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년 6월 14일 22회를 끝으로 중단됐던 '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연재를 만 3년만에 재개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은 을씨년스럽다. 마당에 번듯한 공연이 있는 날도, 화창한 봄날의 대낮 풍경도 을씨년스럽다. 마음에 간직된, 생애 찬란했던 젊은 날 교정의 기억이 마로니에공원을 볼 때마다 여지없이 짓밟힌다. 세상은 화려해졌고 나는 세상이 화려해지는 것을 일단 긍정하는 쪽이다. 대학 4학년 때 들어선, 주변과 너무 달라 심심찮게 돌팔매질을 당했던, 유리창이 너무 많고 건물 각도가 너무 쭈뼛쭈뼛했던 <오감도> 건물은 아예 없어졌는지 찾아보기 힘들고, 나무계단의 `역사`만큼이나 `장소`가 분명한 학림다방도 택시 타고 잠깐 한 눈 팔면 한참을 지나쳐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러서야 앗차 싶을 정도로 동숭동 대학로는 화려해졌지만, 그 모든 것을 나는 긍정한다. 더군다나 사람들의 행진이 아니라 건물들의 풍경이라면, 누추함끼리 어깨를 겯은 평화보다야 화려함과 짓밣힘의 공존이 더 역사적이고 진보적이고 미학적인 까닭이다. 하지만, 마로니에공원으로 들어서면 그런 생각은 온데간데 없고 문예진흥원 산하 그 모든 붉은 벽돌 건물의 예술적 권위조차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역시 `지금도 마로니에는`보다는 `캠퍼스 잔디 위에 또다시 황금 물결`이 명곡이다.
근데 왜 오늘따라 이런 생각이 유독?.....그래. 정진영을 만나러, 아니 정진영과 대담하러 가는 길이로구나. 맞아. 하지만, 그도 `울대` (국문과) 출신이지만, 관악산 세대라 이런 기분은 안 들겠지….요즘에야 `울대`라는 게 길게 말하면 욕 얻어 먹기 십상인, 사회적 지탄의 대상인 학력으로 전락했지만, 그나 나나 `울대 출신`이라고 욕먹기에는 좀 억울하다. 주간이 아니라 야간을 다녔기 때문이다. 대개 성공한 관료나 대기업 임원 등 `엄숙한 부류를 `주간`, 딴따라 등 놀기 좋아 하는 부류를 `야간`으로 분류한다. `울대` 주간은 정계 재계를 주름잡고 있지만, 야간은 딴따라 계에서 아직 명함을 내밀 처지가 못된다. 정진영은, 물론 배우고, 물론 배우답게 잘 생겼지만,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얼굴 상단이 미남인 채로 우락부락할 듯 하다가 하관이 빨라지면서 상큼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묻어나는,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수염 한 자락 없이도 털보 같은, 배우답지 않게 복잡한 인상이다. 목소리도 굵직한 듯 하다가 결국 여려지고, 다정다감해지고, 급기야 사분사분해진다. 자근자근 씹는 법은 결코 없다. (문성근의 `그것이 알고 싶다`가 깐깐하고 이지적인 탐문수사조라면, 정진영의 그것은 다소 수줍은, 촉촉한 종합 정리조다. 복장은 `캐주얼`을 넘어선 적이 없다. 하긴 요즘 `애들` 복장이 워낙 신기묘산이라 영화배우라도 왠만해서는 눈에 띄기 힘들 정도지만.
1987년 정진영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연극, 문학, 미술, 무용에 풍물까지, 온갖 장르별로 구성된 예술운동단체의 연극분과 소속이었다. 나는 시인이었다. 그때 연극운동을 주도한 것은 극단 <연우무대>였다. 소시민 혹은 주변부 삶, 혹은 통일 문제를 주로 다른 <연우무대> 작품들은 좋았다. 정진영이 소속한 극단 한강은 주로 노동자문제를 다루었고, 그가 출연한 작품 <대결>은 나를 울렸다. <대결>은 나를 울린 최초이자 마지막 `노동자연극`이 되었다. 그때 이후 나를 분노케 하거나 슬프게 한 `노동자연극`은 많았지만, `울렸던` 작품은 없다. 예술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엄청나고 너무 가까운 노동운동 `사건`들이 잇달아 터져서 그랬고, 노동자연극운동이 `프로`보다는 `아마`를 거의 의식적으로 지향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문소리는 어디 출신인가?.....문소리도 <한강> 출신일 걸요?.....그랬나? 그럼 문소리를 초대할 걸 그랬네….어쨌거나, 정진영이 연극을 떠나 영화판으로 뛰어든 것은 노동자연극의 아마추어리즘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 아닐까? 그러나, 그의 고민은 한층 더 진지하고 넓고 깊었다. 극단 <한강>에 있으며 파업 현장을 다니며 공연을 하던 때는 그에게 굉장히 기운이 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동구권사회주의 몰락의 충격이 운동권을 크게 흔들었고 그도 크게 흔들렸다. 어느날 지하 한마당 극장에 공연을 하러 들어가는데 문득 어떤 깨달음이 그의 뇌리를 스친다.. 내가 세상을 잘못 보고 있구나….이것은 흔히 말하는 전향과 다르다. 그는 한참 동안 연극 활동을 중단했고, 이창동 감독영화 <초록물고기> 연출부 막내로 일하다가 주인공 한석규의 형(트럭운전사)을 맡기로 한 배우가 개런티 문제 때문에 출연을 거부하자 `우연히` 그 역을 대신 맡게 되었다. 그럼 네가 해라. 어차피 매일 나와야 하니까….이창동은 그렇게 말했다지만, `어차피`가 진심일 리는 없다. 이창동은 가끔 답답하지만, 치밀하고 꼬장꼬장하고 배우를 보는 눈이 무척 밝은 감독이다. 그때까지 정진영의 영화 출연 경력은 세 편인데, 1991년 데뷔작 <닫힌 교문을 열며>는 극장 상영용이 아니라 순회 공연용이었으므로 연극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지만, 연기력보다는 운동성을 더 많이 요구한 작품이었다. 1994년 출연작 <로자를 위하여>는 독일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룬 단편영화였고, 1995년 출연작 <테러리스트>는, 그의 말을 빌자면, `정진영이 보이지 않는다.` 그랬지만, 이창동은 정진영의 `배우 기질`을 `제대로` 알아본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연은 필연이 되고, 대역은 역사가 된다. 첼로 연주자였던 토스카니니는 지휘자의 급작스런 사고를 맞아 악보 암기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지휘자 대역으로 등장,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 중 하나로 남았다. 칼라스는 살인적인 다이어트를 감행해야 할 정도로 뚱뚱한, 무명의 소프라노였지만, 역시 대역으로 화려하게 등장, 사람들이 그녀 몸무게를 전혀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절창을 뽑냈고, 끝내 20세기의 미녀-마녀 디바로 남았다. 아니 먼데 갈 것도 없이, 문소리는 <바람난 가족>에 김혜수 대역으로 출연, 오락영화에서도 국민배우 자리를 굳혔다. 송강호 또한 <초록물고기>의 단 한 장면, 보스의 명령에 어영부영 반발하며 어정쩡하게 오징어를 씹다가 보스에게 얻어터지는 그 단 한 장면을 놓쳤다면, 장안의 화제를 몰며 중고등학생들이 녹음을 하여 듣고 또 듣던 <넘버3>의 무지막지한 `어버버 대사`를 챙길 수 없었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초록물고기>는 아직, 정진영에게 `우연`처럼 보였다. 고등학교 때 그의 꿈은 영화감독이었고, 그의 배역에 송강호급 계기가 없었고, 무엇보다 그는 여전히 꿈이 영화감독이었다. 나한테는 연출부 일이 더 중요한데….이러다가 죽도 밥도 안돼지.…하지만, <초록물고기>는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사회 경험이 전혀 없던 그가 보다 넓은 영화 세상과 영화 제작 상황을 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그런 와중 직접 쓰던 시나리오를 읽다가 보다 본질적인 깨달음이 온다. 내가 세상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구나. 충무로 영화감독을 하겠다는 것은 운동권 연극과 달리 뜻이 맞고 제한된 관객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웃고 우는,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보여줄 영화를 만들고 그들에게, 그들과 얘기하겠다는 건데, 내가 세상 일과 세상 사람들 삶과 아픔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고 심지어 사랑하지 않고 있구나….이 깨달음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시 하지만, 영화는 계속 `죽도 밥도 안되고`, 젊은 날 청춘의 시련을 결혼으로 갈무리하고 아이가 생겼을 때 집에 쌀이 떨어졌다. 그는 다시 연극배우로 나섰고 한 두 달 공연을 했는데 손님이 거의 안 들었으므로 연극은 망했지만, 그는 거금(?) 백 십 만원을 받았고, 그것보다, 연기를 즐거워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신의) 가난이 (세상의) 아픔을 사랑하게 만든 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쯤 되었는데도, 행운이 안 찾아온다면, 운명이란 창녀에 불과하다. 그리고,, 창녀 소리를 듣기 싫었든지, 행운이 찾아왔는데, 그것이 김유진 감독영화 <약속>이었다. 서로 사랑하고 연애하는 조폭 두목 박신양과 여의사 전도연의 소름 끼치도록 자연스러운 연기 사이 그의 `의리파` 연기는 아직 개성파 배우 틀을 완전히 벗지 못했지만, 둘 사이를 충분히 조절한다. 이것은 그가 확실한 `조연급`에 안착했다는 뜻이다. 과연 그는 <약속>으로 1998년 청룡영
화제와 1999년 대중상 남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상업영화는 대중에게 위로가 되면 족하다. 두 시간 동안 대중이 즐길 수 있으면 족하다. 비디오를 보면 FF라 해서 2배속, 4배속, 혹은 8배속으로 돌리는 기능이 있다. 예술이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은 아니고, 리얼리즘도 현실을 반영하는 정신으로, 그냥 베끼는 게 아니라 어떤 입장으로 그걸 다시 펼치는 것이라 본다. 굳이 분류하기가 좀 그렇지만, 예술영화란 8배속 혹은 16배속인데, 그래서 보통 관객들은 이해하기가 힘든 법인데, 나는 예술영화도 하고 싶지만, 어쨌건 대중영화 혹은 상업영화는 최소한 2배속 혹은 4배속 정도로 관객의 정신을 고양시켜야 한다고 본다…`요즘 상업영화`에 대한 그의 생각 첫 대목은 그저 그렇지만, 이어지는 비유는 의미심장하다. 옛날에 연극을 할 때는 영화니 연극이니 하는 것이 사람을 치유하는 약이라고 생각했지만, 상업영화를 하면서, 내가 하는 것은 이제 술이라고 생각했다. 술은 안 먹는 사람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좋은 술과 나쁜 술이 있다. 이왕이면 좋은 술을 만들자. 요즈음은, 특히 스크린쿼터 공부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고 있다. 이제 내가 하는 영화나 연극은 차(茶)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2배속 혹은 4배속으로 대중의 정신을 고양하는 것은 `예술영화`를 만드는 일보다 훨씬 더 힘들다. 그의 `술의 영화는 대체로 코메디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성공적이었다. 장진 감독영화 <킬러들의 수다>(2001년), 박철관 감독작품 <달마야 놀자>(2001년), 이준익 감독작품 <황산벌>(2003년), 육상효 감독작품 <달마야 서울가자>(2004년)는, 숱한 조폭 코메디 영화의 일부가 아니라, 조폭 코메디의 홍수 속에서 엉뚱함과 재치, 난데없음과 절절함, (성과 욕의) 적나라함과 앙증맞음을 겹치는 대사, 과감한 생략, 절묘하게 양식화한 연기력으로 조폭 코메디 장르를 전혀 한국적인 코믹 환타지 장르로 격상시킨 수작들이고(그것은 <조폭마누라>도 <가문의 영광>도 그렇다), 이 영화들 속에서 정진영은 안면 근육을 약간씩만 풀어 주는, 자연스러워도 코믹하고 조금 어긋나면 더 코믹한, 그리고 재빨리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면 더 코믹한, 어떤 `고요=코믹`의 경지를 보여주면서, 주연급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가 말하는, 하고 싶은 `차의 영화`는 물론 휴먼 드라마다. 영화를 하면서 오히려 영화를 배우는 편이다. 솔직히 난 아직도 내 연기가 불만스럽다….그럴 것이다. 25년을 글만 써댄 나도 내 글이 불만스러운데…. 평생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는 김유진 감독영화 <와일드 카드>(2003년)를 찍을 때 양동근의 연기력에 매우 놀란 듯했다. 그럴 것이다. 양동근이야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김운경 일일드라마 <서울 뚝배기> 시절 이미 의뭉한 아역으로 양아치 역의 전설 주현과 맞짱 뜨던 강자다.
예술 `행위`는, 가상현실보다 더욱, 다른 삶을, 죽음을 경험케 한다. 글쓰기 행위가 정신적 가상현실을 경험케 한다면, 연기예술은 육체적 가상현실을 경험케 한다. 영화는 어떤가? 제작은 영화를 닮지만, 상연은 소설을 닮았다. 문학을 하다 연극으로 전환한 배우가 영화를 찍고, 다시 그 영화화면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감상할 때, 그는 도대체 몇 단계의 죽음을 겪는 것일까? 정진영의 남다른 생애와 남다른 예술 이력과 남다른 외모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알고 싶다` 진행 경험까지 생각하면서 나는 약 3천 년 전,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가 합쳐질 때 생긴 이집트 신화지만, 그 복잡하고 정교한, 온갖 신화를 집대성하고 맥락을 찾아준 그리스신화를 포함한 모든 신화에서 유독 `최초의 단편소설`로 평가 받는 `두 형제 이야기`의 주인공 바타를 떠올렸다.
자칼의 신 아누비스와 암소의 신 바타는 형제지간으로, 동생 바타는 힘이 매우 세고 동물의 말을 알아 들었다. 아누비스 아내가 시동생 바타를 유혹하다 거절당하자 오히려 시동생이 자기를 욕보이려 했다며 남편에게 거짓 고한다. 아누비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창으로 동생을 찔러 죽이려 하자 바타는 태양 신 아텐에게 도움을 청하고, 아텐은 두 형제 사이 악어가 우굴거리는 강을 놓아주는데, 강 한쪽에서 동생 바타가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의 남근을 잘라 버리자 진실을 깨달은 아누비스가 아내를 죽인다. 바타는 아카시아 골짜기로 가서 나무 꼭대기에 심장을 감추고 집을 짓고 혼자 살았다. 어느날 바타를 찾은 아홉 신들은 그가 홀몸인 것이 가여워 아내를 구해주는데, 거룩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지만, 정욕에 불타는 여인이었다. 신들이 예언한다. 그녀는 칼을 맞고 죽을 것이다… 바타는 아내가 너무 마음에 들어 애지중지했다. 내가 사냥 나간 동안에는 집 밖으로 나오지 마오. 바다가 당신을 잡아 채 갈지 모르니까…. 바타가 그렇게 조심을 시켰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고 정말 바다가 그녀를 쫓아오고 그녀는 간신히 도망쳤으나 바다 손아귀에 머리카락을 한 웅큼 잡혔다. 바다는 그 머리카락을 이집트 해변에 내려놓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향그러운 내음까지 풍기니 파라오의 세탁꾼들이 그것을 파라오에게 바쳤다. 파라오는 머리카락에 홀딱 반하여 나라 안팎으로 사람을 보내 머리카락 임자를 찾게 하고, 파라오가 보낸 사자가 바타의 골짜기로 밀어 닥친다. 바타는 그들을 모두 죽였으나 한 사람이 빠져 나가 파라오에게 장소를 알려주니 파라오는 군대를 보내는 한편 보석을 노파에게 들려 보내어 바타 아내를 유혹했다. 바타 아내가 남편을 배반한다. 소나무 위에 바타 심장이 있어요…. 그녀가 그렇게 일러 바치고 파라오는 군인들에게 소나무를 찍어 내리게 하고 바타는 숨이 끊겨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바타 아내는 파라오의 정식 왕비에 오른다. 바타를 찾아 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된 형 아누비스는 4년 동안을 돌아다니며 물어 물어 바타 심장을 찾아낸다. 볼품없이 찌그러든 바타 심장을 더운 물에 담그니 바타가 다시 살아나 멋진 숫소 모습으로 변했다. 바타가 형에게 부탁한다. 저를 파라오에게 선물로 가져가 주세요…. 왕궁에 도착한 숫소 바타가 왕비가 된 아내에게 자신이 바타라고 밝히자 왕비가 다음 잔치 때 파라오에게 청을 올린다. 저 숫소의 간을 먹고 싶어요. ...파라오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할 수 없이 숫소를 죽이고 간을 내오라 하고, 숫소가 죽으면서 핏방울 두 개가 왕궁 대문 옆에 떨어지더니 각각 아름다운 나무로 자란다. 파라오는 그 나무가 마음에 들었지만 왕비는 그것이 바타라는 것을 알아 채고는 다시 파라오에게 청을 올린다. 저 나무를 베어 가구로 만들어 주세요…. 가구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쓰러 트릴 때 왕비가 실수로 조각 하나를 삼키니 덜컥 임신이 되었다. 그리고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그리고 파라오가 죽자 그 사내아이가 말한다. 내가 바로 바타다…. 바타는 왕비가 된 아내를 처형하고 30년 동안 이집트를 다스렸다. 그리고 아누비스가 그 뒤를 이어 다스렸다.
이 이야기가 `소설`로 평가받는 것은 여러 겹의 `환타지=죽음` 때문이다. 영화가 `환타지=죽음` 속을 유독 파고드는 장르라는 말이 맞다면, `두 형제 이야기`는 분명, 3천 년 전의 `영화적 상상력`을 보여주며, 이런 영화적 상상력이 내내 발전하다가 19세기 과학 기술의 발전과 결합, `영화`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은, 나르키소스 신화가 `사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난 정진영이 정말 `바타` 같았고, 정진영은 위 글을 읽으며 `짜릿짜릿`했다고 했다.
환타지가 원래부터 영화 예술의 동력이라면, 환타지를 소재로 한 영화, 이를테면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는 결국 동어반복 아닐까? <메트릭스>는 가장현실의 미래라는 소재가 어느 정도 판타지적이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더욱 판타지적이라 그럴 듯 하지만, 앞의 두 영화는 `소재=판타지`의 재현에 그치고 있지 않을까? 이것은 (예술영화가 아니라) `대중예술``로서 영화의 발전에 역행하는 흐름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차분하고 균형이 잡혔다. `두 형제 이야기`는 놀라운 원형의 이야기 같다. 세상이 복잡해진다지만 오히려 원형을 까먹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든다. `판타지영화 `가 신화적 원형을 많이 갖다 쓰면서 그것을 그냥 그림화하는 것이 영화적 상상력을 악화시키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판타지 전략이 상업적 전략인 측면도 있지만, 시각예술장르로서 영화가 갖는 치명적인 핸디캡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판타지 현상이 영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 장르적 특성이라고 본다. 어떤 도화지에서 시작하는가의 차이 아닐까. 어떤 장르는 파란색 도화지에, 어떤 장르는 빨간색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빨간 도화지에 파랑 크레용을 칠하면 이상해지지 않겠는가. 2배속이 4배속으로 발전해야지, 4배속이 2배속으로 물러나서는 안 될 것이고, 예술을 누리고 즐기는 것도 소정의 교육이 필요하지만, 앉혀놓고 마구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보고 읽고 즐김으로써 수준이 높아져야 하고, 그렇다면 예술종사자들은 당연히 수준을 높여야 하고 높일 거라고 본다…..청중들의 질문에 정진영은 `나는 무술은 못한다`고 잘라 말했고 `성룡이나 이연걸도 대역이 있다`고 소개했다. 영화라는 게 가짜를 엮어 진짜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다…..소화하기 힘든 역이나 애착이 갔던 역은 아직 없다…. 하긴 그는 아직 연기자로서, 영화 속에서, 파안대소를 한 적이 없다. 역할이 못마땅했다는 뜻은 물론 아니고….`이념영화`를 다시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내가 듣기에 다소 `무례한`(?) 질문에 그는 `동의하는 이념이라면 물론. 그러나 나의 이념은 다양함을 인정하고 인권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이념의 설파가 아니라 감동적인 전달이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완성도와 진정성이다. `라며, 앞의 `약과 술과 차`의 명비유를 되풀이했다.
PS. 어줍잖게 선배 의식이 낭만적으로 발동, 관악산 세대에게 동숭동 문리대 시절, 특히 학림 시절을 알으켜주고 싶어서였을까? `정진영 강연`을 마치고 우리는, 오래간만에 그를 찾아온 옛날 연극반 동료들과 함께, 학림다방에서 자연스레 술판을 벌였다. 술에 절은 정신이 아득해질수록, 정진영이 정말 바타로 보인다. 그의 동료들은, 예술을 너무 오래 떠나 있었는지, 다소 생뚱맞은 소리를 툭툭 던지는 채로, 갈수록 짙어가는 신화감에 유쾌함을 보태고,, 비틀걸음이 심해진 나의 헛소리가 신화 속을 마구 헤맨다. 하긴, 그와 나의 술 이력으로 보자면, 오늘 멀쩡한 얘기를 너무 많이 했다. 야, 진영아. <파트너>의 정진영이 니가 아니고 딴 사람이라며? 혹시 장진영 아니냐?.....아녜요.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인 것 같더라구요….장진영이 걔 괜찮지. 연기 잘하고, 멋있겠더라….요샌 영화판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서요, 프로가 아니면 발을 못 붙여요….그런데, 진영아, 니랑 이렇게 술 먹고 있으니 온갖 근심이 사라진다?...... 장진영도, 마침내, 영판 딴소리다. 그러니까 그냥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하시지. 괜한 얘기를 시키시고 그래요. 체질에 안 밎게…. 아니, 그게 아니고, 내 얘기는 그게 아니고….
(이것은 문예진흥원에서 개최한 `금요일의 문학 이야기` 2005년 1기 강좌 “시인 김정환과 함게 하는 `만남, 변화, 아름다움”’의 대담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필자)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