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오랑ㆍ세오녀(延烏郞·細烏女) 이야기 아시죠? 금슬 좋은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이 이야기가 일본의 건국신화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죠. 먼저 한번 보시죠.
"동해 연안에 연오랑ㆍ세오녀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서 해조를 따는데, 홀연 바위 하나가 나타나, 이것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국 사람들이 그를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고 여겨 왕으로 모셨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겨 그를 찾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 역시 그 바위에 올라타니 역시 일본으로 갔다. 세오녀를 본 일본 사람들이 놀라 왕에게 바치니 부부가 상봉하여 세오녀는 왕비가 되었다. 이때부터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천문을 맡은 자가 아뢰어 말하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있다가 이제 일본으로 간 까닭에 이러한 변괴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신라왕은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돌아오게 하였으나 연오랑이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아내가 짠 가는 명주를 줄 터이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하면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일본으로 간 사신이 신라에 돌아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그 말에 따라 제사를 지내니 해와 달이 옛날같이 빛났다. 그 명주를 어고에 두어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고,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이라 하였다(『三國遺事』卷1, 奇異 延烏郞細烏女)."
이 이야기는 신라 8대 임금 아달라(阿達羅) 왕 4년의 때의 일이라고 하는데 일월신화(日月神話), 건국신화와 포항 지역의 영일(迎日)이란 지명과 뭔가 관련이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원래 이 이야기는 박인량의 『수이전(殊異傳)』에 실려 있었던 것으로 『삼국유사』에 실려 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문헌에 전하는 거의 유일한 천체 신화(天體神話), 일월 신화(日月神話)라고 합니다.
위의 이야기에서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日月無光)"는 말이 있는데 이것을 일식(日蝕)현상이라고 보면 아달라왕 13년 춘정월조에 일식 기록을 비롯하여 고구려 차대왕 4년(149), 13년(158), 20년(165)과 백제 개루왕 38년(165) 소고왕 5년(170) 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신영식, 『삼국사기연구』(일조각 : 1981) 200~204쪽] 대체로 2세기 중 후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해와 달이 빛을 잃다'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이겠지요.
지금 영일만(포항)의 호미(虎尾)곶에는 연오랑과 세오녀가 상봉하는 장면이 아름다운 조각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림 ①] 연오랑 세오녀(포항 호미곶)
마치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이 가슴 아픈 사랑과 그리움을 담고서 서로 부둥켜안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만남이 이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을까요?
그나저나 세오녀가 일본으로 떠나니 태양이 빛을 잃죠? 그러면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태양신은 여자인가요? 일단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본 신화에서도 태양신 아마테라스오오미가미(天照大御神)도 여성입니다. 이 아마테라스(天照大御神)가 세오녀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요?
그런데 이와 유사한 일본의 이야기에 신라(新羅)의 왕자 아메노히보꼬[천일창(天日槍)]의 아내가 일본에 건너가자 자신도 일본으로 갔다는 내용이 있죠. 즉 아메노히보꼬가 해의 정기를 받은 처녀가 낳은 알을 빼앗자, 그 알(태양의 정기)이 처녀로 변합니다. 그래서 아메노히보꼬는 그녀(알에서 나온 처녀)와 함께 살았는데 아메노히보꼬가 그녀를 함부로 대하니 그녀는 일본으로 와버립니다. 그러자 아메노히보꼬도 일본으로 따라 건너오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메노히보코, 즉 천일창(天日槍)이란 '하늘의 자손이라 주장하는 천손족(天孫族)으로 태양신(日)을 믿는 창(槍)을 든 사람'이란 뜻으로 풀이할 수 있고, 일본에 철기를 전해 준 신라의 왕자라는 것이지요. 천일창은 신라에서 이즈모(현재 일본의 시마네현)를 거쳐 타지마(현재 일본의 효고현) 지역으로 이주하여 원주민의 땅을 빼앗아 정착하였다고 합니다.
아메노히보꼬의 이야기는 연오랑ㆍ세오녀와 거의 비슷한 내용 같기도 한데, 어째 부부간의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군요. 마치 비밀이 많고 복잡한 일본의 신들과 일본의 역사처럼 말입니다.
***(1) 일본 신들의 이야기**
일본 건국신화는 다른 신화들에 비하여 매우 복잡하고 난해합니다.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일반인들이 제대로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대부분의 신화들은 누구나 알기 쉽게 씌어져 있는데 유독 일본 신화만큼은 난해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아마 그만큼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겠지요. 어쩌면 일본 신화만 제대로 해독해도 동북아시아의 역사의 많은 부분을 해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건국신화가 기록된 책은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입니다. 신화의 내용을 먼저 한번 봅시다. 이름들이 너무 복잡하니 같은 레벨(level)의 이름들에 ⓐ, ⓑ 등으로 표시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매우 복잡하니 대부분 간단하게 약칭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령 아마테라스오오미가미(天照大御神)는 아마테라스로, 스사노오노미고또(建速須佐之男命)는 스사노오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먼저 『고사기』를 보겠습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생겨났을 때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에 나타난 신은 ⓐ아메노미나까누시노가미(天之御中主尊)이고 이어서 ⓑ이자나끼노가미(伊耶那岐神)라는 남신과 ⓑ이자나미노가미(伊耶那美神)라는 여신이 생겨납니다. 남신인 이자나끼가 왼쪽 눈을 씻을 때 태어난 신의 이름은 아마테라스오오미가미(天照大御神), 오른쪽 눈을 씻을 때는 쓰꾸요미노미고또(月讀令) , 코를 씻을 때는 스사노오노미고또(建速須佐之男命) 등이 신이 나타납니다(『古事記』제1장, 제2장).
『일본서기』는 약간은 다르지만 훨씬 상세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혼돈 속에서 하늘과 땅이 생기고 그 가운데 일물(一物)이 생겼는데 갈대싹[葦牙]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득 변하더니 신(神)이 됩니다. 이렇게 변한 신을 ⓐ쿠니도코다씨(國常立尊)라 불렀고 두 신이 더 생겨 세 신이 생깁니다. 다음으로 4대의 여덟 신이 생겼는데 그 마지막이 ⓑ이자나기(伊奘諾尊 :イザナミ)ㆍ이자나미(伊奘冉尊 : イザナミ)였지요. 이자나기(伊奘諾尊)는 이자나미(伊奘冉尊)와 결혼합니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는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에 앉아서 "어디 마땅한 나라는 있을까?"하면서 옥으로 된 창[天瓊矛]으로 이리저리 긋더니 섬을 얻습니다(『日本書紀』神代 上 1-3).
그 후 이자나미는 곡식의 신, 바람의 신, 항구의 신, 바다의 신을 낳지만 불의 신을 낳다가 타죽고 맙니다. ⓑ이자나기는 아내를 찾아 죽음의 나라까지 갔다사 도망쳐 나왔는데 이 때 부정한 몸을 씻기 위해 목욕을 하니 왼쪽 눈을 씻을 때,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라는 태양의 여신이, 오른쪽 눈을 씻을 때 ⓒ츠쿠요미 노미코토[月讀命]라는 달의 여신이, 코를 씻을 때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尊)라는 바다의 남신(男神)이 생겨납니다(『日本書紀』神代 上).
그런데 이 남신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尊)는 난동을 부리다가 추방됩니다. 스사노오는 진흙으로 만든 배를 타고 이즈모노쿠니(出雲國)로 내려가 사람들을 괴롭히던 머리가 여덟 개 달린 큰 뱀을 죽이고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日本書紀』神代 上 8). 그 후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烏尊)의 직계 후손인 ⓓ오쿠니누시노카미(大國主命)는 다른 형제들이 물려준 나라까지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는 지상세계는 천손(天孫)이 다스려야 한다고 하여 ⓓ오쿠니누시의 아들에게 나라를 요구하며 '태양의 신'의 손자인 ⓔ니니기[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를 내려 보냈고 그의 직계 증손자인 ⓖ와카미케누 노미코토(若御毛沼命)가 까마귀의 인도를 받아 가시하라(橿原)에 나라를 세우고 일본의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 천황이 되었다고 합니다(『日本書紀』神代 下).
일단 외형적으로만 보면 일본의 신화는 쥬신의 다른 신화들과는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첫째, 일본의 신화는 앞부분은 중국 신화 내용의 일부를 끌어다 차용한 듯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중국신화에 나타나는 천지개벽(天地開闢)과 반고(盤古)식의 이야기와 비슷하게도 들립니다(혼돈 속에 음양이 있다가 갈라져서 싹이 되고 그 싹은 반고라는 사람이 됩니다. 반고가 죽어서 만물이 생성되지요). 이것은 일본의 신화가 다소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거나 중국 문화가 동아시아에 보편적인 문명으로 확장이 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만큼 늦게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중국 신화의 흐름과 일본 신화의 흐름 자체는 완전히 다릅니다. 중국신화는 철저히 인간(人間) 중심의 신화이지요.
둘째, 이전의 쥬신 신화와는 달리 토착민들의 신화가 먼저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니니기(瓊瓊杵尊) 이후의 전개되는 과정은 단군신화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죠(뒤에서 상세히 분석합니다). 이것은 일본 초기의 지배세력과 후기의 지배세력이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일본의 신화는 쥬신의 다른 신화와는 달리 건국 관련 지역이 '신라(新羅)'라고 하여 지명(地名)들이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지요.
여기서 잠시 여기서 중국신화의 전체를 간략히 보고 넘어갑시다.
"혼돈 상태[태역(太易)]에서 맑고 가벼운 것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흐리고 무거운 것은 가라앉아 흙이 되었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어우러져 사람이 되었다(『列子』天瑞 第一). 이 사람의 이름은 반고인데 그가 죽어서 온갖 만물이 되었다(五運歷年紀). 하늘에는 오궁(五宮)이 있고 그 왕은 태일(太一)인데 천극성(天極星 : 북극성)에 있다(『史記』27卷 天官書). 땅의 북쪽 끝에는 천지(天池)라는 바다가 있고 그 곳에는 몇 천리가 되는 큰 고기 곤(鯤)이 살고 바다가 움직이면 곤이 변해서 붕(鵬)이 되어 남쪽 끝 바다로 날아간다(『莊子』逍遙篇). 천지개벽 후 사람이라고는 복희씨와 곤륜산의 여와(女,와는 女 + 卨 글자임)의 두 남매뿐이었다. 이들은 남매라서 결혼하기가 부끄럽지만 연기로 화합하는 방법으로 결혼하여 사람의 씨를 퍼뜨려 사람들이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淮南子』覽冥訓)."
중국의 신화를 보면 쥬신의 신화와 비교해 볼 때, 그 구성이나 흐름이 전체적으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철저히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요. 그러니까 일본 신화가 중국 신화를 일부 모방하기는 했지만 전체 흐름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천신(天神)이 이자나기(伊奘諾尊 :イザナキ)에게 세상을 창조해보라고 보석으로 장식된 마법의 창을 줍니다. 그래서 이자나기는 창으로 바다 속을 휘저어 바닷물 몇 방울이 응결되었고, 이것이 오오야시마(おおやしま)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현재의 일본 열도라는 것이지요. 이자나기는 아내인 이자나미(伊奘冉尊 : イザナミ)와 더불어 다른 섬들을 낳는데 이것이 혼슈(本州)·시코쿠(四國)·큐슈(九州) 등의 다른 섬들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제 이 일본 신화의 세계를 좀 더 깊이 분석해 봅시다.
***(2) 일본 신들의 고향, 경남 거창**
『일본서기』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중요한 지명이 있습니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는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에 앉아서"라는 대목을 봅시다.
이 대목을 보면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는 태초의 일본 신들의 고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등의 신들이 태어난 후 그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처음 나타나는 말이니까요. 따라서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는 최초의 일본 신들이 상정하는 하늘나라인 셈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고천원의 위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천원은 하늘나라가 아니고 실재하는 땅으로서 한반도의 어느 산간분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어학자 김종택 교수(한국지명학회 회장)는 이 고천원이 대한민국 경상남도 거창(居昌)의 가조면(加祚面, 加召面)이라고 단언합니다. 처음에는 황당하게만 들리는 이 말이 김종택 교수의 분석을 보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김종택 교수는 고천원(高天原)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이 지역(거창)에서 쓰이고 있고, 가조의 옛 이름이 벌인데 이 말은 가시하라(橿原) 또는 가시벌과 같은 의미라는 점, 아직도 가조에는 궁궐터가 있고 그것을 나타내는 지명(궁배미)이 있다는 점 등을 들어서 거창의 가조 지역이 바로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라고 보고 있습니다(김종택, "일왕가의 본향은 경남 거창 가조"『신동아』2004.10).
[그림 ②] 거창과 가조면 위치(군관광안내도 재구성)
실제로 거창을 가보면 이상하리만큼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요즘은 사방으로 고속도로가 뚫려 있지만 거창은 해발고도도 높은 고원 분지지역입니다. 마치 티베트 같다고나 할까요? 산세도 험하여 만약 과거 나라를 이곳에 세웠으면 다른 종족이 침략하기는 매우 어려운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의 다른 지역으로는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림 ③] 아름답고 아늑한 경남 거창의 전경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는 일단 이 정도로 해두고 다시 『일본서기』로 돌아가 보면 이자나기의 소생들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라는 태양의 여신, ⓒ츠쿠요미 노미코토[月讀命]라는 달의 신,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尊)라는 바다의 남신(男神) 등이 있는데 ⓒ스사노오(素戔嗚尊)는 난동을 부리다가 추방된 후 이즈모노쿠니(出雲國)로 내려가 사람들을 괴롭히던 머리가 8개 달린 큰 뱀을 죽이고 나라를 세웠다고 했지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즈모노쿠니(出雲國)에 대해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첨부합니다.
"스사노오의 행실이 좋지 못해서 여러 신들이 그를 벌하여 쫓아내니, 스사노오는 아들들인 50여 명의 날래고 용감한 신[猛神]들을 데리고 신라국(新羅國)으로 가서 소시모리(曾尸茂梨)에 있다가 진흙으로 만든 배를 타고 이즈모노쿠니(出雲國)의 파천(簸川)상류에 있는 조상봉(鳥上峯)으로 가서 사람을 잡아먹는 뱀을 죽였다(『日本書紀』神代 上 8)."
바로 이 대목에서 오랫동안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스사노오가 일본에서 신라를 정벌하러 갔다는 근거로 제시하기는 했습니다만 지금까지 본 대로 그것은 아니지요. 다만 여기서 스사노오의 행실이 좋지 못해서 여러 신들이 그를 벌하여 쫓아내는 과정을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사노오의 행실에 화가 난 아마테라스는 하늘나라의 바위굴[天石窟]로 들어가 버립니다. 태양신이 동굴로 들어가 버렸으니 세상은 온통 암흑천지가 되었죠. 그래서 하늘나라 모든 신들이 아마테라스가 나오게 할 궁리를 하는데 오모히가네(思兼神)는 수탉들을 모아서 길게 울게 하여 아마테라스를 밖으로 나오게 하고, 스사노오에게서 머리털과 손톱·발톱을 뽑고 쫓아 버립니다.
그런데 바로 바로 경남 거창 가조면에 닭뫼, 즉 비계산(해발 1,126m)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지역은 수탉이 날개를 펼치고 동북쪽으로 나는 산세 때문에 왕기(王氣)가 일본 쪽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림 ④] 비계산(거창)의 전경
문제는 언제 이 거창 지역을 떠나서 일본으로 갔는가 하는 점이지요. 이 부분은 『일본서기』해석의 가장 골치 아픈 부분입니다. 다시 『일본서기』로 들어가 추적해 봅시다.
위의 인용된 글에서는 스사노오가 신라국의 소시모리에 있다고 말하고 있지요. 그리고 스사노오의 그 다음 행로는 진흙의 배로 이즈모노쿠니(出雲國)로 향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즈모노쿠니(出雲國)는 신라와 가까운 일본 지역이었겠지요.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먼저 신라(新羅)는 사로·서라벌·계림 등으로 불리어지다가 307년 신라 15대 기림왕 때에 이르러 신라를 국호로 삼기 시작했으며 신라가 국호로 확정된 것은 지증왕 4년(503년)의 일입니다. 그래서 김종택 교수는 스사노오가 신라에 도착한 시기는 대체로 4세기 이후라고 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이 보다 훨씬 이전인 1~3세기경에 신라 - 일본으로 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4세기 후반이면 이미 반도부여(백제)의 근초고왕이 이 지역을 정벌하고 영향력을 확대합니다. 그리고 일본열도에서도 반도부여(백제)와 가야 연합세력들이 4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열도정벌에 나서게 되지요. 그렇다면 그 이전에 이미 한반도의 상당한 세력들이 일본 쪽으로 진출해있었다는 말입니다. 『일본서기』에서 비록 사로(斯盧)라든가 하는 신라의 옛말은 나오지 않지만 『일본서기』가 편찬될 당시에는 같은 지역 이름인 신라라는 말을 사용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보세요. 저도 지금 3~4세기의 이야기를 하면서 7세기경에 나온 말인 일본(日本)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서기』에 따르면, 근초고왕(?~375)은 마한(馬韓)을 경략하고 가야를 정벌할 때 일본에서 온 장군 아라다와께(荒田別)·목라근자(木羅斤資) 등과 함께 했으며 치구마나히코(千熊長彦)은 근초고왕과 함께 벽지산(현재 전북 김제로 추정)에 올라 맹세하였다고 합니다(『日本書紀』神功 49조). 여기에 나오는 목라근자의 아들인 목만치(木滿致)는 구이신왕(久爾辛王 : 420~427) 때 전권을 장악한 사람입니다. 목만치는 백제가 정복한 가야 땅의 지배자이기도 했습니다. 이 일들은 4세기 중반 이후 나타난 일이므로 이미 4세기 이전에 반도부여(백제)와 가야 연합세력이 일본 열도로 진출했음을 의미하죠. 그렇다면 이들보다 선주민인 스사노오는 1~3세기 이전에 일본열도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얘기지요.
그렇다면 스사노오는 어떤 갈래의 사람들이었을까요?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거창 지역의 정치세력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당시 이 지역은 가야연맹이 있던 지역이죠.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낙동강의 동쪽은 사로국(후일 신라), 서쪽은 가야연맹이 있었습니다. 당시 거창의 남부에는 금관가야(김해)와 고령가야(진주)가 있고 북부에는 대가야(성주)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거창에도 가야연맹의 소국이 있었던 것이지요. 가조가야, 또는 갓 가야라고나 할까요? 가야연맹은 2~3세기에는 금관가야(金官伽倻)를 중심으로 5세기에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번성합니다. 따라서 스사노오는 가야계이긴 하지만 주류(메이저 그룹)가 아닌 방계(마이너 그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사노오는 흔히 '우두천왕(牛頭天王 : 소머리천왕)'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이 말은 소시무리(曾尸茂梨)와 유사하지요. 그렇다면 소머리산, 즉 우두산(牛頭山)을 신라지역에서 찾으면 상당한 비밀이 밝혀지겠죠? 그 우두산이 있는 곳이 바로 경남 거창이지요. 영남 땅에서 우두산이라고 부르는 곳은 가야산 밖에는 없죠. 가야산(伽倻山)은 예로부터 소의 머리와 모습이 비슷하다고 하여 우두산(牛頭山)이라고 불렀으며 주봉을 우두봉(牛頭峯), 또는 상왕봉(象王峯)이라고 합니다.
왜 이 산을 가야산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곳은 옛날 가야국이 있었던 곳이고 이 산이 가야국에서 가장 높고 훌륭한 산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야의 산, 가야산이라 불려지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답니다. 특히 가야산(伽倻山)에서 쓰이는 야(倻)라는 글자는 우리나라에만 쓰는 한자로 가야국, 즉 나라이름에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국어학자인 김종택 교수는 소시무리를 다음과 같이 분석합니다.
소시(sosi)는 원형과 방언의 중복표기로 봅니다. 즉 앞의 말이 고어이거나 외래어일 경우 그 다음 말을 고유어를 붙여 말을 강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so)는 쇼[牛]로 중앙어이자 고어인데 남부 사투리(남부지역 고유어)인 시(si)를 덧붙인 것이라는 얘깁니다. 일본어로 소를 우시(usi)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소라는 원래 말에다가 한반도 남부 사투리 또는 같은 계통의 일본 말인 우시가 붙어서 소시(sosi)가 된 것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무리는 뫼[山]의 선행 형태이므로 결국 소시무리는 쇠뫼[牛山]로 해독이 됩니다. 아직도 그 곳 사람들은 쇠산, 소산으로 부른다고 합니다(김종택, "일왕가의 본향은 경남 거창 가조"『신동아』2004.10).
그렇지 않다면 쇠머리를 하나의 글자로 표현하기가 어려우니 풀어서 소시머리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지요. 어떤 경우라도 쇠머리, 또는 쇠머리산을 나타내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 소시머리가 『일본서기』에 따른다면 신라국에 있어야 하겠는데 거창에 가깝다니 다소 난감하기도 하죠? 그렇지만 『일본서기』가 편찬될 당시에는 한반도 전체가 신라(통일신라) 땅이었으니 꼭 경주가 아니라도 틀린 분석은 아닐 수도 있겠지요.
[그림 ⑤] 거창 우두산의 전경
스사노오의 이동로 분석을 위해 일단 『일본서기』를 봅시다. 『일본서기』에는 누나인 아마테라스에 의해 쫓겨난 스사노오는 다시 아마테라스에게 갑니다. 그러자 아마테라스가 나라를 빼앗으러 왔다고 매우 화를 내니, 스사노오는 "저는 본래 사심이 없습니다. 저는 멀리 근국(根國)을 가려고 합니다. 누님을 뵙고 싶어 구름 안개를 헤치고 왔는데 이렇게 누님께서 화를 내실 줄은 몰랐습니다.(『日本書紀』神代 上 6)"라고 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스사노오는 가야산을 지나 현재의 부산 쪽인 김해로 가려고 했는데 아마테라스에게 쫓겨 경주(신라) 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입니다(신라에 투항했다는 말일 수도 있죠).
이 과정을 좀 더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아마테라스는 당시 가야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金官伽倻) 세력이고 이들의 세력이 2~3세기 거창 지역으로 확장되면서 거창지역의 가조 가야인(스사노오)들이 금관가야(아마테라스)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고(그러니 스사노오의 행실이 나빠서 추방된 것으로 표현되고 있죠) 부산으로, 경주로 이리저리 몰려다니다 결국은 신라에 투항했다가 영일현(포항) 쪽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입니다[여기서 제가 스사노오를 가조 가야인으로 표현한 것은 그런 기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의상 붙인 이름입니다].
금관가야는 기원 전후로 김해를 중심으로 성장한 가야연맹의 한 국가로 대가야, 구가야(舊伽倻), 남가야(南伽倻) 본가야(本伽倻)라고도 합니다. 1세기 경 수로왕이 김해지방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금관가야를 건국했으며 2~3세기경에 낙동강 유역에 널리 퍼져있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여 가야연맹체를 결성했습니다. 스사노오의 이야기는 바로 이 시기의 일로 가조가야(스사노오)는 이 금관가야 연맹에 흡수되기를 거부한 세력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스사노오는 거창(居昌)을 떠나 가야산을 거쳐 김해(金海 : 부산)로 갔다가 김해의 아마테라스에게 쫓기어 다시 경주(慶州)를 거쳐 포항(浦項)으로 갔다가 일본(日本)으로 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일본서기』에 나타난 스사노오의 이동 경로를 요약해봅시다.
㉠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 가조가야?] → ㉡ 신라국(新羅國) 소시모리(曾尸茂梨) → ㉢ 이즈모노쿠니(出雲國) → ㉣ 네누쿠니(根國)
여기서 말하는 이즈모노쿠니(出雲國)나 네누쿠니(根國)는 일본 내의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즈모노쿠니(出雲國)는 지금도 이즈모 시(出雲市)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시마네현(島根縣)에 있습니다. 이 시마네(島根 : 엄청나게 큰 섬이라는 의미)현에서 한자를 보세요. 섬의 뿌리라는 뜻으로 근(根)이 나오지요? 최근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조례를 정하여 한국 전체를 시끄럽게 만든 바로 그 곳입니다. 신기하고도 아이러니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림 ⑥] 시마네현의 위치(일본 시마네현 홈페이지 소개자료)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의 갈등은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가야의 소국들 간의 대표적인 갈등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이 전쟁은 이 지역에서 세력의 확장을 추진하던 금관가야(김해)와 이에 반발하는 골포국(마산ㆍ창원), 고사포국(고성), 칠포국(칠원ㆍ진동) 등 포상팔국(해변 지역) 사이의 전쟁이었습니다. 스사노오가 바다의 신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즉 스사노오는 이들 포상팔국의 연합세력이었다는 말이지요.
포상팔국의 난은 『삼국사기』에는 209~212년까지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야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는 위기를 맞아 이들을 제대로 물리치지 못하고 갈팡질팡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일본서기』에 "스사노오의 행실에 화가 난 아마테라스는 하늘나라의 바위굴로 들어가 버린다."라는 표현과 관계가 있겠지요.
그래서 가야 연맹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합니다. 『일본서기』에는"세상은 온통 암흑천지가 되어 하늘나라 모든 신들이 아마테라스가 나올 궁리를 꾸미다가 수탉들을 모아서 길게 울게 하여 아마테라스를 밖으로 나오게 하고 스사노오에게 머리털과 손톱·발톱을 뽑고 쫓아 버렸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닭 울음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세요. 계림(鷄林), 즉 경주(신라)를 상징하지요. 신라의 도움으로 사태를 수습한 금관가야는 이후 왕자를 신라에 인질로 보내야했고, 신라는 손쉽게 경상도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당시 포상팔국의 군대는 해로(海路)를 통해 울산까지 진출했다고 합니다.
이 포상팔국의 난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면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의 갈등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스사노오가 신라방면으로 들어간 것은 스사노오(포상팔국) 세력의 일부가 신라에 귀부(歸附)한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3) 연오랑(延烏郞)ㆍ세오녀(細烏女)**
스사노오와 관련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동해안에 살던 연오랑ㆍ세오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연오랑ㆍ세오녀가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죠.
주의 깊게 보세요. 연오랑ㆍ세오녀라는 말에는 계속 까마귀를 나타내는 '오(烏)'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까마귀와 관련된 사람들이 왕이 되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사실 왕은 아무나 되는 일은 아니죠. 왕이 되려고 수십만, 수백만을 죽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만큼 왕이 되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천운(天運)이 있어야 되겠지요. 이 의문을 한번 풀어봅시다.
연오랑ㆍ세오녀에는 까마귀[烏], 해[日]에 대한 제사의식 등이 나타난다는 점이죠. 까마귀는 쥬신의 숭배 대상인 태양의 사자이자 샤먼의 조상입니다. 또한 까마귀는 죽은 사람의 인육(人肉)을 먹기 때문에 새들의 왕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원래 인간의 생명은 하늘에서 새를 통하여 내려온 것이고 육신이 죽고 나면 영혼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겠지요(김병모, 『고고학 여행』)
진수의 『삼국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변진(弁辰 : 변한과 진한)의 사람들은 죽으면 큰 새의 날개를 같이 묻는데 이것은 죽은 사람들이 날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三國志』(「魏書」弁辰)."
다시 말해서 사람이 죽으면 그들의 영혼이 원래의 고향이었던 하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새의 날개를 같이 묻었다는 의미가 되죠.
옛날부터 동양에서는 태양 속에 세 발 달린 검은 까마귀, 즉 삼족오(三足烏)가 살고 있다는 믿음이 있죠. 이런 까닭으로 풍수에서도 금오(金烏)는 태양을 상징하고 제왕을 은유하는 말입니다. 까마귀[烏]의 어원은 [烏]으로 추정이 되는데, 이 말은 신(神)을 의미하는 [神]과 발음이 거의 같죠? 그런데 우리가 앞에서 분석한대로 태양의 자손들(천손족) = 철의 제련기술을 가진 민족이라고 본다면 결국 신의 메신저(messenger)인 까마귀도 철의 제련기술을 가진 민족전체를 상징하는 코드(code : ethnic code)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연오랑ㆍ세오녀가 일본의 왕이 되었다는 말은 어떨까요? 제철기술을 가진 쥬신족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열도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는 말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스사노오(素戔嗚尊)나 연오랑ㆍ세오녀는 결국 같은 무리가 될 것입니다. 스사노오(素戔嗚尊)에 나타난 오(嗚 : 口 + 烏 - 까마귀가 우는 소리)라는 말이 자꾸 눈에 걸리지 않습니까?
일본의 고어사전에 보면'존(尊)'은 미고또[mikoto]라고 읽는데 '명(命)', '신(神)' 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스사노오(素戔嗚尊)는 결국 까마귀의 신을 의미하죠[그리고 김종택 교수는 이 미고또란 본향(本鄕), 본국(本國)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인 밑(本) + 곳(所, 또는 國)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법화경언해에 "믿고대(本鄕) 잇더니"라는 구절도 있지요. 다시 봅시다.
철이란 매우 귀한 금속일 뿐만 아니라 최강의 첨단 무기이기 때문에 이것을 잘 관리하는 것은 부족(민족)의 번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철을 만드는 과정은 마치 밀교(密敎)처럼 그 후계자들에게 전수되었다는 것이죠. 물론 그 후계자들은 그 사회의 지도자들입니다. 힛타이트(Hittite)의 수도인 하투사(Hattusa)의 궁전에서 철을 녹이던 용광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철은 왕이 직접 관리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재원 교수(외국어대)는 석탈해왕,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도 대장장이라고 단언합니다. (유재원,「신화를 통해 본 그리스 선사시대 대장장이 부족」)
사정이 이와 같으니 초기의 금속 제조기술에 대한 진보는 대단히 느리게 진행됩니다. 그래서 철을 생산할 수 있는 민족들이 이웃 민족을 쉽게 정벌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민족의 우두머리가 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실제로 금관가야(아마테라스)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철이 풍부하여 철을 중국이나 일본에 수출하거나 중개무역을 통해서 성장한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들 세력이 신라의 성장과 함께 반도부여(백제)와 연합하고 결국은 일본으로 이주해 간 것입니다. 결국 일본은 초기에는 가야(가야 마이너 그룹)ㆍ신라 세력에 의해 후기에는 가야(가야 메이저 그룹)ㆍ반도부여(백제)의 연합세력에 의해 건설되는 나라가 됩니다.
천 년 이상 한국과 일본 양국 역사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 온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바로 이 반도부여(백제)ㆍ가야 연합을 지탱하는 임시행정관청이나 연락사무소(또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사관ㆍ영사관)였던 셈이죠. 쉽게 말해서 성장해가는 일본가야와 사실상 와해되고 있는 본국가야(금관가야ㆍ대가야)와 강력한 대륙세력으로 한반도에 남하한 반도부여(백제)를 연결하는 임시 행정기관이라는 말입니다. 참고로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일본서기』교토꾸(孝德) 천황 원년(645) 고구려에 보낸 일본 왕의 교서에 "명신인 천하를 다스리는 일본천황(明神御宇 日本天皇)"이라고 지칭한 곳에 처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와 같은 조직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수백 년의 천적관계인 고구려ㆍ백제의 갈등과 신라ㆍ가야의 세력다툼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가 점점 강대해지고 신라도 가야연맹의 갈등을 이용하여 강성해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백제(반도부여)와 가야는 고구려와 신라 세력이 강대해짐으로써 그 긴밀도가 매우 깊어져서 결국은 하나의 형제 왕조와 같은 형태로 발전하게 되지요. 당시의 상황을 본다면 고구려는 한족(漢族) 세력들을 한반도와 요동에서 축출(313)하는데 이것은 남해의 가야국들과 중국 문화의 연결고리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가야의 중심이 대가야(성주ㆍ고령) 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특히 광개토대왕이 5만의 대군을 파견하여 가야ㆍ왜 연합군에게 침략을 받던 신라를 구원했고 고구려는 '임나가라'(김해, 고령)의 성을 빼앗고, '안라(함안)'를 격파합니다(400).
다시 연오랑ㆍ세오녀가 왕이 되었다는 문제로 돌아갑시다. 이들이 왕이 되었다는 것은 이들의 정체가 바로 대장장이라고 볼 수 있죠. 겉으로 보면 연오랑ㆍ세오녀는 아름다운 선남선녀로 보이지만 사실은 금속을 잘 다루는 민족으로 결국 강한 생산력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철의 생산과 관련된 비밀들이 대장장이 집단에 의해서만 은밀히 전수되었기 때문에 철을 만드는 과정이 천년 이상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철 자체가 워낙 귀중한 물건으로 바로 돈이 아닙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휴대폰이나 디지털 TV라고 보시면 됩니다. 철 광맥을 발견한다거나 용광로에서 철을 녹이는 매우 위험한 작업을 하기 전에는 하늘이나 또는 수호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의례가 되니 자연스럽게 '대장장이 = 왕 = 샤먼' 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됩니다. 결국 단군왕검도 이 같은 대장장이 왕이자 샤먼임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 부분은 '똥고양이와 단군신화'편에서 충분히 다루었으리라고 봅니다.
연오랑ㆍ세오녀에 대해 제사를 지낸 곳은 영일현(迎日縣 : 현재의 경북 포항시)입니다. 이곳에는 오천(烏川)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왜 그리 잘 아냐고요? 바로 이곳은 제 아내의 고향이자 제가 한 십년 산 곳이거든요. 처음에는 이 동네에 웬 까마귀 이름을 가진 땅이름이 있어 의아했지요. 이를 보면 땅이름, 함부로 바꾸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땅이름이라는 게 수천 년을 살아있군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卷23)에 따르면 영일(迎日)의 옛날 이름이 오랑우(烏良友), 또는 오천(烏川), 또는 근오지현(斤烏支縣)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근오지현(斤烏支縣)이라는 말은 '큰 까마귀의 마을'이라는 뜻이죠. 그러면 이 말은 철 제련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라는 의미도 함께 가질 수 있겠지요. 놀랍게도 여기엔 세계 최고의 제철소(POSCO : 포항종합제철)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땅 이름이 혹시 어떤 예언적 기능을 가지는 것은 아닐까요?
결국 스사노오는 거창을 출발해서 김해로 내려갔다가 아마테라스에게 쫓겨 경주와 영일(현재의 포항)을 거쳐 일본으로 갔다는 말이지요. 무얼 찾아서요? 바로 새로운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을 찾아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벌(橿原 : 벌, 또는 가시벌), 또는 가시하라(橿原)를 찾아서 말입니다.
김종택 교수에 따르면 『고사기』, 『일본서기』에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벌(橿原)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가시벌은 다름이 아닌 가조(경남 거창 가조면)의 옛 이름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스사노오는 새로운 거창을 찾아서 일본으로 간 것이고, 그 곳에서 새로운 가조가야(거창가야)를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스사노오가 영일쪽으로 와서 일본으로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김해를 거쳐 대마도를 경유하여 규슈로 가면 훨씬 빠르고 안전할 텐데 말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김해를 거쳐 부산방면으로 빠져나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이겠죠. 왜냐하면 스사노오가 다른 신들과 사이가 극도로 나빴기 때문입니다. 즉 스사노오의 벌가야(거창)는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성주), 금관가야(김해), 고령가야(진주), 소가야(고성), 아라가야(함안) 등의 가야연맹으로부터 이지메(따돌림)를 당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가야연맹을 통해 한반도를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확인이 될까요? 물론입니다. 다시 『일본서기』를 보세요.
[그림 ⑦] 일본 신들의 이동경로와 관련된 지도
"스사노오가 풀을 엮어 도랑이 삿갓을 하고 여러 신에게 잘 곳을 빌려고 하였지만 여러 신(神)들이 '너는 행실이 나빠서 쫓겨 다니는 주제에 어떻게 우리에게 잠잘 곳을 마련해달라고 하느냐'라고 모두 다 거절하였다.(『日本書紀』神代 上 7)"
이 시기에는 장마가 심하게 져서 스사노오가 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또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무리 과거지만 영일 쪽에서 일본 쪽으로 가는 항로(航路)가 있는가 말입니다.
당시의 항로(航路)를 분석한 논문들을 보면 이 항로가 일본으로 가는 주요항로 중이 하나라는 것이죠. 이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윤명철 교수의 글을 보면 이 점이 확연해집니다. 오래 전 고대엔 반도(한국)와 열도(일본)는 험난한 자연조건 때문에 대규모의 주민이동이나 군사력의 진출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윤명철 교수는 한반도의 정치세력들은 통합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장기적이고 대규모적인 진출 활동은 쉽지 않아서 초기에는 점령보다는 자발적 이주에 의한 개척의 성격이 강했을 것으로 단언합니다. 그리고 지역별로도 항해자들이 여러 가지 다양한 정치적ㆍ경제적 특성을 가지면서 열도로 이동했으며 가야계 · 백제계 · 신라계 · 고구려계가 지역적 특성을 가지면서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야계는 규슈 북부(남해동부 - 대마도 경유 - 규슈북부 항로)를 중심으로, 신라계는 혼슈 중부 이남(동해남부 출발—혼슈 중부 이남 항로)을 중심으로, 백제계는 초기에는 큐슈 서북부지역(남해서부—규슈 서북부 항로)이었으나 점차 북부지역으로, 그리고 고구려는 혼슈 중부 지역으로 정착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윤명철,「고대 東아시아의 역사상에 있어서 해양의 문제—고대 한일 관계를 중심으로—」『인문연구논집』 제2집 (1997.3). 89~121쪽].
위에서 말하는 것을 본다면 스사노오의 항로는 신라계의 항로로 추정되죠. 즉 동해 남부를 출발하여 일본 혼슈 중부 이남의 항로 말입니다. 즉 포항(영일), 또는 울산 지방에서 동해의 해안에 연한 혼슈우 남단의 이즈모(出雲)와 중부의 쓰루가(敦賀) 등을 잇는 항로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현재까지도 포항ㆍ영일 지역 사람들의 옛말에 "왜(倭 : 일본)로 가는 배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옛날에 폭풍우에 대비하여 줄줄이 배를 엮어서 일본으로 간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최근 노성환 교수(울산대 문화인류학)는 우리나라 동남해안에서 표류한 1백여 건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 경우 일본 시마네 현으로 가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홍하상, 『진짜 일본 가짜일본』(비전코리아 : 2001)].
그러면 가야 계통의 스사노오는 일본에 성공적으로 진출을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냐구요? 이 부분은 해석이 매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고대 일본 역사의 비밀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하죠.
이 비밀을 찾아가는 열쇠는 바로 스사노오가 이즈모노쿠니(出雲國)로 내려가 사람들을 괴롭히던 머리가 8개 달린 큰 뱀을 죽이고 궁궐을 지었다는 기록입니다.
스사노오는 이즈모노쿠니(出雲國)의 국신(國神)인 노부부가 소녀를 가운데 놓고 울고 있는데 그 사연을 물으니 딸이 여덟이 있었는데, 머리와 꼬리가 여덟 달린 뱀이 매년 와서 잡아먹어 이제는 마지막 남은 딸 이나다히메(奇稻田姬)도 잡으러 오니 그게 서러워 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사노오는 큰 항아리 여덟에 독주를 담아 뱀을 취해 잠들게 하여 칼을 뽑아 단칼에 이 뱀을 죽입니다.
이 뱀은 이즈모(이즈모쿠니)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홍수로 인한 강물의 범람 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큰 경제적 손실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비밀은 스사노오가 살려준 아가씨의 이름인 이나다히메(奇稻田姬)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홍수가 매년 빼앗아간 것이 이즈모 사람들이 추수한 벼[稻]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장 드라마틱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집니다. "뱀 꼬리 부분에서 보검(寶劍)이 발견되었다"는 대목입니다. 이 뱀은 매우 거대하여 마치 용처럼 생긴 것이죠? 『일본서기』에는 "뱀이 나온 곳이 여덟 언덕과 여덟 골짜기"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꼬리 부분에서 칼이 발견되지요. 스사노오는 아마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8개의 작은 댐을 만들면서 상류로 올라간 것 같습니다) 골짜기까지 갔다가 광산을 발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요? 『고사기』에 "그 뱀의 몸에는 넝쿨나무와 노송나무가 돋아나있고 … 그 배를 보면 언제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라고 합니다. 즉 산화된 철이 물기에 스며 밖으로도 붉게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지요. 철의 전문가인 스사노오가 이것을 지나칠 리가 있겠습니까? 바로 '심봤다'지요.
계속『일본서기』를 보시죠. 스사노오가 "그 뱀을 죽이니 칼날에 이가 빠졌고 그 안에서 칼이 나왔는데 이것이 천총운검(天叢雲劒 : 하늘나라에서 나 있을 법한 보검)이다." 라고 합니다. 이상하죠? 스사노오의 칼날은 당시로는 첨단 제품이었을 텐데 날이 상하다니 말이죠. 그러니 그만큼 고급 철이 발견되었다는 말이지요. 이에 스사노오는 "이는 신비스러운 칼이구나. 내가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구나."하더니 천신(天神)에게 헌상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걸작입니다. 이 칼 이름은 "이른바 초치검(草薙劍)이라"고 합니다(故割裂其尾視之 此所謂草薙劍 : 『日本書紀』神代 上 8). 초치검이라는 말은 그럴 듯하지만 '풀 베는 작은 칼' , 즉 '낫'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 복잡한 이야기는 결국 스사노오는 이 지역에서 질 좋은 철광산을 발견하여 그것으로 낫을 만들어 다시 대륙으로 수출했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게 만들어진 낫을 자급용으로 쓴 것이 아니라 상품으로 대량생산하여 한반도나 중국 쪽에 내다 팔았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중국과 한반도 남부지역의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보면 스사노오는 세계적인 비즈니스맨의 기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 따지고 보면 한국과 일본이 세계적인 무역대국이 된 것도 다 이 가야 신들의 핏줄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죠.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저도 원래 전공이 국제경제(무역 - 국제인터넷 비즈니스)입니다.
여기서 연오랑ㆍ세오녀가 신라를 떠난 후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을 돌아오게 하였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는 북으로는 고구려의 위협이 증대되고 남으로 금관가야의 세력이 다소 약화되었다고는 해도 항상 신경이 쓰이는 상태이니 신라는 또 다른 곤란에 빠지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와중에 신라를 도울 수 있는 세력 하나가 일본으로 가버린 데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아니면 철 생산자들의 이탈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겠지요). 일본의 연오랑ㆍ세오녀가 명주를 준 것은 아직도 신라와의 관계가 견고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로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현재에도 시마네현의 이즈모 지역은 야스기의 금속, 이즈모 ·마스다(益田)의 방직 등이 유명한 지역입니다.
지금도 시네마현 이즈모市 해안에는 히노미사키(日御崎) 신사(神社)가 있고 신사의 산 정상에는 등대가 있습니다. 그 등대 옆에 작은 신사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스사노오의 무덤입니다. 스사노오는 이곳의 사다 마을(町)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홍하상, 『진짜 일본 가짜일본』(비전코리아 : 2001)].
이 마을 사람들은 지금부터 3천 년 전에 스사노오가 한산(韓山 : 한국의 어느 산간지대)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스사노오를 신라(新羅)의 신이라고 믿는데 사실은 가야(伽倻)의 신이지요. 어쨌든 고단하고 파란만장한 스사노오의 삶의 여정은 여기서 끝이 납니다.
***(4) 초기엔 신라ㆍ가야, 후기엔 백제, 결국은 쥬신의 신화**
그러면 스사노오와 그의 직계가 일본을 지속적으로 다스리나요? 그것은 아닙니다. 다시 신화를 봅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하늘에서는 지상세계는 천손(天孫)이 다스려야 한다고 하여 오쿠니누시의 아들에게 나라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태양의 신', 즉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를 내려 보냈고 그의 직계 증손자인 ⓖ와카미케누 노미코토(若御毛沼命)가 까마귀의 인도를 받아 가시하라(橿原)에 나라를 세우고 일본의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가 되었다고 합니다(『日本書紀』神代 下).
즉 스사노오의 직계가 일본을 다스리고 있는데 후일 아마테라스의 손자(니니기)가 다시 하늘(가야지역)로부터 일본으로 내려가서 왕권을 내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아마테라스의 직계가 일본을 정벌하고 새로이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같은 가야지방의 사람들이라도 스사노오는 훨씬 이전에 열도로 가서 보다 평화적으로 통치하였고 그 후 아마테라스는 강력한 군사적인 힘으로 일본을 정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스사노오계가 아마테라스계로부터 아무 탈 없이 그대로 권력의 이양한 듯이 묘사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 실상은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고 하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사노오는 매우 나쁘게 악신(惡神)으로 묘사되어 있고 아마테라스는 매우 부드럽고 평화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신화의 세계도 결국은 승자(勝者)의 기록이 될 수밖에 없지요.
'태양의 신'의 손자인 ⓔ니니기의 존재를 보면 일본은 분명히 태양의 아들, 즉 천손(天孫)이 건국했다는 말인데요. 이것은 다른 쥬신의 신화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 건국 과정을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통해 다시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 하늘에서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를 땅으로 내려 보냄 → 땅에서 다스리고 있던 오호쿠니누시(스사노오의 후손)에게 왕위를 물려 달라고 요청함.
㉯ ⓔ니니기는 땅에서 미인[아다쓰히메(田吾津姬)]와 결혼하여 세 아들[호느스소리ㆍ히코호호데미ㆍ호노아카리]이 태어남 → ⓕ히코호호데미(彦火火出見尊)은 바다의 신의 딸[도요다마히메(豊玉姬)과 결혼하여 ⓖ나기사다께가 태어나고 그는 이모와 결혼하여 네 아들을 낳음.
㉰ 나기사다께의 네 아들 가운데 막내인 ⓗ이하레히코(盤余彦)는 바다를 건너 구마노(熊野)에 도착하였는데 ⓒ아마테라스가 (꿈에 나타나) 까마귀[야다가라스(頭八咫烏)]를 보내어 인도하여 소호고호리(層富縣)에 도착하여 가시하라(橿原)에 서울을 세우고 이하레히코가 첫 나라님이 되셨다. 이 분이 일본의 초대 임금(야마도 왕조)이신 진무천황(神武天皇)이시다(『日本書紀』神代 下 요약)."
좀 더 자세히 보면 ㉮에서 ㉯의 과정은 부여ㆍ고구려의 건국신화와 그 구조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즉 하늘의 아들이 물의 신, 즉 해신(海神)의 딸과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그 후손이 여러 가지 역경을 이기고 가서 나라를 건국하고 있습니다. 강이나 바다를 건넌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고구려의 신화에서는 강의 신의 따님이었던 유화부인(버들꽃아씨)이 여기서는 바다의 신으로 둔갑한 정도겠지요. 일본이 섬나라인 점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일이지요.
특히 니니기의 강림부분을 보세요.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를 흔히 호노니니기(天孫)라고 하는데 이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니니기는 아마테라스의 지시에 따라 옥구슬·거울·신검 등의 신령스러운 물건 세 가지를 들고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데 일본 사람들은 이를 천손강림(天孫降臨)이라 합니다.
어떻습니까? 단군신화와 완전히 같은 내용이 아닙니까?
일본 남부 큐슈로 내려온 호노니니기는 꽃을 뜻하는 미녀인 고노하나(木花)와 그녀의 언니인 추녀(醜女) 이와(岩 : 바위라는 뜻)라는 두 여인을 사랑하나 결국은 아름다운 고노하나(木花)를 택함으로써 영생의 존재가 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꽃은 열흘을 붉지 못하는(花無十日紅)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일본의 천황(덴노)은 신이면서도 영원히 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호노니니기와 고노하나의 아들인 우가야 후키아에즈는 그의 이모와 결혼하여 네 아들을 두는데 그 막내아들이 바로 일본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입니다. 그로부터 현재의 125대 천황인 아키히토 덴노(1989년 즉위)까지 2600여년이 이어져 이것을 열도 쥬신(일본) 사람들은 만세일계 (萬世一係)라고 합니다(사실은 2600년은 아니지요. 제가 보기엔 대략 1600년~1700년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일본 신화의 특이한 점은 형제간의 갈등이 묘사되어 있어서 오히려 백제신화의 영향도 깊이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즉 위에서는 ㉯부분에서 형제간의 갈등이 나타나지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할 부분은 소호고호리(層富縣)나 가시하라(橿原) 등의 일본 건국과 관련된 지명입니다. 평생을 알타이 문화연구에 몸을 바치신 박시인 선생에 따르면 이 말은 서울이나 부여와도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즉 진무천황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소호고호리(層富縣)는 소호리 → 수리와 같으며 이 말은 해뜨는 곳 즉 서라벌, 벌, 새벌[東夫餘]과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시하라(橿原)와 부여의 가셥벌도 다 같이 가시벌, 아시벌(始林), 새벌[東野, 또는 東夫餘] 등과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박시인,『알타이신화』307쪽).
위에서 말하는 이하레히코[盤余彦 : 진무천황(神武天皇)]가 까마귀[야다가라스(頭八咫烏)의 인도받아 나라를 세웠다는 문제도 전체 쥬신의 신화의 맥락에서 다시 검토합시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나라를 세우려 이동할 때 같이 같던 오인(烏引), 백제의 시조인 온조와 비류가 나라를 세우러 갈 때 함께 같던 오간(烏干), 신라의 박혁거세가 세운 나라의 임금들을 섬긴 대오(大烏) 밀 소오(小烏) 등도 모두 까마귀가 나타나고 있지요? 박시인 선생은 이것이 바로 태양의 전령사인 샤먼이라고 합니다(박시인, 『알타이신화』279쪽).
결국 일본의 신화는 단군신화 + 부여(고구려ㆍ백제)ㆍ가야 신화이며 그 부여계가 가야 지역까지 진출해서 일본으로 가서 건국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일본의 신화도 전체 쥬신의 큰 흐름에서만 보다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요.
***(5) 다시 연오랑ㆍ세오녀로**
지금까지 일본의 신화를 통해서 보면 고대 일본의 건설은 가야인과 반도부여인(백제인)들의 주도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초기에는 스사노오(가야 마이너 그룹)가 주축이 되어 동해를 건너 시마네(島根)의 이즈모노쿠니(出雲國) 등에서 일본 초기의 야요이 문화(彌生文化)를 주도했으며 후기에는 반도부여인(백제인)ㆍ아마테라스(가야 메이저 그룹)들을 중심으로 규슈를 정벌하고 그 여력을 몰아서 내해의 세토나이까이(瀨戶內海) 지역으로 동쪽으로 정벌해 나아가 야마도 시대를 열어갑니다. 사실 가야계는 제대로 된 거대국가를 만들어 본 경험이 없으므로 후에 백제계가 일본의 건국을 주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일본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다시 '일본편'에서 해드리지요).
이로써 일본의 역사는 ① 죠몬문화(繩文文化) → ② 야요이문화(彌生文化) → ③ 고분시대(古墳時代) → ④ 아쓰카 문화(飛鳥文化 : 스이코조) 등으로 발전합니다. 이 가운데 관련된 부분만 좀 구체적으로 봅시다.
야요이 문화(B. C 200년~A. D 300년)는 일본의 농경문화가 시작된 것을 말합니다. 기원전 3세기경 한반도로부터 북부 규슈에 전래된 벼농사와 금속기 문화는 열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고 나라가 출현하기 시작하죠. 이전의 죠몬(繩文) 토기를 대신해서 야요이 토기가 이용되었으므로 이 시대를 야요이 문화라 합니다. 야요이 중기가 되면 군 단위 정도 크기를 가진 1백여 개의 작은 나라들이 생겨납니다(한반도에서 사람들이 엄청 갔겠지요). 이 들 나라들이 이합집산하여 30여 개국이 되는데, 이들 나라들의 우두머리들이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卑彌呼)를 맹주로 추대하여 연맹 왕국이 탄생합니다. 히미코 여왕은 239년 중국의 위에 사자를 파견하여 위의 황제로부터 친위왜왕이라는 칭호와 금인자수와 동경 100매를 하사받기도 합니다.
그 후 3 세기말, 4 세기 초에서 7세기 초까지의 시대를 고고학상에서는 고분시대(古墳時代)라 부르고, 문헌학상으로는 야마토(大和)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이상하리만치 세토나이까이(瀨戶內海) 내의 각 지역에 고분이 출현하고 그것은 이후 전국적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초기의 대부분의 고분은 전방후원분이라고 하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면서 그 규모도 점차 거대화 되어 왕권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줍니다(그만큼 정치적인 압박과 인명의 희생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르지요.
신화로만 이야기 하자면 스사노오는 야요이(彌生) 시대를 주도했으며 반도부여(백제)ㆍ아마테라스는 고분시대(야마도 시대)를 주도하는 것이죠.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瓊瓊杵尊)의 강림신화(천손강림신화) 부분은 단군신화와 유사할 뿐 아니라 그 구체적인 내용은 가야의 신화들과 흡사합니다. 마치 단군신화와 가야신화를 합쳐 놓은 형태로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면 "니니기가 하늘로부터 다카치오(高千穗) 산의 구지 후루다께(久土布流多氣) 봉우리에 내려왔다 … '여기에 나라가 있는가'라고 물어보자 그 곳의 우두머리가 '나라가 있으니 천손께서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 (『日本書紀』神代 下 9)." 라고 하는데 가야(伽倻) 신화에서는 "구지봉(龜旨) 봉우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여기에 누가 있느냐'라고 물으니 몰려든 사람들은 '저희들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김해 김씨의 족보(族譜)에 따르면, 2세기 경 김수로왕의 왕자 열 명 가운데 일곱 명이 구름을 타고 떠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같은 시기에 남부 규슈 가고시마(鹿兒島) 유적에 시치구마라는 곳에 일곱 명의 지배자가 웅거했다는 유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가야신(伽倻神)을 모시는 7개의 신사(神祀)도 있는데 이 지방에서는 옛날 가야국의 일곱 왕자가 이곳으로 와 세력을 뻗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왕가의 사학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씨는 "일본신화는 가야신화와 흡사하며 연고가 깊다"라고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최성규,「가야인의 진출」『부산일보』2000).
이제 일본 신화에 대해서 조금은 아시겠습니까? 물론 제가 분석한 것이 충분하지는 않을지라도 고대 일본과 반도 쥬신이 어떤 방식으로 교류가 있었는지는 충분히 아셨으리라 봅니다.
여기서 연오랑ㆍ세오녀의 문제를 다시 한 번 보고 넘어갑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연오랑이 먼저 가고 세오녀가 갔습니다. 이들은 부부(하나의 민족)였지요. 그런데 일본에 전해져온 아메노히보꼬[천일창(天日槍)]의 이야기를 보면 부부의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연오랑과 세오녀도 부부 사이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떠난 것으로 볼 수 있겠지요. 다시 일본 신화로 돌아가 봅시다.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는 원래 남매지만 사이가 나빠서 스사노오가 추방당하여 일본으로 갑니다. 그리고 난 뒤 한참 있다가 다시 아마테라스의 후손들이 일본으로 가서 왕권을 장악합니다. 이 과정은 스사노오를 대신하여 연오랑을 집어넣고 아마테라스 대신에 세오녀를 집어넣으면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 됩니다. 신기하지요?
결국 일본의 고대왕국이 어떻게 건국되었는지를 우리는 『일본서기』와 연오랑ㆍ세오녀의 설화를 통하여 알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래서 결국 연오랑ㆍ세오녀의 이야기는 젊고 아름다운 부부의 깊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형제간의 처절한 피의 전쟁(戰爭)을 그린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최근 저는 호미곶에 들렀습니다. 호미곶의 대표적인 브랜드인 연오랑ㆍ세오녀의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았죠. 그래서 사진도 찍고 동해의 바다 바람을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건너 일본을 생각했습니다. 우리와는 한 없이 가까운 나라인데 멀게만 느껴지는 나라 일본을 말입니다.
그런데 일본이라는 말이 떠오르자 연오랑ㆍ세오녀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조각상을 보면서도 참담하고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 암담한 쥬신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아름답게만 그려져 있는 연오랑ㆍ세오녀의 사랑이야기 속에 얼마나 많은 피의 냄새가 묻어 나오는지 말입니다.
결국 연오랑ㆍ세오녀의 이야기는 몽골ㆍ고려 연합군의 일본침공(1274, 1281), 임진왜란(1592), 병자호란(1616), 한국전쟁(1951)과 같은 처절한 동족상잔을 그린 이야기일 뿐입니다. 먼 훗날 한국전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도 언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둔갑할지 누가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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