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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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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14>

문무왕의 유조(遺詔)를 읽고

경주의 남산(南山)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도, 경주에 낭산(狼山)이라는 산이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경주 남산에 탑과 불상, 절터, 왕릉 등의 유적들이 많은 것은 널리 알려져 있어도, 낭산에 유적이 많음을 아는 사람들이 많을 수가 없다. 그러나 유적의 밀집도로 말할 것 같으면 남산이 결코 낭산을 당하지 못한다. 낭산은 높이도 거의 없는 나지막한 둔덕에 지나지 않지만 산 전체가 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낭산의 남쪽 봉우리에는 『삼국유사』‘선덕왕 지기삼사’조에 나오는 선덕여왕의 능이 있고, 그 남쪽 기슭에 목탑 터와 경루 터로 알려진 건물 터와 두 개의 귀부 그리고 당간 지주가 있는 사천왕사 터가 있다. 낭산의 서쪽 기슭에는, 문무왕 화장터로 전해지는 능지탑(陵旨塔)이 있고 더 북쪽으로 중생사 터에 폐탑재와 마애불이 있다. 그 인근 밭둑에는 머리를 잃은 보살석상이 있었는데 잃었던 머리를 찾아 지금은 온전한 모습으로 경주박물관 뜰에 서 있다. 중생사 북쪽에는 고운 최치원의 독서당 터가 있고 그 북쪽에는 밭 가운데 목탑의 심초석이 하나 자리하고 있어 거기가 이름 잃은 절터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 절터에서 산자락을 돌아 낭산 동쪽으로 접어들면 성덕왕이 신문왕 부부와 효소왕을 위해 세운 황복사 3층탑이, 논둑에 박혀 있는 두 개의 귀부 등과 함께 어우러져 그 일대가 황복사 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황복사 터에서 진평왕릉이 보이는 동쪽 보문들 방향으로 머지않은 논 가운데 왕릉의 호석임이 분명한 석재들이 여러 개 논 가운데에 뒹굴고 있는데 이웃 황복사 터에서 12지신상 석재들이 출토된 점에 비추어, 경주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그곳을 신문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복사 터에서 낭산 동쪽을 내려오면 다시 사천왕사 터와 만나게 된다. 사천왕사 터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2백 미터 지점에는 경주 김씨 문중에서 ‘신문왕릉’으로 정한 왕릉이 있다. 그 왕릉에서 서쪽으로, 사천왕사 터에서 정 남향이 되는 곳에는 망덕사 터가 있어 두 개의 목탑 터와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이처럼 많은 유적들을 거느리고 있는 낭산은 신라 초기부터 토함산, 선도산, 남산, 금강산등 경주를 에워싸고 있는 동, 서, 남, 북 네 산의 중앙에 위치하여 신라오악 가운데 중악의 자리를 차지하여 왔다. 뿐만 아니라, 낭산은 옛부터 신유림(神遊林), 그러니까 신들이 노닐던 숲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 신라 사람들에게는 성지(聖地)로 여겨져 왔으며, 불교 쪽에서는 석가모니 이전 시대의 일곱 곳 절터 중의 하나로 꼽았던 곳이기도 했다. 이런 곳에 신라 왕실과 관련된 유적들이 즐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중에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과 관련된 것으로 전해지는 유적이 두 군데 있는데 능지탑과 사천왕사 터가 그것이다.

경주 인근에 능지(陵旨)라는 지명은 두어 곳 있어도 능지탑에 관한 문헌기록은 없다. 능지탑이 문무왕 화장터로 언급된 것은, 일제시대인 1930년대 말 ‘조선고적연구회’ 명의로 발간된 보고서에서 이곳이 화장지(火葬地) 같은 특수한 유적일지도 모른다고 언급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후 삼산오악학술조사단이 1969년부터 1979년까지 11년간 발굴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유구 중심부 지하에서 시커먼 그을음이 넓게 깔려 있는 층이 있었다 하여 이 곳을 문무왕의 화장터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는데, 현재의 능지탑 옆에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연화문 석재들이 쌓여있는 점은 능지탑의 발굴 및 복원에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문무왕의 화장터가 이 곳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점도 문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제7 ‘문무왕 21년’조에는 문무왕의 유조(遺詔)가 길게 인용되고 있다. 이 유조에서 문무왕은 태자에게 뒷일을 당부하는 중에 자신이 죽으면 “임종 후 10일에 고문(庫門) 바깥뜰에서 인도 식으로 화장(火葬)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능지탑이 위치한 낭산 서쪽 기슭을 ‘고문 바깥뜰’로 보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문무왕과 관련된 또 다른 유적인 사천왕사 터는 문무왕의 능비가 세워졌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 후기에 사천왕사 터 부근에서 문무왕 능비의 비편(碑片)이 발견되어 경주 관아에 보관되고 그 탁본이 청나라에까지 유포되기도 했는데, 그 비편은 한때 종적이 사라졌다가 1960년에 다시 수습되어 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 비편은 능비의 아랫부분인데 귀부에 꽂는 부분이 2단으로 되어 있어 현재 사천왕사 터에 남아 있는 서쪽 귀부 윗쪽의 구멍과 꼭 맞는다고 한다. 이로써 문무왕의 능비가 사천왕사에 세워져 있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사천왕사는 또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 군사가 신라를 침공했을 때 당군을 물리치기 위해 법석(法席)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여 사천왕사를 문무왕의 원찰(願刹)로 보는 입장도 있다. 다시 문무왕의 능비로 되돌아가 보면, 비편에 남아 있는 비문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어 『삼국사기』 ‘문무왕 21년’조의 유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도(道)는 귀하게 몸은 천하게 여기셨네.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경진(鯨津)에 뼈가루를 날리셨네.(貴道賤身 欽味釋典 葬以積薪……滅粉骨鯨津)”

능비의 이 대목은 또 『삼국사기』의 ‘문무왕 21년’조에 나오는, “군신(群臣)이 유언에 따라 동해구의 대석 위에 장사지냈다. 세속에 전하기를 왕이 용으로 화하였다 하여 그 돌을 대왕석이라고 불렀다.”라는 기록과 상통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삼국유사』가 더 자세하여 기이편 ‘문무왕 법민’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왕은 평시에 늘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했다. ‘나는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龍)이 되어 불법을 받들어 나라를 수호하려 하오.’ 이에 법사가 말했다.‘용은 짐승의 응보(應報)인데 어찌 용이 되신단 말입니까.’ 왕이 말했다. ‘나는 세상의 영화(榮華)를 싫어한 지가 오래되오. 만일 추한 응보로 짐승이 된다면 이야말로 내 뜻에 맞는 것이오.’"

『삼국유사』에서 이 대목은 신문왕대의 ‘만파식적’조와 이어지고 있다. 문무왕이 용이 되고자 했다는 말이 ‘만파식적’조에서 ‘왜의 군사를 진압코자 한다’는 호국의지로 표현된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이러한 문무왕의 호국의지를 기린다는 뜻에서 감은사를 비롯, 이견대, 대왕암의 만파식적 유적 트로이카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 유적을 찾기에 앞서 낭산의 능지탑과 사천왕사를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순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렇게 관련 문헌들을 찾아가며 문무왕의 유조를 읽던 중에 나는 잔잔한 감동을 느낀 적이 있다. 그것은 죽음 앞에서 문무왕이 보여준 홀가분함 때문이었다. 문무왕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김법민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절대자 앞에 선 겸허함이기도 하면서 호국(護國)이라는 짐을 벗은 후의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무왕이 자신의 장례를 화장으로 선택한 것도 어쩌면 그 홀가분한 영혼의 결정이 아닐까 싶다. 그 점은 다음과 같은 유조 귀절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운(運)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이 다름없으니, 홀연히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가는 데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 사진설명입니다.

1) 낭산 북쪽 이름잃은 절터의 목탑 심초석 @김대식
2) 복원된 능지탑
3) 능지탑 복원 후에 남은 연화문 석재들
4) 사천왕사 터 서쪽 귀부의 비신 받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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