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사의 박동원 작전참모는 야포단과 동시에 전차대대에도 출동명령을 하달했다. 그는 사령부 내에 있던 전차대대장 차기준 중령(육사 21기, 후에 합참통합군 기획단 부단장)을 불렀다.
"차 중령, 당장 쓸 수 있는 전차와 기갑병을 모두 사령부에 집결시키게."
상대편에게 위압감을 주어 세를 잡는 데는 전차가 제일이다.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워 전투 병력을 투입하면 진압작전은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다. 박동원과 차기준은 전차 현황을 파악해보았다. 사령부내 대대본부에 4대가 있다. 그리고 30여 대의 전차가 경복궁 30경비단에 1개 중대, 33경비단 배속으로 독립문 부근에 1개 중대가 나가 있다. 이 중 30경비단에 배속된 것은 이미 반란군에게 넘어가버렸다. 차기준은 33단 배속 전차중대에 필동사령부로 집결할 것을 지시했다.
밤 10시 30분경, 독립문 부근을 나서 서대문을 거쳐 시청 앞으로 향하는 전차들의 육중한 캐터필러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경복궁의 반란군 지휘부는 이 전차 구르는 소리에 아연실색했다.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결재를 받으러 세 번째 가 있으나 하회가 없다. 30경비단 본부를 지키는 9사단장 노태우는 등골이 오싹했다.
"장태완이가 정말 탱크를 앞세워 쳐들어오는구나. 최 대통령은 아직도 정승화 총장 연행을 결재하지 않고 있으니 우리는 모두 불법 하극상 세력으로 체포되고 마는가."
이때 장세동, 김진영 두 대령이 보안사 본부와 수경사 보안대원들에게 전차 소리의 진원지를 물었다.
"그러잖아도 33경비단장에게 비상조치를 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수경사에서 지금 33경비단 배속 전차중대를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을 빨리 원대 복귀시켜야 합니다."
김진영은 황급히 지프를 몰아 광화문을 통과해서 서대문으로 나아갔다. 김진영은 전차중대장에게 장태완이 비정상 상태여서 잘못하다간 수경사 부대끼리 전투가 벌어질 판이라며 그 지시에 따라서는 안된다고 강력히 제지했다.
전차중대장은 배속부대장인 33경비단장 김진영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 수경사 예하 최적의 진압장비인 전차들은 모두 회군하고 말았다. 반란군의 손에 들어간 셈이다.
이날 진압작전을 위해 수경사가 직접 동원할 수 있는 부대는 야포단과 전차대대, 그리고 33경비단 일부가 전부였다. 30경비단은 쿠데타군의 본부가 돼버렸고, 방공포단은 황동환 단장이 사령부에 대기하고 있지만, 서울의 하늘을 지키는 경계임무에서 빼낼 수가 없다.
▲1979년 11월20일 신임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가운데)이 청와대 외곽진지에서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왼쪽 끝)으로부터 경계상황을 브리핑받고 있다. 불과 20여일 후 두 사람은 '사살'명령까지 주고 받는 적으로 돌변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
하나회 공수여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는 처음부터 반란군
수경사가 배속 받을 수 있는 충정부대 중에서는 정병주 특전사령관 휘하의 1, 3, 5, 9공수여단과 이건영 3군사령관 휘하의 수도기계화사단 및 26사단 등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는 모두 하나회로 처음부터 반란군 쪽이었다.
수경사령관 장태완은 합참본부장 문홍구와 육참차장 윤성민과 상의한 뒤 9공수여단장 윤흥기 준장(갑종 35기)에게 출동지시를 내렸다. 윤 준장은 참모장 신수호 대령(갑종 간부)에게 후발대로 뒤따라오도록 지시하고 자신이 선발대 및 본진을 이끌고 나아갔다. 그러나 본진이 막 부천 톨게이트에 이르렀을 때 아직 본부에 남아 있던 참모장 신 대령으로부터 무전이 날아왔다.
"단장님, 사령부에서 출동지시가 무효라는 전문이 왔습니다. 그리고 보안부대에서도 병력을 복귀시켜야 한다고 야단인데요."
특전사령부에서는 보안사 정도영 보안처장(육사14기, 후에 사회정화위원장, 성업공사 사장)의 전화지시를 받은 보안반장 김정룡 대령(육사16기, 후에 보안사 참모장, 수자원공사 감사)이 작전처장 신우식 대령과 함께 9공수여단 회군공작을 벌였다. 정도영과 김정룡은 하나회로 손발이 잘 맞았으며 회군공작의 수훈을 세웠다. 이들은 정병주 사령관 몰래 '출동지시는 무효'라는 전통문을 띄웠다. 정규지휘관 보다도 보안사가 군을 더 잘 장악하고 이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장태완은 9공수여단의 출발보고만 받았을 뿐 회군 사실을 늦게까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야포단 선발대로부터 박희도의 1공수여단이 행주대교를 넘었다는 보고에 사령부내 모든 지휘관과 참모를 기밀실로 모이도록 참모장 김기택 준장에게 지시했다. 그는 이어 작전참모 박동원을 불렀다.
"우리 헬기로 지금 수도기계화사단이나 26사단까지 갈 수 없겠나?"
그는 직접 사단장들을 만나 병력출동을 담판 지을 생각이었다.
"우선 지휘계통에서 명령을 내려주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일 아닙니까?"
박동원은 장태완을 이건영 3군사령관과 통화하도록 연결시켰다.
"장 장군, 나도 장관께 두 차례나 건의했소. 위에서 승인을 해줘야 하는데…. 더구나 전방 병력을 움직이는 문제가 아니오."
이건영은 초기보다 목소리가 위축돼 있었다. 수경사에 들어와 있는 육본 지휘부는 공수여단 등 예비 병력이나 움직일 수 있을 뿐, 전방 사단 병력 이동은 국방장관과 한미연합사 측의 결심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노재현 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 등 수뇌부는 이때 반란군 지휘부를 포함해 모든 사령부에 '병력이동금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장태완은 분통을 터뜨리며 기밀실에 모인 장교들 앞에 섰다.
"조금 전까지 우리와 정을 나누던 사령부 전 장교는 450여 명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60명 이외의 장교들은 30경비단에서 국가반란을 모의하는 무리들과 작당해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사령관으로서 명령을 하달하니 소임을 다해주기 바란다. 제30경비단장 장세동, 33경비단장 김진영, 헌병단장 조홍은 누구든지 발견 즉시 체포하되 반항하면 사살하라…."
그의 명령은 전투개시 그것이었다. 기밀실은 살얼음을 딛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령관의 노성은 더 이어졌다.
"이 외에도 30경비단에 들어가 역모하는 자들의 명단을 공개하니 체포하거나 사살하라. 그리고 청와대 뒷산 팔각정 주변에 배치된 33경비단의 경비병력은 부단장이 가서 은밀히 사령부로 철수시키라."
"장세동 김진영 조홍을 체포하되 반항하면 사살하라"
수경사 기밀실에서 쿠데타 주모자에 대한 체포 사살명령을 하달 받은 33경비단 작전주임 김달연 소령(육사 28기, 중령 예편, 서울 풍납동 창일침례교회 목사)은 이를 즉각 33경비단 중대장들에게 전달했다.
김 소령은 처음 사건의 전모를 들었을 때 눈앞이 아찔했다. 직속상관인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이 반란군에 가담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군인관에 혼란이 일어남을 느꼈다. 평소 후배장교들에게 존경받았고 자신 또한 믿고 따랐던 '멘토'를 이제 적으로 돌려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그는 군인이란 언제나 정규 지휘계통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진영은 이제 우리 단장이 아니다. 보는 대로 체포하든지 무기를 갖고 반항하면 사살해도 좋다."
이날 아침까지도 가장 가까운 선배이자 상관을 반란군으로 단죄하고, 그는 콧등이 시큰해졌다. 이어 그는 청와대 외곽의 경비진지에 배치돼 있는 3개 중대를 사령부로 철수하도록 지시했다. 33경비단 병력이 경비진지에서 사령부로 오려면 자하문~효자동~광화문을 거쳐야 한다. 김달연은 경복궁의 30경비단이 이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중대장들에게 방향을 바꾸도록 지시했다. 30경비단도 이제 '적군'이 돼 있는 것이다.
"자하문으로 오지 말고 정릉 쪽으로 우회해서 오라."
실제로 30경비단은 33경비단 병력이 사령부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자하문 부근에 저지조를 대기시키고 있었다. 이날 첫 전투가 벌어질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33경비단 병력이 필동 사령부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 30분경. 이때는 경복궁을 향한 수경사의 공격대형이 이미 무너진 뒤였다. 이에 앞서 장태완은 0시 30분 경 사령부가 보유한 병력, 전차, 화포를 정문 앞 퇴계로에 집결시켜 공격개시선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행정병까지 포함한 병력 100여 명과 전차 4대, 그리고 토우 미사일 10여 기 등이 정렬했다. 작전참모 박동원은 토우 미사일 중대장에게 당부했다.
"미사일은 절대 개함하지 말라. 여기서 써먹을 용도가 없다."
토우 미사일은 꽁무니에 명주실 같은 유도선이 달려 있는데 이것이 전깃줄이나 나뭇가지 등에 걸려 끊어지면 포탄이 방향을 잃고 제멋대로 날아간다. 시가전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을 경호실장 차지철이 억지로 창설해놓은 부대였다.
이때 수경사 사령관실에 차려진 육본 지휘부의 윤성민 참모차장은 수경사 병력의 공격을 개시하기 전 최종방침을 정하기 위해 육본 참모회의를 열었다.
윤성민(참모차장) : 방금 1, 3군사령관과 통화했습니다. 3군 예하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그리고 1군의 11사단 등 전방사단 병력은 장관 지시 없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겁니다. 병력 동원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을 모아봅시다.
천주원(인사참모부장) : 오늘밤 상황전개를 보니 저쪽에서 5.16쿠데타보다 훨씬 장기간 그리고 치밀하게 준비해온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꼴이고….
황의철(정보참모부장) : 현재 우리에게 별 수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어디서 병력을 동원하기도 어려운 것 아닙니까?
하소곤(작전참모부장) : 병력을 동원할 수만 있으면 동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하 부대들에 명령이 먹혀들지 않고 있어요. 명령해도 저쪽의 방해공작으로 병력이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안종훈(군수참모부장) : 이번 쿠데타가 아무리 세밀하게 오래 전부터 계획돼 진압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군대요, 군인의 사명에 따라야 하는 우리 장성들이 우리만 살겠다고 반란군에 손을 들 수는 없는 일 아니오. 우리 군인은 군인으로서 생사를 초월해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병력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합시다.
신정수(민사군정감) : 반란을 막아야 한다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한 후 어수선한 상황에서 아군끼리 충돌해서야 되겠습니까?
육본 지휘부는 당초 수경사의 병력으로 군사반란을 진압하려고 왔으나 수경사 직할부대들이 하나씩 등을 돌리자 크게 낙담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충정부대의 출동은 기대하기 어렵게 돼 가는데 쿠데타 지휘부의 공수여단 병력이 행동을 개시했으니 이미 전세가 기울어가는 듯했다.
장태완은 9공수여단이 회군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9공수여단 병력만 도착하면 전차 4대를 앞세워 경복궁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공격개시선에 집결된 부대를 점검해 나가는 그에게 비서실장 김수택 중령이 달려와 귀에 대고 다급하게 보고했다.
"사령관님, 제가 저 앞 전차 소대 쪽에 갔더니 '장태완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빨리 이곳을 떠나 사령부 안으로 피신하셔야겠습니다."
그는 허리에 찬 권총에 손이 갔다.
"뭐라고? 이런 배신자 놈들…."
사령관으로 취임한지 불과 36일. 그는 직감적으로 수경사가 자신의 부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급상황에서 지휘관에게 언제 배신할 지 알 수 없는 부하처럼 무서운 적은 없다. 그는 비서실장과 함께 황급히 집무실로 들어갔다. 상황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작전참모 박동원은 상황실장 김진선 중령에게 '반란군 가담자들에 대한 체포 및 발포명령'을 각 예하 부대와 검문소에 하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김진선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참모님, 지금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군내부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서도 곤란할 것 같고…. 잘 판단해서 대처하셔야 합니다."
박동원은 이 말이 부하로서 상관을 생각해주는 충언이라기보다 사령부의 반란군 진압에 대한 제동이라고 느꼈다. 그는 순간 이날 밤 상황실을 통해 하달됐어야 할 각종 상황조치와 작전지시가 제대로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심이 갔다.
한편, 수경사가 충정부대들을 동원해 진압작전을 서두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보안사는 우선 이건영 3군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에 대한 내부 체포공작과 함께 본격적인 반란군 병력 동원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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