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12일 밤 11시경, 경기도 중부의 3군사령부 사령관실. 소파에 앉은 이건영 사령관 옆으로 직할 헌병대장 조명기 대령(육사13기, 후에 육본 헌병감)이 다가갔다.
"잠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조명기는 대구 출신으로 하나회 멤버. 윤필용 수경사령관 아래서 수경사 헌병대대장도 지내 서울 소식에 밝은 편이다. 이건영은 서울의 상황이 또 급전되고 있나 해서 그를 바라보며 긴장했다.
"사실은… 보안사에서 사령관님을 연행해오라는 연락이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안부대장 김부연 대령(갑종)과 저는 적전에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합의했습니다."
이건영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불안했다. 그는 사령부와 공관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무장헌병 1개 소대를 증원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부하에게 직속상관을 체포하라는 반란군의 하극상 지령은 서울 특전사령부 옆에 위치한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육사 13기, 후에 합참의장과 국방장관)에게도 직접 떨어졌다. 그러나 처음 최세창은 정병주 특전사령관과의 관계로 보아 선뜻 '패륜행위'를 하기가 어려웠다.
자신뿐 아니라 특전사에서 대대장이나 여단장을 하면서 1급경력 장교로 성장해온 전두환, 노태우, 박희도, 장기오 등 특전사 출신치고 정병주를 상관으로 모시지 않은 이가 없었다. 보안사에서는 정병주를 빨리 체포하고 특전사령부를 장악하라고 독촉했다.
"여단장님, 지금 박희도 장군의 1공수여단은 국방부를 점령했고 노태우 장군의 지시로 9사단 29연대 병력이 중앙청에 진주했습니다. 빨리 특전사 일을 끝내고 3공수 병력을 장충단에 대기시키라는 전두환 사령관님의 지시입니다."
이에 앞서 1공수여단장 박희도가 병력동원을 위해 부대에 도착해 보니 부대에는 육본 지휘부와 사령부의 병력출동 금지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부사령관 이순길 준장(육사 8기)이 와 있었다. 박희도는 부사령관 이순길의 제지를 거부했다.
"나는 전 보안사령관님의 명령에 따르기로 결심했어요."
박희도가 1공수여단 병력을 이끌고 국방부 앞 삼각지 로터리에 도착한 것은 13일 새벽 1시경. 1공수 병력이 도착하기 전 국방부 보안부대장 김병두 대령(갑종 35기)은 국방부 당직총사령인 의무국장 박상빈 소장(군의 16기)과 육본 본부사령 황관영 준장(육사 12기) 준장, 헌병대장 이종민 중령(육사 18기) 등에게 사전공작을 해놓았다.
"새 계엄군이 들어오니 경비병들이 오인사격하지 않게 하라."
그런데 이 사전공작은 국방부와 육본의 당직계통을 통해 전파되느라 국방부 건물옥상에 있는 수경사의 방공포단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1공수여단 병력이 국방부 정문에 접근하자 방공포단의 벌컨포가 불을 뿜었다. 그러나 벌컨포는 대공포여서 공수단의 근접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지 못했다. 공수여단도 건물 옥상을 향해 M16으로 응사했다. 이 교전으로 벌컨포 초소의 정선엽 병장이 목숨을 잃었다.
▲ 1974년 12월 특전사 1공수여단장인 전두환 준장(왼쪽 끝)과 9공수여단장 노태우 준장(왼쪽 세 번째)이 직속 상관인 정병주 사령관의 부대장 접견에 배석해 있다. 훗날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9사단장 노태우가 수괴로 지휘한 12.12 군사반란은 옛 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총격 체포한 비인간적 패륜행위였다. |
9사단장 노태우, 구창회-이필섭에 "중앙청을 점령하라"
공수여단 병력은 국방부 건물 2층의 장관실로 올라가 출입문에 M16소총을 쏘아대면서 문을 걷어차고 뛰어들었다.
"쏘지 말라, 이놈들아. 어디다 대고 총질이냐?"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유병현 대장(육사 7특기, 후에 주미대사)이 군통수권 2인자인 국방장관실을 짓밟는 베레모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는 담력이 있는 장군이었다. 장관실에는 김용휴 차관과 합참의장 김종환 대장, 군수차관보 이범준 중장, 합참정보국장 김용금 중장 등 고위 장성 10여 명이 함께 있었으나 정작 노재현 장관은 보이지 않았다. 공수여단은 국방부를 샅샅이 뒤져 지하계단에 피신해 있던 노재현을 찾아냈다.
1공수여단이 국방부와 육본을 다 평정해갈 무렵 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육사12기, 후에 총무처장관)이 5공수여단을 이끌고 도착했다. 장기오도 하나회 멤버다.
보안사는 5공수를 효창운동장에 대기하도록 했다. 이날 밤 반란군 측은 시가전의 필수전력인 탱크부대로 이상규 준장(육사 12기)의 제2기갑여단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일반 보병병력으로 9사단 29연대와 30사단 90연대를 동원했다.
자정 무렵, 노태우 소장은 자신의 휘하인 9사단 참모장 구창회 대령(육사 18기, 후에 3군사령관) 에게 전화로 병력 이동을 지시했다. 구창회도 하나회 핵심멤버.
"1개 연대를 서울로 출동시켜 중앙청을 점령하라."
구창회는 29연대장 이필섭 대령(육사 16기, 후에 합참의장) 대령에게 노 사단장의 지시를 전달했다. 이필섭 역시 하나회다. 사단 작전참모는 불과 며칠 전 안병호 중령(육사 20기, 후에 수방사령관)에서 표순배 중령(육사 21기, 후에 군단장)으로 바뀌었다. 표순배는 하나회 멤버. 안병호는 12월 5일자로 대령 진급 예정자로 발표돼 다음 보직을 받기 위해 대기상태였다. 그러나 참모장 구창회는 표순배를 남겨 상황실을 지키도록 하고 안병호에게 지시했다.
"사단장님께서 승용차로 서울에 나가셨으니 안 중령이 야전 지프를 갖다드려야겠다."
안병호는 사단장 전속부관 김정진 중위(3사)와 함께 사단장 노태우의 지휘용 지프를 타고 병력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9사단 병력은 일산, 구파발, 박석고개를 거쳐 13일 새벽 1시 30분경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중앙청과 광화문 일대를 점령했다.
서울 근교의 30사단과 90연대장 송응섭 대령(육사 16기, 후에 합참1차장, 대장 예편)도 쿠데타 지휘부로부터 출병 지령을 받았다. 송응섭은 사단장 박희모 소장(갑종 9기)의 방으로 갔다.
"사단장님, 출동하겠습니다."
박 사단장은 초반부터 장태완 수경사령관으로부터 충정부대로서 쿠데타 진압에 협력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에게서도 부대 장악을 잘하고 있으라는 전화가 왔다. 그러나 그는 송응섭의 쿠데타 가담을 제지하지 않았다.
9사단 병력과 제2기갑여단의 탱크는 중앙청, 광화문 등 서울도심지역 관가를 평정하는 데 투입됐고, 30사단 병력은 10.26 이후 박준병 소장의 20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태릉과 고려대학교에 함께 배치됐다. 태릉은 육본 지휘부가 쿠데타 진압군으로 수도기계화사단과 26사단을 서울로 출동시킬 경우 그것을 막아야 할 길목이었다.
패륜의 현장 특전사…직속부하가 사령관실에 M16 난사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 즉사, 정병주는 서빙고분실로 압송
반란군의 작전상황은 밤 11시경 경복궁에서 보안사령부로 옮겨간 주모 장성들과 전두환의 보안사 막료들인 하나회그룹에 의해 치밀하게 짜여졌다.
당시 보안사 지휘부는 참모장 우국일 준장(통역 4기), 보안처장 정도영 대령(육사 14기, 후에 성업공사 사장),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육사 15기, 후에 민정당 사무총장),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육사 17기, 후에 민자당 의원),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육사 17기, 후에 민자당 의원), 대공처 수사과장 이학봉 중령(육사 18기, 후에 민자당 의원), 감찰실장 이상연 대령(통역, 후에 안기부장) 등이었다.
이 중에서도 전두환의 수족으로 기민하게 군사반란을 지휘한 주도세력은 정도영,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 육사 출신 하나회 장교 4인방이었다. 우국일이 참모장이었지만 이날 밤 상황조치에 필요한 정보와 자료들은 그를 거치지 않고 정도영 보안처장과 허화평 비서실장에게 모아졌다. 보안사 내부에서도 사조직 중심으로 움직인 것이다.
이들은 전군에 신경망과도 같이 퍼져 있는 보안사 요원과 하나회원들을 통해 주로 중령, 대령인 실 병력 지휘관들에게 정규지휘 계통의 명령에 따르지 않도록 공작했다. 진압군 출동은 저지하면서 반란군 지원세력을 동원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수경사령관 장태완과 특전사령관 정병주를 체포하는 마지막 작전이었다. 새벽 1시 30분경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은 1공수와 9사단 29연대 등 쿠데타 주력부대가 임무를 끝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는 대대장 박종규 중령(육사 23기, 후에 사단장)을 불렀다.
"할 수 없다. 설득할 대로 해봤는데 말이 안 통한다. 우리만 아직 임무를 끝내지 못하고 있으니 신속하게 사령부를 평정하고 장충단으로 가야겠다."
3공수여단과 특전사령부는 한 울타리 안에 약 1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있다. 3공수여단 예하 박종규가 지휘한 병력은 사령부를 향해 위협사격을 가하면서 달려들었다. 본부중대 내무반은 지붕이 타원형의 철판으로 돼 있었다. 위협사격 총탄이 철판에 튕겨나는 소리가 본부중대 병력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본부중대는 개인화기 소총을 갖고 있었으나 실탄을 지급받지 못했다. 이들은 심야에 모두 잠을 깬 채 자리에 엎드려 있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사령관실 앞에 이르자 3공수 병력이 건물을 포위한 가운데 대대장 박종규 중령이 M16을 앞에 겨눈 특공조를 양쪽에 거느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령관실로 통하는 비서실문이 잠겨 있었다. 특공조 1명이 나서서 문고리 주위로 M16을 난사해 벌집모양을 만들었다. 문을 군화발로 박차고 들어서니 안쪽의 사령관실 문은 열려 있고 갑자기 권총 탄환이 몇 발 날아왔다. 그 중 한 발이 박 중령의 손목을 스쳤다. 그러자 특공조 2명이 양쪽 문가에 몸을 붙이고 사령관실 안쪽을 향해 M16을 난사했다.
특공조가 우르르 방안에 뛰어들었을 때 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육사 25기)은 이미 절명상태였고 정 사령관도 왼팔에 관통상을 입고 무저항 상태였다. 정병주는 지프에 실려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압송됐다.
장태완, "우리가 졌다.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
헌병대위 총격에 하소곤 소장 관통상, 평생 휠체어
한편, 특전사가 유혈 평정된 직후인 밤 2시 30경 수경사령부.
공격개시선을 구축하던 중 전차에서 새어나온 '장태완을 사살하라'는 괴무전을 듣고 집무실로 피신한 장태완에게 외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국방장관 노재현이었다.
"장 소장, 왜 자꾸 싸우려고 하나, 말로 하지. 말로 해결 짓자. 병력을 모두 해산시키고 내 지시에 따르도록 해."
박희도 준장의 1공수여단이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해 노재현의 신병도 이들에게 잡혀 있었고 반란군의 작전배치가 완료된 뒤였다. 장태완은 맥이 탁 풀리면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집무실 옆 접견실로 참모들을 불러들였다.
"자네들 오늘밤 고생 많았다. 이 시간부터 일체의 전투행위와 사격을 중지하라. 모든 상황은 끝났다. 우리가 졌다. 군인은 승부에 깨끗해야 돼. 자네들은 그저 사령관이 명령하는 대로 했을 뿐이고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
장태완이 육본 지휘부 방에 가 이 사실을 알리고 접견실로 돌아와 보니 몇몇 참모들이 남아 있었다.
"가서 일들 보고 새로 오는 사령관을 맞을 준비나 하라."
장태완이 말을 마친 순간 육본 지휘부가 자리한 방에서 우당탕하고 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경사의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이 3명의 대위와 무장헌병 등 10여 명을 이끌고 육본 지휘부가 쓰던 사령관실에 들이닥쳤다.
신윤희가 경복궁 30경비단에 가 있는 헌병단장 조홍 대령으로부터 장 사령관 체포 등 수경사 평정 지령을 받은 것은 이날 밤 10시 30분경. 조홍은 그러나 이를 차마 실행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다가 사실상 상황이 끝났으나 반란군 지휘부로부터 추후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신윤희가 이끄는 무장헌병조가 습격했을 때 육본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이 접견실로 나왔다가 막 사령관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무장헌병들이 총을 겨눈 채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반사적으로 허리의 권총에 손을 대면서 소리쳤다.
"뭐야, 웬 놈들이냐?"
그러자 헌병대위 하나가 즉각 M16 한 발을 발사했다. 하 소장은 가슴을 관통당하고 쓰러졌다. 문홍구 합참본부장과 육본 장성들은 소파에 앉았고 정승화 총장의 수석부관 황원탁 대령(육사 18기, 후에 남북군사정전위 수석대표)은 양탄자 바닥 위에 앉아 있었다. 순간 황원탁이 바닥에 끌러놓은 권총 벨트에 손을 뻗쳤다. 그러자 문홍구 중장이 그의 팔을 가로막으면서 무장헌병들에게 소리쳤다.
"그만! 쏘지 말아라!"
문홍구 중장과 장태완 소장은 즉각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됐고 하소곤 소장은 병원으로 실려 갔다. 하소곤은 그 후 한반신 불구가 돼 평생 휠체어에 의지하는 몸으로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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