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필칭 '참여정부'를 표방하고 출발한 노무현 정부는 지금 스스로 '고립정부'를 향해 치닫고 있다. 정치 슬로건이란 게 으례 그렇듯이 과장과 왜곡, 거짓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역사적 사실도 있지만 언론의 진실을 강제로 봉쇄하고 '어설픈 국익'의 명분으로 사실과 진실을 뒤틀리게 할 수도 있다는 정권과 특정 재벌의 무모함을 지켜보면서 이 정권의 '착란적 현실'까지 읽게 된다. 이번 월간중앙의 강제적 기사삭제 사건을 통해 이제 이 정부의 과도한 편집증적 증상이 국익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다수결주의 그리고 파시즘의 경계까지 희미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기 어렵다.
협잡과 이전투구의 명목이 '국익' 때문이었다고 강변하는 현실은 갑자기 무엇이 과연 국익인가를 따져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국익이란, 더욱이 언론의 국익이란 딱 하나, 진실을 말하는가가 관건이고 이는 언론을 통한 국익이다. 그런데도 지금 월간중앙의 기사가 국익을 해하고 도외시했다는 얘기는 어불성설이다.
과연 국익이 무엇인가? 김운용 전 IOC위원과 청와대와 특정 재벌과 IOC본부와 태권도가 '국익'의 함수인가?
국제평화와 정당한 스포츠정신을 함유하는 동계올림픽 개최 문제와 국기(國技)인 태권도마저 협잡과 밀실야합으로 훼손당하는 이 현실이 국익이란 이름으로 가능한 것인가?
언론의 국익이란 결코 협잡을 일삼는 게 아니다. 언론의 국익이란 진실의 전달이고 정의의 언어를 소통하는 것에 있다.
사실의 비판적인 검토와 이성적이고 냉정한 현실 분석을 통해서 그 무엇이 우리의 역사와 현재와 미래의 사회를 더 이성적으로 더 풍요롭게 하는 것인가를 묻는 태도가 국익이며 이 세계를 더 사람이 살 만한 세계로 이끌 수 있는가가 '언론의 국익' 문제이다.
언론을 통한 국익은, 협잡정치에 대한 반대, 일방의 국익만을 앞세우는 세력들에 대한 반대, 세계의 사람들과 연대하여 명백한 반이성적 파괴행위에 대해서 반대하고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게 참된 국익이고 언론의 국익이다. 근시안적으로 좁고 얕은 국익은 도리어 국익을 해친다.
국익은 우리끼리 우리만의 국익으로는 뚜렷하게 그 한계가 있다. 심지어 글로벌한 오늘의 세계에서는 특정한 한 나라 한 지역의 눈앞에 이익만을 국익으로 이해한다면 짧고 짐승적이며 심지어 위태롭기까지 하다.
비좁고 근시안적이며 '옹졸한 국익(?)'을 위해서 언론이 입을 다물어야 하고, 본 것을 말하지도 말아야 하며 현실의 모호성을 핑계로 하여 진실과 거짓의 구분과 결단까지 회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국익을 내세운 파시즘적 혐의에 다름 아니다.
사실 노무현 정부는 출발에서 진실의 실천을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정부는 진실의 왜곡과 소멸에 기꺼이 앞장서고 있는 현실에서 자기 부정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정권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등장한 정권이지만 스스로 수단과 목적을 혼돈하면서 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국가이익이라는 교묘한 이름으로 진실을 망가뜨리고 있음에 경악한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런 언론의 강제압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혹시 민주주의 역시 이들만의 전유물이라 착각하는 오불관언의 독선과 아집 때문인가? 아니면 민주주의를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무능력하고 무기력하며 민주주의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옹색하여 심지어 진실을 대면하기에는 더없이 허약하고 참담한 실체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런 지경 때문인가?
진실은 연약한 것일 수도 있다. 진실이 권력과 부의 일부가 될 때 진실은 타락하고 부패하며 끝내는 파괴된다. 또한 진실이 권력과 부에 맞부딪쳐 충돌할 때 상처받기 쉽고 대답 없는 허공이나 침묵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이렇듯 진실이 정당하게 드러내어지지 못할 때면 이 사회는 이내 소통 불가의 암흑 천지에 빠지고 만다.
소통의 불확실성과 모호성이 계속 되풀이되면 민주주의마저 일대 위기에 빠트릴 수도 있지만 진실은 부메랑이 되어 정권의 목숨도 되치기 마련임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진실은 가냘픈 것이지만 무섭고 끈질긴 것이다. 권력이나 금력은 일시적으로 진실을 호도하고 은폐시킬 수도 있겠지만 진실은 진실이 아닌 다른 그 무엇에 쉽게 동원되지 않는다는 진실의 특성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참여정부'가 빠르게 '고립정부'화 되면서 지난 정권의 폭력과 억압과는 또 다른 형태의 전체주의적 유혹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이 때, 언론 또한 '잘 팔릴 수 있는 것들'에만 빠져 들어가면서 언론 스스로 모순에 직면한 이 때에, 언론이 스스로 문제를 확인하고 문제를 본 사실마저 '보지 않았고 못 본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비이성적인 세력에 맞섰다는 사실은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는 노무현 정부 들어서서 이성을 내세우던 사람들이 이토록 비이성적인 존재이며 그동안 줄곧 '언론과 민주주의'를 독점하고자 하고 일방의 조악한 그들만의 언론만을 언론으로 여기면서 '고립'으로 내달려 가짜 지식을 권력화하고, 그 둘레에 장벽을 쳐서, 그것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사용하고자 하는 음모에 강력한 문제 제기를 한 태도이고 '참여정부'가 '민주정부'라는 가면 한켠으로는 권력과 특정재벌 그리고 그들이 상관하는 추잡하고 협잡이 판치는 여론 조작 장치들의 가면을 언론 스스로 내던져 벗겨냈다는 사실에 있다.
이렇듯 이번 월간중앙의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고립정부'의 일련의 행태에는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한 논리가 설득력을 자꾸 잃어버림을 그들도 알아차리면서도 그 생각들을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고 있는 사실을 볼 때, 그들 존재의 당위는 턱없이 위태롭게까지 보여진다는 점이다. 이는 '고립정부'가 자신의 당장의 좁은 목적을 위해 진실을 외면 조작하는 것에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가차없는 재난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진실로 알아 차려야 한다는 사실을 주문하고자 한다.
금번 월간중앙의 사태에서 언론의 국익은 기사를 강제로 삭제하고자 한 일련의 시도에 대해서 또렷한 어조로 반대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언론에 재갈을 물린 획책에 대해서도 반드시 그 원인과 책임을 무섭고 냉정하게 따질 때 비로소 더 이상 국익을 해치지 않게 된다.
정치 권력과 특정 재벌의 계속적인 일방의 야만성은 레임덕을 넘어서서 작동불능의 상태로 그들도 모르게 아주 빠르게 빠져들 수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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