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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21세기의 강대국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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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21세기의 강대국이 될 것인가

미래전략연구원의 '지구촌, 분석과 전망' <8> 푸틴 하의 러시아 1

'위대한 강대국 러시아의 부활'을 꿈꾸는 푸틴주의는 러시아를 과연 21세기의 강대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러시아의 과거사는 21세기의 러시아 강대국화의 가능성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18세기의 러시아의 강대국화 과정과 20세기의 강대국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21세기 강대국화 가능성에 대한 시사점과 함의를 찾으려는 것이 본 글의 목적이다.

방대한 영토, 다수의 인구, 풍부한 부존자원은 러시아의 강대국화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한반도의 78배, 미국의 1.8배의 면적을 가진 러시아연방은 2003년 당시 1억 4,40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방대한 영토에는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의 천연자원이 상당히 존재한다. 그러나 세계사에서 볼 수 있듯이 영토가 넓고 자원이 풍부한 모든 나라가 국제정치의 강대국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역시 지난 3세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강대국으로의 부상과 쇠락을 반복하였다. 그렇다면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만든 요소는 무엇이었으며 또한 러시아 국가의 붕괴를 가져온 쇠락의 원인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강대국으로 등장하는 나라는 국제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capability)과 의지(will)를 동시에 지닌 국가였다. 능력에 관한 측면은 마이클 만의 사회 권력의 원천 요소 즉 이념적,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강대국의 능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요건으로 1. 내부통합력, 2. 경제력, 3. 군사력, 4. 이념력 등을 중심으로 18세기-20세기의 러시아 역사를 살펴보면서 21세기 러시아의 강대국화 잠재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차 강대국화 (1721-1814): 유럽의 강대국으로의 부상**

1613년에 로마노프 왕조가 성립하였으나 1721년 스웨덴과의 북방전쟁 이후 제정 러시아가 성립하기까지 러시아는 자국의 생존을 위해 주변 강국들과 경쟁해야 하는 동유럽의 한 국가에 불과하였다. 북으로는 스웨덴, 남으로는 투르크, 서로는 폴란드가 버티고 있어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의 승리는 러시아가 안팎으로 세력을 팽창해나가서 유럽의 중심 세력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정 러시아는 18세기 중반의 2차례에 걸친 러시아-투르크 전쟁을 통해 흑해 북서부 연안과 크림 반도를 획득하였고, 1772년, 1793년, 1795년의 폴란드 1, 2, 3차 분할을 통해 백러시아,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지역을 확보하였다. 뿐 아니라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였을 때, 러시아는 이를 방어했을 뿐 아니라 1813-14년의 유럽원정을 통해 유럽의 대부분의 지역을 나폴레옹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 러시아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나폴레옹을 몰아낸 러시아의 군사력, 특히 육군력은 러시아를 유럽의 군사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러시아를 19세기 유럽 협조체제를 유지하였던 5대 강국 중 하나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18세기 러시아의 유럽 강대국으로의 부상은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일차적으로는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을 들 수 있다. 러시아의 군사력은 유럽의 세력균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러시아로 하여금 유럽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러시아의 군사력확장은 많은 경우 표트르 대제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에 상비 육군을 강화하고 상비 함대를 만들었으며, 전 국민에게 공평하게 부과되는 징병제도를 확립하였다. 즉 귀족들의 군대복무기간을 농민출신의 병사와 마찬가지로 일생동안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서유럽의 노련한 교관들을 초빙하여 새로이 마련한 교범으로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무기도 근대적으로 개량했다.

뿐만 아니라 표트르 대제가 실시한 국내 개혁은 군사력의 확장과 이를 유지할 수 있는 자금조달에 유리한 것이었다. 유럽의 발전된 문물을 습득한 표트르 대제는 서구화, 근대화를 표방하면서 정치(행정), 경제, 사회,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교육의 증진, 근대적 행정체계 수립, 산업의 육성, 재정 강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어 러시아를 강대국화하려는 전략에서 나온 것이었다.

행정기구는 합리적으로 개편되었다. 중앙에는 원로원과 9개 참사회를 통해 행정, 사법, 재정, 군사, 외무 등의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고, 지방에서는 구베르니야(현) 제도를 도입하여 지방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자치를 허용하였다. 국가에 대한 의무봉직 제도와 관료제를 정비하였다. 한편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관, 수염에 이르기까지 과세를 했으며, 호구세를 폐지하고 인두세를 부과하였다. 또한 인구조사를 바탕으로 과세대상을 파악하는 노력을 하였다. 경제적으로도 표트르 대제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가소유의 공장을 설립하는가 하면, 민간인들의 공장 설립도 이 시기에 증대되었다. 직물, 유리, 피혁공업 등이 발전하였고, 우랄 산맥에서 구리와 철광산을 개발하였다. 교육과 문화, 국민보건, 그리고 의복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표트르 대제는 깊고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새로운 러시아의 틀을 만들었다.

한편 표트르 대제의 개혁은 군주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는 전제 군주제의 강화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토착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에 대한 봉사를 바탕으로 누구라도 일정 관직에 오르면 귀족이 될 수 있게 만듦으로써 짜르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였다. 표트르 대제 기간 동안 러시아의 전제정은 그 어떤 사회세력으로부터도 강한 도전을 받지 않았고 따라서 러시아를 통치하고 내적 통합력을 장악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표트르 대제가 마련한 강대국화의 기반을 바탕으로 러시아는 19세기의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특히 1815년 비엔나 회의를 통해 유럽의 질서를 재편하는 데 있어서 러시아는 강대국의 일원으로서 유럽의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19세기 초반에 알렉산드르 1세는 '유럽의 황제', '유럽의 헌병'으로 간주되었고 '해방자'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러시아는 1945년 이전에는 다시금 누릴 수 없는 강대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대국으로서의 러시아의 지위는 오래가지 않아 잠식되게 된다. 무엇보다도 19세기에 들어와서 전제군주제에 입각한 정치이념은 러시아를 통치하는 데 있어서, 또한 유럽의 중요 세력으로서 유럽 내의 사태에 간섭하는 데 있어서 갈수록 적절치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비엔나 체제 성립시 전제군주제에 입각한 보수적인 정치이념은 국내적으로 도전받지 않았으며, 뿐 아니라 유럽의 다른 보수적 군주세력과 더불어 유럽협조체제를 통해 보수적 정치 이념을 유럽 전역에 강요할 수 있었다. 사실 보수적, 반동적 유럽협조체제의 이념은 짜르 체제의 통치이념과 너무나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의 확산은 전제군주제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만들었으며, 러시아는 국내외에서 이에 대한 도전세력에 직면하게 된다.

동시에 보수적 전제군주제는 19세기의 변화된 국제환경-영국 등의 산업혁명, 민족주의 및 자유주의 이념의 확산-에 적응하여 러시아 내부에서 필요한 개혁을 취하는 데 장애요소로 작동하였다. 경제적으로 볼 때, 산업혁명으로 인한 유럽 일부 국가의 급진적 경제성장을 뒤따를 수 없었고, 러시아는 분명히 뒤쳐진 국가가 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서 농노제는 러시아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임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농노제를 폐지 또는 개혁하려는 시도는 번번히 좌절되었다. 농노제 폐지가 러시아 전제군주제의 토대를 이루는 귀족계급을 몰락시킴으로써 사회혁명을 초래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결국 1866년에 가서야 농노제가 폐지되었지만, 이 농노해방은 불충분하고 뒤늦은 것이었다. 농노제 폐지가 불충분하게 이루어진 것은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장애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산업화의 진전에도 방해가 되는 요소였다. 러시아의 산업화는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국가주도로 외국자본을 유치하여 본격적으로 진전되었다.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는 공업화를 통해 상당한 경제성장률을 보였지만, 러시아의 산업화 정도는 여전히 유럽의 발전된 산업국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군사력은 러시아 국력을 이루는 여전히 중요한 요소였다. 19세기에도 러시아는 투르크와 페르시아와의 전투를 통해 카프카스 지방을 거의 장악하였으며, 중앙아시아에서의 수차례의 군사작전에 의해 투르게스탄, 부하라, 히바, 호칸드, 투르크멘 등 중앙아시아 지역의 상당부분을 정복하였다. 또한 극동지역에서는 아무르 강 북쪽 지역과 우수리 강 동쪽의 연해주를 차지하여 러시아의 극동영토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 그 상대적 우위는 점차 상실해 갔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856년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였다. 또한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제국주의적 팽창을 위해 제해권을 장악하고자 영국과 독일이 해군력 경쟁을 하였으나, 러시아의 해군은 이들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하였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의 패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러시아 해군력의 취약성은 러시아 내부 체제의 다른 여러 모순점과 더불어서 러시아의 강대국 지위를 지탱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요소 및 군사적 요소보다 더 러시아 체제를 취약하게 만든 것은 내부 통합력 유지의 상실과 이념적 요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 유럽 전역을 통해 민족주의, 자유주의 사상이 널리 퍼졌고, 사회주의 사상 또한 새로운 이념으로 대두하였다. 중앙에서의 강한 억압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이들 사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러시아 사회 전반에 걸쳐서 이들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다양한 사회 세력들이 짜르 지배 체제의 전통성에 대해 도전하였고 체제의 안정은 계속적으로 위협받았다.

짜르 체제는 1905년 혁명을 겪고 나서야 전 국민에게 시민적 자유를 보장하고 국가 두마를 창설하여 대의제 민주제를 도입하였으나, 이미 불거진 혁명 세력들을 완전히 잠재울 수 없었다. 또한 유럽에서의 민족주의 의식의 대두는 다민족 국가로 이루어진 제정 러시아에서의 국민통합의 과제가 달성되는 것이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짜르는 강제적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이들 소수민족들의 원망을 샀으며, 자치에 대한 이들의 요구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너무나 뒤늦게 대처함으로써 이들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켰다. 결국 변화된 환경 속에서 국내통합을 이룰 수 있는 대안적 이념을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이 짜르 체제 전복의 중요 요인이라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러시아제국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을 통해 러시아 국민들은 짜르 체제의 비효율성과 구조적 모순을 매일의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러시아 국민들은 초기의 애국주의적 지지를 저버리고 전쟁의 목적 및 필요성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짜르 체제의 정통성마저 의심하게 되었다. 이것이 1917년 2월 혁명 이후 짜르 체제가 너무나도 쉽게 붕괴된 이유가 된다.

***2차 강대국화 (1928-1945): 세계 초강대국으로의 부상**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정권을 장악한 볼셰비키 정권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취약한 국가를 인수받게 되었다. 이미 2월 혁명 이후 임시정부 하에서 나타났던 공권력의 붕괴, 사회적 통합의 해체, 전쟁으로 가속화된 경제의 붕괴, 독일과의 전쟁에서의 군사적 패배에 직면해서 볼셰비키 정권은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해서 새로이 국가를 형성해야 하는 거대한 임무를 맡게 된다. 광범위한 대중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켜야 하며, 독일과의 전쟁을 종결해야 했고, 전국적 수준에서 공권력을 다시 세워야 했던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18년에서 1920년까지 계속된 내전 기간 동안 볼셰비키 정권은 백군의 군사적 공격, 미국, 일본 등의 연합국의 간섭, 비러시아계 민족들의 민족주의 운동-자치나 독립을 요구하는-을 막아내야 했다. 이에 1920년대 초까지 소련은 극도의 혼란기를 거치게 된다. 러시아의 경제는 더욱 파탄 났고, 정치적·사회적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수 민족들의 독립 및 자치를 추구로 인하여, 그리고 독일과의 강화조약으로 인하여 러시아의 영토는 사상 유례 없이 축소되었으며, 이와 더불어서 이들 영토에 존재하는 다수의 러시아인과 자원, 산업 시설들을 상실하였다.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은 땅에 떨어졌으며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그러나 내전에서의 군사적 승리는 공산 정권의 정통성을 부여하였고, 이후 1920년대의 신경제정책(NEP) 시기동안 비사회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억압 및 체포를 통해, 그리고 농민과 같은 사회세력과는 화해를 통해 사회통합을 이루어 갔다. 이를 바탕으로 소련은 1928년에는 1913년 이전, 즉 전쟁 이전의 산업생산력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여전히 주변 국가의 공격을 두려워하는 취약한 유럽의 1 개국에 불과하였고 국제적으로 고립을 회피하고자 소련 국가에 대한 승인을 추구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취약하였던 소련은 약 15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등장하여 1945년부터 1991년에 이르기까지 약 45년간의 냉전 시기동안 미국과 더불어 세계 정치의 양대 주요 행위자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소련의 강대국화는 어떻게 가능해진 것일까?

소련의 강대국화는 분명히 역사의 우연은 아니었다. 소련의 취약한 국제적 위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었고, 내부적으로 치열한 강대국화 논의-사회주의 건설 방식을 둘러싼-가 있었다. 소련이 강대국으로 변모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 그 생존을 위협받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존재하였다. 결과적으로 소련은 1928년부터 중공업 위주의 국가주도 산업화를 추진하였고 명령계획경제의 틀을 세웠다. 1930년대-1940년대의 소련의 경제성장률은 눈부신 것이었고 소련을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탈바꿈하였다. 물론 이 과정은 막대한 인적 희생과 경제적 비효율성을 동반한 것이었지만, 초기의 30년간은 그 성과가 괄목할 만하였다. 1930년대의 산업화는 1941년 독일의 침공을 맞아 수년에 걸쳐 이를 거의 단독으로 막아내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한편 국내적 내부 통합력을 달성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공산당 조직을 통해 국가관료 기구뿐 아니라 주요 사회조직들을 통제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사회주의 이념은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이라는 이상을 만들어내는 데 적절하였다. 지속적인 이념교육을 통해 국민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건설 가능성을 믿게 만들었으며, 이를 위해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뿐 아니라 1930년대의 악명 높은 숙청을 통해 잠재적, 실제적 체제 반대 세력를 제거하거나 침묵하게 만드는 데도 성공하였다.

따라서 최소한의 표면적인 내부통제력을 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사회주의 이념은 "형식은 민족주의, 내용은 사회주의"라는 구호 하에 다양한 소수민족들을 통합하는 데에도 유용하였다. 민족 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일부 소수민족의 민족주의적 열망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공산당 조직을 통해 이들 공화국에 대한 중앙 통제를 유지하였다. 물론 이러한 강압적 수단을 통한 국가통합력 달성의 허구성은 1980년대 후반 체제 붕괴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군사력의 경우, 국가주도의 명령경제체제는 군사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데 매우 유용하였다. 소비재 산업을 희생하고 중화학공업 위주로 산업화를 이루는 전략을 취했기 때문에 소련이 1940년대의 독일과의 전쟁 중에 자국의 산업을 전시 산업 및 군수 산업으로 재배치하고 전환하는 데 상대적으로 용이하였다. 뿐 아니라 연합국이었던 미국으로부터의 군사물자 지원도 소련의 군수산업발전을 더욱 촉진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는 소련을 미국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다. 전쟁은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유럽 강국들을 초토화하였고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소련은 자국의 영토를 확대했을 뿐 아니라 동유럽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어 동유럽지역에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여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었다. 뿐 아니라 소련이 1949년 핵무기의 생산에 성공하자 소련의 세계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련의 세계지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련 국가 그 자체가 1991년 해체되었다. 이는 전쟁을 통하지 않고도 강대국이 스스로 붕괴되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너무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사회의 모든 영역을 통치한다고 간주되었던 소련 국가가 그토록 쉽게 무너진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소련의 붕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데, 크게 소련 외부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견해와 소련 내부의 요인을 강조하는 견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미국과의 군비 경쟁의 부정적 효과를 강조하거나 과대팽창된 제국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한편 소련 내부의 구조적 모순을 강조하는 견해는 소련 경제체제의 문제점이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쇠퇴를 강조한다. 이 외에도 고르바초프의 개혁의 실패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기도 하고 민족 문제 해결의 실패로 설명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소련의 내부적 붕괴는 소련 군사력의 약화나 전쟁을 통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소련 및 소련 동맹군(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군사력이 나토군에 대해 수적으로는 우세하나 기술적으로는 취약하다는 지적이 있기도 하였으나, 이것이 소련 붕괴의 결정적 요소였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붕괴 당시 소련은 수천 개의 핵무기를 소장하고 있는 핵 강대국으로서 군사력의 측면에서는 소련 붕괴를 설명하기 어렵다. 물론 이들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이 소련 경제에 무거운 짐을 지운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또한 소련 경제의 취약성에 대해서는 이미 1980년대 이전 시기부터 국내외적으로 많은 지적이 있었다. 장기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소련 경제의 쇠퇴가 소련 국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어 온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바로 이 요소가 1991년의 소련 붕괴를 촉발한 원인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시작 이전까지는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명령계획경제가 그대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념력의 약화에 따른 정치통합의 해체가 소련 붕괴의 중요한 요소였다고 볼 수 있다. 많은 관찰자들이 이미 지적하였듯이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분명 소련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글라스노스트를 통한 자유여론의 형성은 체제에 대한 비판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는 궁극적으로 소련체제가 거짓말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소련 공산당의 통치는 정통성을 상실하고 소련 공산당의 붕괴와 더불어 소련 국가 그 자체가 카드로 만든 종이 집처럼 너무나 쉽게 무너졌던 것이다.

***푸틴의 러시아 강대국화 시도에 대한 시사점**

소련 붕괴 이후 새로운 국가 건설에 몰두하고 있는 러시아는 다시금 경제를 활성화하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어 내부적 통합을 이루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해 있다. 체제전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수반되었던 1990년대의 혼란과 경기쇠퇴는 러시아를 초강대국의 위치에서 개발도상국의 위치로 추락시켰다. 이에 푸틴은 2000년 집권과 동시에 파편화된 러시아 사회의 통합, 경제 활성화, 러시아 국가 정체성의 재확립, 그리고 추락된 국제적 위상의 복원을 위해 일련의 전격적인 대내외적 조치들을 실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난 역사에서 보여주는 러시아의 강대국화와 몰락의 과정은 푸틴의 강대국화 시도에 대해 어떤 시사점을 주는가?

첫째, 강대국화 출발점의 차이점이다. 즉 구체제의 해체, 혹은 몰락의 과정상의 차이점에 주목할 수 있다. 18세기의 1차 강대국화의 과정에서는 표트르의 개혁을 통해 구체제가 혁명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점진적으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20세기의 2차 강대국화의 과정에서는 혁명과 전쟁으로 인하여 구체제가 전면적으로 붕괴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3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 및 20-30년대의 계속적인 숙청을 통해서 구체제의 유산을 전적으로 제거해 나갔다. 그러나 1991년의 소련의 붕괴는 이와는 양상이 전혀 달랐다. 급작스러운 붕괴이기는 하였으나, 그 어떤 폭력적 과정을 수반하지 않았다. 이는 곧 구체제의 인사와 구체제의 제도가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1990년대 내내 러시아가 겪었던 혼란과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된다고 보인다. 따라서 푸틴의 강대국화의 과정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과거의 유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일반인의 사고방식에서 체제의 통치방식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남아있는 구체제의 유산을 발전적으로 해소, 변형시키는 것이 러시아 강대국화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강대국화 추진 과정에서 국제환경의 상이점이다. 18세기의 강대국화는 서구의 문물을 상당히 수용하면서 이루어졌지만, 20세기의 강대국화는 국제적 환경으로부터의 고립 속에서 이루어졌다. 1930년대의 '일국사회주의' 논의에서도 드러나듯이 소련의 강대국화는 국제체제와 절연된 상태에서 추진되었다. 이것이 국가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든, 당시의 국제정세로 인한 불가피한 사정이었든 소련은 국제 경제 및 정치 질서와 연계되지 않는 독자적 체제를 만들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소련 내에서 억압적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었으나, 다른 한편 국제경제의 흐름으로부터 동떨어진, 자본주의의 '유해한' 영향으로부터 보호되나 동시에 자본주의의 긍정적 발전촉진 요소로부터도 단절된 체제를 만들어서 궁극적으로 소련 경제의 침체를 가져왔다. 반면에 21세기의 강대국화는 이전 시기의 강대국화와는 달리 정보화, 세계화의 국제 환경 속에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 이 점은 강대국화 전략에 주목할 만한 차이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러시아도 세계적 흐름으로부터 영향 받지 않을 수 없으며, 세계경제 및 사회로부터 절연된 자급적 경제체제나 억압적 정치체제를 만드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계적 흐름에서 동떨어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혹은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세계적 흐름에 편승해 갈 수 있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셋째, 강대국화 방식의 문제이다. 18세기의 강대국화는 국내 행정 및 재정상의 개혁을 동반하기는 하였지만 주로 군사력 증강에 의존한 것이었다. 20세기의 강대국화도 사회주의 이념을 토대로 하면서도 실은 경제성장과 군사력 증강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푸틴의 강대국화는 무엇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가? 먼저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을 통한 강대국화 전략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국가의 재건립 과정 속에서 군사체제의 정비는 필수적일 것으로 보이나, 군사력을 이용한 영토적 팽창이나 국제적 영향력 행사는 바람직한 전략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이미 보유하고 있는 군사력을 잘 정비하되 필요 이상의 군비증강에 빠져들지 않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동시에 국제무대에서 외교력을 높이는 것만으로도 러시아 강대국화 부상에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경제적 요소는 21세기에도 강대국화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따라서 러시아의 경제 회복 및 성장은 당연히 강대국화의 주요 부분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달성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국가는 어느 정도로 시장에 개입하여야 하는가? 또한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 효율적인 정치체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질문해 볼 수 있다. 아시아의 NICs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그리고 현재 중국이 그렇듯이, 권위주의적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러시아에 바람직하다고 볼 수도 있다. 단기적으로는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1990년대에 극도의 혼란을 경험한 러시아인들이 혼란을 동반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보다는 안정을 강조하는 권위주의 체제를 선호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권위주의 체제의 성립이 곧 경제발전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또한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경제발전에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푸틴의 통치전략이 얼마나 권위주의 체제의 속성을 띠게 될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한편 21세기 러시아의 강대국화에서 이념적 요소와 내부 통합 달성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다. 즉 러시아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러시아와 같이 방대한 영토와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에서는 군사력 증강이나 경제 성장뿐 아니라 이념적 요소에 의한 내부통합력 유지가 강대국화의 조건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것의 달성에 실패할 시에는 국가 자체의 붕괴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러시아 강대국 만들기에서는 새로운 이념과 국가 정체성에 입각하여 내부통합력을 달성하는 문제가 관건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에서는 어떤 이념적 요소를 통해 국가 만들기를 하여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충분한 이념적 권력의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러시아에는 러시아적 전통과 문화적 유산을 강조하는 슬라브주의가 존재하지만, 세계화 시대에 개방적 경제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러시아에서 러시아적 전통만을 강조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국제적 규범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진 새로운 이념이나 규범을 창출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시장화를 추구하는 범위 안에서 국가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국가 통치 이념을 찾아내야만 한다.

동시에 러시아는 내부 통합력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는 내부 통합력 달성에 있어서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짜르의 체제나 스탈린의 체제가 그러했듯이 억압적 수단에 의한 강권적 중앙지배는 단기적으로만 효율적일 수 있다. 흔히 러시아의 정치문화를 논할 때 중앙의 억압적 통치라는 면만을 부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 러시아의 역사는 러시아에도 지방 자치적, 민주적 요소들도 존재하여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적절한 수준에서 지방의 자치를 부여하면서도, 중앙이 상충되는 지방의 이해관계를 효과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효율적인 체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넷째, 지속가능한 강대국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러시아 역사에서 드러나듯이 러시아는 2차례에 걸쳐서 강대국화에 성공하였고, 유럽의 강국으로, 또한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이들 체제는 새로운 환경-물질적, 이념적 변화-에 민감하지 못한 체제였다. 이것이 러시아가 강대국의 지위를 계속적으로 유지하는데 실패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체제 그 자체의 붕괴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소위 '강한 국가', '전체주의 국가'라고 인식되었던 제정 러시아와 소련 국가가 급작스러운 붕괴를 맞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강대국화 전략에서는 강대국화를 이루는 것 뿐 아니라 강대국의 지위를 계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즉 과거의 제정 러시아 체제나 소련 체제와는 달리 변화에 민감한 통치체제를 만들 필요성이 대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는 가장 적절한 대안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민주적이면서도 내부통합력을 이룰 수 있는 체제, 동시에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효율적인 국가통치 체제를 만들어내야만 러시아가 세계무대에서 새로워진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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