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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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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15>

추래암(墜來巖) 암각화에 대하여 - 속리산 법주사

도는 사람을 멀리하려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고(道不遠人人遠道),
산을 속세를 떠나고자 않는데 속세는 산을 떠나는구나(山非離俗俗離山).

속리산의 이름을 설명해 주는 고운 최치원의 시이다. 속세가 산을 떠난 그곳에 있는 절의 이름이, 법이 머무른다는 법주(法住)이다. 법이 바로 진리이고 보면, 속세가 떠난 산에 진리만 오롯이 남은 셈이 된다. 속리산 법주사는 그런 곳이다.

법주사를 가려면 대개 보은을 거치게 된다. 보은 읍을 지나 열두 구비 말티재를 꼬불꼬불 넘어서면 길은 잠시 내리막인가 싶다가 이내 평평해진다. 길 따라 가다보면 정이품송이 나오고 이어 널찍한 개활지에, 관광단지가 펼쳐진다. 그 단지 끝 주차장에서 법주사 길이 시작된다. 속리산 깊은 곳에서 시작된 계곡에는 물도 제법 흘러내리는데 계곡 입구에서 다리를 건너면 5리 숲길이다. 길은 순한 계곡을 따라 이어지고, 울창한 숲이 서늘하게 길을 그늘지워 준다.

법주사에는 볼거리가 많다. 나는, 법주사에 딸린 전각이나 유물들을 꼽기에 앞서 절이 자리한 곳, 그러니까 절의 앉음새 자체가 큰 볼거리라고 생각한다. 서쪽 보은읍에서 말티재로 넘어가든, 남쪽 외속리에서 삼가저수지를 거쳐 넘어가든, 아니면 북쪽 괴산에서 화양구곡을 거쳐가든 간에, 일단 내속리에 들어서면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지세가 저절로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는데 그 아늑한 개활지의 가장 안쪽 그윽한 곳에 법주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절에 들어서기도 전에 받은 감동은, 오리 숲길을 걷는 내내 이어지다가, 금강문을 지나 절 경내에 들어서서 거기에 있는 유물들을 대하면 다시 한번 증폭되기 마련이다. 유물들도 그렇다. 국보나 보물 등 국가지정 문화재가 여럿 있지만, 그 말고도 다양한 유물들이 절 경내에 산재해 있는데 그 유물들이 신라시대 것들부터 고려시대 것들, 조선시대 것들에 이르기까지 나이가 다양한 것 또한 법주사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속담에 “상놈은 나이가 벼슬”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삼국유사』 흔적들을 찾는답시고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는 나의 유물 관람 태도를 꼬집는 것 같아, 가끔 속으로 뜨끔할 때가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디 가서 유물을 관람할 때에 그 미적 가치라든가, 역사적 의미 같은 것을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함에도 나는 그런 것들보다는 유물의 ‘나이’부터 따지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것보다는 고려시대 것에, 고려시대 것보다는 신라시대 것에, 신라시대 것 중에서도 통일신라시대 것보다는 삼국시대 것에 더 관심을 보인다는 얘기다. 삼국시대 것에 들어가서는 또, 신라 것보다는 백제 것에, 백제 것보다는 고구려 것에 더 끌리게 되는데 이 경우에는 희소성 때문에 그러려니 하드라도, 유물 앞에서 그 나이부터 따지고 드는 태도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속되고 상스러운 것임이 분명하다. 이런 태도가 병폐임을 알고 있음에도, 법주사에 들어서는 즉시 이 고약한, 상놈의 관람법이 발동되는 데에는 나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다. 법주사에서 내가 유물들을 관람하는 본새를 얘기하자면 대충 이렇다.

금강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서도 거기 금강역사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상은 눈을 주지도 않고 지나친다. 다음 천왕문에서도 마찬가지다. 법주사 사천왕상은 우리나라 사천왕상 중에 최고 수준의 것으로 꼽히고 있음에도 나는 눈길 한번 흘깃 주는 것으로 그냥 지나친다. 천왕문을 나서면 바로 팔상전인데 거기에서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팔상전은 조선시대 것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희귀한 목탑으로, 흔히 화순의 쌍봉사 3층 대웅전과 함께 쌍벽으로 꼽혀 왔다. 그러나 쌍봉사 대웅전보다 규모가 더 크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쌍봉사 대웅전은 근래 화재로 소실된 후 새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팔상전이 월등한 위치에 있다. 그런 생각으로 기단부에서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 눈을 주며 한 바퀴 돎으로써 나는 팔상전에 경의를 표한다. 그 다음 거기서 서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법주사의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미륵대불이 서 있다. 내 눈길은 그러나 거기에 얼마 머무르지 못한다. 이 불상이 1990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1939년에 미륵불 조성공사가 착수되었으나 중도에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63년에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대장’의 시주로 시멘트로 세워졌다. 그런데 시멘트 재질의 불상이 30년도 채 버티지 못하여 1990년에 청동으로 다시 세워졌고 최근에 개금(改金)까지 한 것이다. 그런 불상에서 연륜 같은 것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쉽게 눈길을 돌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륵대불 서 있는 자리가 원래 용화보전이 있던 자리였다는 것까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법주사의 가람배치가 얼핏 보매는 금강문과 팔상전, 대웅전을 잇는 남북의 축이 주축인 듯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미륵대불과 팔상전을 잇는 동서의 축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지금 미륵대불이 서 있는 옛 용화보전 자리가 법주사의 정신적인 중심점이라는 얘기다. 용화보전이 2층 35칸으로, 2층 28칸의 대웅전보다 더 규모가 컸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한창 보수공사 중인 대웅전은, 정방형 사모지붕의 원통보전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국보로 지정된 팔상전과 어우러져 법주사 목조 건축물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법주사에서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된 것들은 이들 목조건축물 뿐만이 아니다. 많은 석물들이 또한 국보, 보물 등으로 지정되어 있다. 나는 법주사 넓은 뜨락을 느릿느릿 거닐면서, 흩어져 있는 석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를 좋아한다. 대웅전 앞 사천왕상 석등에서는 거기 새겨진 부조를 운문사 작갑전의 사천왕상 석주들의 그것과 비교해 보기도 하고, 국내 석탑 석등에 조각된 사자상 중에서는 가장 뛰어나다는 쌍사자석등의 두 마리 사자의 조각에서는 그 뒷다리 근육의 사실적인 표현에 감탄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향로공양을 하는 희견보살상과, 돌로 연못을 조각한 석연지(石蓮池)의 두 유물이 옛 용화보전을 좌우에서 장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법주사가 미륵신앙의 도량이었음을 새삼 확인하기도 한다. 이밖에 물을 담아두는 커다란 석조를 비롯하여, 몇 천명의 밥을 지을 수 있다는 커다란 쇠솥, 높이 22m에 이르는 철로 된 찰주 등도 귀한 유물들이어서 둘러보기를 잊지 않는다. 이런 유물들은 대부분이 신라시대 것이라, 유물의 나이에 집착하는 나의 취향과 맞아떨어져 내가 법주사 뜨락을 서성거리는 시간은 길어지게 마련이다.

법주사 경내에서 서쪽 수정암으로 가다보면, 사리각 아래 쪽에 추래암이라고 불리우는 마름모꼴 모양의 높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의 남쪽에는 깊지 않은 부조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의좌형(倚座型)의 드문 모습에, 경주박물관의 속칭 삼화령애기부처 본존에 자주 비교되기도 하는 이 마애불을 학자들은 미륵불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바위 면에 모를 꺾어 동향을 하고 있는 바위의 위쪽에는 왼손에 구슬을 쥐고 있는 약사여래상이 새겨져 있다. 두 마애불은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마모 정도가 사뭇 달라서,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인지에 관해서는 의문이 있다.

그리고 의좌형 마애불의 오른쪽에는 희미하게 또 다른 선각(線刻)의 흔적들이 보이는데 이 선각은 광선상태가 좋을 때에만 그 모습이 간신히 드러날 정도로 마모가 심하다. 이들 선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잔등에 짐을 짊어지거나 무릎을 꿇은 소 모양의 짐승들이 분간되고, 승려인 듯한 인물도 분간이 된다. 이 선각들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그것이 『삼국유사』 의해편 ‘관동풍악 발연수 석기’조에 나오는 기사를 그림으로 옮겨 새긴 것이라는 설이다. ‘관동풍악 발연수 석기’조에 이런 기사가 있다.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떠나 속리산으로 가는데 길에서 소가 끄는 수레를 탄 사람을 만났더니 그 소들이 율사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수레에 탄 사람이 내려와 물었다. ‘이 소들이 무슨 까닭으로 스님을 보고 우는 것이며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것입니까?’ 율사가 말하기를, ‘나는 금산수(金山藪)의 진표라는 중이요. 내가 일찌기 변산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미륵ㆍ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戒法)과 참 패쪽을 받았기에 절을 지어 길이 수도할 자리를 찾고자 오는 것이오. 이 소들이 겉은 어리석은 듯하지만 속은 밝아서 내가 계법 받은 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이요.’ 그 사람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짐승도 오히려 이러한 신심이 있는데 하물며 나는 사람으로서 어찌 그런 마음이 없으리오.’ 그는 즉시 제 손으로 낫을 쥐고 자기 머리털을 잘랐다. 율사는 자비심으로 다시 그의 머리를 깎아 주고 계를 주었다. 가다가 속리산 동구 안에 이르러 길상초가 난 자리를 보고 표를 해 두었다.”

한국불교연구원에서 펴낸 ‘한국의 사찰’ 시리즈 『법주사』에서는, 의좌형(倚座型) 불상 오른쪽의 선각을 두고, “음각으로 짐 실은 말 앞에 꿇어앉은 소의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 아마 진표율사가 불경을 끌고 속리산에 들어오다가, 소가 법(法)을 구했다는 전설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싶다.”라고 하여 추래암 선각들이 『삼국유사』의 기사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 선각이 진흥왕 때 법주사를 창건했다는 의신(義信) 스님이 중국에서 불경을 싣고 온 것을 상징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그 두번째 설이다.

두 가지 설의 어느 편을 따르더라도 이 선각들은 통일신라시대 내지 그 이전에 새겨진 것임이 분명하다. 『삼국유사』에 기댄 설을 따라 진표의 행적과 결부시킨다면 선각의 제작시기는 경덕왕대인 8세기 후반이 될 터이고, 의신의 법주사 창건과 연계시킨다면 진흥왕 대인 6세기 중반이 될 터이다. 그 어느 경우든 추래암 선각들은 법주사 유물 중 최고령의 것이 된다. 그리고 의신의 창건이든, 진표의 창건이든 간에 법주사 태생의 비밀이 이 추래암 선각에 담겨져 있음도 분명해진다.

추래암 선각들을 제대로 살피려면 바위에 빛이 드는 오전에 찾아가야 한다. 뒤늦게 알게 된 이 선각들을 자세히 살피고자 나는 올 봄에만 세 번이나 법주사 걸음을 했다. 그때마다, 법주사 금강문 앞에 이르러서는, 경내에 들어서지도 않고 곧장 수정암으로 난 쪽문으로 들어가 추래암 앞에 서서 햇빛이 들기를 기다리며 서성거렸다. 그렇게 기다려서 선각들에 햇빛이 드는 모습을 살피고 나서야, 걸음을 옮겨 법주사 뜨락 곳곳의 석물들을 보고, 그런 다음에 목조건축물들을 살피곤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 나름으로 행해오던 법주사 관람 순서가 바뀌어 버렸다. 새로 바뀐 관람 순서는, 추래암 선각에서 시작하여 법주사 뜨락의 석물, 목조건축물 등등……, 결과적으로 유물의 나이 순서에 그대로 따른 셈이 되었다. 모르는 사이에 나는, 법주사 유물들을 철저하게 상놈의 관람법으로 살펴보기에 이른 것이다.
사진설명입니다.

01) 팔상전
02) 쌍사자석등
03) 추래암 마애미륵불과 마애약사여래
04) 승려와 무릎꿇은 소 모양 짐승
05) 승려와 무릎꿇은 소 모양 짐승 부분 확대
06) 짐을 실은, 여러 마리의 소 모양 짐승들(전체사진이니만큼 다른 사진들보다 좀 크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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