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수’(阿利水)를 아십니까? ‘아리’는 ‘(깨끗하고) 큰’ 이라는 뜻이므로 ‘아리수’는 큰 강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바로 서울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한강(漢江)을 옛말로 ‘아리수’라고 합니다. 강 이름으로는 매우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한강은 그 길이만도 4백km가 넘는 큰 강입니다. 한강은 남한강과 북한강의 둘로 나뉘며 남한강을 본류로 하는데 강원도에서 시작하여 광대한 충주호(忠州湖)에 27억 5천만 톤의 물을 채우고 서울로 흘러갑니다.
한강은 공업용수 · 농업용수뿐만 아니라, 서울 ·춘천 ·원주 ·제천 · 충주 등 유역 도시의 먹는 물을 제공합니다. 그뿐입니까? 한강은 1백만 kw 이상의 전력을 생산하기도 하여 가히 ‘민족의 젖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 ①] 아름다운 한강의 모습
그런데 최근에 이 한강과 관련하여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났습니다.
2004년 3월 24일 서울시는 지난 2001년부터 페트병으로 공급하고 있는 서울의 수돗물에 대하여 그 이미지를 고급화하기 위해 명칭을 ‘아리수’로 변경했습니다. 그때까지 서울시가 공급하는 페트병 수돗물은 거의 60~70만 병에 이릅니다.
그런 와중에 그해 9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이 ‘아리수’라는 명칭을 두고 서울 시의원과 벤처기업간의 논쟁이 벌어진 것이죠. 서울시 의원 한 사람이 ‘아리수’가 『일본서기』 등에 나오는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에서 유래했으며 일본의 삼한정벌론(三韓征伐論)을 정당화하려고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광개토왕비문을 조작하면서 사용했던 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이에 대해서 아동용 한글교육 사이트 ‘아리수 한글’이라는 벤처 기업은 이 시의원을 규탄하면서 “‘아리수’가 일본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이 아무런 고증도 없이 보도되었으며 ‘아리수’가 한강의 옛 이름이라는 사실은 국내 학계에서 확인되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아리수(阿利水)는 한강의 옛 이름으로 고구려 시대에 한강을 ‘아리’ + ‘수(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부분을 좀 더 알아봅시다.
한강은 한사군(漢四郡)시대나 삼국시대 초기에는 대수(帶水)라 불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강의 이름이 ‘아리수’라고 한 것은 영락대제비(광개토대왕비(碑))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영락대제비는 ①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세계(世系) 및 영락대제의 행장(行狀), ② 영락대제의 정복활동과 그 성과, ③ 영락대제 능에 대한 관리방법 등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중요한 부분은 ② 정복활동과 성과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모두 8개의 정복기사가 적혀 있죠. 바로 영락대제비에는 한강을 아리수(阿利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보시죠.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부여의 잔당들(백제)’의 근거지인 여러 성들을 토벌하였다. … [토벌한 여러 성들의 이름 나열] … 그러나 ‘부여의 잔당’들은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여기저기서 대항하여 싸우니 이에 왕이 크게 노하였다. 왕은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성들을 압박하자 … ‘부여의 잔당’들은 개구멍(근거지를 낮추어 부른 말)에 숨어들어가 있다가 잔당의 우두머리(백제 아신왕)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여 옷감 1천 필과 남녀 1천명을 데리고 나와서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머슴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왕)은 이런 허물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왕은 58성(城) 700촌(村)을 획득하고 잔당 우두머리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原文]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여기서 보면 백제에 대하여 ‘잔(殘)’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 봐야 합니다. 백제(百濟)를 의미하는 말인데 이것은 부여의 잔당(殘黨)이란 듯입니다. 즉 이 당시 부여는 힘도 없이 사실상 고구려의 보호국(속국)에 불과하면서도 그 잔당들이 여기저기서 부여를 만들어서 고구려에 대항하고 있으니 이것을 성가시게 생각한데서 나온 말로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노골적으로 부여를 비난하여 ‘부여의 잔당’이라고 하지 못한 것은 고구려 역시 부여의 후예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당시 사정을 좀 더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부여의 잔당’이라고 번역 해드린 것이지요. 이 부분은 백제(반도부여) 편에서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어쨌든 한강을‘아리수’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권 25)에도 한강을 ‘욱리하(郁利河)’라고 하는데 이 ‘욱리(郁利)’라는 발음은 ‘유리[yùli]’로 나타나 결국 아리수와 유사한 발음이 납니다.
그 후 한강은 백제가 동진(東晋)과 교류하고 중국 문화를 수입하면서부터 중국식 명칭인 ‘한수(漢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천년 이상의 세월 동안 한강은 ‘아리수’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버리고 한강(漢江)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지금까지 불리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새끼 중국인’을 자처하는 소중화주의자(小中華主義者)들 덕분이라고 봐야겠지요? 이들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이 강 이름조차도 ‘한강(漢江)’이라고 바꾸어버렸죠. 서울(Seoul)도 ‘한성(漢城)’이라고 부르죠.
참, 못 말리겠습니다. 이렇게 지독한 사대(事大)ㆍ중화주의자(中華主義者)들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들은 한국이 중국의 식민지가 되면 두 손을 들어 환영할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병이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깊은 것이죠. 정말 세대가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한강(漢江)을 ‘아리수’라고 바꾸어야 합니다. 만약 혼란이 심하다면 한강의 한문(漢文) 표기를 중단해야하고 한[‘한’이란 크다는 순우리말]가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지도 모릅니다.
“김 선생, 좀 지나치게 굴지 마. 한강이라는 지명은 벌써 1천 5백년도 넘게 사용 되어 왔어?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이름을 고쳐라 마라 하는 것이 교양이 있는 소린가 말이야?”
옳으신 말씀입니다. 혼란이 심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한강을 아리수로 불러야 한다고 하는 데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몸속에 뿌리 깊은 새끼중화주의를 경계하려 함이고 다른 하나는 이 ‘아리수’라는 말 안에는 엄청난 쥬신의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1) 아리ㄱ 오손(Arig-Usun)**
칭기즈칸의 나라 몽골의 시조인 아름다운 성녀(聖女) 알랑 고아에 관해서 『몽골비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알랑고아의 아버지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사냥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아름다운 여인 바르고진을
아리ㄱ 오손(Arig-Usun : 청결한 강이라는 뜻)에서 만나 알랑 고아를 낳습니다.
그런데 코릴라르타이-메르겐에게는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 사냥을 하지 못하도록
계속 방해하는 무리들이 나타납니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사람들을 모아 코릴라르(Khorilar)라는 씨족을 만들어
성스러운 산 보르칸으로 이동합니다.
성스러운 보르칸 산은 땅이 좋고 사냥감이 풍부한 곳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코릴라르는 코리족(Kohri)에서 갈라져 나온 부족의 명칭이라고 합니다. 이 명칭은 주몽이 코리 부족에서 일단의 지지 세력을 이끌고 남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운 뒤 국명을 코리의 한 나라임을 나타내기 위해 고(高 : 으뜸) 구려(Kohri)라고 부른 것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몽골비사』에는 세 개의 몽골 기원설화가 실려 있습니다. 맨 앞에 있는 늑대 설화는 돌궐의 것을 모방한 것이지만 나머지 두 개, 즉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의 이동설화와 알랑 고아의 설화는 몽골 고유의 설화라고 합니다(박원길, 『북방민족의 샤머니즘과 제사습속』1998). 앞으로 다른 장에서 말씀드리겠지만 알랑 고아 설화는 고구려의 유화부인(柳花夫人) 이야기와 거의 같은 내용이고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한역하면 고주몽(高朱蒙)입니다. 활의 명인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메르겐은 신라의 마립간(麻立干)과 같은 말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쥬신의 마음의 고향인 바이칼 호수에는 삼십 개에 가까운 섬들이 있고 그 섬 가운데 가장 큰 섬이 바로 ‘알흔섬’입니다. 칭기즈칸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져 온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곳에는 우리 민족과 관련된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알흔섬’사람들의 말로는 이 곳이 바로 코리(Khori)족의 발원지로 부리야트족의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이동하여 만주 부여족(夫餘族)의 조상이 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합니다(제가 보기에 이들이 말하는 민족의 발생기원은 이들의 말처럼 단순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민족 이동의 방향도 이들의 말과는 좀 다릅니다. 이 점들은 앞으로 계속 분석해 드리지요). 이 부리야트족은 칭기즈칸의 종족으로 알려져 있죠. 김병모 선생에 따르면 이 종족이 한국인들과 유전인자가 가장 가까운 종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림 ②] 바이칼 호수에 있는 알혼섬에서 본 풍경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사실을 한반도에 사는 우리만 모른다는 거죠. 그렇지만 이 얘기는 동몽골이나 바이칼 지역에서는 상식이라고 합니다. 이 지역에서는 동명왕을 코리족 출신의 고구려칸(Khan)이라 부른다고 합니다(정재승 :『조선일보』2003.09.25).
다시 생각해봅시다. 이 이야기들을 왜 우리만 모르는지. 일부러 피하는 걸까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처럼 중국이 ‘부모의 나라’여서 그런가요? 그래서 중국에 누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숨긴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과거에는 영광스러웠지만 이제는 별 볼일 없다 뭐 그런 걸까요? 그런데 ‘뿌리를 찾는 일’은 볼 일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정재승 선생에 따르면 ‘알혼섬’ 바다는 바이칼호 전 지역 중 가장 수심이 깊고 풍랑이 센 곳으로 예부터 이곳 뱃길을 항해하는 상인에 의해 몸을 던지게 되는 부리야트 심청의 인당수가 있다고 전해집니다. 이 비극적인 아가씨는 ‘알혼섬’의 바이칼 인당수에 몸을 던지자 금빛 비늘을 가진 물고기로 다시 환생하여 신들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전해오는 유명한 이야기중의 하나가 ‘나무꾼과 선녀’ 입니다. 이 이야기는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와 내몽골·티베트·만주지역 등에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으나 바이칼호가 그 원류라는 점이 학계의 중론이라고 합니다(이 부분은 다른 장에서 상세히 분석해 드립니다).
***(2) ‘아리수’를 아십니까?**
‘아리수’ 이야기를 한다더니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아리수’로 돌아가 봅시다. 영락대제비(광개토대왕비)에 ‘아리수’가 나온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아리수’가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도 나온다는 것이죠.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동명성왕)은 대략 개루부 출신(‘舊唐書’)으로 2천년 전 동부여를 떠나 졸본으로 가서 나라를 건국했다고 하죠?
고주몽은 원래 부여사람으로 동부여를 출발하여 보화산(寶花山)을 거쳐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건너 제사, 묵골 등을 만나 졸본(현재의 환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삼국사기』「고구려 본기」).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엄리대수입니다. 대수(大水)는 문자 그대로 큰물 즉 강(江 : 가람)을 의미하겠습니다. 그러면 엄리(奄利[yănlì])는 무얼까요? 두 가지 각도에서 분석해야죠. 하나는 그 뜻이 무엇인지, 다른 하나는 그 위치가 어디인지 말이죠.
첫째, 엄리(奄利[)는 ‘야리[yănlì]’에 가까운 발음이 나고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엄리를 큰 강을 의미하는 ‘아리가람’을 한자음을 빌려서 표시한 말이라고 합니다(신채호,「조선사연구초」『丹齋申采浩全集(下)』1982). 즉 ‘아리수’라는 말이죠.
둘째, 엄리대수를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는 흑룡강으로 보았습니다[『塞外民族史硏究(下)』]. 그럴 수밖에요. 엄리대수는 양자강(揚子江)과 같이 큰 가람을 의미하죠. 그리고 만주와 몽골에서 크고도 큰 강을 의미하는 것은 흑룡강 밖에는 없지요. 흑룡강은 아무르강, 또는 몽골어로 에르군네무렌(Ergünne- Muren)이라고 합니다.
[그림 ③] 흑룡강의 모습
어, 그러면 흑룡강도 ‘아리수’가 되는군요. 어허, 한강(漢江)과 흑룡강(黑龍江)의 원래 이름이 같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무려 1천여 km가 떨어진 두 강의 원래 이름이 같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림 ④] 한강과 흑룡강
***(3) 어, 압록강과 ‘아리ㄱ 오손(Arig-Usun)’도 ‘아리수’라고요?**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 만주 지역의 여러 가지 연구를 진행했던 시라토리 쿠라키치는 압록강(鴨綠江)도 엄리대수라고 하였습니다. 일단은 한강과 흑룡강 사이에 있는 강이 압록강이니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아 다행이죠.
압록강에서 ‘압록(鴨綠)’도 앞에서 본 엄리(奄利[yănlì])와 마찬가지로 ‘야뤼(鴨綠[yālù])로 발음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시라토리 쿠라키치의 견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죠?
뿐만 아니라 시라토리 쿠라키치는 엄리대수의 다른 명칭으로 ‘아리수’(阿利水[아리 강]), 오열수(烏列水 [아오리에 강]), 무열수(武列水 [우리에 강]) 등을 지적하였습니다(白鳥庫吉, 「黑龍江の異名について」『塞外民族史硏究(下)』74-75쪽).
이형석 한국 하천연구소 대표에 따르면, 주자(朱子)는 천하에 황하·장강·압록강 등, 세 개의 큰 강이 있고 그 가운데 여진이 일어난 곳이 압록강이라고 했다고 합니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신당서』와 『구당서』 등에 의하면 압록강(鴨綠江)은 물색이 오리대가리처럼 파랗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압록강의 다른 이름으로는 안민강(安民江)·요수(遼水)·청하(淸河)·아리수(阿利水)·패수(浿水)·엄수(淹水)·엄리수(淹梨水)·엄체수(淹遞水)·시엄수(施淹水)·욱리하(郁里河)·비류수(沸流水) 등으로 기록되어 있고 중국에서는 ‘야루’(yalu), 또는 ‘아리, 야루장’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압록강도 아리수라고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만주족(만주 쥬신)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시 정리하고 갑시다. 흑룡강을 ‘아리수’라고 하더니 이제 압록강도 ‘아리수’라고 하였죠?
그런데 이것만 문제가 아니죠.
칭기즈칸의 선조들이 떠나온 ‘아리ㄱ 오손(Arig-Usun)’이라는 말로 돌아가 봅시다.
‘아리ㄱ 오손(Arig-Usun)’이라는 말에는 문제의 그 ‘아리’가 또 들어가 있죠? 즉 ‘아리ㄱ + 오손(물, 또는 강)’에서 오손이란 강이란 뜻이므로 결국은 수(水)로 바꿀 수 있죠? 그렇다면 ‘아리ㄱ 오손(Arig-Usun)’도 결국은 ‘아리수’가 됩니다.
그런데 칭기즈칸의 원제국(1217~1368)은 13세기에 나타나는데『몽골비사』의 이야기는 훨씬 이전의 이야기죠. 그리고 『몽골비사』에서 말하는 ‘아리ㄱ 오손’은 ‘아리수’라는 것은 알겠는데 정확한 위치를 추적하기가 어렵죠.
그런데 선비족의 원주지 가운데서도 또 ‘아리수’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타브가치[탁발선비(拓跋鮮卑)]는 북위(北魏 : 386~493)를 건설한 민족인데 이들의 원주지(原住地)가 원제국의 건설자 몽골의 원주지와 겹칠(같거나 인근지역) 뿐만 아니라 언어나 풍속이 거의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타브가치는 고구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魏書)』에는 사신이 와서 북위의 세조(世祖)에게 민족 발상지를 설명해주자 세조가 그 곳에 사람을 파견하여 축문을 새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魏書』「烏洛侯傳」). 그런데 앞서 본대로 1980년 이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그 장소 가까이에도 ‘아리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축문이 발견된 장소는 내몽골 자치구인 후룬뷔일멍(呼倫貝爾盟) 어룬춘(鄂倫春) 자치기(自治旗)의 천연동굴인데 이 동굴이 바로 아리하(阿里河)진 서북 10km 지점이라는 것이죠[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민속원 : 2001) 97쪽]. 이 지역은 대체로 따싱안링산맥[대흥안령(大興安嶺山脈)]과 샤오싱안링산맥[소흥안령(小興安嶺山脈)]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 ⑤]은 이 지역의 위치를 표시한 것입니다.
[그림 ⑤] 북위 발상지의 위치
그렇다면 북위제국을 건설한 타브가치의 한 무리들이 결국은 후일 요나라나 원나라를 건설한 것으로 볼 수가 있죠.
그런데 [그림 ⑤]를 보면 부여를 기점으로 마치 서로 대칭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부여에서 출발했다면 한 무리는 서쪽으로 한 무리는 남쪽으로 가서 ‘아리수’와 닮은 강가에서 터전을 잡다보니 우연하게도 비슷한 거리를 이동했을 수도 있겠군요.
지금까지 분석을 해보니, 이상한 일이 생겨났지요. 서울을 끼고 도는 한강도 ‘아리수’요, 압록강과 흑룡강도 ‘아리수’고, 『몽골비사』에서 칭기즈칸의 선조들이나 선비족이 떠나온 고향도 ‘아리수’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이 이야기는 그 동안 제 글을 열심히 읽으신 독자분이라면 다 아시는 내용입니다.
제가 앞의 장(‘똥고양이와 단군신화’)에서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평양이라는 지명이 원래는 베이징(北京) 부근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이 지명이 베이징 → 만주 즙안(集安) → 평양(평안도)에서 계속 나타난다고 말씀드린 바 있죠?
전문가들에 의하면 유목민들은 어떤 곳에 살다가 불가피하게 이동해야 하는 경우, 그 땅을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 자신의 뿌리나 토템과 관련된 신성(神聖)한 지명(地名)을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즉 유목민들은 이동할 때 자기 민족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들고 다닙니다. 언제 다시 돌아올 수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땅에 대한 집착도 없지요. 이것은 유목민들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떠도는 민족일수록 뿌리에 대한 집착은 한층 강하다는 사실만은 알아둡시다.
***(4) 땅 이름, 강 이름을 들고 다닌다니?**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참지 못하고 이렇게 따질 것입니다.
“김 선생, 그런 게 어디 있어. 당신 말이야. 운이 좋아서 평양이나 한강 정도는 찾아냈겠지. 예맥은 그렇다 치고 그러면 당신이 우리와 족보가 같다는 동호도 그런 게 있어?”
좋은 지적이십니다. 앞에서 지적한 북위가 바로 동호지요?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동호로 분류되는 선비ㆍ오환(烏桓)의 경우에도 이런 것은 많이 발견되고 오히려 그 때문에 현재의 우리민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하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면 좀 구체적으로 볼까요?
왕침의 『위서(魏書)』에는 오환의 영혼의 안식처로 ‘붉은 산[적산(赤山)]’이 나옵니다. 『후한서(後漢書)』에는 오환은 본래 동호(東胡)이고 그 오환의 명칭이 오환산(烏桓山)에서 유래했다고 하고 있습니다(「烏桓傳」).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오환산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죠.
요나라 때는 오주(烏州)에 오환(烏丸山)이 있었고(『요사(遼史)』「地理志」), 청나라 때 학자가 쓴 책에서는 아로과이비(阿魯科爾泌)부 오란령(烏蘭嶺) 서북쪽 1백여리 지점에 오료산(烏遼山 = 烏丸山)이 있다고 합니다(張睦, 『蒙古遊牧記』). 청나라 말기 학자 띵첸(丁謙)은 오환(烏桓)이 몽골어의 울라간(Ulagan)의 음역이라고 추정하기도 했습니다(丁謙, 「烏桓鮮卑傳地理考證」『蓬萊軒地理學叢書』1915 浙江圖書款叢書). 그런데 여기 나타나는 오환산들의 거리가 많이 떨어진 것으로 봐서 오환산이 여기저기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마치 ‘아리수’처럼 오환산도 유목민들이 그 지명을 들고 다닌 것입니다.
『요사』에 따르면 요나라의 성종(聖宗)은 오환산(적산)이 위치한 경주(慶州) 부근에 말을 세운 후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愛其奇秀) “짐이 죽으면 이 곳에 마땅히 묻혀야겠군(吾萬世後當葬此 : 『遼史』「地理志」).”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오환산이란 죽으면 돌아가는 산으로 볼 수 있겠지요. 이 산은 쥬신의 마음의 고향이자 조상님들과 그 신령들이 살고 있는 곳이죠. 참고로 말씀드리면, 오환인들이 병들었을 경우에는 주로 쑥뜸과 달군 돌로 아픈 부위를 문질렀다고 하는군요(王沈,『魏書』). ‘단군신화’ 이야기가 생각나지요? (이 부분은 ‘똥고양이와 단군신화’를 참고해 보세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오환의 ‘붉은 산[적산(赤山)]’은 바로 쥬신의 성산(聖山) 부르항산(Burkhan Khaldun), 또는 불함산(不咸山)과 흡사한 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박원길 교수의 책(『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마니즘』68~72쪽)을 참고로 하시면 됩니다.
몽골 전문가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현재 몽골에서도 지명조사의 결과 부르항(Burkhan)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다양하게 분포되어있다고 합니다. 부르항 산의 특징이 버드나무가 자라며 사람들의 출입이 가능한 나지막한 산이라는 것이지요. 『몽골비사』에서는 “주변에 수풀이 우거지고 사냥감이 많은 곳(9, 102, 103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특징들이 오환의 거주지 곳곳에 나타나는 붉은 산[赤山]과 자연 환경적 특성이 거의 일치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민족이 이동할 때 그 땅이름도 가지고 다니는 경우는 비단 쥬신의 역사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요. 앵글로색슨(Anglo-Saxon) 민족의 경우에도 영국의 요크(York = Yorkshire)를 미국에 옮겨온 것이 바로 뉴요크(New York)아닙니까? 캐나다의 뉴잉글랜드(New England)도 영국의 잉글랜드(England)를 옮겨 놓은 것이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뉴 사우스 웨일즈(New South Wales)도 영국의 웨일즈(Wales)를 옮겨다 놓은 것이죠. 미국의 버지니아(Virginia)나 오스트레일리아의 빅토리아와 퀸즈랜드, 뉴질랜드의 퀸즈타운(Queens town) 등은 모두 영국 여왕을 기리는 땅이름이죠? (참 앵글로색슨 민족도 쥬신족 만큼이나 세상을 두루 다녔군요)
아하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 지명만으로도 민족의 역사의 일부를 볼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요?
구체적으로 범(凡)쥬신은 한족(漢族)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허베이(河北) → 요동 (遼東) → 만주 → 북만주 등으로 이동하여 부여가 건설되었고, 다시 북만주(길림, 또는 농안지역) → 압록강 중류(고구려)ㆍ어룬춘 아리하(몽골) → 한반도 중부 ‘아리수’ 유역 등지로 이동해갔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한족(漢族)들의 압박이 거세어지자 다수의 쥬신이 북만주로 이동하여 흑룡강을 제2의 근거지로 삼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흑룡강을 원(原) ‘아리수’라고 부릅니다. 흑룡(黑龍)이라니 기분이 좋지 않군요. 마치 적(敵)그리스도나 사탄과 같은 느낌을 주는 말이군요.
어쨌거나 ‘아리수’라는 이름을 토대로 쥬신의 이동 방향을 추정해보면 [그림 ⑥]이 됩니다.
[그림 ⑥] 아리수의 명칭으로 본 범쥬신 이동경로
그런데 ‘아리수’(흑룡강)로 쥬신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오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신구 세력의 갈등이 생기게 되자 신세력, 또는 개혁세력들이 ‘아리수’를 떠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그들은 다시 옮겨간 곳에서도 또 그 지역에 흐르는 강을 ‘아리수’로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유목민들의 특성상 이들이 부여의 원(原) ‘아리수’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야 하는 곳의 강 이름을 ‘아리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선비(북위)나 몽골·고구려 등은 부여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무리는 후일 북위(北魏)나 원(元) 제국을 건설한 몽골로, 또 한 무리는 고구려(高句麗)로 내려온 것이죠.
***(5) 누가 한강을 아리수로 불렀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서울을 끼고 도는 한강을 또 ‘아리수’라고 부른 주체가 도대체 누구냐는 것입니다. 고구려요? 제가 볼 때는 아닙니다.
이 말은 부여의 세력들이 남하하여 잃어버린 ‘아리수’(현재의 흑룡강, 또는 아무르강)를 재현한 것이지요. 흔히 말하는 백제인(百濟人), 즉 ‘반도 부여인(夫餘人)’들을 말합니다. 사실 유사하지요. 서울의 한강은 흑룡강(아무르강)보다 폭은 좁지만 대도시를 끼고 도는 큰 강임에는 틀림이 없죠. 파리의 세느강이나 런던의 템즈강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결국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동호를 포함한 예맥족의 이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예맥족의 이동의 원인을 고조선을 기점으로 간단히 보고 갑시다. 한족(漢族) 세력이 요동(遼東)으로 몰려온 것은 크게 세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원전 3세기 초로 연(燕)나라의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무려 2천여 리나 되는 고조선의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침공으로 고조선의 영토가 많이 축소되었으며 세력이 매우 약화됩니다.
둘째, 진(秦)ㆍ한(漢)교체기에 위만(衛滿)을 비롯한 사람들이 대거 동쪽으로 밀려온 일입니다. 결국 위만이 고조선의 정권을 장악하게 되지요.
셋째, 한무제(漢武帝) 때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고조선을 멸망시키는데 이 때 한(漢)나라는 고조선 지역을 다스리기 위하여 4개의 군[낙랑(樂浪)·현도(玄菟)·진번(眞番)·임둔(臨屯)]을 두려고 계획합니다. 이 가운데 실질적인 것은 현도와 낙랑이라고 합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고구려가 세워지기까지 요동과 만주, 즉 쥬신의 고토를 이끈 나라는 부여(夫餘)입니다. 부여는 국가의 안전을 고려하여 북쪽에 위치하였으며 반농반목(半農半牧) 국가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여는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존재한 국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여는 길림(吉林) 북쪽에서 북류 송화강을 따라서 동쪽으로는 장광재령(張廣才領), 서쪽으로는 요하에 이르기까지 만주의 가장 광활하고 넓은 평원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한 나라입니다.
부여국을 건국한 동명왕은 고구려ㆍ백제는 물론이고 발해에까지 그 이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부여는 쥬신의 뿌리와 깊이 연관이 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여는 안전한 곳에 터전을 잡고 한나라와 불편한 관계를 피하면서 거의 600년에서 700년 정도의 역사를 유지합니다.
이제부터는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예맥의 이동을 사서(史書)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