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당 차가 밀리는 날이라고, 밀릴 거라고 생각하고 나왔건만, 생각보다 더 밀리면, 한참을 더 밀리면, 그것처럼 정신 사납고 신경질 나는 일도 없지만, 교통부장관 불러다 요절 낼 일 없을까, 그런 생각도 나자마자 싹뚝 잘릴 정도로 열불이, 지리멸렬하게 터질 정도지만, 김운경을 만나니 그것도 다 헛거고, 은제 그랬느냐 싶고, 10킬로그램이나 빠진 몸의 숨만 가쁘다. 김운경만큼 인생과 작품이 구체적인, 구질 맞다 싶을 정도로 구체적인 TV드라마 작가 앞에서는 투덜거리는 것도 치기라는 듯이, 아니면 역시 50대 나이가? 아니, 그는 나와 동갑인데, 그는 아직 인생이 꿋꿋하고 나는 여생이 삭았고, 어쨌거나 그는 안 늦었고, 나는 늦었다. 그는 허술한 차림에 얼굴이 검고 얼핏 더부데데한 농투산이지만, 그보다 더 뚜렷하게 모종의 동그라미가 묻어난다. 순진무구하다기에는 너무 진지하고(작가의 파지는 고흐가 잘라낸 귀처럼 혹독한 자학에 근거해야 한다. 고통과 절망, 몸부림, 망망대해, 낭떠러지, 스스로에 대한 연민, 재능에 대한 회의, 찢고 다시 쓰고, 허물고 세우기를 반복해야 한다-김운경) 진지하다기에는 너무 순진무구한, 모종의 동그라미가 그의 얼굴에, 얼굴보다 더 또렷하게 묻어난다. 미소? 아니 미소보다는 깊고,, 아니 깊고 얕고의 문제가 아니라, 혹시 `빙그레`라는 말 뜻을 동그라미로 약간 푸짐하게 표현한 것 같은, 그런 공감각의….몇 달 전 첫 만남 때 그는 무공해농산물을 내게 `봉다리 채` 넘겼는데, 묻자니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고, 동생이 지은 것도 아니고 그냥 남이 준 것을 나와 첫 만남이 너무 반가워서 덥석 준 것이라지만, 들은 소문과 첫 인상(취재길이 얼마나 험난했던가를 증거하는)을 종합하건데, 그가 드라마 소재를 농사꾼처럼 사냥한 후(적어도 드라마 작가라면, 처절한 자기 헌팅이 있어야 한다. 노숙자들 얘기 쓰고 싶으면 서울역에 가서 같이 소주 마시며 한 2주 동안은 굴러야 한다. 여자들도, 파출부 나가야 한다-김운경), 사냥꾼처럼 농사짓는 듯 하고, 딴 거 따질 것 없이, 더도 덜도 말고 <서울 뚝배기>, <서울의 달>(제비족 대목은 영등포 에어리어 `대머리 박`이라는 분을 찾아가서 사교춤도 좀 배우고 그랬다-김운경), <파랑새는 있다>라는 밑바닥 인생으로 질펀한 드라마들이 어떻게 우리 안방을 (당연히)질펀하게 하고, 질펀함이 (놀랍게도)우리 일상을 (더 놀랍게도)일상적으로 깊어지게 만드는가, 그 비밀을 잠깐 엿 본 듯도 하고, 갑자기 이성부 시 <전태일 君>을 같이 읽고 싶어진다.
불에 몸을 맡겨
지금 시퍼렇게 누워버린 청년은
결코 죽음으로
쫓겨간 것은 아니다
잿더미 위에
그는 하나로 죽어 있었지만
어두움의, 입구에, 깊고 깊은 파멸의
처음 쪽에, 그는 짐승처럼 그슬려 누워 있었지만
그의 입은 뭉개져서 말할 수 없었지만
그때 다른 곳에서는
단 한 사람의 자유의 짓밟힘도 세계를 아프게 만드는,
더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의 뭉친 울림이
하나가 되어 벌판을 자꾸 흔들고만 있었다.
굳게 굳게 들려오는 큰 발자국 소리.
세계의 생각을 뭉쳐오는 소리,
사람들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아무도 지켜보지 않았지만
불에 몸을 맡겨
지금 시커멓게 누워있는 청년은
죽음을 보듬고도
결코 죽음으로 쫓겨간 것은 아니다.
누가 살고 있는지
다시 눈 비비며 읽어보아도
읽을 수가 없다. 그대의 책에서는 책만 보일 뿐
종이의 살결만이 드러날 뿐
페이지의 외로움과 활자(活字)의 찌꺼기와
비닐우산을 받치고 가는 사람들의
어두움만이 보는 어두움이 냄새 날 뿐
냄새 날 뿐
그대 불타는 마음은 엿보이지 않는다
시대(時代)여 모든 절망(絶望)을 다 삼키고도
부족한 얼굴로 죽어가는 참다운 유다여
구름 뒤에 남아 기다리는
뜨거운 햇살도 그 억센 팔뚝도 안 보이는
사람들의 나라에 누가 살고 있는지
그대가 세상에 보태는
단 한 줄의 말씀도 보여지지 않는
오 열렬한 거부(拒否)의 나라에 누가 살고 있는지.....
80년대는 `전태일 활화산`의 시대였고, 숱한 `전태일 시` 혹은 `전태일 연극`, 혹은 전태일 영화가 나왔지만, 나는 70년대 쓰여진 위 시만큼 감동적인 작품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 감동은 매우 뒤늦은, 비역사적인, 80년대 문화를 겪으면서 비로소 깨달은 감동이다. 전태일의 소원이 바로 그것이었음에도, `불탐의 증오`를 `눈물의 감동`으로 만드는 법을 80년대는 알 수 없었다. 왜냐면,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여 어떻게 되는가? 사람들은 안방에 전태일을 들여 놓기가 께름직하다. 그리고, `아름다운 청년`이란 말도 허세거나 가짜다. 전태일을 후대에 물려준다는 것은 아름다운 전망을 물려주는 것이지 불에 탄 시체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80년대는 일상의 모뉴멘탈리티를 죽음으로 더욱 아름답고 의미심장하게 만들 기회에 게을렀고 결국 놓쳤다. 전태일 추모곡 `그날이 오면` 말고는. 그렇게 보면 김운경은 특이한 소재의 작가가 아니라 특이한 소재로 안방 극장을 직접 파고 드는 승부사고, 파고 드는 목적을 십중팔구 달성하는 대가다. 백발백중이 아닌 것은, <죽도록 사랑해>에서 보듯, 서민성에 대해서는 손목을 풀되, 역사성 앞에서는 약간 목에 힘을 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서민성이라….<서울의 달>이나 <옥이 이모>는 그의 어린 시절이 많이 묻어 있고, <도둑의 딸>은 직접 취재를 많이 한 편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평상시의 `서민 체험`이다. 양희은과 송승환이 진행하는 <여성시대>도 자주 듣고, 소설보다는 논픽션류를 많이 잃고, 교양잡지보다는 <선데이 서울>같은, 부황한 얘기지만, 서민의 성과 속이 생짜 냄새로 배어 나는 싱숭생숭한 글을 더 많이 읽는다….이 대목은 <맨인블랙1>의 고참대원이 신참대원에게 하는 말을 연상시킨다. 우주인 사정을 알려면 싸구려 `진실과 야담류`가 가장 빠르다구…. 잡다 속으로 더욱 깊이, 갈수록 잡다하게 온 몸을 담가야만 `김운경표`드라마가 나올 수 있다.
그는 1981년 <전설의 고향> `몇 편`을 집필하는 것으로 드라마작가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이미 전국의 전설 소재가 거덜 났을 때였다. 공진석이 지은 제법 두툼한 <전설의 고향>을 들춰 보아도 남아난 전설이 없었으므로 결국 새로운 전설을 스스로 지어냈다. 지어낸 걸 시청자한테 들키면 안되니까, 만만한 이북 `함경북도 어디 전설`이라며 지명도 지어냈고, `무사히` 전설로 통과되었다. 어쨌거나, <전설의 고향>은, 지금 돌이켜 보면, `작가가 없어도 되는` 희한한 작품이었다. `전설`이란 말, 그리고 `고향`이란 말의 위력은 그토록 크다. 두 번 째 작품 <한 지붕 세 가족>은 서민 생활을 다룬, 시트콤에 가까운 주말드라마였는데(사실 모든 코메디는 시트콤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 탤런트 오미연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아예 새 판을 짜서 탤런트 윤미라, 강남길과 함께 교체팀으로 투입되어 쓴 것으로, 1년 6개월 쓴 후 또 다른 교체팀을 맞지만, 이 기간은 작가 김운경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고 김운경의 직업을 `먹고 살 만 한 것`으로 격상시키는데 충분한 기간이었다. KBS로 옮긴 후 쓴 첫 작품 <회전목마>는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서울뚝배기>는,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쓰여진 경위는 김운경 `잡다의 미학`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은 `목에 힘을 준` 주제로 구상되지만, 결국 `주인공이 사라지는` 코메디의 진경을 보여주게 된다.
<서울 뚝배기>는 사실 당시 일본 JAL기 기내식을 먹은 사람들이 식중독을 일으키고 그 중 한 사람은 거의 죽을 뻔 했다가 겨우 살아나게 되자 가내식 납품업체 사장이 국민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편지를 쓰고 자살한 사건 때문에 쓰게된 것이다. 그걸 보고, 아, 우리나라 음식문화도 저 정도가 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서 내용은, 부끄러워서, 쪽 팔려서 못 살겠다, 뭐 그런 내용이었고, 우리나라도 그런 사람이 나오면 동상 하나 세워줘야 한다고, 그런 우리나라 음식문화의 어떤 모법을 세워보자는 의무감에서 시작했는데, 나중에, 그랬걸랑요, 저랬걸랑요, 하는 식으로 좀 이상하게 가버렸다…..하지만, 이상하게 가버린 게 아니다. 제대로 간 것이다. 그렇게 손목이 풀리지 않았다면, 음식문화 구호는, 더군다나 안방에서, 박정희 정권의 분식장려 구호를 연상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손목이 풀린 <서울뚝배기>에서 주인공이 조연들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은, 설렁탕과 수육이라는 음식이 당당히 안방 식탁을 차지하고, 음식문화야말로 가정생활의 가장 아름다운 기본이라는 점을 어설픈 `가정용 궁중요리 강좌`보다 몇 배나 더 일상적으로 당연시하기에 족했다. 성스러운 밥과 친근한 밥의 일치, 이것이 음식문화의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이 기적이겠는가. 그와 병행하여, '주먹`이 거의 고정역이다시피 했던 오지명은 `근엄하게 코믹한` 배우로, `그리스 조각상처럼 이목구비가 훤칠한` 주현은 도저히 구제가 안되는, 설상가상으로 미워할 수도 없는, 꾀죄죄한 나이를 먹어 더욱 그러한, `양아치적으로 코믹한` 배우로, 육감의 김애경은 푼수와 문학소녀 취향을 버무려 `40대 육신이 코믹한 배우로 거듭났고, 아역 양동근은 벌써 의뭉한 표정과 동작, 그리고 대사로 주현과 `연기 맞짱`을 뜨고 있다. 왜 그렇게 되나? 인물들의 캐릭터 위주로 간다. 스토리 위주가 아니라 캐릭터를 일단 꾸머 놓는다. 그러면 캐릭터가 자기네끼리 살아있는 것을 느끼고, 써가면서 캐릭터가 사건을 준다. 세익스피어도, 결국 운명을 이끌고 가는 것은 캐릭터라고 했다. 드라마는 큰 게 아니다. 드라마는 누가 왕을 죽였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저 푸줏간집 아저씨가 배추 장사 아줌마와 결혼을 할 것인가, 아닌가가 중요하다. 드라마는 영화하고 스케일이 달라서, 어떤 때는 아주 디테일한 것에 더 관점을 둬야 한다. 드라마작가가 되려면 최소한 지하철이나 기차를 탔을 때도 항상 얘기가 있는 쪽으로 가서 듣든지 아니면 녹음기 같은 걸 갖고 다니면서 약장사 얘기도 녹음하고 그렇게 디테일 연습을 해야 한다….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서울뚝배기>의 그 모든 절묘한 코메디들은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를 감싸 안고 흘러간다. 주인공들은 희박해지지만, 사랑 이야기는 시리고 시리다.
<서울뚝배기>에 이른 드라마 <형>은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이지만 반응은 시원찮았다. 하긴, 반응이 시원찮아서 더 애착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출세를 할 만 큼 한 자식에게 무슨 애착이 가겠는가. 하지만, 김운경이, 겸손을 떠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정말 열심히 잘` 쓴 작품이라고 했으므로, 나처럼, `케이블 TV가 내게 해준 가장 좋은 일은 옛날에 바쁘기도 하고, 주말마다 기다렸다가 보는 것이 너무 `아줌마스러워` 안 보던 명작 TV드라마들, 특히 김운경 드라마를 보여준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 이 작품 재방을 기대해 볼 일이다. 케이블카 재방송도 왕년의 히트작 만 하니, 이것도 간단치 않겠지만. 어쨌거나, <형>의 고만고만한 반응을 보고 사람들이 하긴, <서울뚝배기>만한 성공을 두 번 거두기가 쉬운 일이겠는가, 뭐 그런 생각을 할 때 쯤 <서울의 달>은 터졌다. 그런데, 주인공 한석규와 최민식을, 조연 속으로 실종시키는커녕 `자고 나니 스타가 되`게 만들면서 동시에, 이제껏 겉보기에 `멀쩡한 신사`의 대명사였던 탤런트 김용건을 `부산 찍고 목포 찍고 대구 찍는` 제비족 조련사로 보기 좋게 망가트린, 하여 다시 김용건에게(도) 코메디안의 길을 열어준 이 작품은 출발이 잡다했다.
<서울의 달>을 할 때 한석규와 최민식이 캐스팅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처음에 김영철과 유인촌을 생각했는데, 유인촌은 부인이 이탈리아에 있다며 반대를 했고 김영철은 돈을 많이 달라 해서 캐스팅을 못했는데, 난데없이, 한석규와 최민식을 캐스팅했다는 것이라,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삐져 갖고, 다른 사람으로 하지 않으면 글을 안 쓰겠다고 버텼다. 하지만 결국, 제작비가 없으니 더 버틸 수도 없고, 다만 원래 최민식이 `날라리` 분위기가 있고 한석규가 촌놈 기질이 있다고 보았던 것을 다시 바꾸어 한석규에 뺀질이 역을 최민식에게 우직한 촌놈 역을 맡겼다. 그때 하도 그래 놔서 최민식과 한석규는 지금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뭐 가끔 술 한 잔 하자고전화를 해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꽤나 기분이 나쁠 정도로 반대를 했으니까….어쨌건, 3-4회 방송이 나가면서 나는 내 생각이 전혀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저 친구들 때문에 드라마가 성공하겠구나. 그때 크게 반성하여, 지금은 캐스팅에 별로 신경 안 쓰고 PD한테 맡기는 편이다….하기사 나도, 한 두 번 혼이 나고는 출판사 기획에 대해 입도 뻥끗하지 않게 되었다.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그 책 어떻겠냐고 후배 출판사사장이 묻길래, 그것도 제목이라고 붙였냐?, 했다가 그 책이 출간 몇 주 만에 백 만 부 가까이 나가는 곤경을 치렀고,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렸고, 그 얼마 후 또 후배의 후배 출판사사장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제목에 대해 묻길래, 아무리 일단 책을 많이 팔고 보는 것이 급하기로서니, 라고 핀잔 내색을 했다가, 역시 몇 주 만에 그만큼 나가버리는 바람에 곤경이 곤욕으로 바뀌고 나서부터니, 꽤 오래 동안 입을 다문 셈이다. 그건 그렇고, 준비 단계부터 잡다했지만, <서울의 달> 또한 계기가 있고 그 계기는 고스란히 살아 남았는데, 다름 아닌 김종삼의 짧은 시 <스와니江>이다.
스와니江가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스티븐 포스터의 허리춤에는 먹다 남은
술병이 매달리어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는
앞서 가고 있었다
영원한 江가 스와니
그리운
스티븐
1970년대 말 서울예전 문창과를 다닐 때 그는 시를 지망했고, 당대의 시인 정현종에게 2년 동안 시를 보여주고,, `한한테 배워 니가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 만으로도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라`는 말을 듣고, 지금도 시집을 많이 사서 보는 편이고, 내 시집은 `별로 사 본 기억이 없`고(그가 굳이 짚고 넘어가니 나도 굳이 짚고 넘어간다), 그와 아주 친한 소설가 이윤기가 `이 친구는 방송을 통해 문학을 한다`고 그를 소개했을 때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사실, 설령 문학 작품을 각색할 때도, `문학`을 완전히 잊고 쓰는 드라마작가가 프로다), 그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김종삼의, 의미가 사라지는 음악의 시인 듯 하다. 아니 `시=음악`은 그의 `잡다의 미학`을 튼튼히 버텨주고 정결하게 만들어주는 중심이자 비밀이다. 아주 넓은 그의 집 지하는 파두아 성당 조토 <그림의 방> 못지 않게 장려한 음악의 방으로, 양쪽 긴 벽은 LP명반 위주로 가득 찼고 전면은 오디오 전문가도 혀를 찰 정도로 정교한 기기에 지름 30센티미터 쯤 될 듯 한 바다고둥껍질 모양(진짜 고둥 아닐까?) 스피커가 음악의 눈처럼 아름답게 박혀 있어. 모양의 아름다움과 소리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뽑내며 서로를 닮아가는 중이다. <스와니江>은, 구호가 아니라 시므로, <서울의 달> 마지막 장면의, 한석규의, 비참하고 초라한 죽음으로 살아 남았다. 이쯤에서, 악인에 대한 그의 생각이 뇌리를 친다. 드라마를 쓸 때 스스로 약속했고, 지금까지 그 약속대로 악인을 만들지 않았다. 제비족 한석규도 악인은 아니다. 만일 악이 있다면 그걸 코믹화한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악이라는게 굉장히 웃긴다…이것은, 코메디에 한정된 얘기지만, 사실 TV방송드라마를 안방의 `예술`에 달하게 만드는 요체다. 완전한 악인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신화다. 예술에는 `악행의 전후사정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당연히, 죽은 예술이 아니라 산 생명을 지향하고, 그러므로 더욱, 예술가다. <남과 여>라는 영화를 보면, 남자와 여자가 해변가를 걷는데 가늘어진 그림자가 꼭 자코메티의 `철사줄 인간 조각` 같다. 여자가 `꼭 자코메티 같죠?`라고 묻고는 남자가 그렇다고 하자 다시 `자코메티가 한 말 기억나세요?` 묻는다. 그리고 답한다, 불타는 방 속에 렘브란트 그림과 고양이가 있다면 나는 고양이를 구하리라. 그리고 놓아 주리라….김운경의 <파랑새는 있다>는, 내가 보기에, <서울뚝배기>와 <서울의 달>의 모든 것을 갖추고 그것으로 새로운 질서, 아주 안정된 질서를 만들어낸 김운경 드라마 예술의 최고 걸작이다. 전직 창녀, 차력사, 국악지방 소녀, 밤무대 가수 등, 얼핏 낯설고 신기한 이야기들만 한데 모으기로 작정한 듯한 소재들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한데 아우르는 모종의 `예술=인생`관은 정말 화엄이라 할 만 하고, 이 화엄의 경지를 문득문득 깨닫는 것은 휴식의 중심인 안방이 또한 화엄으로 가득찬 것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주는 것이라서 우리는 `신기`보다 더 놀라운, TV화면이 안방인지 안방이 TV화면인지 까마득해진다. 전태일의 불을 눈물로, 눈물의 화엄으로 전화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마득함일 것이다. `사기꾼` 백윤식은, 갖은 잔꾀에도 불구하고 악의가 까마득하고, 양금석은, 순정과 억체에도 불구하고 선의가 까마득하다. 그렇게 까마득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까마득하므로, 백윤식과 양금석은 안방의 그 무엇보다 친근하고, 친근함이 까마득하다. 이때 우리는 `인생을 배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의 달>은 `안방에 어울리지 않는 소재`라는 이유로 숱한, 엄청난, 어처구니없는 관의 압력을 받았다. <파랑새는 있다>는 그런 터무니없는 압력에 대한, 혹시 오기로 시작한, 그러나 예술로 끝맺은, 답변인지 모른다. 그렇게, 고우영 만화`가 70년대, 운동권보다 더 본질적인 문화운동사의 한 맥락을 이루듯, 김운경 드라마는 80-90년대, 운동권보다 더 본질적인 문화운동사의 한 줄기를 이루는 것인지 모른다. 올 11월부터 방영될 작품은, <홤금사과>. 그리스신화 세 여신 사이를 이간질시켜 결국 트로이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불화의 사과`에 착안, 1960년대 경상도 상주 쯤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란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도전이랄까, 산 너머 산일 텐데. 그것 아니라도 방송드라마라는 게, 일단 쓰기 시작하면 징역살이와 진배 없다는데. 그의 대답은 이랬다. 피아니스트 박하우스는 자기 집에 탄광 광부 사진을 걸어 놓고 열심히 피아노연습을 했다….그는 배우들의 에드립에 대해 단호하지만(구속을 시키거나, 군대나 이민을 보내거나, 병원 이송시킨단다, 물론 드라마상으로), 주현과 임현식의 에드립 능력은 인정했다. 어쨌거나, 내 나이 아래로는 에드립을 인정 못한다…
PS. 역시 김운경이라, 만남 끝 뒤풀이는 술도 인물도 푸짐했다. 동료 방송작가로 최근 전남대에서 강의 중인 박진숙이 달려왔고, 같은 광주파 나희덕(시인)이 달려왔고, 이승우(소설가)까지, 실로 모처럼만에 불려왔고, 쌍총장`(문예진흥원/작가회의) 강형철과 김형수가 자진해서 왔고 술판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이어진 술자리에서 나는 술 취한 엉겁결에 엄청난 선물을 받았다. <바릴리4중주단 베토벤현악4중주 전곡집>. 떨리네….이거, 술 깼으니 다시 돌려줘, 말어?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