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6천명 사망ㆍ실종된 비극의 현장**
페론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은 아르헨티나 군부가 반정부인사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였던 '추악한 전쟁'의 본부이자 아르헨티나 판 아우슈비츠로 악명 높은 해군본부 내 감옥이 29년만에 현지 언론에 공개됐다.
22일 오전10시(현지시간) 필자를 포함한 50여명의 아르헨티나 현지 내외신기자단은 지금까지 일반인들에게는 금단의 땅으로 알려진 악명 높은 해군공병학교 지하감옥을 방문, 생지옥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두 명의 생존자들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청취했다.
지난 76년부터 82년까지 정권을 잡았던 아르헨 군부는 자신들에게 반대입장을 취한 정치인, 학생, 페론 당원 등을 무차별적으로 납치하여 해군본부 내 공병학교 병영 안에 감금시키고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고문으로 5천 여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늘어나는 정치범 수용에 골머리를 앓던 군부는 매주 화요일 새벽 정치범들의 발목에 벽돌을 매달아 비행기에 태워 강물에 던져버리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진 '야간비행'이 당시 생존자들에 의해 사실임이 드러나기도 했다.
당시 군 정보기관원들에게 납치되어 아직까지 생사를 알 수 없는 실종자가 3만6천 여명에 이르는 비극의 현장에는 감옥과 창고 등 흔적만 있을 뿐 고문기구나 문서 등은 깨끗하게 청소돼 있었다. 침침한 어둠과 군데군데 벗겨진 페인트, 미로처럼 얽힌 지하통로 사이에서 가혹한 고문행위를 설명하는 생존자들의 증언에서 당시 아버지를 잃은 한 유력언론사의 여기자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려 동행한 기자단 일행을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생존자들 "군부와의 진실게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시의 생존자인 엔리께 포크만(48)씨는 "지난해 3월 키르츠네르 대통령이 이 역사적인 장소를 아르헨티나 과거사 역사 박물관으로 지정하자 해군은 이곳에 있던 모든 고문기구들과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문서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며 "오는 12월 이곳의 모든 시설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정부에 이양이 되면 이들 역사적인 자료들을 일반에 공개하도록 요구하겠다"고 주장했다.
아르헨티나의 군부과거청산은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며 남아있는 군부세력과 피해자가족들간의 진실게임은 계속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거의 비슷한 기간 동안 군사독재의 경험을 한 한국인 필자에게 특별한 호감을 보인 까를로스 가르시아(56)씨와 엔리께 포크만(48)씨를 따로 만나 보았다.
***생지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과 일문일답**
-언제 어떻게 체포되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나.
포크만: "체포된 게 아니라 납치된 것이다. 나는 당시 체포될 만한 잘못을 하지 않았다. 다만 지난 77년 10월 이유도 모른 채 납치되어 이곳으로 끌려왔을 뿐이다."
-추악한 전쟁 당시 주로 어떤 사람들이 납치의 대상이었나.
가르시아: "군부에 비협조적인 언론인, 정치가들, 반정부시위를 벌이는 학생, 페론 당원 등 무차별적인 납치작전이었다. 나는 페론당 소속으로 노조관련 업무를 보다 납치되어 이곳에 수감되었다"
-감옥 곳곳에서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이 행해졌다고 했는데 이들 군인들은 왜 이런 고문을 자행했다고 생각하나.
가르시아: "해군정보국은 이곳에서 아르헨티나의 입법ㆍ사법ㆍ행정ㆍ언론을 통제했다. 따라서 이 부분에 경험이 있는 일손이 필요했고 군부의 의도대로 정국을 이끌고 가기를 원했다. 이들의 요구를 거절한 정치범들과 학생들은 고문을 당했고 많은 죄수들이 고문에 못 이겨 생을 달리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공포에 떨기도 했다. 그리고 군부는 자신들의 실정을 호도하기 위해 페론을 매도하기 시작했고 페론의 업적 말살작업을 여기에서 주도했다."
-고문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포크만: "물론이다. 군인들은 매일 저녁 우리들이 취침을 하기 전 몇몇 죄수들을 선정해서 전기의자를 감방에 설치해놓고 의자와 정치범들의 몸에 물을 뿌려 감전효과를 높인 후 고문을 시작했다. 우리들의 눈앞에서 부르르 떨면서 고통에 신음하는 죄수들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생지옥 그 자체였다. 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큰 물통을 가지고 와서 비협조적인 젊은 학생들의 머리를 그 속에 처박아 숨을 쉬지 못하도록 하는 물고문을 하기도 했다."
가르시아: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악몽에 시달린다. 더욱이 나를 괴롭혔던 건 여자정치범들과 학생들에 대한 폭력이었다. 정치에 가담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끌려와 갖은 고문과 성폭행을 당하는 것을 옆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나 자신의 무기력함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다. 나중에 느낀 것이지만 그들은 고문과 여자 죄수들을 괴롭히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인간이 그렇게 잔인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정치범들과 학생들의 다른 인권침해 사례는 없었나.
포크만: "당시 아르헨티나에는 인권이라는 말 자체가 실종됐었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생지옥이었지만 밖에 남아있는 가족들 역시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한번은 이곳 요원의 심부름으로 보관창고를 갔다가 놀란 일이 있었다. 거기에는 피해자가족으로부터 강탈해온 가구와 가전제품 등 귀중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매일 이곳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이 퇴근을 하면서 필요한 대로 몇 개씩 가지고 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당시 군부는 마치 점령지의 주둔군들처럼 행동을 했다. 그리고 수감자 가족들의 어린아이들을 유괴, 양자로 팔아 넘기는 게 군인들 사이에 유행을 하기도 했다."
-'야간비행'이라고 알려진, 정치범들이 산 채로 비행기에 태워져 강물에 던져진 일이 실제로 있었는가.
포크만: "그렇다. 우리는 매주 화요일 새벽이면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화요일 새벽만 되면 어김없이 20여명의 비협조적인 죄수들을 무작위로 선별, 머리에 두건을 씌우고 손발을 묶은 다음 연병장에 대기중인 포커기종의 비행기에 태워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이 수용소 안의 처우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가르시아: "당시 우리 모두는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아침은 마른 빵 한 조각과 마때(아르헨티나 전통녹차) 한 잔이 고작이었고 점심과 저녁은 햄 한 조각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으며 몇 년을 살아왔다. 지금도 우리는 당시의 영양실조와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또한 수용인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의료시설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진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죽어가기도 했다.
-고문이 자행되었던 감옥마다 천주교신부가 입회를 했다고 설명을 했는데.
포크만: "그렇다. 모든 방마다 천주교신부들의 지정석이 있었고 그들은 우리들의 고통 현장의 증인들이었다. 대다수 신부들은 아르헨티나 국적이 아닌 외국에서 파견된 신부들이었는데 그들은 시종일관 군부의 만행에 침묵으로 일관했고 군부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진1. 29년만에 금단의 벽을 허물고 현지기자단에 공개된 아르헨티나 해군 공병학교 정문. 7년의 군사독재 기간 동안 3만6천여명의 애꿎은 아르헨티나 시민들이 이곳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김영길
2. 권력을 장악한 군부가 아르헨티나 정치ㆍ언론을 주물렀던 해군정보국건물. 당시의 문건과 고문기구들은 현 군부에 의해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
3. 정치범들의 수효가 늘어나자 군부는 건물 지붕 아래 다락방까지 수용소로 사용했다. 이곳은 주로 매주 화요일
새벽 비행기에 태워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 라 쁠라따강 속에 수장시킬 죄수들의 임시수용소 역할을 했다.
4. 지하감옥에서 참혹했던 당시를 회상하고 있는 생존자 엔리께 포크만씨.
5. 납치된 정치범들을 발가벗겨 지하감옥으로 처넣을 당시를 설명하고 있는 카를로스 가르시아 생존자.
6. 필자와의 대담 중 ‘한국 역시 군인들로부터 혹독한 철권통치를 경험했다'는 말에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다며
웃고 있는 엔리께 포크만씨
7. 군정 당시의 고문과 영양실조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설명하는 카를로스 가르시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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