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아직 관광객이 들어오기 전 성안을 다시 보았다. 성벽 위에는 벌써 부지런한 산책객이 있었다.
▲ 성문 앞 초가집들. 낙안성의 새벽 풍경. ⓒ 이순희 |
성안 골목길은 어디로든 도달하게 나 있었다. 그동안 시나 사진으로만 보던 고향산천의 전형적인 장면들이 모두 보였다. 오래된 돌담 옆의 환한 꽃나무들, 초가집 툇마루, 밭뙈기들, 기와지붕의 선, 고요함.
골목길에 서있으니 황토밭에 우산 들고, 양복 입고 혼자 서 있는 신사를 그린 장욱진의 그림이 절로 생각났다. 밤엔 보이지 않던 강아지들이 나오고 아주머니들이 마당에 물을 뿌리며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 성안의 가장 큰 샘물은 옛 그대로 놔두었다. 물이 넘쳐 돌 도랑을 통해 빠져나갔다. 여기도 금줄을 쳐놨다.
▲ 동네 골목길, 장승이 있는 풍경 ⓒ 이순희 |
장승들이 요지마다 수십 개 있어 이정표 노릇을 한다. 나무가 구부러진 것, 짧고 기묘한 것까지 생김새를 기묘하게 살려 임병주 씨 등 여러 사람이 만들었다. 말을 못하는 젊은 그는 '나무로 만드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 한다'고 옆에서 설명했다.
▲ 천연염색의 자료가 되는 열매들. 아무도 없는 마당 안에 이처럼 예쁘게 차려져 있었다. ⓒ 이순희 |
아침 9시가 되니까 동헌, 자료관, 판소리 집 등의 문이 활짝 열렸다. 대장간에서 칼을 벼르던 강호인 씨가 말했다.
"이 무쇠칼은 폼은 안 나도 서양 식칼 10개가 힘을 못 당해요. 녹이 슬지 않게 하려면 들기름 칠하면 됩니다. 한국 호미는 한 가지가 3가지 도구를 합친 역할을 다 해서 서양 사람들이 정원도구로 아주 좋아합니다"라고 그는 말했었다. 지게도 한국의 대단한 발명품이다.
칼은 신문지에 둘둘 싸서 양 끝을 구부려 고정시키고 고무줄을 끼우니 포장이 완성됐다. 너무나도 소박한 거래였다. 그 외 짚 물, 판소리, 베틀 등 여러 가지를 골고루 살펴볼 곳들이 많았다. 천연염색 자료인 열매들이 바구니에 담긴 채 아무도 없는 동안에도 마당 안에 놓여 있었다.
▲ "이리 들어와, 어여 커피 묵어!" 지나가는 이에게 김귀심 할머니가 권하고 있다. ⓒ 이순희 |
사립문이 열린 이 집 저 집을 보면서 오는데 누군가 부르는 것 같았다.
"어이, 우리 집이 여긴데 왜 다른 집 들어가려고 해. 길 잃어 먹은 겨? 어여, 이리 들어와 커피 묵어!"
민박집의 할머니가 내다보고 있다가 불러들인다. 하룻밤 잤는데, 어느새 우리 집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말끔한 입식 부엌에서 설탕단지와 밥숟갈과 산뜻한 커피 잔을 내다 주며 권했다.
"술도 안 마시는데, 커피는 설탕을 많이 넣고 달콤하게 마셔야지."
낙안성의 진짜 면모는 이런 데서 나오는 듯했다. 할머니 성함은 김귀심. 과시하는 것도 없고 명랑했다.
"내가 여기서 나서 시집가고 여기서 살았어. 젊어서는 어지간한 남자보다 힘이 세서 벼 베기도 남자한테 지지 않던 큰 애기였어. 전에는 순천장까지 밀알이랑 무 머리에 이고 서너 시간 걸어가서 팔고 돈 갖고 돌아왔어. 그런데 어제 장에 가서 신발 하나 사오느라고 걸었더니, 오늘 못 걷겠어. 사람들이 '사람이 늙을 게 아니다이. 힘도 좋고 걸음도 잘 걷던 할마이가 저렇게 되었다'고 해.
9남매 낳고 살면서 죄도 안 지었는디 아들 셋을 땅에다 여 버렸어. 영감은 나 52살에 가고. 그 뒤 내가 점을 보러 갔는데, 점 치는 사람이 '영감이 나오신 게 비요' 해. 영감이 '나가 자네를 고생만 시켰는데 날 뭣 하러 찾나' 해서 내가 '영감 말소리도 들어보고 할라고 찾지? 자식도 다 결혼시켰으니 내가 이제 좋은 사람 만나보면 어떻소' 하니 '나 말고 다른 남자 만나고 그러면 내가 자네를 물에 밀쳐버릴랑께, 그리 아소' 하더라고.
영감은 대보름날 농악대에서 법구를 치다가도 내가 구경하고 있으면 '집으로 가라'고 했어. '자네가 남자들 볼 것 없다.' 하고. 내가 지금 92살인데 영감이 명을 이어놨다고 해.
어저껜 바람이 세게 불어 무서워서 저 가마솥 아궁이에 불 안 땠어. 굴뚝이 쑥 올라와 지붕이랑 닿아있어서 불똥이 튈까 봐. 우리 집 유자나무 여름에 열매 열리면 막 들어와서 따가. 워낙 사람들이 많이 오니 별사람 다 있어. 여기 나와 마루에 앉아있으면 가는 이, 오는 이 다 보고 심심하지 않아."
누군가 스쿠터를 타고 오는 소리가 났다. 할머니가 큰 소리로 불렀다.
"아무개야, 배달 가는 겨? 이리 들어와. 저이가 커피를 잘 묵어. 한잔 줘야지."
▲ 시골집의 정취가 담뿍 배어 있는 한 집의 마당. ⓒ 이순희 |
마을 이장이 마이크로 '동내리(東內里) 아무개 아무개, 와서 비료 받아가세요' 호명하는 소리가 났다. 여기는 아직 농업이 주요 산업이다. 그래도 10월의 남도음식문화축제 때는 30만 명이나 관광객이 온다고 했다.
"전남의 한다 하는 음식점들은 2,3일간 문 닫고 다 여기 오죠. 온갖 남도음식이 다 나와요."
광고는 판소리로 하는데 화사하게 머리 쪽 찌고 부채 펴든 명창이 이렇게 했다.
"팔도진미가 다 나오는 음식 잔치가 자르르르르 펼쳐진다는데, 싸게 싸게 오시요잉!"
어떤 음식들일지 궁금하지만 30만 명이나 온다는 설명에 기가 질렸다. 관광객 매표수입에 따라 성안 주민들 집 고치는 지원금이 나온다고 한다. 낙안읍성이 민속촌 분위기와 고답적 분위기가 함께 섞인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낙안성 밖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금전산자락에 이곳이 오랜 고을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표적 - 금둔사(金芚寺)가 있다. 이곳에는 야생차밭을 가꾸며 차를 논하는 지허스님이 있다. 금둔사는 6세기 백제 위덕왕 때 절이다. 성왕의 아들 위덕왕은 백제불교의 전파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 임금이다. 그의 재위 때 세워진 이 절에 7세기 백제 석불과 백제 패망 뒤의 9세기 신라 삼층탑이 있다. 절 전체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지허스님이 1983년 중건했다.
▲ 금둔사에서 야생 한국 재래종차를 일구는 지허스님 ⓒ 이순희 |
난 일본 개량종 녹차가 아니고, 진짜 한국 재래종 차를 만들어요. 맛이 어떻소? 두잔 석잔 째 가면 점점 진해지는 게 가을 하늘 새털구름 맛이라고 부르지. 이곳 삼층탑에 스님이 차 공양 하는 모습이 조각돼 있으니 여기가 우리나라 차의 본산이었을지 몰라."
스님 처소에서 차를 마셨다. 밖에는 꽃이 드문드문하면서 향기가 진한 조선 재래종 매화가 피어 있고 벌이 그 나무에 모여들어 잉잉거리는 한낮이었다. 스님의 차 맛을 찾는 일본 다도가들이 매년 오는데 스님은 "너거들이 불태운 절이다. 너거들이 재건해라'하고 차를 팔아서 중건에 보탰다고 했다.
"이곳은 철감선사와 징허대사가 수행하던 곳이고 삼층탑에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차 공양 바치는 스님 상이 있어요. 굉장히 중요한 석탑이고 우리 다도역사를 증명하는 움직일 수 없는 자료입니다. 공양받으시는 석불은 머리에 탑의 지붕 같은 광배를 이고 있어 독특하지요. 새 차가 나는 5월이면 나도 부처님에게 새 차를 공양드리지요."
절의 위쪽 벼랑을 배경으로 삼층탑과 석불이 마주하고 있었다. 삼층탑 이층 탑신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찻잔을 올리는 스님상이 새겨져 있다. 십이지상이 새겨진 금둔사 삼층탑은 경주 원원사에서 본 삼층탑과 거의 같아 보였다. 다만, 차 공양상이 있고 없고의 차이뿐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전후 김유신 등이 세운 원원사와 같은 기법의 탑이 이곳 백제 땅 낙안성 옆에도 세워진 것이다. 원원사 삼층탑에서는 당나라 군대와도 대적하는 군사적 기풍이 강하게 풍겼지만 금둔사에서 본 삼층탑은 차 공양이라는 고도의 정신적 문화가 보였다.
▲ 차 공양상이 조각된 금둔사 삼층탑 앞에서 백제 부처님께 차 공양하는 지허스님. 탑에 새겨진 공양 자세와 스님의 자세가 똑같다. ⓒ 이순희 |
이날 지허스님이 탑 옆 석불 앞에서 간략하게 차 공양을 올렸다. 스님의 그 자세가 탑에 새겨진 모습과 똑같았다.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9세기와 21세기 스님의 차공양이 그토록 일치하는 것일 수 없다. 국토 어디를 가나 깊은 역사의 궤도를 재확인하는 것에 놀라곤 한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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