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독재·자본·친일이 지운 ‘민족사학’ 되찾을 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독재·자본·친일이 지운 ‘민족사학’ 되찾을 때”

[기획] EBS 한국교육사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미리보기④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던 시기에 '차미리사'라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청각장애인이었지만 신체적 결함은 물론 여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이 땅에 민족사학을 설립해 강인하고 아름다운 민족정신을 심으려 했다. 그렇게 지금의 덕성여대 교사(校史)가 시작됐다. 하지만 몇 년 뒤 그녀의 이름은 차츰 지워지고 그 자리는 어느새 '송금선'이라는 친일파의 이름이 이를 대신하게 됐다.

대구 도심에 위치해 있는 지금의 영남대학교도 마찬가지다. 광복 직후 민족사학으로 출발했던 이 학교는 60년대 말부터 "박정희의 학교"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더니 언젠가부터 누구나 아는 기정사실이 됐다.

우리 민족사학에 대체 무슨 일들이 벌여졌던 것일까. 민족사학을 세웠던 이들의 발자취는 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일까. 망각의 정원 저 너머로 은폐됐던 우리 사학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

"'교주(校主) 박정희의 창학 정신을 이념으로 한다.' 영남학원 정관 제1조는 아직도 그렇게 돼 있어요. 그리고 뒤에 이사회를 열고 그런 과정에서 보면 대표적인 이름이 이후락 씨가 나옵니다. 그는 아직까지도 이사로 돼 있어요." 황원일 영대민주동문회장은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어떻게 사립대학을 소유하게 됐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 민족사학의 비운을 만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광복 2년 뒤인 1947년. 대구에선 또다시 '독립운동'이 시작됐다. 민족국가 건설을 향한 희망보다 좌우 이념 대립만이 가득한 시대. 지역신문 <대구시보>를 발행하던 장인환과 독립운동가 출신 최해청이 손잡고 민족정신 고취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민족사학 설립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애초 학술강좌를 열어 학생들에게 선열들의 사례를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학생들의 요구에 의해 학술강좌는 상설 야간학교로, 다시 야간대학으로 발전했다. 야간대학은 1950년 청구대학 신설로 이어졌다.

민족교육에 대한 열망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사학의 설립은 자본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청구대학 설립은 '경북포화조합'을 중심으로 한 지역 재산가들의 기부로 가능했다. 이렇게 지역유지였던 조합원들의 단결은 지역사학 설립의 모범적인 사례였다.

그러던 중 1966년 12월 말 학장이었던 최해청이 이사들에 의해 갑자기 파면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최해청이 형식적 이사로 물러앉은 바로 이듬해, 종합대학 승격을 앞두고 있던 청구대학은 공사 중이던 6층 건물이 붕괴돼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군사정권은 사고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더니 어느새 재단의 재정 비리를 조사하겠다고 덤벼들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 결국 청구대 이사들이 내놓은 자구책은 박정희에게 학교를 자진해서 헌납하는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처럼 임기를 마친 뒤 대학총장으로 노후를 보내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고, 이를 위한 뒤처리는 이후락이 맡았다.

때마침 삼성 이병철의 '사카린 밀수 사건'도 터졌다. 이병철 역시 자신이 운영권을 갖고 있던 대구대학을 박정희에게 헌납했고, 이후락은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을 묶어 영남대학으로 통합했다. 그렇게 청구대학을 세웠던 최해창의 존재는 사라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예가 영남대만의 특이한 상황은 아니라는 점이다.

***민족사학, '비리사학'으로 이름을 바꾸다**

1904년 발족한 국민교육회는 전 국민의 문맹퇴치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바로 그해 세브란스를 필두로, 이듬해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학교가, 그 다음해엔 휘문의숙 등의 사학들이 생겨났다. 알려진 명문사학 외에도 크고 작은 사학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그 정신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민족자강운동과 맥락을 같이하며 민족교육을 지향하고 있었다. 민족정신과의 결합으로 시작된 사학의 역사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이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이 지속되고 군국주의가 날뛸수록 학교는 식민지정책을 전파하는 도구로 철저히 전락했다. 그 속에서 민족교육을 고집하던 많은 사학들이 문을 닫아야했지만 미미하나마 민족교육의 정신을 이어나간 것 역시 사학들이었다.

해방공간에서 사학설립은 일제시대의 민족교육이라는 당위성을 이어받는다. 대부분의 사립학교 설립은 창학 의지를 가진 선각자와 다양한 액수의 여러 기부자들이 결합돼 이루어졌다. 이런 결합은 훗날 재단설립주체와 기여도를 둘러싸고 잦은 다툼의 원인이 됐다.

지주계급 위치에 있었던 이들은 토지개혁을 앞두고 기왕 빼앗길 바에는 차라리 이를 사학설립에 기부하는 쪽이었다. 당시 토지개혁안에 따르면 보통 토지의 경우 15%를 보상해주었지만, 학교재단에 기부할 경우는 30%를 보상해주었을 뿐 아니라 우선보상이라는 혜택까지 주어졌다. 사실상 두 배의 혜택으로 파는 셈이었다. 게다가 잘만하면 재단 이사진에 오를 수도 있었다.

한편 둑이 무너지듯 넘쳐난 향학열에 비해 학교와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와중에 미군정의 교육지원정책은 한반도에서 엘리트를 육성해 그들의 시장을 확대하는 것에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곧바로 서울대 중심의 투자가 이뤄졌고, 이로 인해 초등학교에서는 백명의 학생이 한 교실에서 북적이고, 그도 모자라 3부제 수업까지 해야 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초·중등교육에서만큼은 이른바 '수혜자 부담원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국고마저 텅 빈 가난한 시대. 고등교육과 인재양성에 사학이 담당한 역할은 적지 않았다.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수혜자부담인 바에야, 학교의 설립을 제한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따라 사학은 그야말로 우후죽순으로 설립됐다. 정부나 재단의 투자 없이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학교가 운영되는 사학 풍토가 시작됐고, 운영을 위해서는 교육보다 학생의 머리수가 더 중요해졌다. 이런 고등교육에 대한 넘치는 열망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무허가 교육기관들이 생기고, 대학졸업생들의 실업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부터 60년대 경제성장을 지나면서 지속적으로 고등교육인구는 증가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사립대학이 하나의 치부수단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사학은 민족사학이라는 자랑스러운 이름 대신 '비리사학'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우리 사학 왜곡 원흉 '독재, 자본 그리고 친일'**

1949년 6월, 남북 분할통치의 암울함 속에서 민족의 희망이었던 김구 선생이 암살됐다. 수많은 국민들이 선생의 마지막 길에 모여들었지만, 특히 홍익대 학생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었다. 3기생 전부가 운구행렬에 참석한 것이었다. 당시 홍익대학은 학생들뿐 아니라 재단측도 김구 선생과 뜻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전국을 휩쓸었던 '보도연맹 사건'이 홍익대학에도 불어 닥쳤다.

홍익대학의 최초 설립자는 이흥수였다. 그는 만주와 러시아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었다. 초대이사장을 맡았던 정열모 역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됐던 민족지사였다. 하지만 보도연맹 사건 뒤 홍익대에는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학무국장이었던 엄상섭을 비롯해 윤성순 등이 이사로 들어왔다. 이로 인해 홍익대는 오늘날까지 학교 설립에 대해 두 가지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1947년 11월 대종교의 지도부였던 이흥수는 1억원이라는 거액을 투자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1억원은 정식대학교를 조성하는데 필요한 액수였다. 2년 뒤인 1949년 문교부로부터 홍익대학 설립인가를 받았다. 곧 한국전쟁이 터졌지만 부산피난시절에도 학교는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1956년 운영난을 이유로 이흥수 이사장이 물러나고 당시 청년실업가이며 정치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도영이 새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부패정치인 이도영은 4.19혁명 이후 학생들에 의해 쫓겨나고 재단의 모든 재산을 학교에 기부하기로 했다.

하지만 5.16쿠데타는 이 모든 것을 어그러뜨렸다. 혁명위원회는 홍익대에 관선이사를 파견하더니 불과 몇 달 뒤 학교를 다시 이도영에게 넘겼다. 조건은 3백만원을 학교에 투자한다는 것뿐이었다. 3백만원은 당시 서민용 집 한두 채 값밖에는 되지 않는 돈이었다. 이도영은 그나마도 결국 절반 밖에 투자하지 않았다. 이도영은 이후 73년 사망하기까지 별 문제없이 이사장의 위치를 누렸다.

홍익대의 본격적인 '역사 지우기'는 이도영이 사망하고 5~6년 뒤부터 진행됐다. 이도영의 동상이 세워지고, 1979년에 발행된 자료에는 돌연 설립자가 이도영으로 바뀌었다. 1983년 학교 역사를 정리한 <도솔 37년사>에는 홍익대의 전신인 1946년 홍문관 시절을 홍익대학의 역사 속으로 편입시켜 홍문관을 시작한 양대연을 창설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는 건너뛰어 바로 1956년 이도영 이사장의 홍익대 설립으로 기록된다. 홍익대학 역사 속에서 독립운동가 이흥수는 지워진 것이다. 기록이 지워지자 역사는 지워졌다. 만주벌판의 찬바람을 가르며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학교를 일으켰던 이흥수와 그를 지원한 대종교의 민족정신은 이제 학교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한편 이에 대해 홍익대학교측은 "기록관리 소홀로 인한 단수누락이었다"며 "2001년 요람부터는 이흥수 선생을 2대 이사로 기록하고 있다"고 해명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 지우기'와 '학교 주인 바꾸기'는 홍익대만의 역사가 아니다. 다른 사학의 역사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사학재단의 변신은 정치권력의 흐름과 호흡을 맞추었기에 어렵잖게 가능한 일 이었다.

"4.19 직후에도 사학민주화 움직임이 한번 일어났지만 그게 5.16 때문에 완전히 짓밟혔죠. 그러다가 다시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면서 그걸 계기로 각 대학마다 교수협의회가 만들어지고, 총장 직선제가 도입되면서 구성원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마련됐어요. 그러자 위기의식을 느낀 재단은 89년 사립학교법을 개악해 분출되는 민주화 역량을 법으로 막으려고 했던 거죠."

사립학교법 개악되던 89년 당시 이에 저항했고, 다시 97년 학생들과 함께 학원민주화 투쟁을 벌였다가 재단측에 의해 교수재임용 과정에서 탈락했던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는 우리 사학의 민주화 역사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 교수는 제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지리한 투쟁 끝에 결국 복직, 지금은 사학 최초로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서고 있다.

"우리 뿌리를 한번 찾아보자. 송금선이 친일파라는 것은 많이 아는 얘기죠. 하지만 차미리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죠.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건지 연구해 본 겁니다."

한 교수는 본격적으로 기록을 찾기 시작했고, 비로소 차미리사라는 아름답고 강인한 여인을 만나게 됐다. 그녀는 중국유학시절 청각장애라는 비극을 맞았지만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세우고 대중 속에 몸을 던져 민족교육운동을 펼쳤다. 그녀는 교육운동가요, 여성운동가인 동시에 독립운동가였다. 당시 언론은 그녀가 설립한 학교를 '순조선적인 학교'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덕성여대 창립자로 알려진 또 다른 인물 송금선. 차미리사가 물러나고 송금선이 이사장이 되자 조선총독부는 성명서를 내기까지 했다. 일개 사립학교의 주인이 바뀌는 일에 "축하할 일"이라는 공식입장을 밝힌 것이었다. 송금선은 차미리사가 타계하자 최은희라는 작가를 통해 그녀의 평전을 쓰게 했다. 목적은 '그렇게 훌륭한 선생이 송금선처럼 훌륭한 분에게 다시 학교를 넘겨줬다'며 스스로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통성 부여의 필요성은 1세대를 지나가면 그 필요성이 사라진다. 송금선의 아들은 대를 이어 이사장에 오르자 아예 설립자를 송금선으로 바꾸고, 창설자인 차미리사를 지워버렸다.

차미리사의 이름은 현재 덕성중·고등학교에만 남아 있을 뿐 덕성여대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 독립 유공자 기록에조차 그 이름이 남아있지 않았다. 사학의 역사이며, 동시에 우리 근대역사의 한 조각인 차미리사 여사의 복원이 진행되자 기존의 비리재단은 학교를 떠났다. 한 교수의 연구는 1955년 창설자의 죽음 뒤 무려 반세기동안 지워졌던 역사를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 땅 사학의 미래에 희망을 심는 작업이기도 했다.

현재까지 잊혀지고 멍들어온 사학의 역사 속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이었다. 이제라도 학교의 주인인 학생들에게 진실을 돌려주어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먼저 지워진 역사는 복원돼야 한다. 사학의 투명한 운영을 위한 제도적 장치와 합의 또한 절실하다. 앞 세대가 남긴 기록은 훗날 역사가 돼 올바로 기록돼야 하기 때문이다.

***EBS 광복60주년 창사5주년 특별기획 5부작 한국교육사 다큐멘터리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제4부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사립학교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는 2일 저녁 10시 EBS 채널을 통해 50분 동안 방영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