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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먹는 하마' 중화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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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민족을 먹는 하마' 중화의 그늘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4>

여러분,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다음의 그림에서 나타난 숫자는 무엇일까요 ?

아래의 그림은 올해 봄에 '히스토리 채널'에 방영된 것을 제가 다시 깨끗하게 그린 그림입니다[『빼앗긴 영토 사라진 역사, 영원의 땅 티베트』(히스토리채널 2005. 3. 6)]

[그림 ①] 황당한 그림 (한국은 16번째)

그런데 그림에 나타난 숫자는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중국과 친한 나라의 순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멀리 싱가포르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무슨 해상 교역로와 관련된 그림 같기도 합니다.

중국 주변의 나라들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무슨 경제협력지구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경제 수준으로 우리와 경제협력 지구를 만든다는 것도 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얼까요?

놀라지 마세요. 정답은 1950년대 중국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지도로 중국이 앞으로 회복해야 할 영토라고 합니다. 숫자는 복속시키는 순서를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중국은 한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영토 전부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데도 한국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듯합니다.

이상하게 일본(日本)은 빠져있군요. 중국은 아마 일본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모양입니다. 일본도 중국에 열심히 조공(朝貢)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기에 포함됩니까? 도대체 왜 그런지 알 수가 없군요. 과거 역사의 관성이 붙어서일까요?

1974년은 공산당의 중국이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날이었습니다. 1974년 유엔 특별회의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중국이 어느 날 빛을 바꾸어서 초강대국으로 변화하고 세계의 패권국가로 자처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모욕하고 침략하고 수탈한다면, 세계 인민들은 마땅히 중국에 사회제국주의(社會帝國主義)라는 모자를 씌워야 하며 그 사실을 폭로하고 반대하여야 한다."

그 후 덩샤오핑은 1979년 1월 미국을 방문하고 미국과 수교했습니다. 미국을 방문한 최초의 중국 지도자였습니다. 이 같은 중국의 건강성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단순히 오늘의 중국 지도자들이 대장정(大長征)의 어려움을 겪지 못했고 경망스러워서일까요?

***(1) 검은색과 흰색**

제가 쥬신의 역사를 이야기하려니 어떤 사람들은 "말도 안 돼. 옛날에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무엇이 달라? 다 몽골로이드(황인종)이지."라고 합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렇게 치자면 유태인이나 아랍인은 또 무엇이 다릅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말하고 나니 좀 이상합니다. 세기의 과학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나 세기의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 천재 영화감독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펄쩍 뛸 소리죠. 스필버그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김 선생, 당신 말조심해. 그 악질적인 테러리스트 아랍인들과 우리 유태인이 같다니 그게 말이나 돼? 우리는 신(神)이 선택한 민족이야. 이거 왜 이래."

아이고 제가 말을 잘못했나 봅니다. 뭐가 뭔지 모르겠고 뒤죽박죽입니다. 그렇지요. 다르지요 유태인들과 아랍인은 분명히 다릅니다.

유태인들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격은 유태의 율법(律法)을 지키는 사람이라야만 하는데 이 율법이란 게 너무 유태의 고유 풍습에서 나온 율법들이라 저 같은 사람은 지키기가 좀 곤란합니다. 바로 이웃에 사는 아랍인들도 지키기 어려우니 저는 오죽 하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저는 유태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기는 틀렸습니다.

그나저나 중국에 대한 이야기나 다시 합시다. 먼저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중국인들, 즉 한족들이 언제부터 자기들은 한족(漢族)이라는 의식을 가졌을까요?

이 의문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주 먼 과거로 돌아가면 구체적인 의미에서 민족 개념이 있을 리가 없죠. 또 낙양(洛陽) 사람과 북경(北京) 사람들이 뭐 그리 다르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세상이 온통 백지(白紙)라면 무슨 구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누군가가 검은 점을 찍으면서 세상은 검은 색과 흰색으로 나눠지는 것이죠. 그리고 그 검은 점이 점점 뚜렷해지고 커질수록 흑백의 구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2) 화하(華夏)의 시작**

중국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중국 민족을 스스로 '화(華)', '하(夏)' 또는 '제하(諸夏)'라고 합니다. 쥬신족들이 스스로를 부를 때 '제신(諸申)'이라고 한 것과 대조됩니다['제하(諸夏)'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제신(諸申)'이라는 말을 아는 한국인은 드뭅니다. 각성합시다].

그러나 이 '화(華)', 또는 '하(夏)'라는 종족은 구체적으로 어느 민족인지를 지금까지 밝혀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화(華)'는 화산(華山)의 이름에서 나왔고 '하(夏)'는 하수(夏水)에서 나왔다고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화(華)'라는 말은 '과(夸)'라는 음에서 나왔으며, 이것은 산동(山東) 지방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인 '과'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기도 합니다(章太炎 『태염문록(太炎文錄)』).

그런데 이 '과(夸)'라는 말은 '자랑하다(take pride in)'는 의미가 있으므로'자랑스런 사람(respectable man)', 또는 '자랑할 만큼 훌륭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 '과(夸)'의 현대 발음은 [ku󰐀]로 납니다. 이 발음을 한번 계속해 보시면 '화(華 : [hu󰐁])'에 가까운 발음도 납니다. 만약 중국인이 산동인(山東人)을 지칭한다면, 그것은 중국인들이 인디아 - 동남아 등을 거쳐 산동반도에까지 이른 남몽골인임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중국의 중심지는 산동이 아니라 낙양(洛陽)과 장안(長安 : 현재의 시안)을 포함한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후베이성(湖北省), 안후이성(安徽省) 등의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를 지켜봐야할 것 같군요.

그런데 중국인들이 오늘날과 같은 한족(漢族)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은 언제일까요? 일단 그 말로 보더라도 한(漢) 나라인 듯한데요.

그렇습니다. 한(漢)나라 때 중국의 통일이 이루어지니까요. 아니 한나라 때 통일을 하다니 그러면 진시황(秦始皇)의 진(秦)나라는 어떻게 되죠. 그러면 이 점을 좀 더 분석해봅시다.

한족(漢族)이라는 민족적 실체가 형성되는 기점은 일단 진(秦)나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춘추전국 시대를 통해 전국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게 되었고 결국은 진나라에 의해 통일이 되어 중국민족의 1차 통합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중국인이 형성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진(秦)나라 때 이후 축조하기 시작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국인과 주변 민족들 간의 경계가 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통일은 불완전한 통합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진나라는 중국인들의 대표성을 가지지 못했으며 태생적으로 북방의 유목민에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한족들은 진나라의 통일을 중국의 통일로 보지 않는 겁니다.

중국 민족의 2차 통합은 한(漢)나라 때 이루어집니다. 한나라에 의한 천하 통일은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보면 중국민족의 진정한 통합은 이 한나라 때부터라고 보면 됩니다.

진나라는 엄격한 법 집행으로 사람들의 원성(怨聲)을 사게 됩니다. 그래서 이에 반발하는 여러 가지 사회적 소요가 있었고 결국 유방(劉邦)에 의해서 진 왕조는 끝이 나게 됩니다. 당시 진(秦)나라의 수도를 점령한 유방이 "여러분들은 가혹한 진나라의 법률 때문에 오랫동안 고생하였습니다. 이제 진나라의 법은 없습니다. 법은 단 3조 정도면 족합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남의 물건을 도적질하는 것만 벌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법삼장(法三章)입니다.

한(漢)나라를 건국한 유방은 후일 명나라의 태조인 주원장(朱元璋), 중화인민공화국의 건설자인 모택동(毛澤東)과 더불어 한족 부흥(漢族復興)의 대표적인 영웅이 됩니다. 한나라는 중국 역사상 한족에 의해 통일되고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로서 무려 4백여년 동안 통일과 안정을 이룩하고 찬란한 중국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한나라는 그 이전까지 지역별로 다양하게 발전해온 문화를 융합하여 중국 고전문화(古典文化)를 완성한 왕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 ②] 한나라

이런 의미에서 중국인들은 한나라가 '중화(中華)의 뿌리'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중국인들을 '한족(漢族)', 또는 '한인(漢人)'이라고 하거나 중국어를 '한어(漢語)', 중국문자를 '한문(漢文)'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나라가 이후 전체 중국사에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한나라도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전한(前漢) - 후한(後漢)이 서로 다른 창업자에 의해 건국되었기 때문에 다른 왕조로 볼 수도 있지만 후한이 전한을 계승했다는 강한 국시(國是)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한과 전한을 합쳐서 그저 한나라라고 보면 됩니다(김운회 『삼국지 바로읽기』).

***(3) 위대한 한족(漢族)의 탄생**

한(漢) 제국이 건설되고 중국인들이 한족(漢族)이라는 의식을 가진 것이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이전의 하족(夏族) 또는 제하(諸夏)라고 불리던 민족이 좀 더 큰 차원에서 한(漢)나라의 깃발 아래 모임으로써 민족적 동질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전에는 그렇지를 못했습니까? 그렇지요. 이전에는 주로 낙양 - 장안 등에 이르는 지역을 중원(中原) 즉 세계의 중심이라고 했고 양자강 남쪽이나 황하 이북 지역을 중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춘추 전국시대까지도 중국의 영역은 작았지요. 예를 들면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초나라 왕이) 나는 야만적인 오랑캐[蠻夷]라서 중국의 호시(號諡)와 같을 수 없다(「楚世家」)." 라든가 "진(秦)나라는 중국의 제후들의 회맹(會盟)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랑캐[夷翟]로 간주되었다(「秦記」)."하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춘추 전국시대에서는 중국의 서북방에 위치했던 진나라나 양자강 유역에 있던 초나라 등을 제외한 황하 유역의 국가들을 중국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그림 ③] 춘추전국 지도

즉 한나라 이전에는 황하 이남이나 장안의 동쪽, 장강의 북쪽 등 작은 지역을 중원(中原)이라고 하여 중국의 본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엉뚱하게 오랑캐로 생각되던 진나라의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하자 양상이 좀 바뀌었죠.

『한서(漢書)』에서는 "진시황은 오랑캐들을 물리치고 장성(長城)을 쌓아서 중국의 경계로 삼았다(「西域傳」)."고 합니다. 물론 이 장성은 엄밀히 보면, 오늘날의 만리장성을 그대로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기는 하지만 일단 중국이라는 역사적 무대를 지정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진시황의 업적은 두 가지 점에 있어서 한족(漢族)에게는 (그가 오랑캐라고 해도) 지대합니다. 하나는 춘추전국이라는 복잡한 정치국면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영역을 물리적으로 지정하기 시작함으로써 중국인이라는 민족적 실체가 서서히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나저나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오랑캐가 한족들을 통일하여 한족의 실체가 서서히 태동했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진시황은 지금까지 '폭군(暴君)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 중국 역사에서도 하나의 운명처럼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오랑캐의 대명사인 청태조(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나 청태종(아이신자오뤄홍타이치)이 현대 중국의 영역을 만들어 주었지요. 어쨌든 진나라와 한나라의 등장으로 한족(漢族)의 실체와 영역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냅니다.

[그림 ④] 중국 영역의 확대(은 - 주 - 진한)

[그림 ④]는 은나라와 주나라 및 진나라, 한나라 등을 거치면서 확장되고 있는 중국의 영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족(漢族)의 탄생과 더불어 중화사상(中華思想)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지요. 중화사상은 '한족에 의한 천하의 지배질서'를 이론적으로 구체화 한 것입니다.

한(漢)나라 때에 접어들면서 이전의 단편적 수준에 있던 중화사상이 보다 구체화되고 정교해지기 시작합니다. 한나라 이전의 이론가가 주로 공자(孔子)나 맹자(孟子)였다면 한나라 때는 동중서(董仲舒 : 179~104 B.C.)나 가의(賈誼 : 200~168 B.C.)가 그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론을 그대로 한무제(漢武帝)가 강력한 국력(國力)을 바탕으로 현실화합니다. 이로써 초기 중화사상의 골격은 완성된 것이지요.

그 후 중국의 영역은 확대일로를 걷게 됩니다. 즉 삼국시대에 이르러 중국은 황하 중ㆍ상류 지역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일어난 국가도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나라 이후 중국의 개념은 지속적으로 확대 팽창되어왔습니다.

***(4) 쥬신 오랑캐 되다**

그런데 이 한족의 탄생이 주변 민족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한족(漢族)의 탄생 및 구체화와 더불어 주변민족은 확실히 오랑캐로 다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즉 이전에는 자신이 오랑캐인지도 몰랐는데 한(漢)나라가 등장하여 한족(漢族)의 실체가 명확히 되면서 확실히 오랑캐가 되게 된 것이죠. 이것은 마치 가만히 있다가 이교도(異敎徒)가 된 아랍인들과 비슷합니다. 어이가 없는 일이죠.

즉 이전에는 낙양과 장안, 그리고 산동의 일부 등 중원(中原)이라고 불리던 좁은 지역에 살던 극소수의 화하족(華夏族)들이 남들을 오랑캐라 하더니 이젠 중국의 영역을 일정하게 표시하고는 그 이외의 민족을 몽땅 오랑캐로 취급한 거죠.

그러면 이들이 오랑캐가 된 과정을 한번 볼까요?

『논어(論語)』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랑캐들에게 임금이 있는 것은 제하(諸夏) 여러 나라에 임금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세계의 성인(聖人)이라는 분이 하신 말씀치고는 좀 심합니다. 그의 제자는 한술 더 뜹니다.

"나는 중국사람[夏]이 오랑캐들[夷]을 변화시켰다는 말을 들었어도 오랑캐가 중국인들을 변화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맹자(孟子)』「滕文公篇」)"

그리고 『예기(禮記)』에서는 오랑캐는 불변하는 고유한 성격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독특한 거처와 음식·의복 등이 있으며 이들은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며 기호도 다르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동쪽에 사는 오랑캐를 이(夷)라고 하는데 이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被髮] 몸에다가는 문신(文身)을 새기고 음식물을 날로 먹었다고 합니다(「왕제편」). 한나라 무제 때 동중서(董仲舒)의 말처럼, 오랑캐는 중국을 예(禮)로서 대할 수가 없고 중국도 오랑캐들에게는 예절로 대할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춘추좌전』에는 "서쪽 오랑캐[융(戎)]나 북족 오랑캐[적(狄)]는 승냥이 이리떼와 같다"고 합니다. 사람이 아닌 것이죠.

이렇게 되다가 이젠 확실히 오랑캐의 모습들이 구체화됩니다.

즉 중국인들은 북방 유목민들을 서융(흉노, 강), 북적(흉노, 선비), 동이(갈, 예맥) 등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흉노·선비·갈·예맥이니 하는 명칭들은 이들 부족들이 스스로 부르는 명칭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자기들이 분류하기 편리한 대로 임의로 부여한 명칭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인간 이하를 지칭하는 욕들입니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진 '예맥(濊貊)'이란 '똥오줌이 묻은 더러운 (승냥이 같은) 짐승'라는 뜻인데 간단히 얘기하면 '똥고양이'이죠. 세상의 어느 부족이 자기 부족 그렇게 부르겠습니까? 그리고 선비(鮮卑)란 동물무늬가 있는 허리띠[세르베] (에가미 나미오 교수의 고증), 흉노(匈奴)란 '입심 좋은 노예'라는 뜻입니다. 물길(勿吉)은 '기분 나쁜 놈(재수 더러운 놈)'입니다.

[그림 ⑤] 사이(四夷 : 중국 주변의 오랑캐들)

중국인들은 사방의 오랑캐들을 이렇게 나누지만 실제로는 북적(北狄)이나 동이(東夷)는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이 점은 앞으로 계속하여 상세히 분석해 드립니다).

이와 같이 한족이라는 실체가 역사상에 나타나자 동아시아는 여러 가지의 변화가 생깁니다. 이것을 한번 정리해 봅시다.

① 중국의 영역이 일정하게 그리고 점진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합니다[중국인들은 한나라 때 중국 동부 해안 지대의 쥬신 문화와 장강(長江)을 중심으로 번성하였던 초(楚)나라의 문화를 하나의 용광로 속에 밀어 넣습니다. 이어 위진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소위 남만(南蠻)이라고 불렀던 남방지역을 한족화(漢族化)하는 작업을 강행합니다].

② 한족(漢族)의 실체(national identity)가 명확해질수록 주변민족들은 중국 역사의 무대에 확실히 오랑캐로 등장합니다. 즉 이전까지는 역사적 자료로서 민족적 실체가 불분명했던 민족들이 한족(漢族) 사가(史家)들에 의해서 정교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민족들은 확실하게 한족(漢族)의 오랑캐가 된 것이죠.

③ 한족의 등장은 다시 주변민족(오랑캐)들의 민족의식(民族意識)을 자극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의 이 같은 책동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것은 몽골쥬신입니다. 그래서 몽골쥬신은 아직까지도 견고히 민족적인 실체를 유지하고 있지요.

④ 동아시아의 민족과 그 민족이 건설한 국가가 역사의 주요 행위자로 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즉 동아시아의 각 민족적 정체성은 한나라 이후부터 견고하게 구축되기 시작합니다. 즉 산동 - 낙양 - 장안 등에 살았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기들은 한족(漢族)이라는 생각이 굳어지면서 그 주변 민족을 더욱 비하하게 되고 주변 민족들에 대한 차별화 작업을 강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한족들의 입맛에 맞도록 주변민족들에 대한 분류 작업도 가속화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문자가 없어서 생긴 일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런 한편으로는 주변민족들의 민족적 자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 중국의 오랑캐 즉 주변민족 들은 다음의 세 가지 중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내몰립니다.

ⓐ 중국과 동등하게 행동하여 중국과 적대적 관계를 지속하거나(고구려, 몽골)
ⓑ 중국의 질서 속에 편입하여 적당한 독립 상태를 유지하거나(조선)
ⓒ 중국에 완전히 동화되어 실체가 사라집니다(남만).

그 동안의 역사를 보면 주로 ⓐ → ⓑ → ⓒ 의 방향으로 진행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중국은 가히 '민족을 먹는 하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 민족을 먹는 위대한 하마, 중화주의**

도대체 중국인만큼 수천 년에 걸쳐 민족적 실체(national identity)를 견고히 유지하는 민족이 세상에 있었을까요? 그런데 희한한 일은 한족(漢族)들이 항상 중화백성과 오랑캐로 세상을 보더니 최근 10여년간 갑자기 중국은 다민족국가(多民族國家)이며 모든 오랑캐도 중화인(中華人)이라고 선언하고 나선 것입니다. 중국은 그들의 스승인 공자나 맹자의 말을 무시하고 오랑캐들을 모두 한족이라고 선언하고 있지요. 중화주의의 실제 창시자인 동중서(董仲舒)가 들었다면 기절할 일이지요. 그뿐입니까? 중화의 영웅인 악비(岳飛, 1103~1141)나 문천상(文天祥, 1236~1282) 등이 들었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입니다.

황하 유역의 화하족의 문명의 중심지를 '중국'이라 부르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중국인이라고 하는 전통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지속적이고 견고하게 유지되어왔습니다. 물론 중국이라는 말은 세상의 중심을 의미하는 말로 보통명사이지만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中華民國)', 즉 중국(中國)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사상은 바로 중화주의(中華主義)입니다.

중화주의 즉 중화사상은 쉽게 말해서 중국민족이 천명(天命)을 받아서 세계를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는 중국 고유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 체계는 이미 주(周) 나라 때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나라가 차지한 영역이 협소하고 그것이 오늘날 중화사상을 대변할 정도라고 보기는 어렵지요.

그러나 이 같은 천명사상은 맹자에 의해 더욱 체계화되고 이론화 됩니다. 그리하여 후일 한(漢)나라가 중화사상을 실현하는 현실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한나라 초기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석학(碩學)인 동중서(董仲舒)는『춘추번로(春秋繁露)』에서 "하늘[天]은 우주의 주관자이며 한나라가 무도한 진(秦) 나라를 벌한 것은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한나라의 황제는 이 같은 하늘의 뜻(천명)을 대리 수행하는 존재 즉 천자(天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즉 한나라의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며 하늘의 뜻을 하늘을 대신하여 수행하는 대리자라는 것이지요. 이후 이러한 생각은 그대로 계승되게 되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 좀 지나칩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중국놈이 번다.'고 하듯이 아무리 오랑캐지만 중국을 최초로 통일해 준 사람에 대해서 지나치게 폄하하고 있습니다.

진시황이 천명(天命)을 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진나라의 멸망은 다른 각도에서 봐야합니다. 당시의 중국이란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상태였는데 진나라가 이것을 보다 빨리 하나로 통합하려다 생긴 일이지요. 한나라 고조 유방은 말로만 통일을 했지 실질적인 통일은 60여년 뒤의 한무제(재위 : 141~87 B. C.)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진시황은 오랑캐지만 중화 영웅에 들어가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동중서의 말은 진시황이 천명을 받기는커녕 천벌(天罰)을 받은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대의 석학이라는 사람이 하는 말치고는 지나칩니다.

어쨌거나 한나라 때 중화사상, 또는 중화주의는 중국민족의 정체성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실천화합니다.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 민족 형성의 분기점을 한(漢)나라 이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죠 ?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중국인 말고 다른 민족은 천명(天命)을 받을 수 없는가 하는 점입니다. 원래의 이론대로라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한족(漢族)이 따로 있고 오랑캐가 따로 있을 리 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덕(德)이 있는 자가 천명을 받는 것인데 이 덕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국인들의 고유 신앙이나 관습을 토대로 한 덕입니다[이춘식 『중화사상의 이해』(신서원 : 2002) 132쪽]. 따라서 중국인들이 말하는 그 덕(德)을 가지려면 아예 중국인이 되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안된 일이지만 중국을 통일하여 한족을 만들어 준 진시황과 세계의 주인이었던 원나라 태조(칭기즈칸)나 중국영역을 최대로 확장해준 청태조(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도 천명을 받을 수는 없지요. 어디 오랑캐가 덕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나사렛 같은 촌구석에 어디 인물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저러나 중화주의는 중국인에 의한 세계 통치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통치의 일원성(一元性)을 천명하는 통치이념이 됩니다. 여기에 다시 송나라의 성리학(性理學)이 가미되면서 중화주의는 인식론적인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성리학이 가미된 중화사상은 한족(漢族)들을 골수 중화민족주의자로 만들 수 있었으며 수천 년 동안 온갖 시련에도 민족적 실체를 유지하는 바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함께 중국도 국사나 민족을 해체하자고 권고를 해요? 중국을 몰라도 한참 모르거나 참으로 순진한 생각입니다.

중화사상에 따르면, 천명(天命)을 받은 중국의 황제를 중심으로 세계의 중심에 중화(中華)가 형성되고, 그 주변국은 이 중화와의 의리에 기반한 문화적 군신관계(君臣關係)를 형성함으로써 천하의 질서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리학에 따르면, 천명(天命)을 받은 중국의 황제[천자(天子)]는 세상의 중심인 중국 민족과 천제(天帝)를 연결해주는 사람으로 반드시 천명을 성실히 수행하고 주변의 제후국을 문화(文化)로 감화시키고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지역별 국가 자치제의 완성을 추구해 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후국들은 중국의 황제를 신뢰하고 본받아서 의사(擬似) 중화국(中華國)의 건설에 매진하여 천하의 평화를 달성해 가야 합니다.

그러니 주변 나라들은 중국에 조공(朝貢)을 하나 안하나 모두 중국의 신하입니다. 설령 오랑캐들이 중국을 지배한다고 해도 그들은 그저 무도(無道)한 놈들일 뿐이지 중화가 사라진 것도 아니죠. 결국은 중화가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이승기필패론(理勝氣必敗論)이 그것이죠. 제가 『삼국지 바로읽기』에서 말씀드린 것처럼,『삼국연의』에 나타난 유비(劉備)의 불패사상(不敗思想)도 같은 맥락입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주변민족은 이미 2천년 전에 한족(漢族)에 복종하고 살아가야할 의무만 남은 민족들만 있는 것이죠(이제 세상은 중국에 복종하고 있거나 앞으로 복종할 신하들밖에는 없는 것이죠). 참으로 아큐(루쉰『阿Q正傳』주인공)식의 자아도취적 논리입니다.

그러나저러나 이 같은 중화사상을 한족(漢族)이 아닌 민족으로서 가장 성실하게 수행하여 "중국보다 더 중국적인 나라"를 만든 나라가 바로 한반도의 조선(朝鮮) 왕조입니다. 그래서 항상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합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 시끄러운 동북공정에 대해서도 아무 말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으로서는 확실한 머슴 하나를 옆에 둔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소중화, "새끼 중국"을 자처한다고 해도 중국인들이 그것을 제대로 봐 줄지가 의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은 오랑캐들을 사람같이 생각한 예가 없기 때문입니다.

***(6) 오랑캐 길들이기 : 기미부절(覊縻不絶)**

한족(漢族)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의 형성은 여러 각도에서 동아시아의 역사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 점을 정리해 봅시다.

① 중국의 영역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면서 북방 유목민들과의 충돌이 잦아지게 됩니다. 민족적 갈등이 심화되는 것이지요.

② '중국'이나 '한족(漢族)'의 개념이 '사이(四夷 : 중국의 주변에 존재하는 네 방향의 오랑캐)'의 상대개념(相對槪念)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③ 중화주의로 인하여 중국의 주변민족은 사사건건 내정문제(內政問題)에 간섭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단적인 예가 하늘을 숭배하는 유목민들이 마음껏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도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예기(禮記)』「왕제편(王制篇)」에 "천자는 하늘에 제사하고 제후는 사직에 제사를 하며 천자는 어느 곳이든지 명산대천을 골라서 제사를 지내지만 제후는 자신이 다스리는 곳의 명산대천에서만 제사를 할 수 있다.(天子祭天地·諸侯祭社稷. 天子祭天下名山大川 諸侯祭名山大川在其地者)"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중원의 주인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말이지요. 중국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이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팠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쌓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적으로 중화사상에 동화될 수밖에 없겠지요. 어쨌거나 세력이 약한 중국 주변 민족들은 중국의 눈치를 보아가면서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하거나 아니면 쉬쉬해가면서 적당히 제천의식을 하는 경우도 많았겠지요. 힘은 강자(强者)의 정의(正義) 아닙니까?

한족의 이러한 주변민족들에 대한 비하(卑下)는 한편으로는 역사 서술의 비대칭성(非對稱性)이 공고화되고 (즉 주변민족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도 없이 불평등하게 함부로 비하한다는 말이죠),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민족들이 한족에 대한 적개심(敵愾心)을 가지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민족이 몽골입니다. 오죽하면 몽골인들은 같은 민족인 요(遼)나라인들이 중국인들의 흉내를 내니 이들을 "중국인 트기" 쯤으로 여기면서 비하하여 지금도 중국을 요나라라고 하겠습니까?(이 부분은 다시 상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민족이 중국에 적개심을 가진 것은 아니죠. 특이하게도 조선 후기의 지배층들은 자발적으로 중국을 '부모(父母)의 나라'로 섬깁니다. 중국의 국력을 감안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부가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중국은 참 행복한 나라입니다.

한족(漢族)은 스스로를 주변 민족들과 철저히 구별함으로써 주변 이민족을 변방의 야만족으로 대합니다. 주변 민족(오랑캐)의 역사를 중화민족의 역사로 포괄하기에는 이질성이 너무 많다는 것이 한족의 기본적인 역사인식입니다.

중국인들의 주변 민족에 대한 일관된 정서는 기미론(覊縻論)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한서(漢書)』에 "중국과 오랑캐 사이의 관계란 기미부절(覊縻不絶)의 관계만 있을 뿐이다(『漢書』「陳湯傳」)."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오랑캐와는 기본적으로 상종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때로 중국에 위협이 되므로 그대로 둘 수는 없고 말이나 소처럼 고삐를 끼워두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참으로 엄청난 말이 아닐 수 없지요. 이 기미론이 가지고 있는 뜻은 중국인을 제외한 백성들은 모두 동물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예(禮) 또는 회초리로 이들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죠. 이 주변민족들은 위험하고 성가신 존재이므로 적당히 고삐를 메어두었다가 중국을 위해 필요할 때 적절히 사용한다는 것이죠.

***(7) 지나친 생각들**

지금까지 본 대로 한(漢)나라는 중국 역사의 호수입니다. 마치 로마가 유럽사의 호수였듯이 말이죠. 그런 점에서 쥬신의 역사에도 호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구려(高句麗)지요.

쥬신의 역사에서 고구려가 중요한 이유는 고구려사가 쥬신족 역사의 일부였기 때문이 아니죠. 고구려는 쥬신족들의 구성과 민족적 일체성을 곧추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는 몽골을 파생시키고(다시 충분히 설명해드립니다), 그대로 대조영의 고려(발해)나 왕건의 고려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고려는 조선으로 이어졌고 대조영의 고려(발해)는 금(金)으로 계승이 된 것이죠. 또 그 금은 후금(청)으로 계승됩니다.

이제 쥬신의 역사기행에 앞서 중화사상과 관련하여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료에 의해 어느 정도의 검정이 가능한 민족이나 역사적 공동체를 논할 때는 한(漢)나라 이후를 두고서 보는 편이 타당하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공자(孔子)는 동이족(東夷族)'이니 '강태공은 한국인'이니 또는 유명한 '충신 백이와 숙제가 동이족'이니 하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즉 한(漢)나라 이전에 나타나는 쥬신의 역사나 중국의 역사는 큰 의미를 둘 수가 없다는 말이죠.

여기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한(漢)나라 시대 이후 역사에 대한 정리가 대단히 체계화되고 객관화되어서 역사적인 사료 등에 대한 신뢰도가 상당히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검증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는 것이죠. 우리가 상상으로 역사를 볼 수는 없는 일이지요. 좋건 싫건 간에 사료가 없거나 확인이 불가능한 것을 두고서 학술 논쟁을 해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바탕에서 이루어진 어떤 이론들도 수용하기는 어렵습니다.

둘째, 한(漢)나라 이후 중화사상이 견고해지면서 중화인(中華人)과 오랑캐 즉 화이관념(華夷觀念)이 견고해졌기 때문입니다. 즉 한나라 이전에는 중국이라는 개념이 모호하고 그 영역 또한 협소할 뿐만 아니라 한족(漢族)이라는 민족 개념이 모호한 상태이므로 한족과 비한족(非漢族)의 구분이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지요. 앞서 보셨다시피 양자강 남부나 현재의 북경지방도 중국과는 무관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서 보면, 한(漢)나라 이후 쓰여 진 역사서들의 내용들은 1백%는 아니라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검증은 가능하다는 얘기지요. 이른 바 중국의 25사(二十五史)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역사서로 중국 역사의 정사(正史)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 이십오사는 물론 중국인의 기준에서 서술되어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고는 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즉 이 이십오사에는 같은 사실이라도 ① 같은 책에서도 다른 각도로 여러 군데서 분석해 놓기도 하고['기전체(紀傳體)'의 특성], ② 다른 사서(史書)들에 다시 나타나기도 하고 ③ 시대에 다른 변화추이를 보기가 용이할 뿐만 아니라(사서가 시기별로 편찬되므로) ④ 나름대로는 투철한 직업의식과 소명의식을 가진 엄정한 사관(史官)들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기도 용이하고 신뢰할 만합니다. 그래서 한나라 이후에 나타나는 역사적 사실들은 어느 정도 추적이 가능한 일이죠.

그 동안 쥬신의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지나치게 과거로 올라가서 역사를 기술하는데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예를 들면 『한단고기(정신세계사 : 1999)』에 한국시대는 3301년이고 "신시 말기에 치우천왕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누리더라." 라고 합니다. 이렇게 정확한 수치를 기술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느 사료를 근거로 또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한(漢)나라 이전 사료(史料)들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것도 문제지만 한나라 특히 동중서(董仲舒 : 179~104 B.C.) 이전에는 ⓐ 중화사상도 불완전하고 ⓑ 중국인(한족)들의 실체가 불분명한데 ⓒ 중국인들보다도 실체가 더 불분명한 쥬신의 역사를 정리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한나라 이전에 제대로 된 민족개념이 있다고 보는 것도 잘못입니다. 과학적인 분석을 기반으로 해야 할 학문이 목소리만 크다고 될 일은 아니지요.

***(8) 현대 중화패권주의의 미래**

그러면 지금까지 견고하게 유지된 중화주의는 현대 사회에서는 어떨까요? 「들어가는 글」에서 보신 대로 전체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가 중국 오성홍기(五星紅旗)의 깃발 아래 신하(臣下)의 예를 갖추어 무릎을 꿇을까요?

중국은 외형적으로 보면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과 개방에 크게 성공한 이후 국방력이나 경제성장도 빠르고 국력도 매우 강대해보입니다.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중국은 겉보기와는 달리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 점을 간단하게 요약해 봅시다.

① 현대 중국의 경제 성장은 외국자본의 유입에 의한 부분이 많고 자체적인 성장 동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현재 중국의 임금(wage)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으며 향후 10년 이내에 외국자본이 더욱 값싼 지역으로 자본 이동을 강행할 경우 심각한 실업문제가 발생할 위험성이 큽니다.

② 중국의 동남해안(상하이, 산둥, 광둥, 푸첸, 텐진)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의 개발이 미진합니다. 특히 내륙과 서북부의 미개발 상태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③ 중국의 3% 정도의 최상층 그룹이 형성되면서 극심한 빈부격차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13억 인구 가운데 4천만이 최상층이고 6~7천만 정도가 중산층이며 나머지 10억 이상이 매우 빈곤한 상태입니다. 이것은 잦은 소요사태(騷擾事態)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④ 심각한 관료주의(官僚主義)의 병폐에 시달리고 있으며 갈수록 격렬하게 진행되는 자본주의화는 불가피하게 언론의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게 되어 장기적으로 공산당 1당 독재체제로서는 버티기 힘든 상황이 올 것으로 보입니다.

⑤ 소수민족(少數民族)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같은 무리한 프로젝트를 추진함으로써 천년(千年)의 혈맹(血盟)인 한국과 같은 주변민족들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도 중국의 오판(誤判)으로 보여 집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노회(老獪)한 중국인답지 않게 일을 추진한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동북공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고구려의 역사를 집어 삼키려는 무모함이라기보다는 중국이 동아시아의 상황을 오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약간의 경제개발에 도취되어 그 스스로가 과거 한무제(漢武帝)의 힘을 가졌다고 오판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은 중국 통치자들의 강인하고 신중했던 장정세대(長征世代)가 끝이 났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림 ⑥] 중국 역대 통치자 (좌로부터 마오쩌둥, 덩샤오핑, 후진타오)

중국은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련(Soviet Russia)의 경우도 미국과의 경제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몰락한 것을 중국의 지도부가 직시해야 합니다. 미국의 지속적인 저유가(低油價) 정책으로 석유 수출에 의존하던 소련 경제가 심각한 재정적자에 봉착한 데다 미국의 SDI(Strategic Defence Initiative) 프로젝트의 추진으로 소련의 숨통을 눌려버린 것이 소련붕괴의 원인이었다는 지적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요.

군사적인 측면이나 전략적으로 중국은 일본과 미국, 타이완(臺灣), 한국에 의해 봉쇄되어 있습니다. 중국이 일본이나 미국의 영향력을 벗어나 태평양이나 동남아시아로 나가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아마 중국은 동남아의 화교(華僑) 세력을 이용하여 이 같은 문제들을 극복하려 하겠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일본을 자극하면 일본의 재무장(再武裝)을 초래하여 중국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대만(臺灣)도 단기간에 중국의 주요 시설과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를 초토화(焦土化)시킬 수 있는 공군력(空軍力)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현재 경제성장률도 매우 높은 나라로 외부적으로 큰 발전을 하고 있긴 하지만 석유를 포함한 많은 자원을 수요로 하기 때문에 세계 석유시장과 그 수송로를 완벽히 장악하고 있는 미국은 언제든지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2005년 현재 중국은 제2의 석유 수입 국가이기 때문에 극심한 재정 적자 상태의 중국으로서는 고유가(高油價)를 견디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국은 하루 6백만 배럴의 석유를 소비하고 있으며 90년대에는 세계 석유 총생산량의 5%를 소비했지만 지금은 거의 10%를 상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아직까지는 중화패권주의가 팍스아메리카나(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지향하는 미국의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과 충돌하기에는 요원한 상태입니다. 이 점을 중국의 지도부가 인식해야 합니다.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은 미국과 심한 군사적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고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석유자원의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을 가상적국(假想敵國)으로 인식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 같은 요인으로 인하여 현대 중국의 중화주의 즉 중화패권주의(中華覇權主義)는 단기간에는 실현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답답한 일은 바로 한국입니다. 청나라 말기 중국이 열강에 의해 핍박을 받으면서도 한족(漢族) 관료 리훙장(李鴻章)을 중심으로 오직 한반도에만 확실한 종주권을 행사하려 했던 것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이지 한국은 중국의 동네북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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