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교육계의 ‘타는 목마름’, 민족·민주·인간화”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교육계의 ‘타는 목마름’, 민족·민주·인간화”

[기획] EBS 한국교육사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미리보기⑤<끝>

1960년 4월 독재의 총성 앞에 두려움 없이 몸을 던진 것은 교복 입은 학생들이었다. 물결치던 서울의 봄. 그 벅찬 감동을 가장 크게, 가장 먼저 안고 일어선 것 또한 학교였다. 제자들이 일구어낸 민주화의 물결을 학교로 끌어들이려는 교사들의 열망은 봇물처럼 터졌다. 이 땅 최초의 교원노조였다.

하지만 군사정권은 결코 학교의 민주화를 용납할 수 없었다. 전국 10만명의 교사 가운데 무려 4만명이 가입했던 ‘4.19 교직원노조’는 불과 1년 만에 그 뿌리까지 제거됐다. 이후 수십년 동안 교사들은 칠판 앞에 서서 가슴이 두근대는 수치심을 딛고 참기 어려운 목마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교직원노조의 함성은 그렇게 잊혀져 갔지만 그것은 기나긴 싸움의 시작이기도 했다.

***교사들, 권리를 찾아 나서다**

1987년 그 해 초여름 공기는 매웠고, 최류탄의 광폭한 폭음은 오히려 잠자던 시민들의 분노를 깨웠다. 6월 시민항쟁의 대승리는 혁명과 같았다. 이후 도화선을 타고 흐르듯 사회 곳곳에서 변혁의 바람이 불며 민주세력이 조직됐다. 교육계에서도 그해 9월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가 공식출범했다. 단순한 교권주장을 넘어 교육의 기본권을 찾겠다는 선전포고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것이 10년 동안이나 계속될 전쟁의 시작이란 것은 알지 못했다.

“광주를 그때는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그러면 시로라도 이야기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5.1 시동호회’가 만들어졌는데 10명 정도 됐죠. 처음에는 선생들끼리 얘기가 시작됐죠. 지금 우리가 서있는 교단의 문제가 심각한데 우리가 매일 다른 얘기 할 게 아니라 이 얘기도 좀 해야 되는 게 아니냐. 그래서 YMCA교사회 쪽 사람들도 만나고 이렇게 해서 ‘민중교육지’가 만들어졌죠. 당시 정권은 대학내 비판의 목소리를 꺾기 위해 학원안정법을 제정했는데 이 민중교육지를 바로 분위기 조성용으로 이용했죠. 10명의 교사가 파면되고 2명의 교사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돼 실형을 선고 받게 됐습니다.” - 김진경·전 전교조 초대 정책국장(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

하지만 이 사건은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교사와 학생들은 물론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 재야 단체와 야당, 학부모 등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그렇게 모여진 역량은 80년대 교사운동을 가능케 했다.

6.29 선언으로 6월 항쟁을 무마시키고 등장한 노태우 정권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밀려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 청산 청문회를 잇달아 여는 등 5공과의 단절을 내세웠다. 곧이어 판금 서적의 해금과 민주인사 석방 등 가시적인 민주화조치도 취했다. 하지만 전교협에 대한 강경한 탄압만은 계속 이어나갔다.

마침내 1989년 5월, 교사들은 정권의 탄압 속에서 교사협의회란 틀을 벗고 교직원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전교조의 결성은 교육의 민주화와 참교육을 향한 교사들의 열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은 전교조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가입교사들을 무더기로 해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89년 한 해 동안 무려 1천5백40명의 교사가 해직됐다.

수많은 교사들이 참교육을 꿈꿨다는 죄로 학교에서 쫓겨나야 했고, 아이들은 그런 현실을 보면서 분노와 상실감을 겪어야했다. 학생들의 눈물은 선생님을 돌려달라는 농성으로 발전해갔다. 정부의 탄압 속에서 힘겨운 저항을 계속하던 교사들에게 학생들의 지지는 가장 든든한 지원이기도 했다. 이후 전교조의 투쟁은 합법화 투쟁으로 집중 된다.

왜 교사들은 그렇게까지 교원노조를 고집했던 것일까. 전교조는 이미 60~70년대부터 교육현장에서 쌓여왔던 모든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입시 지옥’이라 불리는 교육현실 속에서 교원노조는 교사의, 그리고 학생의 교육 기본권을 상징하고 있었다.

***4.19혁명의 결실이었던 ‘교원노조’**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사법처리는 교원노조가 불법이라는 근거 위에서 가능했다. 그것은 4.19 교원노조 때에도 발목을 잡았던 바로 그 논리의 반복이었다.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므로 조직적인 교육운동을 할 수 없다는 주장, 이는 교사에겐 노동기본권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60년 2월, 전국은 선거유세로 들썩이고 있었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노렸다. 당시 선거는 투표장에 형사를 배치해 공개투표를 감행할 만큼 극단의 부정선거로 치달았다. 그 틈에서 학교는 이승만 독재정권의 선거도구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 무렵, 혁명의 불씨는 대구에서 시작됐다.

“2.18시위 사건이 일어난 날이 일요일이었거든. 그날 장면이 대구에 와 선거유세를 했어요. 그런데 자유당은 그 선거유세를 못 듣게 했어. 학교에선 아이들을 ‘토끼 잡으러 가라, 청소해라’하면서 등교시켰단 말이야. 그래 아이들을 강제로 교실에 넣고 나오는데 한 녀석이 자꾸 따라오는 거야. 화장실 뒤편으로 가 ‘무슨 할 말이 있니’ 했더니 ‘왜 우리를 말리냐, 왜 데모를 못하게 하느냐’하는 거야. 할 말이 없잖아. 나도 속은 부글부글 끓는데. 그래서 내가 ‘우리는 비겁하지만 너는 용감하구나’하곤 그 녀석 붙들고 한참을 울었어.” - 이목·4.19 교원노조 초대 사무국장

학교는 교사들을 동원해 학생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불씨를 끌 수는 없었다. 대구학생 시위 소식은 곧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끝까지 강행된 3.15 부정선거는 마침내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시위 사건이 터지자 가장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이 교사들이야. 이승만 정권이 불법정권이다, 독재정권이다, 타도하라는 소리를 한 번도 못 냈는데 아이들은 그걸 했단 말이지. 교사들은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고 겁이 나서 못했단 말이지. 4.19혁명 성공 뒤 내가 있던 학교만 해도 30여명의 교사들이 있었는데 전부 사표를 썼어요. 무슨 면목으로 지금 교단에 서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느냐는 반성이었지.” - 이목·4.19 교원노조 초대 사무국장

어린 제자들을 거리로 내보내야했던 죄책감과 철저한 반성 위에서 이 땅 최초의 교직원노동조합인 대구시 초등교원노조는 그렇게 60년 5월 7일 결성됐다. 그 뒤 교원노조는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7월엔 전국적 조직망을 확보하고 ‘대한교원노조총연합회’가 조직됐다. 당시 교원노조 본부가 파악한 조합원 수는 모두 2만명. 실제로는 무려 4만여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의 하야 뒤 들어선 장면 정부는 4.19 교원노조의 합법성 여부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교사들의 노조결성은 불법이 아니었다. 노동조합법에 경찰관, 소방관, 형무관 등만 노조를 결성할 수 없다고 규정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수진영은 교원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고 거세게 저항했고, 결국 장면 정부는 노동조합법 개정을 시도, 교사의 노조결성을 금지하는 조항을 삽입했다.

이에 4.19 교원노조는 단식수업을 결행하면서 한편으로 당시 ‘2대 악법’으로 불리던 반공특별법과 집회규제법 반대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4.19 교원노조는 그렇게 학교라는 테두리를 넘어서 사회 민주화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며 합법성을 인정받았지만 1년 뒤 일어난 5.16 군사쿠데타는 이러한 교사들의 교육민주화 꿈을 무참히 꺾어버렸다.

쿠데타 성공 바로 다음날 4.19 교원노조 대표를 맡고 있었던 강기철 선생이 구속됐고, 이어 수천명의 교사가 끌려갔다. 곧 수십명의 교사들이 혁명재판에 회부됐고, 61년 6월 초에는 교원노조가 남한 정부를 전복시키고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됐다는 이른바 ‘공산화 음모’가 발표됐다. 그해 11월, 혁명재판소는 교원노조 핵심간부들에게 징역 10년에서 무기징역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했다. 길고 차가운 겨울의 시작이었다.

***학교의 민주화는 계속돼야 한다**

80년대 말 노태우 정권 아래에서 교원노조는 다시 힘겨운 투쟁을 해야 했다. 5.16쿠데타 이후 개정된 교원공무원법과 사립학교법이 교사의 노조 결성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전교조의 합법화를 위해선 노동법 개정부터 해야 했다. 전교조는 수많은 교사들이 해직돼 나가는 상황 속에서 합법화를 위한 지루한 싸움을 90년대까지 이어 나갔다.

전교조 합법화를 위한 싸움이 4년째 계속되던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섰다. 문민정부는 국민들에게 이전과 확연히 다른 학교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교육개혁’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전교조는 해직교사의 전원복직을 전제로 정부와 협상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전교조 합법화 요구를 접고 문민정부의 교육개혁에 동참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그나마도 선별복직을 내세웠다. 불법단체인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는 한 복직시킬 수 없다는 원칙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해직교사들이 형식적인 탈퇴를 통해 교단으로 돌아갔다.

김영삼 정부는 약속대로 교육개혁을 추진했다. 바로 1995년 발표된 ‘5.31 교육개혁안’이 그것이었다. 5.31 개혁안의 목표는 교육의 세계화와 경쟁력 향상이었다. 교단으로 돌아가 교육개혁 동참을 결의했던 전교조 교사들은 즉각 정부 개혁안에 반발했다. 교육의 경쟁력만을 내세우고 있을 뿐 과밀학급해소 등 교육환경에 대한 현실적인 투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1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미궁에 빠졌던 전교조 합법화 투쟁의 결정적인 실마리는 외부로부터 왔다. 1997년과 98년 전국 노조들의 총파업과 함께 노동기본권에 대한 요구가 몰아쳤다. 밀물 같았던 노동계의 총파업 투쟁은 결국 노동법 개정을 쟁취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노동권에 대한 인식변화와 더불어 교원노조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달라졌다. 최초의 야당 승리로 김대중 정부가 등장했고, 99년 1월 마침내 국민의 정부는 교사의 노동자 권리를 인정했다.

“‘가끔 칠판을 바라보면서 왜 멍하게 있었느냐.’ 지금도 제자들이 그 이야기를 많이 해요. 칠판에 쓸 때 예전에 서빙고에 끌려갔던 생각, 내 마음속에 있는 걸 그대로 했다가는 또 문제가 생겨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거죠.” - 윤한탁·전 전교조 지도위원(현 교육문화공간 ‘향’ 대표)

“우리가 목표한 것은 충실하고, 성실한 선생이 되고자 한 것이죠. 그때 우리는 노동자의 권익이라든지 경제적 이익을 보고 싸움을 시작한 게 아니에요. 노동조합은 단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 싸우는 게 아니에요. 전체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 싸워야 하고 그래야 참다운 노동운동이 되는 것이죠.” - 이목·4.19 교원노조 초대 사무국장

4.19 교원노조가 최초로 이 땅의 학원민주화를 꿈꾸었던 때로부터 45년. 어떤 시인은 그 참혹한 희생을 아파하며 ‘민주주의는 피를 마시고 자란다’고 노래했다. 하지만 숱한 희생으로 얻어진 교육기본권은 한그루 나무로 심어졌다. 아직은 연약하고 작은 나무지만 환한 햇살을 받으며, 때론 비바람도 겪으며 크고 무성한 나무로 자라기를 꿈꾸어본다.

***EBS 광복60주년 창사5주년 특별기획 5부작 한국교육사 다큐멘터리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제5부 ‘나의 권리를 찾다-교육기본권을 향한 몸부림’은 9일 저녁 10시 EBS 채널을 통해 50분 동안 방영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