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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가지 일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

[전태일통신 41] 시각장애인과 직업선택의 자유

안마는 시각장애인들의 생존권입니다

지난 5월 25일 헌법재판소에서 지금까지 시각장애인에게만 허용되어 오던 안마업을 개방하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시각장애인들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일이었습니다. 이제 시각장애인들의 삶은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나락 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안마업은 약 100년 동안 시각장애인들에게만 허용되어 온, 시각장애인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자 직업이었습니다. 자격을 갖춘 시각장애인 안마사는 의료, 침술, 맛사지 등 시각장애인 특수학교에서 3년 동안 집중 교육시켜 양성해 왔습니다. 지격인정 시험은 각 시, 도에서 주관하였기 때문에 무자격자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자격증이 있어도 일자리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텐데 자격증을 가지고 일할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취업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각장애인들 스스로 일터를 만들어 동료 시각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약 1000개 정도 시각장애인들이 운영하는 안마시술소가 있는데, 한 업소에서 5~6명의 시각장애인을 고용합니다. 이렇게 약 6000~7000명의 일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적인 배려가 있었기에 복지정책 하나 없는 이 나라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아무 도움 없이 살 수가 있었습니다. 안마업은 시각장애인들 스스로 만들어 낸 자립의 터전이었습니다. 장애인 의무고용제도가 있다고 하지만 시각장애인이 취업할 곳은 이 땅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안마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일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취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9년 경제위기가 닥치고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일 때 스포츠 마사지, 발 마사지, 경락 마사지 등등 이름만 달리한 유사 안마업이 무더기로 생겨났습니다. 그때 우리 시각장애인들은 눈을 보는 일반 사람들도 일자리가 없어 취업을 못하고 나라 전체가 어렵다고 하니까 고통을 분담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양보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시각장애인들이 사랑으로 묵인해 준 스포츠 마사지, 발 마사지, 경락 마사지 등 일반 사람들이 하는 유사 안마업종이 시각장애인들 안마업을 90% 이상 잠식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헌법재판소에 소송을 내서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제도를 인정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 낸 것입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시각장애인들은 일반인들과 자유경쟁을 해서 살아 남아야 합니다. 법적 보호를 받고 있을 때도 거의 전부를 빼앗기다시피 다 내줬는데 이제 그 보호마저 풀어 버리고 자유경쟁으로 살아남으라는 것은 시각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는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습니다. 이제 시각장애인들은 국민 세금이나 축내며 살든지 아니면 거리에서 구걸을 해서 사는 방법밖에 없겠지요.

시각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이 "맹인 생계 보장하라!", "안마업권 보장하라!" 하고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절규가 대충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을 살려 주십시오

저는 지금, 36년 전 전태일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 절망적인 때를 다시금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를 토하며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현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폭력과 억압에 짓눌린 노동현실을 고발하며 죽어간 전태일처럼 살길이 막막해진 시각장애인들이 앞다투어 죽음을 택하고 있습니다.

잠시 제가 살아 온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세 끼 밥 먹고 사는 것조차 힘겨워 동생들이라도 배불리 먹여 보겠다고 70년대 초반 대도시인 인천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수 있는 일자리를 구할 길이 없어 처음 도시에 나와서는 재워주고 먹여주는 조건으로 17시간, 18시간의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을 일하다가 월급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해서 옮겨 갈 수 있었지만 그 생활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쪽방 하나 얻어 서너 명씩 방값을 나눠 내야 겨우겨우 생활이 가능하고 먹는 것도 배고픔만 간신히 면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동일방직에서 여공으로 일하고 있을 때 무슨 변화가 없이는 도무지 희망없는 삶임을 깨닫고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일터에서 쫓겨나고 죽는 것보다 참기 힘든 고문도 겪어야 했습니다. 제 젊은날을 돌아보면 구속 수감생활을 했던 시간이 가장 편안했던 생활로 기억한다면 짐작이 가실 겁니다. 그때도 저는 틈틈이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가진 것은 없지만 어려운 사람들끼리 서로 조금씩 정을 나누는 것이 저는 그렇게 좋았습니다.

1970년대 말에는 부산에 내려와 고무공장에 다니면서 작은 힘이지만 봉사활동 또한 계속했습니다. 거기서 광주학생운동 출신 남편을 만나 민주화운동에 온 정신을 쏟으며 살았는데, 그 남편은 딸아이 하나 남겨놓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서른이었습니다.

그이가 죽기 전, 자기 몸 전부를 기증한다는 서약을 해 두어 시각장애인 두 사람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일을 경험한 저는 죽은 남편을 보듯이 시각장애인을 돕는 봉사자가 되었습니다. 봉사자로 나가는 첫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제 성한 두 눈은 그들을 돕는 눈이 되게 하시고, 죽어서는 제 남편처럼 그들을 고치는 눈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하느님이 제 기도를 들으셨던지 그 후 많은 시각장애인들을 재활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을 희망으로 이끄는 노력을 하면서 저도 남편과 사별한 뒤의 칠흑과도 같던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6~7년 세월이 흘렀을 무렵, 지금 재혼해서 살고 있는 시각장애인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일반 정규대학을 마칠 무렵 양쪽 눈 시력을 잃고 죽을 궁리만 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절망을 딛고 일어선 것처럼 그분도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온 마음으로 살아갈 의지를 일깨우고 재활의 길을 도왔습니다.

세월이 흘러 죽으려 했던 그 사람은 재활에 성공하여 아픈 사람을 살리는 치료사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자기를 살렸으니 나머지 자기 인생을 책임지라고 하더군요. 그 억지 사랑에 못 이겨 죽은 남편을 가슴에 묻어 둔 채 그 분과 재혼해서 13년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시각장애인의 아내로 13년을 살아 오면서 저는 안마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사시는 시각장애인들과 안마를 받기 위해 찾아오시는 환자들을 수없이 많이 보아 왔습니다. 허리디스크, 목 디스크, 각종 신경통, 쑤시고 결리고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들을 안마사들은 온 마음으로 환자들 아픔을 어루만져 줍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낫게 하고 편안하게 해주고 마음까지도 치료해주는 의사 중의 의사의 모습이었습니다. 아파 본 사람이 남의 고통을 알고 죽음의 직전에서 구원된 사람만이 구원의 기쁨을 압니다. 그러기에 절망의 끝에서 구원받은 시각장애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고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그렇게 주무르고 만지고, 성스럽기까지 한 치료 행위가 안마인 것을….

그런데 시각장애인들에게서 안마 일을 빼앗아 간 사람들은 순전히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으니 같은 안마일 수가 없지요.

시각장애인들이라고 모두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은 아니었습니다. 각종 사고와 당뇨합병증, 눈 질환 등으로 살아가는 중간에 시력을 잃게 되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니 우리 중 누구라도 시각장애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 시각장애인 회원들 중에는 시력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교수, 은행원, 기술인, 연극인 등등 각 분야에서 전문인으로 사회적 지휘를 누렸던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전문 능력을 갖춘 인재라고 하더라도 시력을 잃어버리면 집안에 들어 앉아 폐인으로 살다가 견딜 수 없게 되면 자살을 택합니다.

시각장애인들은 살아가는 중간에 시력을 잃고 중도 실명자가 된 이같은 시각장애인들을 구원의 삶으로 이끄는 일에도 최선을 다합니다.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중장년층을 위해서는 시각장애인단체에서 그분들 재활교육과 자립생활을 돕습니다. 지금까지도 정부에서는 이런 재활 프로그램을 할 생각도 못하고 있는 일인데 말입니다.

가정방문을 통해 적극 찾아 나서고 재활의 길로 이끌어 가는 과정들을 저는 봉사자로 활동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봐 왔습니다만 보면 볼수록 눈물겹고 감동을 자아내지요. 아마 제가 시각장애인을 남편으로 맞아 지금껏 잘 살아가고 있는 것도 비록 눈은 보이지 않을지라도 살아가는 모습에서 존경과 사랑을 잃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참된 인간사랑 정신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분들의 삶은 여전히 감동을 줍니다.

눈을 보고 사는 사람들 속에는 끝없는 경쟁과 이기심이 가득한 데 비해 시각장애인들 안에는 아직 사랑이 있습니다. 서로 돕고, 지나친 경쟁은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안마시술소를 개설할 때는 거리제한 약속을 두고 이를 철저히 지킵니다. 수익이 나면 다른 시각장애인을 위한 복지기금으로 내놓습니다. 어디, 어떤 곳이 장사가 잘된다는 소문만 나면 같은 업종들이 연달아 생겨나고 지나친 경쟁으로 같이 망하는 일반 사회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지나친 경쟁으로 사업실패를 겪고 비관 자살했다는 뉴스들을 접할 때마다 저는 시각장애인 가족으로 살게 된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됩니다.

시각장애인의 고백

며칠 전 서울의 투쟁 현장에서는 서로 살아 온 이야기를 고백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먼저 어떤 나이든 아주머니 한 분이 앞에 나와 자신을 소개했는데, 4살 때 홍역을 앓다가 시력을 잃었다고 하셨습니다. 육십이 가까운 나이지만 아직 일을 하고 있고, 안마 일을 해서 여섯 자녀를 성장시켰다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남자 분은 20살 때 시력을 잃었는데 13년 동안 집안에 방치되다가 서른 살이 넘어서야 재활교육 받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두 분 증언에서 공통점은 안마 일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답게 살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초등학교부터 시각장애인 학교에 들어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그때부터 안마사로 일해서 혼자 힘으로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시각장애인 남자와 결혼을 하고 여섯 자녀를 두었지만 남편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집을 나가 다른 여자와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 혼자서 여섯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켰는데, 공부를 끝까지 하겠다는 두 자녀는 대학까지 시켰다고 했습니다. 한 살, 두 살 터울로 여섯 자녀를 공부시킬 때는 도시락 두세 개 싸는 일은 기본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엄마들은 아이를 기르는 것도 아니라며 자식이라야 한두 명 가지고 자식 키우기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냐고 하시더군요.

아주머니께서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존경스러웠습니다. 눈을 보는 정상인 엄마라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자식사랑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살아 오신 이야기는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그분에게 안마 일이 없었던들 아무리 진한 사랑과 강인할 정신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 많은 자식들을 거두며 살 수 있었겠습니까?

남자 분은 시력을 잃고 13년 동안이나 집안에 처박혀 있었던 것은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또 다른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라서 그랬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 가정을 꾸려가는 시각장애인 한 분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분이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시각장애인 학교를 안내받아 입학할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 학교에 입학하는 날 참으로 놀랍고 어이가 없어 한없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맹인학교가 있었지만 그것을 자신도 가족들도 13년 동안이나 몰랐다는 것에 놀랐고, 눈을 보고 살던 20년 동안 이웃에 대해 그만큼 무관심하게 살았구나 하는 때늦은 후회로 가슴을 치며 울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재활교육을 받고 안마시술소 원장이 되서 돈을 좀 벌게 되니까 전에는 몰랐던 친척들이 아주 많더라고 했습니다. 집안에 방치되어 있을 때는 짐이라도 될세라 친형제들도 피해서 가족도 없는 것처럼 외롭게 살았는데 밥술이나 먹고 산다는 소문이 나자 찾아온 사촌만 해도 16명이나 되더라고 했습니다. 그분 고백에 모두 웃었지만 너도 나도 모두 다 경험했던 현실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시각장애인이 손님 1명에게 안마를 해주고 받는 돈은 대략 2만 원 정도입니다. 하루 평균 두세 건의 일을 합니다. 그러기에 교육받고 안마사 자격증을 가진 시각장애인이라면 풍족하지는 않지만 구걸하지 않고 아무 도움 없이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최고로 좋은 복지정책은 자기 힘으로 일을 해서 먹고 살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이 아닐까요.

더 이상 시각 장애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지 말아야 합니다

시각장애인들을 설득하려고 나온 정부 관계자들이 한다는 소리는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먹고 살 길이 없는 시각장애인 1000명 정도를 보건소 등에 취업시켜 주고 월 20만 원을 주겠답니다. 개 돼지 한 달 사료값도 20만 원으로는 부족할 터인데 20만 원을 받아서 시각장애인과 가족들은 어떻게 살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은 개 돼지보다 못한 존재라는 말입니까? 이른바 참여정부에는 대통령부터 장관, 국회의원까지 지난날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데, 이분들은 이런 짓을 하려고 민주화운동을 했는지 정말 묻고 싶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 이후 20여 일만에 벌써 두 사람이 죽고 의식불명 상태에 있는 시각장애인이 여러 명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혼자서는 걸을 수도 없는 시각장애인들이 연일 거리로 나와 피를 토하듯 외치고 이를 막으려는 전경들과 맞서다 보니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 처절한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저는 이게 죽음의 행진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 몹시 두렵습니다.

정상인들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수백 가지, 아니 수천 가지가 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많고 많은 직업들 중에 안마라는 직업을 하나 더 추가시킨 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안마 일은 시각장애인들에겐 오직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마지막 생존수단입니다. 단 한 가지 일입니다.

이 안마업을 시각장애인들에게 돌려주십시오. 시각장애인들에게 안마 일은 직업이기 전에 생명입니다.

정부관계자 분들과 안마업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분들께 진심으로 호소하고 부탁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안마 한가지밖에 없는 시각장애인들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눈은 잃었지만 사회의 일원으로, 떳떳한 가장으로, 나라에는 성실한 납세자의 의무를 다하고 가정을 지키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미 시력을 잃었을 때 죽음보다 더한 절망을 체험한 사람들이기에 다시 쓸모없는 인간으로 살라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분들은 절망적인 삶으로 돌아가기 전에 주저 없이 죽음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십시오. 지하철로 뛰어들고, 한강으로 뛰어들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제주에서부터 강원도에 이르기까지 이 땅이 지금 시각장애인들 무덤이 되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각장애인과 그 가족들을 제발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십시오. 오늘 내가 건강하게 살아 있다고 해서 내일도 건강한 몸으로 잘 살아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죽음도, 장애도 예고없이 들이닥치는 불청객이고 보면 오늘 시각장애인들이 목숨을 내던지고 지키려는 이 생존권 투쟁이 나를 위한 싸움일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기회가 되어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 마음 안에 제발 시각장애인들의 호소를 듣는 마음의 귀가 열리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니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어렵고 아픈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며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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