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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장을 보고 낙안읍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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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장을 보고 낙안읍성으로

[김유경의 '문화산책']<23> 낙안읍성과 금둔사 ①

지난봄 낙안읍성을 다녀왔다. 전남 순천에서 서쪽으로 재를 하나 넘어 22km 길이다. 순천 오일장이 서는 날의 아랫장을 구경하고 오후 장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에 섞여 낙안성에 들어가기로 했다.

순천을 싸고도는 강 동천(東川)의 긴 다리서부터 장 꾸러미를 들고 바삐 지나는 사람들에게서 장날의 활기가 전해온다. 1만 평이 넘는 구역을 점령한 장터에는 남자들도 많이 나와 있다. 순천 인근 산간마을에서 장날을 기다려 물건들이 나오고 사람들도 움직이는 것이다.

7일에 서는 순천 아랫장은 남도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오일장이라고 한다. 서울의 동대문 남대문 시장 비슷하면서 압축되어 있어 아기자기했다. 장터의 음식점마다 손님들이 점심상과 술 한잔을 기울인다. 뉴욕의 한 요리사가 왔다가 여기 장터의 국밥을 맛있게 먹었다는데 그보다는 봄 한 철 애쑥국이 더 당겼다.

▲ 사자처럼 생긴 큰 개를 순천 오일장에서 처음 봤다. 이 개처럼 생긴 조각상이 낙안읍성 동문 앞에도 연이어 있었다. ⓒ 이순희

정거장에는 이미 짐을 한가득 지닌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낙안까지 40분쯤 달리는 길에 불재라는 고개가 있어 양옆에 산자락을 끼고 넘어갔다. 옛날엔 여우와 산적들이 길가는 행인들을 넘보던 고개가 어디나 있어서 이런 고개를 넘는 모험담을 숱하게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지간한 고개 넘는 일은 별 일도 아니다.

"전에 불이 없을 때 고개 넘어 다니려면 무서웠지만 지금이야 뭐"라고 한 점잖은 중년이 말했다.

▲ 성벽으로 반쯤 가려진 신중한 형세로 사람들을 맞는 낙안읍성의 동문. 성을 보호하는 세 마리 개의 돌조각상이 앞에 버티고 있다. ⓒ 이순희

재 넘어가 바로 읍성이어서 정거장에 버스가 섰다. 평지에 구축된 낙안성이 보였다. 장승 하나가 '어서 오세요, 이쪽입니다' 하는 몸짓으로 거기 마중 나와 있었다. 의전의 한 장면인 듯, 성안 팍 통틀어 고작 인구 200∼300명의 시골 읍성이지만 그 관록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었다.

다음에 보인 것은 성문으로 접근하는 돌다리 위 3마리 개 조각이었다. 그것은 조금 전 순천장에서 본 검둥 사자개를 연상시켰다. 이 돌조각 개들은 '낙안성을 쳐들어오려다 죽은 왜구 원귀들로부터 읍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는 고려 말 조선 초에 걸쳐 낙안의 풍요한 산물을 노린 왜구들이 6km밖에 안 떨어진 벌교만의 물길을 타고 노략질을 하러 들어왔기에 그만큼 전투가 많았다. 낙안성이 세워진 것은 그런 것들로부터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문인 동문은 옹성에 가려진 채 반쯤만 보였다. 외부인을 가려 맞아들이는 신중한 자세인 듯 했다.

▲ 낙안읍성 안의 주민들이 사는 마을. 모두 초가집으로 텃밭과 돌담 짚가리 소 꽃밭 등의 생활터전이 마련돼 있다. 뒤에 보이는 산은 북산인 금전산이다. ⓒ 이순희

4만1000평의 낙안읍성 안 북쪽의 거의 절반은 동헌과 객사, 내아, 임경업장군사당, 낙민관, 자료관, 관리사무소 등으로 채워진 행정구역이다. 모두 근년에 새로 복원한 기와집 건물이라 오래된 느낌은 덜 했다. 단지 그 주변에 수백 년 된 느티나무, 팽나무, 푸조나무, 은행나무 등이 성벽 일부가 되기도 하며 성의 생활사를 그대로 품고 있어 비로소 오래된 터라는 실감이 났다. 이곳이 오래된 고을임을 알게 하는 것으로는 고인돌부터가 성벽아래 있고 북산에는 6세기 절 금둔사가 있어 축적된 역사를 말해준다.

관가와 마주해서 큰길을 사이에 두고 남쪽에는 80가구 330여 동의 크고 작은 주민들 집이 하나같이 초가지붕을 하고 서 있다. 한 세대마다 서너 채의 건물을 지녔다. 뜰이 넓고 밭과 정원을 잘 꾸며놓은 집이 보이고 짚가리가 집채만큼씩 쌓여 있었다. 생강나무, 매화가 돌담 옆 여기저기 피고 소와 송아지가 마당에 있었다. 이들은 성안에서 옛날부터 살아오던 터전 그대로를 유지해가며 오늘날까지 살아온다.

남한에만 1500개나 되는 산성이 있지만, 성안에서 옛 그대로 주민이 살아가는 곳은 낙안성 뿐이다. 오늘 사람들이 낙안 읍성을 찾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도 현대화된 삶의 형태를 비켜나지 못해 지금 이 성안에서 가장 오래된 세대는 3·4대를 이어온 정도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부근에 있고 주민들은 성 밖 넓은 벌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다.

▲ 낙안읍성의 성벽. 성안과 성벽을 연결하는 돌계단, 오래된 나무 등이 성벽과 한 구조를 이룬다. ⓒ 이순희

山의 돌을 이용해 쌓은 성은 조선시대 유적으로 둘레가 1.4km에 달한다. 옆으로 긴 사다리꼴 같은 성의 가장 높은 언덕인 동남쪽에는 대숲이 아늑하고 마을과 성벽 위를 연결하는 좁은 돌계단이 20여 군데 있다. 북문은 없고 서문은 건물 없이 키 높은 차량이 통과할 수 있으며 동문과 남문은 누각이다.

"남문 쪽 성벽의 돌이 어려서 키보다 더 큰 것들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큰 돌을 갖다 성을 쌓았는지 늘 궁금해하며 자랐지요." 서문을 지키던 관리인이 말했다.

관청구역에는 옥에 갇히거나 형틀에서 곤장 맞는 사람을 마네킹으로 보여주는 위압감이 강조돼 있다. 왜 하필 이런 장면을 골라 강조하면서 보여주나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성에 놀러 온 해맑은 아이들은 죄수호송마차도 타보고 목에 칼도 걸어보면서 뛰노니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주민들의 초가집 동네는 낮은 돌담을 덮은 덩굴과 유난히 많은 매화, 푸릇푸릇한 마늘밭 이런 것들로 생활의 평정을 지키는 것 같았다. 작약이 막 솟아나는 중이었다. 봄이 무르익으면 더 많은 꽃들이 핀다 했다.

▲ 성 밖으로 펼쳐진 낙안벌. 이곳의 풍요한 산물을 노려 왜구의 노략질이 끊이질 않았다. 동이 트니 사람들이 마을로부터 경운기를 몰고 성안으로 들어왔다. ⓒ 이순희

읍성은 삼면이 산이다. 성벽 위는 폭3-4m의 도로를 4m 높이에서 빙 돌아 걷는 것이었다. 10월에는 밤에 이 성벽 위로 횃불을 들고 걷는 행사도 열린다. 여기서는 성안 팍 마을과 평야, 주변 산세가 모두 보였다. 오직 동남쪽으로만 트인 낙안평야를 보는 순간 그 경제적 배경이 이해되었다. 유명한 호남곡창의 일부, 만 가지 결실이 나고 바다에서는 어물이 풍요하다. 이곳의 송갑득 씨는 읍성 관리소장을 지내며 낙안읍성에 관한 책도 펴냈고, 마을이장도 겸해 낙안성의 과거와 현재를 꿰뚫고 있었다.

"읍성 한가운데 오래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보이죠? 낙안성이 배라면 저 두 나무가 돛대고 수백 년 된 거목 열댓 그루가 노 역할을 하지요. 닻은 성 밖 향교 안의 동산을 칩니다."

이순신 장군과 임경업 장군이 이곳에 자취를 남겼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낙안성에 5번이나 와서 전략을 의논하고 군량과 무기 병사들을 보충하였다. 이곳 출신 용감한 수군들 활동이 자료관에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왔을 때 그의 수레가 고장 나 이곳 은행나무 아래서 고쳤다.

▲ 낙안성의 중심을 이루는 오래된 은행나무. 낙안성에 온 이순신 장군이 이곳 은행나무 아래서 수레를 고쳐 타고 갔다. ⓒ 이순희

주민들이 장군에게 대접한 음식이 '팔진미'라는데, 도라지·더덕·묵·생선·무·석이버섯·고사리·미나리 같은 지역산물이었다. 성안의 한 식당에 '팔진미' 메뉴가 있어 먹어보니 버섯전에 무 생선조림·도라지나물 등이 나오는 한정식이다. 고목나무는 오래된 만큼 온갖 생활사를 품고 있다. 한 은행나무 옆을 지날 때 민박집 아주머니가 설명했다.

"저 은행나무 고목에서 오래전에 業둥이(구렁이)가 나왔어요. 우리 할머니가 정한수를 떠놓고 '좋은 데로 가십사' 빌어 드렸죠. 그 뒤로 다신 안 나왔어요. 30년도 더 된 이야기죠."

임경업 장군은 인조 때 무관이었다. 낙안 군수를 지낸 그의 사당이 성안에 있고 제사가 지금까지 이어진다.

"임경업 장군의 명검이 두 개 있었어요. 그중 용천검은 여기 낙안의 용소(자연휴양림 근처)에서 용이 나와 떨어뜨려 준 것이죠. 후일 일인이 가져갔다고도 합니다. 다른 하나 추련검(秋蓮劍)은 충주에서 큰 잉어인지 이무기가 주었다 하고 충주시에 보관돼 있죠."

임경업 장군의 명검은 가는 데마다 전설을 남기고 있어 이곳 낙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경업의 강렬한 자취는 갑옷 등 유물, 제사 지내는 모습 등으로 그를 기리는 정신이 느껴진다. 지금도 정월대보름날 낙안성에서 풍물을 칠 때 당산나무보다 먼저 임경업 사당에서부터 시작된다.

▲ 봄날 낙안성 돌담 옆 매화꽃 핀 길. ⓒ 이순희

읍성의 하루를 온전히 보고 싶어 성안에서 묵었다. 초가지붕 민박집은 조그맣고 깨끗했다. 온돌방이 더웠다. 사방이 조용하고 달과 별이 분명하게 보였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잠자기 전 놋숟갈로 잠가 논 사립문을 열고 나가 마을의 밤 골목길을 걸었다. 가로등에 매화가 비취는 돌담길, 밤에도 흘러가는 샘물, 길이 구부러지는 곳에 쌓인 칠흑 같은 어둠, 간간이 보이는 창문의 불빛, 기와집 누각의 긴 처마, 그런데 아무도 지나다니는 이들이 없었다.

민박집 아주머니는 "시골에서는 다들 일찍 자니까 밤엔 조용하다"고 했다. 출퇴근하는 이들은 성 밖으로 나갔고 4만 평 성안에서 잠자는 주민은 80가구뿐, 술집도 없고 가게도 다 문 닫은 시간이었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동차 몇 대가 오히려 반가웠다.

성문은 밤에도 닫히지 않았다. 옥사가 남문 가까이 있는데 죄인들이 탈옥할 때 빠지라고 파놓은 연못들이 그 주변에 모여 있었다. 지금은 연꽃이 가득하여 그윽한 풍경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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