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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은 오래될수록 따스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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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문화유산은 오래될수록 따스한 기억이다

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제2부 <4> 문화재청장 유홍준

유홍준은 `문학판의 4.19세대보다 튼튼한 `운동권` 68학번 세대 소속이고, 70년대 가장 시끌벅쩍했던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 중 하나이며 더 요란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이래 숱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리고, 물론, 이 글을 쓰는 현재, 정부 고위직 중에는 그래도 때깔이 괜찮은 문화재청장 자리에 앉아 있다.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대학 시절, 혹은 그 후로도 상당 기간 동안, 그의 별명은 `아가리컬쳐`(구라+문화 혹은 경작)였다. 그가 푸는 구라가 대단했거니와, 결코 잘 생겼다고 할 수 없는, 느끼함과 말상을 간신히 면한 거무죽죽 얼굴에, 역시 훈계조를 간신히 면한, 가라앉음과 오름이 애매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라 `내용`이 상당한 `딴딴라` 수준에 달했다는, 그래서 그 모든 것이 모종의, `어긋남의 조화`를 이뤘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별명이겠다. 뭐, 설마, `어글리컬처`는 아니었겠지…1968년도 대학가가, 그렇게 악의적인 시절이었을 리는 없겠다. 어쨌거나, `구라`를 `방송국`이라 치고, 큰 구라는 중앙방송국 혹은 공중파방송국, 새끼 구라는 지방방송국이라 부르거니와, 그는 어언 `교육방송`으로 불리고, 그 `평가`를 그냥 무념무상으로 받아들이는 처지가 되었다. 아니, `교육`에 대한 그의 정의는 참신하고, 열의는 대단해서, 혹시 그가 애당초 교육을 위해, 전혀 교육이 아닌 것처럼 교육하기 위하여 특유의 `구라 기법`을 익힌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그런데, 왠 `구라` 이야기를 이렇게 서두부터 장황하게? 그것이야말로 유홍준의 `안팎`을 이해하는 `서두`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운동권 투사`라는 `존칭`은 툭하면 `운동을 너무하여 근육만 튼튼할 뿐 골은 텅텅 빈 사람`을 뜻하는 `빛 좋은 개살구`이기 쉽다. 김영삼이 특히 그 점을 너무도 당당하게, 거의 주장했고, `전문행정가`에 대한 국민 일반의 갈급증 또한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으며, 심지어 오늘날 그것과 연관된 몇몇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자괴감 또한 없지 않게 되는 실정 속에서, 유홍준의 `학식+썰`은 단연 돋보일 뿐 아니라, 그를 모종의 진퇴양난으로부터 일찌감치 구원하는 품격이었다. 민청학련사건은 어떤가?

민주화운동사, 혹은 학생운동사에서 이 사건의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그거야 역사가가 평가할 때 그렇고, 시건을 주도한, 혹은 겪은 당사자들로서는, 젊은 날 한 번도 견디기 힘든 충격을 단 1년 만에 세 번이나 `겪게` 만드는, 얼을 빼는 사건이었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시기 전국적으로 데모를 벌이려 한다, 그러나 데모 전국화는 실패하고, 주동자들이 느닷없이 `간첩 이상의 현상금으로 수배된다, 주동자들이 잡히고 사형, 무기, 수 십 년 징역 등 난데없는 철퇴를 맞는다, 10개월 남짓 지난 후 `시간이 미쳤는지, 내가 미쳤는지, 아니면 둘 다 미쳤는지`(김지하), 사형수와 장기수 모두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다, 그리고 며칠 후 `공범`으로 재판을 받았던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난 다음 날 새벽,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이것을 어떻게 `사건`이라 하겠는가. 아니, 1년도 채 안되는 시기 벌어진 이, 나라 전체에 불길하고 이상한, 삼국시대 나라 멸망의 징후를 닮은 일들을, 어떻게 현실이라 하겠는가. 이것은 `죽음보다 끔찍한 황당함`이고, 땅이 꺼진 듯한, 다시 죽음보다 끔찍한 허전함이 뼛 속 깊은 곳까지 파고 들며, 소름 끼칠 틈도 주지 않고 존재 전체를 장악한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형 집행정지`란 언제 어느 때든 다시 잡아가둘 수 있다는 뜻이니, 그들은 `죽음의 무게를 먹은 수 십 년 징역의 빚을 지고, 그런 상태를 일상화했을 것이다. 이럴 경우, 당사자들은 대개 영웅적으로, `목에 힘`으로, 아니 육체 전체를 뼈대화하는 것으로 버틸 밖에 없고, 장차 정치 밖에 할 일이 없게 된다.

아니 그것도 정말 드문, 영웅적인 심성의 소유자만 가능한 일이고, 장한 일이다. 이런, 비극보다 끔찍한, 아니 끔찍함보다 끔찍한 무기력의 코메디 속에서 유홍준을 구원한 것은 역시 `학문+썰`이다. 긴급조치 4호라는 `죽음의 코메디`를 그는 `삶의 코메디`로, 받아 치지 않고, 그물 벗어나듯 벗어났다. 하긴, 그가 받은 징역 량은 7년이다. 그가 사형이나 무기를 받았다면 그의 코메디는 세 번의 충격으로 더 깊어졌을까, 아니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을까? 장담할 수 없다. 소리꾼 임진택이 유일하게 `무죄 선고`를 받지 않고 사형이나 무기를 받았다면 그의 예술이 세 번의 충격으로 더 깊어졌을지, 아니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것처럼. 어쨌거나, 유홍준이 7년을 받은 것, 그리고 임진택이 무죄를 받은 것은 정말 다행이다.. 아무튼, `공간`, `계간미술` 등 미술잡지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이란 것이 이때 있었던 것도 참 다행이다)에 당선되었을 때, 그는 미술, 특히 한국미술에 대한 `공부`가 `구라`를 훨씬 능가한 상태였고, 그의 `공부`는 장차 민중미술운동에 참으로 소중한, 고전적인, 고전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소위 `제도권` 전통 미술사가들이 민중미술진영한테 그 흔한 `전통도 모르는 것들이` 운운을 하지 못했던 것은 대체로 유홍준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이제 `교육적 구라`, 즉 교육방송의 시대가 온다. 그는 문화유산 슬라이드들을 보따리, 보따리로 싸들고 다니며, 순회 강연을 시작하는데, 그 순례의 노정과 행색은 조선 말 보부상과 다를 게 없었다. 이 때의 교육방송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문화유산 답사기>를 이룰 뿐 아니라, 그를 가장 유능한 운동권 화상으로 만들어주거니와 (당시 그림은 운동권 최고 자금원이었고 그의 `구라`에 걸리고도 그림을 사지 않은 부유층은 없다.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 그때부터 나는 유홍준을 위해, `문화유산은 오래될수록 따스한 기억`이라는 명제를 위하여, 조태일 시 <국토서시>를 읽어 주고 싶었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어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산새소리 사라진 만덕산의 봄, 그것은 외할머니 돌아가신 외가댁에 온 것만 같았다…..<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는 `문화유산`론`을 문화유산 `문학`으로 끌어 올렸다. 특히 향토적 서정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고, 사라져가는 자연에 대한 묘사는 가슴 아프다. 그가 농촌 출신은 아니다. 오히려, 서울 출신이라 농촌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 잘 느끼는 것 같다. 왜냐면 농민에게 농촌과 자연은 일상이고 버릇이고 습관이니까….소설가 송기숙은 `나는 장흥에서 태어나 시골 촌사람으로 살면서 여태까지 논바닥에 벼 포기 흔들리는 것을 문학으로 쓴다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없다`면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홧홧하게 평했다. 하긴, `문`과 `학`은 도시에서 하건 농촌에서 하건 기질은 `도시적`이니까. 명문 혹은 명비유(좋은 문학은 항상 이 둘을 동반하거나 일치시킨다_ `산새 소리…`에 대해 유홍준은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는데, 그것 자체로 `썰`이다. 어릴 적 초등학생 시절 방학 숙제가 끝나면 어머니는 그를 경기도 포천 연천 어름의 외갓집에다 `부려` 놓고 개학 때 다시 실어갔다. 그는 천성이 노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더군다나, 대가리가 막 깨기 시작하는 초등학생이라면?) 방학 숙제를 며칠 만에, 밤을 새워 가며 얼마나 빠른 시일 내, 곤충 채집(!)까지 포함하여 얼마나 빨리 끝내느냐가 문제였고, 외갓집은 말 그대로 노는 천당이었다. 가재 잡고 나무 하고 외사촌형 묵내기 화투 구경하고, 하지만 그것도, 외할머니가 돌아가고 부터는 시들해져서, 그는 외갓집에를 가지 않았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론`을 위하여, 그러나 `아름다움의 론`을 위하여 미학과에 입학했으나 역시 `론`은 `론`일 뿐이라 그냥 노는 쪽을 택했던 그를 `공부`로 이끌어준 것은 김윤수(미술평론가, 국립현대미술관장)였다.

미학과에 가면 무슨 예술평론, 예술학을 배울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헤겔, 칸트라니. 죽겠는데, 게다가, 하르트만이라는 자가, `병이 아름다우면 병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냐, 아니면 병은 가만 있는데 우리의 미적 감성이 병에 비추인 것이냐` 운운하면서, 주관주의, 객관주의, 상관주의 운운하더니, `객관적`이 30%, `주관적`이 70%라는 자, 즉 37제라는 자, 46제로 하자는 자, 그렇게 학파로 나뉘고, 미치겠고, 그래서 마냥 놀고 대학 2년 때 수학 여행 가서는 더군다나 2박 3일 동안을, 소문 날 정도로, 전설적으로 놀아 제낀 그를 어느 날 김윤수가 대학다방으로 불렀다. 김윤수는 당시 시간강사로 출강했으나 유홍준을 직접 가르친 바는 없고, 다만 수학여행 때 유홍준 꼴이 너무 해괴한 중에도 모종의 싹수가 있었던 것이다. 자네 노는 것을 보니 공부하면 잘 할 것 같은데, 너 공부는 떼 엎어 버리고 그냥 마냥 논다며, 그럼 뭐하러 미학과에 왔나?......평소 자상하지만 남을 꾸짖을 때는 더 자상하면서도 외유내강의 이심전심이라 꾸중 내용이 더 아픈 김윤수가 그렇게 말했고 유홍준은 짐짓 호기롭게 버텼다. 선생님, 나, 미학과한테 사기 당했습니다. 여기 오면 `예술`을 배울 줄 알았는데, 없는 독일어 실력에 `판단력 비판`, `예술 철학` 이런 거 읽으려니 고생바가지고, 제가 원했던 것은 이게 아니라 이겁니다. 전 어쨌든 즐겁게 살랍니다….하지만 사실, 이 말은 애당초, `선생님. 저 공부하고 싶어요`를 강하게 담은, 탕자의 고백 같은 거였다. 김윤수가 답한다. 대학사회는 학생을 지식인으로 대접하는 사회인데, 선생이 가르치므로 학생이 배우고 안 가르치므로 학생이 안 배우고 포기하나? 니가 하고 싶어떤 것이 무언인지, 지금부터 니가 그것을 하면 될 것 아니냐?....그리고, 김윤수는, `유홍준류`가 무엇을 공부하고 싶어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유홍준에게 바사리 <이탈리아 미술가 열전>을 읽어보라며 내주었던 것. 바사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평전` 스타일로 정리, 미술평론의 길을 개척한 사람이고, <…열전>은 훗날 유홍준이 <화인열전>, 무엇보다 <완당 평전>을 쓰게 만들 만큼 내용이 매력적이었다. 문화재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의 연구실 책꽂이에 라면 박스 열 개가 죽 놓여 있(었)다. 겸재(정선), 단원(김홍도), 추사(김정희), 능호관(이인상), 현재(심사정) 등 조선시대 `화인들`에 대한 자료통이다. 각 인에 대한 자료는 물론 각 통에 넣고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자료는 여러 부 복사하여 한 통에 하나씩 집어 넣는다. 그는 이 통들을 무려 15년 동안 보강하고 관리하고 처리했다. 그가 쓴 논문 <단원의 삶을 증명해주는 열 가지 변증>은 `단원 통`이 너무 넘쳐서 `처분`히려고 쓴 글이다. 이 정도의, 자료벌레 혹은 공부벌레지만, 김윤수 때문에 특히, 그가 강조하는 조기교육론은 education의 그리스 원어 `에튜카`가 그렇듯, (아이가 가진 재능을) `뽑아 주`는 것이다. 김윤수가 유홍준을 `에듀카`해주었듯. 빈 깡통 같은 머리에다 부모가 제 멋대로 마구 지식을 `우겨 넣는` 것이 아니라. 페프스너 <로얄아카데미의 역사>를 보면, 프랑스 `로얄아카데미`(우리나라로 치면 `학술원`, `예술원` 쯤 된다)라는 데가 참 희한한 곳이다. `아카데미 모범생`은 훗날 대가가 된 예가 없고, 그곳에서 쫓겨나거나 그곳을 탈퇴한 세잔, 르코르뷔지에 등은 훗날 대가로 컸다. …어쨌거나, 아니 그래서 그런지, `전기`에 대한 그의 애정은, 얼핏 우리 애정이 그만 못해서 화가 난 듯 보일 정도로 근본적이고 열혈적이다. 그는 각계 명사들을 만날 때마다 왜 우리나라 의사열전은 없냐, 왜 무용가평전은 없냐, 왜 법조인열전은 없냐, 무턱대고 물어 보기 일쑤고, `실명`을 쓰면서도, `전기적 근거`가 거의 없는 요즘 영화-방송드라마-문학-연극 뮤지컬 등 온갖 예술장르 `시장` 사정에 대해 말을 아끼지 못한다. 아니 그는, 이순신이든, 광주항쟁이든 그것을 다룬 `문학`보다 실제 삶이 더 드라마틱하고 상상을 뛰어넘는 면이 많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전태일 수기> 및 <전태일 평전>(조영래)은 이 땅의 온갖 노동문학보다 사실적이고 감동적이다. 모든 광주항쟁에 대한 사실 없이 소설만 있다면 사람들이 `날구라`라고 하지 않겠는가…사실, 궂이 외국과 비교해보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의 `전기문학`은 수준의 사정이 형편없고, 앞으로 나아질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신화적인` 재벌성공담, `영웅적인 아동물 위인전들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전기문학`은 유홍준의 `썰+학문`기질에 무척 어울린다. 아니, `전기`가 바야흐로 유홍준이라는 `임자`를 만났달까. <임꺽정전>을 쓰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연려실기술>까지 온갖 것을 두루 꿴 벽초 홍명희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의 허구는 모두 근거가 있는 허구다. 구라되, 근거가 있는 구라라는 얘기다. 그는 철저한 근거에다 문학적 심혈`을 기울인다.. <임꺽정전>은 엄청난 인기를 끌며 연재되던 중, 사흘 동안 `작가 사정`으로 연재가 끊긴 적이 있다. 작가 사정이란 게 뭐냐. 여자하고 노닥거린달까, 일본말로 `히야까시` 쯤 되는 뜻인데, 이걸 당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다. `노닥거리다`는 너무 남녀 구분 없이 일반적이고, `수다 떨다`? 이건, 남녀 수작과 거리가 멀고, `수작`은 `다 된 밥` 냄새가 나고, 도무지 마땅한 말을 찾지를 못하여 사흘을 끌었고, 그러다가 마침내 `희영수걸이다`라는 표현을 찾았고, 그리하여 연재가 계속될 수 있었다. 그리고, 홍명희 <임꺽정전>이 어떤 자료를 근거로 쓰여졌는가를 연구한 임형택(국문학자) 또한 대단한 사람이다….<완당 평전> 제 3권은 `자료집`이다. 이런 자료집들이 널리 알려진 상태라면 나는 두 권짜리 완당 `평전`이 아니라, 한 권 짜리 `완당 전기`를 쓸 수 있었겠으나, 그런 사정이 아니라, 내가 일일이 `논증`을 해야 하므로 평전이 될 밖에 없었다….그가 내친 김에 <완당 평전>을 아무데나 펼치며, 추사가 남긴 `죽이는`글들을 대목대목 읽어주는데, 과연 `이 정도면 이 사람의 생애를 재현하는 데 나의 재주를 바칠 만 하지 않은가!`하는 그의 주장에 동조할 만한 수준이었다. (괄호 안은 유홍준의 감탄-찬사)

나는 천성이 노는 것을 좋아하여서(야, 이 문장이 참... 내 이 분이 이럴 줄은 몰랐어) 늘 좋은 놀이 만나거나 좋은 친구를 만나면 낮놀이가 부족하여 밤까지 계속했으며(어쩌면 이렇게 나와 완벽하게 닮았는지, 그래서 놀랐는데, 점점 더 닮아요) 근심과 걱정을 하도 많이 겪어 삶과 죽음까지 깨우쳐 통달했으니 처자나 집안일 따위는 마음에 걸릴 것도 없이(밑줄 유홍준)(그 다음은 더해) 오직 풀 한 포기 돌 한 덩이 꽃 한 송이만 보더라도 진실로 내 마음이 거기 붙일 만할 곳 있다면 아예 거기 가서 세상을 마칠 생각으로 떠나곤 했지요(내 답사 다닌 꼴이 꼭 이랬었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이렇게 진솔한 이야기로 풀 수 있을까. 그런데 그 다음을 내가 못 미쳐요) 하물며 이른 봄과 늦봄 사이 강마을 경치는 더욱 아름다워 꽃은 비로소 봉우리가 터지고 새들은 다 둥지를 벗어나 하늘은 엷은 청색을 띠고 물은 짙은 초록을 지으며 만 그루 복사꽃이 붉고 천 그루 배꽃이 희게 다투어 벌어지고 백리 들판에 보리는 푸르고 누렇게 펼쳐졌는데 나는 이따금 홀로 그 속을 거닐며 짐짓 들까치들 설레게 하고 왕왕 큰소리로 노래 부르며 흰구름을 뚫고 가곤 했지요. 간혹 옛 벗을 만나면 그윽한 데하고 먼 데까지 마음껏 구경하고(다음은 갈수록 태산이지) 낮에는 역사책을 읽고 새벽에는 경전을 공부하며 해가 기울도록 벗을 붙들고 밤중이면 귀신과 얘기하며 밤낮의 구경을 다하여 흠뻑 젖어 드는 흥취를 실컷 푼다면 그 즐거움이 거의 죽음을 잊을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이게 예순 여덟 살 과천 노인이 서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니!)…

유홍준에 관한, 나만 아는, 혹은 안다고 착각하는 A)고마운 일과 B)놀라운 일과, C)비밀과, D)기분 좋은 일 하나. A)1980년대 중반, 악명 높은 수금원이던 나에게 그는 `내가 한 일에 비해 돈을 너무 많이 받는 것 같다`며, 자진해서, 거금을 희사했다. 그건 정말, 일주일에 한 번 출근하는 화랑 큐레이터 월급에 비하면 막대한 돈이었다. 다시 한번 감사. B)그의 베스트셀러 대부분이 연재 글을 모은 것이고, 연재 고료를 받지 못한 것이지만, 어쨌거나, 유독 바쁜 `유명인사`가 된 후, 거리에서 우연히, 한 십 년 만에 만난 내게 그는 `책을 보냈던가?` 묻더니, 주소를 적었다. 뭐, 그런 시늉만 해도….난, 그 정도 생각했는데, 며칠 후 정말 책이 왔다. 이런 경험 처음이다. 다시 한번 경악. C)그가 국립박물관장 공개 채용에 `응시`했다가 스스로 철회한 것은 `인터넷`에 깡통이기 때문이다. 몇 사람이, 혹시 아르바이트로, 집중적으로 비난 댓글을 올렸는데, 그는 `전국민`이 반대를 하는 줄 알았단다. 하긴, `관장` 낙방하고 `청장` 됐으니, 그것도 새옹지마지만. D)몇 달 전 이빨이 아파 유영재(는 대학 시절 같이 문학반 하던 내 친구다) 치과에서 유홍준을 만났다가, 피차 모종의 무참함(`이빨 문제`는 `나이듦`의 그것을 너머, 뭔가가 `삭는` 듯한 문제 아닌가)을 얼버무리는 와중, 나는 그에게서 `완당평전`을 그걸로 썼다는 몽블랑 만년필을 천행으로 얻었다. 그가 사는 집이 무슨 문화재급(문화재 용어 좀 쉬운 말로 하면 안 되나?)이라던데, 이 몽블랑만년필도 몇 십년 묵히면 문화재가 되지 않을까. 다시 한번 흐뭇…..나와 만남이 있고 그 다음 다음 날엔가, 북한 방문 중 유홍준의 `노래 실수`로, 유홍준의 입담에 눌렸던 언론이 `잘 걸렸다` 쾌재를 부른 사건이 있었다. 뭐, 경솔했던 건 사실이지. 하지만, 더 중요하게, 나는, 유홍준이나 노무현정부가 모종의 실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딴따라+교수+공무원`이 우리나라 문화 수준에 가능한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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