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1일(현지시간) "총기규제는 늦었다"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총기소지가 천부인권이라는 미국 총기지지자들의 논리를 비판했다. 칼럼은 미국과 달리 영국, 캐나다, 프랑스, 일본 등 비슷한 선진국에서는 총기소지를 제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총기소지의 자유는 천부인권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천부인권'은 일반적으로 어떠한 조건에서도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침해 불가능한 권리로 해석된다. 칼럼은 총기소유의 자유는 천부인권이 아니라 일국의 법체계 안에서 타인에 대해 일정한 수준 이상 의무를 지킬 때 보장될 수 있는 제약 가능한 권리란 점을 강조한다. 이어서 칼럼은 미국에서 '권리'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두 가지 상이한 의미, 즉 불가침한 천부인권과 경우에 따라 제약 가능한 권리를 혼재해서 쓰는 것이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칼럼은 이런 주장이 미국에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조한다. 총기소유의 자유가 천부인권이라는 개념은 미국에 뿌리 깊게 박혀 있고, 규제를 하기에는 너무 많은 총기를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 칼럼의 주요 내용이다.<편집자> ( ☞원문보기)
▲ 22일 콜로라도 주에서 열린 총기난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기도회에서 한 남성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다. 미국 콜로라도 주(州) 덴버시 인근 한 영화관에서 20일(현지시간) 새벽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으로 12명이 숨지고 50명 이상이 다쳤다 ⓒAP=연합뉴스 |
철학자 리처드 로티,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 철학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는 "사람들이 제각기 하고 있는 생각들을 하나의 머릿속에 일제히 모아놓고 결합해 보면, 이 결합물은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을 일제히 결합시켰을 때 앞뒤가 맞지 않는 분야 중 하나는 '권리'다. 많은 미국인들은 그들의 권리가 신으로부터 부여된 것이거나 인간이기에 가지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고 있다.
미 공화당 폴 라이언 의원과 그와 정치적 신념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이번 달 오바마의 의료개혁안에 관한 논쟁을 진행했을 때를 보자. 그들은 '권리'는 신이나 자연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므로 인간이 새로운 형태의 권리를 구성할 힘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의 천부적 권리가 독립선언문과 헌법에 기술되어 있다고 믿는다. 침해 할 수 없는 개인적 권리에는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할 권리'도 포함된다.
그러나 영국, 캐나다, 프랑스, 이스라엘, 네덜란드, 일본과 같은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법치 민주국가에서는 개인이 무기를 소지할 권리가 없다.
그런데 왜 미국에선 '무기소지의 자유'가 천부적인 헌법 안에 고이 간직되어 있으며 인간이기에 가지는 자연스러운 권리로 되어 있는 것인가.
무기소지의 자유는 국가를 통해 사람들이 새롭게 창조하기로 한 특별한 권리인가? 만약 그렇다면, 정부를 통해 건강보험을 가질 권리나 교육받을 권리와 같은 새로운 종류의 권리들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을 막는 것은 무엇인가.
총기 소지 지지자 중 한 명인 클리프 스턴스 공화당 하원의원은 "무기를 소지할 권리는 단지 헌법상의 권리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근본적인 기본권이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바로 다음 문단에서 그는 "총기소유의 자유는 17세기 영국에 존재했던 '수렵과 사냥에 관한 법'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의 천부적 기본권이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로 6000년 동안이나 잠자고 있다가, 대영제국 시기 수렵에 관한 법에 대한 논쟁 하나로 잠에서 깨어나 만개할 수 있는가. 그리고 총기소유의 권리를 태곳적 잠에서 깨워낸 영국인들을 비롯하여 총기소유의 자유라는 이 기본권의 과실을 즐기지 못하고 있는 95%의 무지몽매한 인류는 어떻게 된 건가?
이러한 질문에 미국 총기 소지 지지자들은 사실 모든 국가의 국민들은 총기를 소유할 천부적 권리를 가지지만,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이스라엘, 네덜란드, 일본과 같은 나라에선 정부가 이 천부적 권리를 누릴 즐거움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또 이들 나라에서 시민들이 누리는 건강보험을 가질 '권리'는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가짜 권리에 불과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충분한 설명이 아니다.
그보단 '권리'라는 단어를 쓸 때, 두 개의 다른 사용 방식이 존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첫 번째 방식은 권리를 '침해 불가한 도덕적 고려사항'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때 권리는 어떤 국가에서 살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진다고 이해된다. 권리 사용의 또 다른 방식은 일국 법체계 안에서만 허용되는 요구라는 뜻으로, 이 같은 권리를 갖기 위해선 정부 또는 타인이 모든 시민들에게 어떤 종류의 대우를 반드시 보장하라고 명령한다. 두 개의 권리 중 어떤 것이 건강 보험을 가질 권리에 걸맞으며, 어떤 것이 무기 소지의 자유에 걸맞는 권리인가.
무기소지의 자유만이 이런 역설적 상황을 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권리는 이런 역설을 가지고 있다. 어떤 성별의 사람과도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질 권리는 신분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1980년대 중반에 대법원에 의해 "경박한 것"으로 천명됐다. 그러나 25년이 지나고 나자 이 권리는 권리장전에서부터 뻗어 나온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권리처럼 되었다. 많은 권리들이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변증법을 통해 진화한다면, 그 권리들이 어떻게 "천부적"인 것이겠는가.
▲ 미국 콜로라도주 영화관 총기 난사범 제임스 홈스가 23일(현지시간) 콜로라도주 센테니얼의 아라파호카운티 지방법원에 출두했다. ⓒAP=연합뉴스 |
그러나 최근 발생한 끔직한 학살의 여파와 함께 던져지는 이런 질문들은 부질없다. 최소한 필자에게는 이런 질문이 부질없는 발상으로 다가온다. 여러 차례의 총기난사 사건 이후로 상당수 미국인들은 총기 규제에 관해 말하는 것을 확실히 모욕적이라고 느끼고 있다. 이들은 총기 규제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총기 규제에 대한 이야기에 실제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경제학자 저스틴 울퍼가 21일 아침 트위터를 통해 "총기규제에 대해 논하지 말자. 총기규제를 논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너무 늦었을 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너무 이르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너무 이르다"는 울퍼의 말은 우스꽝스럽지만 맞는 말이다. "너무 늦었다"는 그의 말 역시 옳다. 미국의 총기규제는 너무 늦어버렸다. 총기는 결코 규제되지 않을 것이다. 저 밖에는 이미 너무 많은 총이 있고, 개인이 무기를 소지할 자유는 헌법 속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총기를 규제하자는 주장은 흡사 마리화나를 금지하자는 의견처럼 너무도 기묘한 주장이 되었다. 단 총기규제와 마리화나금지 사이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첫째, 마리화나 금지라는 터무니없는 정책을 미 정부는 무슨 이유에선가 여전히 추진하고 있다. 둘째, 총기는 실제로 공중보건에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총기규제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해소할 수 있는 '두 국가 전략'(two-state solution), 경제 위기를 막기 위한 유럽연합(EU)의 조치, 지구 온난화를 멈추기 위한 노력들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더 좋게 바꿀 수 있었지만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일들의 반열에 올랐다.
이제 미국은 정신이상자들도 쉽게 반자동 소총에 접근할 수 있고 때로는 그것을 이용해 잔혹한 행위를 저지를 수도 있는 증오와 냉소의 나라가 되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더 많은 잔혹한 사건들을 보게 될 것이며, 이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실적으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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