이죠.
그러고도 중국은 청나라 역사도 중국사의 일부라고 하는데요. 그러면 청나라 정부는 무엇 때문에 1천 리도 더 되는 기나긴 버드나무 장벽, 즉 유조변(柳條邊)을 설치하여 만주 쥬신의 영역에 한족(漢族)의 출입을 막았겠습니까? 그것은 청나라의 역사는 한족(漢族)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웅변하는 것이지요.
만주가 이렇게 독립성을 상실한 것은 모택동 공산정권 이 후의 일입니다. 1949년 이전까지만 해도 봉천군벌 장쯔린(張作霖)ㆍ장쉐량(張學良)이 이 지역을 장악했으며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으로 있었지요. 그러다가 중국 공산당 정부가 중국을 장악(1949)한 후에도 ‘둥베이 인민정부(東北人民政府)’로 어느 정도 독자성을 유지했습니다. 1953년 중국 정부가 이를 폐지하고 랴오닝 · 지린 · 헤이룽장의 3개 성으로 나누어 버림으로써 만주는 이제 중국의 정치구조 속으로 완전히 편입되고 말았습니다. [그림 ③] 유조변
현대 중국은 그 많은 영토를 청나라 덕분에 그저 주운 것이죠. 여기에는 물론 제2차 세계대전, 동북아의 힘의 공백상태, 미국과 소련의 대립 등의 역학관계도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그림 ④] 청나라가 확장한 영역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요동과 만주에는 항상 고구려와 같이 쥬신의 방파제 역할을 해 온 나라가 있었습니다. 과거에 고구려(高句麗)ㆍ북위(北魏) - 요ㆍ금(遼ㆍ金) - 원(元)ㆍ북원(北元) - 후금(後金 : 청) 등의 나라들이 이런 역할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이들 국가들은 쥬신의 전체적인 문화를 보존하는 쥬신의 방파제 구실을 한 것이고 그 시작이 고구려라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고구려가 있음으로 하여 쥬신의 역사가 있을 수 있었다는 점이 고구려가 전체 쥬신의 역사에서 가지는 역할이라고 하겠습니다.
***(2) 미국인이 뱀의 자손이라니**
요즘 중국은 정치 경제적으로도 대단합니다. 미국의 동부지역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중국어(中國語)가 필수과목이 되고 있습니다. 자신감에 충만한 중국은 “중국의 역사란 중화인민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민족(중화민족)이 그 영토 안에서 이루어온 모든 역사”라는 수준 미달의 논리로 학문적 체계나 가치를 무시해도 주변 나라들은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중국의 학문적 수준이 상당히 떨어집니다. 그래서 한국의 경우, 중국사를 전공하더라도 중국에서 학위를 받아오는 것은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미국이나 일본에서 받은 학위를 더욱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고구려조차도 중원(中原) 한문화(漢文化)의 영향을 받은 한제국(漢帝國)의 번속지방정권(藩屬地方政權)이라고 합니다(馬大正ㆍ李大龍ㆍ耿鐵華ㆍ權赫秀,『古代中國高句麗歷史續論』(中國社會科學出版社 : 2003).
그나저나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니 참으로 대단합니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많이 거론을 했으므로 좀 다른 각도에서 기존의 학계에서 말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몇 가지만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고구려의 민족적 기원에 대해서는 예·맥·예맥, 또는 예맥족에서의 분화설, 원래는 예족인데 명칭상 맥족이라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제시되고 있습니다(金貞培, 1968 「濊貊族에 관한 硏究」『白山學報』5 ; 盧泰敦, 1986 「高句麗史 硏究의 現況과 課題」『東方學志』52). 물론 정설은 없습니다.
그 동안 고구려에 대한 연구를 보면 대체로 B. C. 3~2세기경부터 고구려는 예맥사회와 구별되는 주민집단을 형성하였고, B. C. 2세기 후반부터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맥사회와 구분이 되는 주민집단은 처음에는‘구려(句驪)’로 불리다가 이것이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으로 고정되면서,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점차 ‘맥(貊)’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고 있고 고구려를 건국한 주민집단도 고조선이나 부여처럼 예족(예맥족)에서 분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여호규, 「高句麗 初期의 梁貊과 小水貊」『한국고대사연구』25 (2002)].
그러나 우리가 앞서 여러 장에서 본 대로 예맥의 실체를 보면 이런 논의 자체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구려(고구려)와 예맥을 분리하다니오? 예맥이라는 큰 줄기를 보면 그 차이를 논하는 자체가 잘못된 일이지요. 기본적으로 사학계의 생각들이 위험한 것은 고구려를 일단 한족(漢族)과는 다르게는 보는 것은 좋은데 항상 분석의 기준을 숙신과 동호(烏桓ㆍ鮮卑ㆍ契丹)와 계통을 달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죠. 심지어는 예맥과도 분리하고 있으니 기가 찰 일입니다.
현대 중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고구려가 중국 민족의 하나라고 보려고 온갖 내용을 다 동원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일단 중국인들의 주장을 간단히 보고 넘어갑시다.
1990년대부터 중국은 소위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論)’을 주장합니다. 즉 중국은 많은 민족들로 구성된 통일적 다민족국가이므로 중국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민족들의 역사 나아가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모두 중국사의 범주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주가 현재 중국 땅이니 그 이전의 만주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라든가 “칭기즈칸도 중국인” 이라고 떠들어 댑니다
이상하죠. 칭기즈칸은 그 수많은 중국의 조상들을 죽이고 말도 못할 정도로 천대하여 지금까지는 무슨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怨讐)의 대명사처럼 생각하더니 이제 와서는 갑자기 자신의 위대한 할아버지라니 정신분열증 환자도 아니고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요즘 중국에서는 자기 조상들을 죽이고 학대한 것이 무슨 위대한 업적이 되는 모양입니다. 마치 쥴리엣이 원수의 집안(로미오)에 시집을 갔더니 그 로미오의 아버지가 쥴리엣을 보고 “내가 바로 너의 아버지”라는 식입니다. 나 원 참,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사실 이런 말은 논리적으로 반박할 가치도 없는 말입니다. 수준 미달의 중국 학계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만약 일본(日本)이 중국의 동부 해안지대를 모두 점령하고 난 뒤 국경을 고정시킨 후 똑같은 논리를 편다고 합시다. 그러면 송(宋)나라 등 남조(南朝)니 남송(南宋), 명(明)의 역사도 모두 일본의 역사가 됩니까? 그러면 청나라 때는 중국의 역사가 모조리 없어져 쥬신의 역사에 편입되겠군요. 그래서 한족(漢族)의 영웅인 악비(岳飛)나 관우(關羽)도 쥬신의 장수가 되겠지요(사실 이들이 쥬신의 장수가 되기를 저는 개인적으로 원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국경이라는 것은 고정불변한 것도 아니므로 중국이 사라져 미국의 영토가 된다고 합시다. 아니면 미국의 지방정권이라도 된다고 칩시다. 그러면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그 모든 역사도 미국의 역사가 되겠네요.
그러면 한족(漢族)의 시조 할아버지인 황제(黃帝)도 파란 눈 미국인들의 시조가 되고 말겠군요. 미국인들은 여와(女媧)가 진흙을 쳐서 태어나게 되겠네요.
하지만 이젠 미국인들이 기절할 차례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자손인데 웬 여와라니 당치가 않습니다. 여와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바로 뱀입니다(여와는 인간의 머리와 뱀의 몸을 하고 있죠). 사탄(Satan)인 셈이지요. 그러면 미국인들은 (그 성의는 가상하다고 하나)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論)’과 같은 중국인들의 정치적 배려를 두 손을 들고 사양할 것 같은데요.
결국 이런 논리는 중국 학계를 세계의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습니다. 사실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입니다. 새끼 중국인들이 정신만 차린다면 말이지만요.
어쨌든 수준 미달의 논리로 인해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고구려ㆍ발해ㆍ금ㆍ후금 등 요동과 만주 지역에서 명멸해간 쥬신의 역사죠. 여기서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일단 보지요.
중국은 고구려의 조상을 예맥, 또는 부여족으로 보고 이들은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면서 고구려는 과거 상(商)나라 사람들로부터 나왔다든가 고구려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고이(高夷) 가 주나라 때 이미 조공을 바쳤다고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중국 동북방에 있는 오랑캐들을 ① 낙랑오랑캐(고조선 조상 : 대동강 유역), ② 예인(부여ㆍ옥저ㆍ동예의 조상 : 길림성과 한반도 동북지역), ③ 발인(發人 : 요동지역의 주민집단)으로 나누고 이 가운데 고구려의 조상 뻘인 고이(高夷)는 예인과 발인 사이에 거주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는 서로 다른 계통이지요. 결국 한국은 고구려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낙랑오랑캐, 또는 예인에 속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고이(高夷)를 중국 전설상의 인물인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의 후예로 설정하기도 한 경우도 있고 염제(炎帝) 계열의 후예로 중국 산동지역으로부터 압록강 중류일대로 이주하였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잡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들이 무척 많은 종류의 말과 다양한 분석을 하는데도 저는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습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백가쟁명(百家爭鳴)식으로 연기를 참 잘 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저러나 중국의 결론은 하나입니다. 고구려인은 중국인, 또는 중국의 소수민족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뿐만 아니라 이 논리에 따른다면 자연스럽게 고조선, 부여와 고구려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인들은 고구려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중국인들의 결론은 뻔한데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가 있는 듯이 보임으로써 무엇인가 학문적으로 풍부한 인상을 주려 하는 것이죠.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따로 없군요. 여기에 놀아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 쓸데없는 데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그들의 의도에 말려들어가는 것이지요.
중국인들은 세상에서 선전전(宣傳戰)에 가장 능한 민족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중국은 꽹과리와 북이 중요한 무기가 되는 특이한 나라라는 점을 꼭 알아야 합니다. 치우천황(蚩尤天皇)도 황제(黃帝)의 북소리에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최근 영국 옥스퍼드대학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교과서를 비롯, 총 34개 세계 유명기관의 53개 세계지도가 한국의 전체 영토 및 일부를 중국 영토로 표기한 사실이 언론에 의해 드러났는데 그것도 ‘동북공정의 범세계화 전략’의 일환이었다는 것이지요(『연합뉴스』2005. 7.10).
물론 중국인들의 생각 가운데 고려할 만한 것도 있긴 합니다. 예맥이 상나라ㆍ주나라 때에는 주로 산동반도 일대에 거주하다가, 상나라가 망할 무렵 몸을 피해 중국의 동북방으로 이주했는데 『일주서(逸周書)』에 나타나는 고이(高夷)가 바로 이들이고, 이들은 전국시대에는 시라무렌하 방향으로 가서 부여족의 선조가 되고 전국시대말기에 남하하여 부여ㆍ고구려ㆍ옥저 등으로 나눠졌다고 합니다[馬大正외, 『古代中國高句麗歷史叢論』(2001 : 黑龍江敎育人民出版社) 31~39쪽].
이에 대하여 한국의 사학계는 고구려의 역사를 방어하기 위해서 결사적으로 이론을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공격적 이론이나 한국 사학계의 대응은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첫째,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중국인이라는 정체성(ethnic identity)은 한(漢)나라 이후에 제대로 형성이 되고 있는데 그 이전의 정확하지도 않는 전적(典籍)들에 의거하여 입씨름을 해본 들 어느 쪽이나 별 소득은 없을 것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고이(高夷)를 고구려라고 추정해본 들 그 고이(高夷)와 『삼국지』에 나타나는 고구려와의 연계성, 또는 연속성을 어떻게 추정한단 말입니까? 앞서 보았듯이 문명의 초기 단계에서는 쥬신과 한족이 서로 각축을 벌이면서 중원을 번갈아 장악했기 때문에 이 때는 이 땅이 누구의 영역이라고 명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이죠. 결국 한국과 중국 양국의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확인할 길이 없는 신화나 설화·전설을 두고 싸우는 꼴밖에 안 됩니다. 제가 보기에 한족(漢族)이라는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되는 것은 한(漢)나라 이후이므로 한(漢)나라를 기점으로 보는 것이 좋겠죠.
[그림 ⑤] 여명기의 한족(漢族)의 영역
예를 들어봅시다. 중국에서는 『좌전(左傳)』의 기록인 “숙신과 연, 박 등은 우리의 북쪽 영토다(肅愼, 燕, 亳 吾北土也 : 「昭公」 9年)”라는 기록을 들어서 서주(西周) 초기에 벌써 (요동지역의 맥족인) 박인(亳人)들이 주나라에 신하로서 복종한 듯이 말하고 있죠. 그런데 이 기술은 ① 좌전의 기록의 사실판단도 문제지만 ② 이 시기에는 소위 중국의 한족(漢族)개념도 성립되지 않아 민족 개념이 불명확하고 ③ 사서(史書)들의 엄정성도 없고 그 근거를 다른 사서들과 비교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는 말이지요.
여러분들이 즐겨 읽으시는 『삼국지(三國志)』만 봐도 무엇이 중국(中國)인지 헷갈립니다. 즉 낙양(洛陽) 땅의 일부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그저 위나라의 영역인지 애매할 지경입니다. 분명한 것은 양쯔강 남쪽의 오나라도 중국에서 제외되어있죠(김운회, 『삼국지 바로읽기 』상권 ‘삼국이 아니라 2.5국’ 참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학자들은 중국(中國)이라는 보통명사 개념을 고유명사화하여 중국은 불변한 듯이 기술하고 있죠. 황하 문명은 쥬신과 농경민 즉 한족(漢族)의 접점지역에서 발생했으며 사실상 쥬신에 의해 선도된 것입니다. 진한(秦漢) 시대 이전 즉 선진(先秦) 시대에 도대체 한족 - 쥬신의 엄격한 구분이 제대로나 됩니까?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秦)나라가 한족(漢族)의 나라입니까?(‘민족을 먹는 하마 중화의 그늘’ 참조) 필요하지 않으면 오랑캐라고 하다가 필요하면 중국인이라고 하는 중국인들의 논리는 차라리 가장 중국인답다고나 해야겠습니다. 더구나 중국인들은 중국(中國 : the center of the world)이라는 용어로 보통명사와 고유명사 사이를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둘째, 고구려는 범쥬신의 일부이지요. 그것을 공격하거나 방어한다고 해서 범쥬신 자체가 바뀌거나 변할 수는 없는 것이죠. 한국 사학계가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범쥬신 자체를 방어해야지 고조선이니 부여니 발해니 하는 특정 국가만을 방어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제가 이제까지 여러 가지 사서(史書)나 여러 가지 유적, 생물학적 증거 등을 통해서 고증해온 것은 바로 범쥬신의 일부로서의 여러 쥬신 국가들에 대한 분석이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고구려는 7세기에 멸망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 요동과 만주는 다시 고구려의 후예들로 다시 대씨 고구려(후고구려 : 발해)와 요ㆍ금ㆍ몽골ㆍ후금 등 쥬신 국가들이 성립하는데 이들을 한국 역사에서 완전히 배제하고서는 요동과 만주를 한국 역사의 영역으로 우기는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죠.
***(3) 중국은 미국의 지방정권?**
중국의 학계는 각종 사서에 있는 고구려의 중국에 대한 조공(朝貢) 기사들을 끌어다가 고구려는 중국에 신하로 복속한 나라라고 합니다. 『삼국지』에 나타난 기사(『三國志』魏書「東夷傳」)들을 끌어다 고구려는 건국 시기부터 한나라에 복속하였다는 식으로 주장합니다. 이 점은 “고구려가 중국이 지방정권”이라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으니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중국은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변경지방민족정권(邊境地方民族政權)이다(馬大正ㆍ李大龍ㆍ耿鐵華ㆍ權赫秀,『古代中國高句麗歷史續論』(中國社會科學出版社 : 2003)”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왜냐하면 백제나 신라, 왜 등도 당시로 보면 조건이 고구려와 다를 리가 없는데 고구려를 중국에다가 얽어 매려고 하니 말입니다.
중국은 고구려가 백제ㆍ신라와 같이 변경민족정권(邊境民族政權)이란 성격을 가지지만 동시에 백제ㆍ신라와는 달리 중국의 지방정권(地方政權)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면 “모든 상황은 다 같은데 왜 하필이면 고구려야?”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간단합니다. 이것은 순수한 의미에서 학술적인 문제나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저 고구려가 현재 중국의 영토에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낸 논리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 논리가 통하면 “알고 보니 신라나 백제도 중국의 지방정권이더라”고 할 겁니다.
중국이 들고 나오는 논리는 바로 조공(朝貢) - 책봉(冊封)의 관계에 있습니다. 즉 고구려는 중국의 천자(天子), 즉 중국의 중앙정권에 의해 책봉을 받은 천자의 신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내용은 좀 더 복잡합니다. 중국이 말하는 천하의 신하도 내신(內臣 : 중국 자체의 제후)이 있고 외신(外臣 : 주변민족)이 있으므로 고구려는 이 내신(內臣)에 해당된다는 말인데 그 근거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군요. 더구나 이 천자의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 한족(漢族)이 아니라 대부분은 쥬신족이라면 문제는 훨씬 복잡해집니다. 사실 한족(漢族)이 천자의 지위를 행사한 경우는 한(漢)나라, 명(明)나라 정도일 뿐이지요. 일단 이 분야의 전문가의 분석을 봅시다.
조공 - 책봉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니시지마(西嶋)의 연구가 있습니다. 니시지마(西嶋)에 따르면, 책봉(冊封)이란 원래는 주(周)의 천자(天子)가 책서(冊書)라는 문서를 통해 그 친척이나 공신들에게 봉토(封土)를 주어 그 토지 안의 인적 물적 지배권을 주는 것을 말하지요. 그래서 책봉체제(冊封体制)란 주나라 때의 봉건제(封建制)에서 비롯된 것인데 일종의 국내질서용이라는 것이죠. 진(秦)나라 때는 이를 부정하고 전국을 군현(郡縣)으로 나눠 직접 통치를 하게 되다가 한나라 때 다시 봉건제(封建制) 일부가 부활되죠. 그런데 이 당시 한나라는 국내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나라에도 왕(王) 이나 제후(諸侯)라는 작위를 주었는데 이것이 국제적인 관례로 정착된 것입니다[西嶋定生,『西嶋定生東アジア史論集3 東アジア世界と冊封体制』(岩波書店 : 2002)]. 주변 나라의 입장에서도 중국의 작위를 받는 것이 국제적으로 승인 받는 셈이기도 하니 거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책봉을 받은 나라들은 매년 조공을 한다거나(歲貢) 군사적 협력을 통해 상호 이익을 얻는 형태를 취합니다. 마치 요즈음 한ㆍ미ㆍ일 상호방위협정과 같은 형태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쪽에서 공격을 받으면 서로 도움을 주는 형태지요. 여기에 중국의 천자는 무력보다는 덕(德)으로 주변을 감화(感化,) 또는 왕화(王化)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내부에는 여러 나라들의 자국의 이해가 얽혀있고 근본적인 동력은 그 나라가 가진 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지요. 형식적으로는 책봉관계가 중국 주변의 여러 나라가 마치 중국의 신하국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책봉관계가 중국으로 하여금 주변 지역을 영유(領有)하였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도록 합시다.
간단히 말하면 조공이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서 여러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강대국에 사절을 보내 특산물(예물)을 바치고 그 강대국은 이에 대응하여 예물로 답례하는 것이죠. 원래는 상호공존의 교린의 예로부터 출발했지만 무력시위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조공의 대상이 되는 국가도 때로는 쥬신의 국가이기도 하고 때로는 한족의 국가이기도 했습니다.
조공(朝貢)이란 약소국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① 강대국이 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또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즉 강대국은 정벌할 수 있으면 확실히 정벌하여 직접통치를 하겠지만 경우에 따라 ② 강대국이 상대를 무력으로 완전하게 지배할 수 없거나 ③ 지리적으로 멀어서 정벌이 어렵거나 정벌하더라도 비용이 너무 들 때, 또는 ④ 당나라 때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와 같이 대고구려(발해 또는 후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용도, 즉 이이제이(以夷制夷)의 필요성이 있을 때 강대국이 선택하는 차선의 외교수단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당(唐)과 대고구려(발해)의 싸움입니다. 조공관계가 수립되다가 한쪽의 힘이 일방적으로 커지게 되면 전쟁이 발발하죠. 그러다가 싸움이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면 그 휴전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조공이기도 합니다(『舊唐書』8 「玄宗紀」, 199「渤海靺鞨傳」).
앞서 본대로 책봉(冊封)은 조공의 대가로 제후나 왕 기타의 벼슬을 내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책봉에는 국내일 경우도 있고 대외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국내용인 경우는 제외하고 대외적(국제적) 책봉에 대해서만 간단히 알아봅시다.
간단히 말해서 대외적 책봉이란 양국간의 외교적인 승인 행위이지요. 그러면 책봉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요?
책봉은 ① 어떤 지역의 왕이나 사실상 통치자를 그 지역의 지배자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고(중국의 영토는 아니지만 특정 지역을 이미 통치하고 있는 정권에 대해 그 지배자로 인정하는 것) ② 전혀 엉뚱하게 남의 나라의 땅에 대한 지배권을 주는 경우도 있으며, ③ 이미 없어진 나라에 대한 지배권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동진(東晋)의 안제(安帝)가 고구려 장수왕(413~491)을 고구려왕낙안군공(高句麗王樂安郡公)으로 봉한 것(413)은 ①에 해당되겠지만, 제나라(479~502) 황제가 왜왕(倭王)에게‘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진동대장군’을 제수하였는데 이 경우는 ② 또는 ③에 해당합니다(실속은 없는 듯한데 길기도 깁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에 왜국이 신라를 지배할 수도 없지만 모한(마한)은 이미 없어진 나라가 아닙니까?
이런 점들을 보면 책봉은 정치적인 외교적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공 - 책봉은 고대 사회에 있어서 대표적인 외교관례로 볼 수 있죠.
다른 각도에서 보면 조공은 말하자면 일종의 휴전협정이기도 합니다(즉 쌍방이 전쟁을 할 만큼 국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러다가 조공이 흐지부지해지면 오히려 강대국이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퍼붓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중국인들 내부에서도 이 같은 현상은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삼국지』에서 보면 위(魏)나라에 대하여 촉(蜀)은 끝까지 대항하여 결국은 위나라에 멸망하지만 오(吳)나라는 위나라에 지속적으로 사신도 파견하고 조공하면서 현상유지를 도모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오나라가 위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보는 중국 사람은 없지요. 그러다가 촉이 멸망한 후 오나라가 약화되자 위나라는 이내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병합해버립니다. 이것이 한족(漢族)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고구려를 비롯한 쥬신 제국들이 중국과 조공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중국이 이들 지역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방증(傍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족들이 쥬신들에게 제대로 무력 공격을 못한 것은 그들의 물리력의 한계 때문이지 그들이 가진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조공제도는 현대적 의미로 보면 ① 공무역(국가간의 무역), ② 상호불가침 공존관계의 수립, ③ 문화적 교류, ④ 동아시아 국제정치체제에로의 편입 등의 여러 가지 정치ㆍ경제ㆍ외교ㆍ사회ㆍ문화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공이라는 것은 당시의 공무역과 외교적인 관례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국제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국제적인 외교관행입니다. 좀 어려운 요즘의 외교용어로 말하면 ‘국제 레짐(international regime)’ 이죠.
‘국제레짐’이란 국제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와 국제관습(international convention)의 중간적 개념으로 ① 여러 국가들에 의해 인정되는 상호기대ㆍ규칙ㆍ조정ㆍ계획 및 재정적 책임의 장치(John Ruggie의 견해), ② 행위자의 기대가 국제관계에서 주어진 영역 내에서 수렴되는 원리ㆍ규범ㆍ규칙 등의 묵시적인 장치(Stephen Krasner의 견해), ③ 행위를 정규화하고 통제하는 규칙ㆍ규범ㆍ절차를 연결하는 지배적 협정장치, 즉 국제 레짐은 국가의 자기이익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은 협정(Robert Keohane, Joseph Nye Jr.의 견해) 등으로 정의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국은 조공(朝貢)이라는 외교적인 의미의 용어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려는 자체가 유치한 수준입니다. 이것을 현대적 개념으로 좀 더 쉽게 알아봅시다.
현대의 국제연합(UN)은 세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기구, 또는 국제제도지요? 그러나 그 실제 비용은 대부분 미국이 부담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국제연합도 미국의 의지대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국제연합과 더불어 미국의 의도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국제 레짐인 GATT(무역ㆍ관세에 관한 일반 협정)가 발전하여 국제무역기구(WTO)가 구성이 되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경제 질서가 형성되어있죠. 결국 미국은 정치적으로는 UN, 경제적으로는 WTO를 기반으로 세계를 주도합니다.
한 마디로 미국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꿈꾸지만 아메리카(미국)는 로마제국(Roman empire)의 영광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상당한 부분 로마제국의 꿈을 이루고 있는 듯도 합니다. 워싱턴(Washington D.C.)의 주요 건물들이 마치 로마의 건물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림 ⑥] 워싱턴 이미지
그렇기 때문에 WTO가 국제통상을 규제해도 미국은 수가 틀리면 WTO의 권고사항을 막 무시합니다. UN의 권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사실상 UN이나 WTO는 미국의 들러리에 불과할 때가 많죠. 왜 아랍인들이 WTO를 공격하려 하는지 이해가 되죠? 그들의 눈에는 WTO가 세계경제의 이해를 공평하게 대변하는 단체가 아니라 미국의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소국가들이 UN이나 WTO가 권고사항을 무시하면 여러 모로 혼이 납니다. 대개의 경우 정치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국체(國體)를 유지하기 힘들죠.
그렇다고 UN이나 WTO에 가입되어있는 모든 국가들이 미국의 식민지, 또는 지방정권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중국도 UN과 WTO에 가입했으니 미국의 속국이나 지방정권이 되겠군요? 그 중화(中華)의 자존심은 어디로 가고 미국의 지방정권의 길을 가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한(漢)나라 초기에는 한족들은 소위 ‘흉노’의 나라에 엄청난 물량의 조공을 바쳐 신하로 복종했으니 그러면 한(漢)나라는 흉노의 지방정권이겠군요.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와 명제(明帝)는 얼마나 엄청난 돈을 소위 오랑캐들에게 바치고 평화를 샀습니까? 광무제와 명제 당시 후한 조정이 남흉노에게는 9천만 냥을 주어서 평화를 샀으며 선비 부족장들에게 정기적으로 상납한 금액은 연간 2억 7000만 냥에 달했다고 합니다(TwitchettㆍLoeweㆍFairbank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 Volume 1 』1986). 그렇다면 후한도 그 오랑캐들에게 복속해야겠군요. 그러면 도대체 중국 땅이 얼마나 남아나겠습니까? 딱한 일입니다.
이렇게 중국학자들의 논리는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필요한 부분만을 끌어 모아서 자기에게 유리한 식으로만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지요. 더 답답한 사람들은 한국 사학계입니다. 쥬신을 보다 큰 범주에서 보지 못하고 그저 고구려니, 삼한(三韓)이니, 그리고 나머지는 오랑캐라는 식으로 ‘새끼 중국인’식의 논리로 역사를 보고 있으니 해결의 길이 요원할 뿐 아니라 결국은 중국 학계의 논리 속에 빠져서 허둥대고 있는 것이죠.
그 동안 중국은 한족(漢族)에 의한 통치만큼이나 쥬신의 통치를 많이 받았습니다. 가장 가까이는 만주 쥬신(만주족)이 중국을 통치했는데, 그러면 만주 쥬신에게 요동과 만주를 돌려주어야만 과거의 소유권도 인정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 중국학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원래 내가 살고 있던 땅도 내 땅이고 원래 네가 살던 땅도 결국은 내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요동과 만주가 중국 땅에 귀속된 것이 도대체 어느 시기 또 언제입니까? 그것은 전체 중국사에서 10%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요동과 만주를 제대로 통치한 적이나 있습니까?
결국 중국이 주장하듯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식이라는 논리는 현대 중국이 미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는 얘깁니다. 제가 만약 중국에서 “중국은 미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떠들어댔다가는 아마 살아서 여러분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나저나 저는 『삼국지 바로읽기』에서는 중화영웅 관우(關羽)와 유비(劉備), 제갈량(諸葛亮)을 깔아뭉개더니 지금도 중국에 성가신 말만 늘어놓고 있어 갈수록 중국 가기가 힘들겠군요.
***(4) 고구려를 위하여**
고구려는 8백년 이상 국체를 유지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현재로서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이것도 국사학계의 큰 논쟁거리 중의 하나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문무왕이 고구려사람 안승에게 준 책 명문에 고구려가 8백년간 유지되어 오다가 망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新羅本紀」文武王 15년(670)].『당서(唐書)』에는 당나라 초기 시어사인 가언충(賈言忠)이 당 태종에게 “고구려는 한(漢)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이 9백년이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唐書』「高麗傳)」)
그리고 중국의 뤄양(洛陽)에서 발견된 고구려사람 고자(高慈)의 묘지명에는 “고구려가 708년 동안 유지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대체로 보면 고구려는 7백~9백년 정도 유지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요즘 정권들이 십년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참으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간단히 살펴볼 것은 고구려가 단순히 한반도 방향만으로 역사의 주된 흐름이 쏠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고구려는 칭기즈칸의 몽골민족(몽골쥬신)과도 직접적인 연계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많은 증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일단 간단히 분석해보고 넘어가도록 합시다.
우리는 앞에서 구려(句麗)는 고을 또는 나라를 뜻하는 고구려어 ‘구루(GuLu)’에서 나왔을 수도 있고 이것과 유사한 말로는 ‘몽골(GoL)’, ‘말갈(GaL)’, ‘돌궐(GuaL)’, ‘위구르(GuL)’ 등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떤가요? 몽골, 맥골, 맥고구려 등의 말이 떠오르지 않나요? 무언가 말할 수 없지만 어떤 관계가 있는 듯하지 않습니까? 이 점에 관해서 흥미 있는 연구가 있습니다.
주채혁 교수(강원대)는 몽골이라는 명칭이 맥고구려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1998)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까요?
『몽골비사』에 근거하여 보면 몽골의 시조인 알랑고아의 아들은 보돈차르인데, 코릴라르타이 메르겐(고주몽)이 보돈차르의 외조부이므로 몽골족은 코리족의 외손(外孫)이 됩니다. 몽올(蒙兀)이라는 말은 보돈차르의 4대조에 이미 나오고 있죠. 몽골은 성모(聖母) 알랑고아(고주몽[코릴라르타이 메르겐]의 따님)를 중심으로 세상에 태어난 종족으로 맥고구려(貊高句麗) → 貊(맥)고올리 → 貊(맥)골 → 몽골(?) 등의 순서로 음이 전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주채혁 교수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몽골’에서 ‘몽’은 씨족의 이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도 동몽골에서는 한국을 ‘고올리’라고 부르는데, 이 ‘고올리’에 ‘몽’을 합하여 몽고올리, 즉 몽족의 고올리라는 것이거나 맥고올리(맥족의 고올리)가 몽골로 전화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주채혁, “몽골의 맥고구려 기원 문제”『몽골민속현장답사기』(민속원 : 1998) 251쪽].
물론 이 같은 견해를 증명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몽골이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몽골 지역에서 고구려를 구성한 민족, 즉 맥족의 고올리(고구려) 성읍 터나 구비전승 자료들이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보이르 호수 언저리나 몽골 동남부, 몽골의 중서부인 셀렝게․아이막 등지에서 이 같은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림 ⑦] 고올리의 성읍터
현재까지도 몽골인들은 한국을 ‘고올리(고구려)’, 또는 ‘솔롱고스’라고 부르고 금나라를 ‘알탄올스’라고 하고 중국을 ‘키타드(거란)’라고 합니다. 일본인 학자 모리 마사오(護雅夫)는 비문(碑文)에 남아있는 돌궐 카한 시조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신 가운데 ‘해뜨는 곳’으로부터 파견된 뫼클리(MӦkli) 초원의 사절을 고증하였습니다. 모리마사오에 따르면 이 뫼클리(MӦkli)는 맥의 나라, 즉 뫽(MӦk)의 엘리(eli : 나라) 다시 말해서 고구려임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지요. 즉 돌궐인들은 이들 몽골인들을 아예 뫼클리(MӦkli), 즉 맥국(貊國)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말이지요.
몽골이라는 명칭이 과연 어디서 처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해명하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몽골학의 대부(代父)인 한촐라 선생의 문하인 박원길 교수는 몽골이라는 명칭의 기원을 ‘주몽신화’에서 찾고 있습니다.
‘주몽신화’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주몽이 모둔곡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마의(麻衣)를 입고 한 사람은 납의(衲衣 : 장삼)를 입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수조의(水藻衣 : 水草衣)를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묻기를 “당신들은 누구시오? 그리고 이름은 무엇이오?”라고 하니, 마의를 입은 사람은 재사(再思)라고 하고, 납의를 입은 사람은 무골(武骨)이라고 하고, 수조의를 입은 사람은 묵거(黙居)라고 하였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박원길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위의 사료에서 재사(再思)는 지혜를 뜻하는 jai, 또는 그 복수형인 jaic 의 음역이거나 귀인(貴人)을 의미하는 jaic(an)으로도 추정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골과 묵거인데 박원길 교수은 이 두 개의 글자가 몽골이라는 용어가 아닌가 추정합니다. 즉 무골(武骨)은 mogol[모골] > monggol[몽골] 의 음역으로 보이며 묵거(黙居) 역시 무거[moggo]의 음역으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결국 이 말은 고구려의 건국 세력의 일부가 몽골로 들어가서 후일 몽골을 세웠다는 말이 됩니다.
이와 같이 몽골전문가들이 몽골을 분석하는 것과 관련하여 고구려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언어적으로 역사적으로 고증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몽골과 고구려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고구려에 대하여 핫 이슈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뿌리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시대적 유행에 따라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좀 더 우리 뿌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동북공정과 같은 쥬신 말살의 시도는 쉽게 대응했을 것입니다.
평소에는 쥬신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가 소수민족 전문가이자 티베트 말살의 주역(후진따오)이 중국의 새 지도자가 되면서 중국의 통합을 강력하게 부르짖으며 동북공정으로 우리를 압박해 오니 이제야 여기저기서 부산을 떨고 난리가 난 것이지요. 사실 문제의 발단은 모택동의 중국이 들어설 때부터가 시작인데 우리는 너무 순진하게 그것을 몰랐던 것이지요.
따지고 보면 중국은 요동ㆍ만주 지역에 대해 하등의 권리가 없으므로(있다고 해도 불안정한 것이죠. 동북공정이라는 말 자체가 중국 정부 스스로도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이 불안정하다고 인정하는 것이죠) 무슨 끄나풀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빌미로 해서 이 지역을 장악하려는 책동을 하는 것입니다. 중국이 뤄양공정(洛陽工程)을 합니까? 후난공정(湖南工程)을 합니까? 자기의 땅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니 공정이 필요가 없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같으면 경상공정(慶尙工程)이나 전라공정(全羅工程)을 하겠습니까?
공정을 한다는 말은 바로 자기의 땅이 아닌데 어거지로 자기 땅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그 많은 한족(漢族)들을 만주로, 만주로 이주시킨 것이지요. 신속한 식민작업(植民作業)을 통한 완전한 만주 지배를 획책하는데 ‘새끼 중국인’ 근성에 사로잡힌 한국의 사학계는 먼 산 불구경 하듯이 이를 외면하였으니 이제는 동북공정의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들고 만 것이지요.
중국은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쥬신의 땅 대부분을 차지했으면 얌전히 있어도 시원찮을 일인데 오히려 남의 나라 역사까지 다 집어 삼키려고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염량(炎凉)이 없어도 그렇지 칭기즈칸도 중국인이라고 하지를 않나 뜬금없이 백제와 신라(新羅)의 뿌리가 중국[초(楚)나라]이라는 식(「中학자 공산당 기관지에 또 ‘역사왜곡’」『경향신문』2004.12.10) 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의 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그 나라의 역사(歷史)를 말살시키는 것이지요. 중국은 이제 그 기본 코스를 가고 있는 것입니다. 동북공정은 쥬신 말살의 시작입니다. 외눈박이에 팔 다리가 하나 없는 늙은 장군처럼 때로는 엉큼하게 때로는 강경하게 사람들을 죽이면서까지 말입니다. 이 노회(老獪)한 늙은 장군의 욕망의 끝이 어딘지 걱정됩니다.
‘분노는 때로 최고의 과학’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중국은 우리 쥬신의 영토는 물론이고 역사와 문화 전체를 말살하고 이제는 유라시아 대륙에 마지막 남은 한반도 전체까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도 우리는 침묵합니다. 그저 하릴없이 ‘고구려 지키기’에 열을 올립니다. 제가 보기엔 북한(北韓)은 이미 위험한 상태지요. 친중화(親中化)된 지 이미 오래인데다 미래를 기약하기 힘든 상황입니다(언제 노골적으로 친중 괴뢰정권이 들어설지 모를 형편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잠에서 깨면 대한민국(Korea)의 서울(Seoul)은 없어지고 쭝후아런민꿍허꾸어[中華人民共和國] 한씽(韓省)의 한청(漢城)이 여러분의 눈앞에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역사의 시간이 흐를수록 한족은 자꾸 불어나서 이제 13억입니다. 쥬신의 거의 7배입니다. 이럴수록 저는 자꾸 쥬신의 방파제 고구려가 생각납니다.
이상을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요동과 만주를 한족(漢族)의 침략으로부터 쥬신을 지킨 것은 바로 고구려라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고구려를 민족의 방파제니 뭐니 하면서 단순히 한반도를 수호하는 역할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고구려를 모독하는 것이지요. 고구려는 전체 쥬신의 방파제의 모델을 제시한 국가였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고구려는 쥬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대들보 역할을 했습니다. 고구려는 쥬신의 호수(湖水)이자 방파제였습니다. 이후 나타나는 대부분의 쥬신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고구려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갔다는 말입니다. 칭기즈칸이 있으므로 해서 오늘날까지 몽골이 있듯이 고구려가 있음으로 해서 쥬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쥬신의 역사에 있어서 고구려가 가지는 최대의 의의라는 것이죠.
다음 장에서는 비밀의 나라, 백제의 건국 이야기를 해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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