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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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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8>

의상과 원효의, 관음보살: 양양 낙산사

“이제 관음 거울 속의 제자 몸이, 제자의 거울 속 관음 대성(大聖)께 목숨 바쳐 귀의하옵니다. 간절한 발원의 말씀 사뢰오니 가피(加被)의 힘 드리워 주옵소서. 오직 바라옵건대 제자는 세세생생토록 관세음을 칭송하여 스승으로 모시겠으며, 대성이 아미타불을 정대(頂戴)하듯 저도 또한 대성을 정대하겠나이다.”

의상이 지었다는 ‘백화도량(白花道場)발원문’ 중의 한 구절이다. 참으로 간절하고, 참으로 경건한, 기구(祈求)가 느껴진다.

의상은 중국 유학에서 돌아오던 길로 관음보살의 진신이 동해 해변의 굴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찾았다. 이레 동안 재계한 끝에 의상은 바닷가 굴 속으로 안내되어 수정 염주를 받고 동해용으로부터 여의주를 받았다. 다시 이레를 재계하자 관음보살의 진용(眞容)이 나타나 “앉아 있는 자리 위쪽 산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다 전각을 지으라”고 헸다. 굴을 나오자 과연 대나무가 땅속으로부터 솟아났다. 이에 의상은 금당을 짓고 불상을 만들어 모셨는데 원만한 얼굴과 고운 자질은 하늘이 낸 듯 엄연하였다. 의상은 이미 받은 구슬 두 개를 성전에 모셨다. 대나무는 다시 없어졌는데 의상은 그제서야 그곳이 진신 관음보살이 사는 곳임을 알아서 절 이름을 낙산사라 이름짓고 그곳을 떠났다.

의상이 낙산사를 창건한 일은 『삼국유사』 탑상편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ㆍ조신’조에 실려 있다.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ㆍ조신’조에는 의상이 낙산사를 창건하고 원효가 낙산사를 찾은 일을 비롯하여, 범일이 정취보살을 모신 일, 난리 중에 걸승이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간수한 일, 조신이라는 중이 관음보살의 깨우침으로 헛된 욕망을 벗어난 일 등이 실려 있다.

의상이 떠난 후, 원효가 의상의 뒤를 좇아 낙산사에 찾아온다. 원효가 남쪽 교외에서 벼 베는 여인을 만나 농담 삼아 벼를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벼가 쭉정이라고 농담으로 대답했다. 다시 어떤 다리 아래에서 월경 서답을 빨고 있는 여인을 만나 물을 청하였더니 여인이 서답 빨던 더러운 물을 떠 주므로 원효는 그 물을 버리고 새 물을 떠서 마셨다. 이 때 들 가운데 소나무 위에 앉아 있던 파랑새가 “제호 화상은 단념하라!” 말하고는 사라졌는데 그 소나무 밑에 신 한 짝이 있었다. 원효가 절에 이르러 보니 관음상 자리 아래에 먼저 보았던 신 한 짝이 있어, 그제서야 앞서 만났던 여인이 관음의 진신임을 뒤늦게 깨닫고는 바닷가 굴에 들어가 관음의 진신을 보고자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절을 떠났다.

의상과 원효의 이러한 일화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는 해석이 분분하다. 의상이 정성을 다한 기도로 진신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받아 절을 지은 반면, 나중에 낙산사를 찾은 원효는 여인으로 화한 관음보살을 몰라보다가 그들이 관음의 화신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아 관음의 진신을 보고자 했으나 결국 못 보았다는 점에서, 의상은 관음보살 친견이라는 형태의 신비체험을 성취하였으나 원효는 성취하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것이 인제대 김열규 교수의 해석이다.

이에 반하여 의상은 숭고한 것을 숭고하게 추구한 반면, 원효는 숭고하지 않고 전혀 비속하기만 한데, 숭고한 것과 비속한 것은 사실 둘이 아니어서 숭고한 것은 비속한 데서 찾아야 비로소 진실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원효가 행동으로 보여주었다고 하는 서울대 조동일 교수의 입장이 있다. 숭고한 것을 숭고하게만 추구해서는 진실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의상의 자세가 소승적이고 원효의 자세가 대승적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같다.

그런가 하면 배재대 유광수 교수는, 두 사람이 다 관음을 만나고 그 만남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 만남과 깨달음의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의상은 간절하고 경건한 기도에 걸맞는 방식으로 보주를 얻고 관음의 진신을 뵌 후 절을 짓게 되고, 원효는 특유의 거칠 것 없는 무애행(无碍行)으로 벼 베는 여인, 서답 빨래하는 여인으로 화한 관음보살을 만나 시시덕거린 끝에 관음의 존재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해석과 관련하여 나는 『삼국유사』에서 저자 일연이 의상과 원효에 대해 사용하는 호칭을 주목한다. 승려들의 열전으로 볼 수 있는 『삼국유사』 의해편의 각조 기사 첫머리에서 일연은 승려의 이름 앞에 일일이 호칭을 붙이고 있는데 대부분의 고승들을 석(釋) 보양, 석 양지, 석 혜숙 하여 그냥 ‘중’으로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자장에게는 대덕(大德), 의상에게는 법사(法師), 원효에게는 성사(聖師)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이처럼 원효에게 최고의 경칭을 쓰고 있는 일연이 의상과 원효의 일화를 전해주고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거기에다 나는, 의상과 원효를 나란히 놓고 우열을 가리려는 것보다는 원효가 낙산사를 찾아온 이유를 더 궁금해하는 편이다. 의상이 이미 진신 관음보살을 친견하여 절까지 지어놓고 떠난 마당에, 원효가 뒤늦게 관음보살을 친견하겠다고 찾아가는 것만으로는 원효의 낙산사 걸음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원효는 왜, 의상이 떠나고 없는 낙산사를 찾아갔을까?

원효가 의상보다 8년 연상이지만, 두 사람은 같이 당나라 유학 길에 오르기도 했던 동학(同學)이자 도반(道伴)이다. 이 점을 감안 할 때, 위의 일화들을 “의상이 마련한 관음도량을 원효가 확인하고 그곳이 진신의 주처임을 증명한 설화”라고 보아서, “의상이 관음신앙을 불국토사상으로까지 발전시켜 이 땅에 정착시킨 확립자라면, 원효는 그것을 확인한 증명법사인 셈이다.”(『한국의 사찰』 시리즈, 낙산사 편, 18-19쪽)라는 견해가 타당하게 들린다.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선생은, 의상과 원효 두 사람이 중국 유학 길에서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다음 날의 광경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하룻밤의 잠자리에서 대화엄의 진수를 깨치고 오던 길을 돌이킨 원효의 모습도 약여(躍如)하지만, 초지(初志)를 바꾸지 않고 당나라를 향해서 일로 불퇴전하는 의상 역시 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낙산사에 관한 의상, 원효의 일화를 떠올리노라면, 지극한 간절함과 경건함으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의 모습도 약여하지만, 의상이 창건한 낙산사를 찾아와 그곳이 관음보살의 진신주처임을 확인하는 원효 역시 장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낙산사에는 의상과 원효가 살던 시대의 유물은 하나도 없다. 낙산사의 전각들은 창건 이래 몇 번이나 새로 지어져 다시 불에 타버리곤 했는데, 가장 최근에는 6.25 동란 때에 낙산사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타버려 옛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의상이 관음보살과 용으로부터 받았고, 고려 때에는 어느 걸승이 목숨을 걸고 지켰다는 수정 염주나 여의주도, 지금의 원통보전 앞 석탑에 봉안되어 있다는 설이 있으나 분명치 않다. 다만 의상이 찾아들었던 바닷가 굴은 그대로 있어 그 위에 홍련암이라는 암자가 앉아 있고, 의상이 좌선했다는 곳이 의상대라는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 원효가 관음의 화신인 여인에게 물을 얻어 마셨다는 곳도 얼마 전까지 ‘냉천’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왔으나 이제는 자취를 찾을 수 없으며 원효의 무지를 일깨워준 파랑새가 앉았다던 소나무도 관음송으로 불리웠다는데 그 이름만이 의상대 옆 소나무에 옮겨져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동해에서 매일 해가 떠오르듯, 의상의 눈 앞에서 관음굴 바위벽을 쳤던 파도는 홍련암 아래에서 여전하고, 의상이 좌선했다던 의상대도 그 자리에 있고, 의상에게 관음보살의 상주처임을 확인시켜준 대나무는 지금도 매년 새롭게 솟아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음보살을 찾는 참배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동해 낙산사는 남해의 보리암, 서해의 강화 보문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인 관음성지가 되어, 그 중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의상 이래로, 낙산은 관음보살의 상주처가 된 것이다.

화엄경 보살주처품에 의하면 금강산에는 법기보살, 오대산에는 문수보살, 천관산에는 천관보살이 상주하면서 설법을 하고 있다고 한다. 관음주처 신앙은 그러나 화엄경 중에서도 보살주처품이 아닌 입법계품에 근거하고 있다.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스물여덟번째 만나는 선지식이 관음보살이다. 관음보살이 상주하면서 설법을 하고 있는 곳은 남방의 ‘보타락가산(낙산)’인데 이를 한역(漢譯)하면 ‘소백화산(小白花山)’이 되니 ‘낙산사’는 곧 ‘백화도량’의 다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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