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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내 '집토끼'-'산토끼'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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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조선일보내 '집토끼'-'산토끼' 논쟁

김창균 “논조·이미지 문제” vs 김대중 “자학말라"

조선일보의 간판 논객인 김대중 고문과 소장파인 김창균 논설위원이 조선일보의 현 위기상황에 대한 진단과 대처방안을 두고 ‘지면 설전’을 벌여 눈길을 끌고 있다. 김 고문은 지난해말 정년퇴임한 뒤 고문 직함으로 기명 칼럼을 써오고 있고, 올해 45세인 김 논설위원은 정치부 차장대우를 거쳐 현재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창균 “가르치고, 편 가르기 때문에 독자 불만 고조”**

이번 논쟁은 김 위원이 <조선노보> 지난 2월18일자에 ‘과학의 훈수를 따라야 한다’ 제하의 기고 글을 통해 조선일보의 현재 위기를 “논조와 이미지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비롯됐다.

김 위원은 이 글에서 “정치부에 있다가 논설위원실에 올라오니 여기저기서 ‘정치기사와 사설이 조선일보에 부담’이라는 식의 지적이 나와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라며 “(더군다나)사내 마케팅팀이 실시한 포커스 그룹 조사 결과도 그렇고, 컨텐츠업그레이드(CU)실 자문위원들의 평가를 종합해 봐도 비슷한 결론”이라고 운을 뗐다.

김 위원은 이어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비교적 시간을 갖고 (자사)신문을 꼼꼼히 읽어본 결과 조선일보의 사설·정치기사 완성도는 다른 신문과 비교해서 결코 뒤지지 않았지만 결국 문제는 논조 내지 이미지 때문이었다”며 “(주변으로부터) 가만히 얘기를 들어봐도 ‘신문이 정보를 주면 되지 왜 자꾸 가르치고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느냐’에 대한 불만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어떤 조선일보를 만들어야 하느냐’에 대해 사내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며 조선일보내 '집토끼 수호론'과 '산토끼 사냥론'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회사 간부층을 비롯해 윗세대들은 전통 독자층을 만족시키는 선명한 노선의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른바 ‘집토끼 수호론’이다"라며 "젊은 기자들은 앞으로 신문의 주 구독층이 될 30, 40대 이하 세대 기호에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다. 산토끼를 잡으러 가자는 것이다"라며 자신은 후자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은 글 말미에서 “조선일보의 위기는 오랜 세월 정상에 있으면서 해이해진 것과 독자 시장의 흐름을 잘못 읽었던 측면도 있다”며 “이제 우리는 위기를 인식했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과학의 훈수’도 들은 만큼 좌표를 제대로 설정해서 일관되게, 그리고 서로 마음을 모아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우리는 계속 1등, 자학하지 말라”**

이 글이 실린 지 20여일이 지나 발간된 <조선노보> 3월10일자에 김대중 고문은 이례적으로 반박 기고 글을 실었다. 조선일보의 간판 논객으로서 젊은 논설위원으로부터 받은 불의의 ‘지적’에 대해 반박인 셈이다.

김 고문은 우선 “조선일보가 오늘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사설이 크게 기여했으면 했지 방해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해온 지난날의 사설 필진들에게 ‘정치기사와 사설이 조선일보의 부담’이라는 사설유죄(有罪)론은 어이없는 논고였다”며 “우리는 우리 의견을 분명히 말할 뿐 누구를 가르치려 들지도, 끌어들이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결과로 누군가가 ‘가르침’을 받았다면 기분 좋은 일이고, 우리 의견에 ‘끌려 들어왔다’면 더더욱 즐거운 일이 아니겠느냐”고 사설 논조를 문제삼은 김 위원 글에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김 고문은 이어 “결론적으로 나는 근자에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의 근원이 조선일보를 파괴하려는 어떤 의도에 의해 조작되고, 조직되고 있다고 본다”며 “이는 일등을 깎아내리는 데서 오는 쾌감과 하향 평준화에 길들여진 근간의 세태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그는 또 김창균 위원이 제기한 '산토기 사냥론'과 관련해서도 "산토끼를 잡으러 가자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논조와 이미지를 바꾼다고 그 산토끼들이 우리에게 웃어줄까. 내 생각으로는 비웃어줄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시나부로 집토끼도 잃고 쫓던 산토끼도 우리를 비웃고 마는 상황이 온다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라고 반박했다.

김 고문은 “따라서 ‘과학’의 이름으로 훈수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이념과 원칙을 같이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그 비판이 두려워 ‘논조와 이미지’를 바꾸자는 것이 ‘과학의 훈수’인 모양인데, 그것이야말로 위험한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김 고문은 또 “국회의원에게는 여론이 ‘과학’이겠지만 신문에게는 부수가 과학이고 우리의 판매부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1등인지 오래고 앞으로 근거 없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렇게 갈 것”이라며 “부디 스스로를 자학하지 말고, 우리를 ‘가르치고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 다름 아닌 안티들임을 알아야 한다”고 꾸짖었다.

시대의 흐름은 막을 수 없어, 드디어 조선일보내에서도 세대논쟁이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다음은 김창균 논설위원과 김대중 고문이 <조선노보>에 실은 글의 전문이다.

***‘과학의 훈수’를 따라야 한다
- 김창균 조선일보 논설위원**

정치부에 있다가 논설위원실에 올라온 사람으로서 요즘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정치기사와 사설이 조선일보에 부담’이라는 식의 지적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사내 마케팅팀이 실시한 포커스 그룹 조사 결과가 그렇고 컨텐츠업그레이드(CU)실 자문위원들의 평가를 종합해 봐도 비슷한 결론이다. 몇몇 구체적인 항목에 대해서는 “사실관계가 잘못 인식돼 있다”는 느낌이고 억울한 생각도 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독자들에게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신문을 선택할 것이다.

신문이라는 상품에 대한 평가는 논조와 완성도에 따라 좌우된다. 조선일보 상품을 구성하는 요소 중 정치기사, 사설이 상대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일까. 내 주관적 판단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논설위원실에 와서 비교적 시간을 갖고 신문을 꼼꼼히 읽어보면서 얻은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과 정치기사의 완성도는 다른 신문과 비교해서, 그리고 다른 부서 분들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조선일보 다른 지면에 비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결국 문제는 논조 내지 이미지다.

‘어떤 조선일보를 만들어야 하느냐’에 대해 사내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회사 간부층을 비롯해 윗세대들은 전통 독자층을 만족시키는 선명한 노선의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른바 ‘집토끼 수호론’이다. 젊은 기자들은 앞으로 신문의 주 구독층이 될 30, 40대 이하 세대 기호에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다. 산토끼를 잡으러 가자는 것이다.

나 개인적인 판단은 후자 쪽이었다. 밖에서 40대 중반쯤 되는 내 또래 친구들을 만나 보면 조선일보에 대한 반응이 뒤섞여 나온다. 그러나 후배층으로 내려 가면 부정적인 그룹이 훨씬 많다는 것을 느꼈다. 애당초 조선일보의 노선이 싫다는 사람들도 있고, 이런 경우엔 사실 해답이 없다. 문제는 나와 생각이 다를 것도 없는데, 조선일보에 대해선 손사래를 치는 경우다.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면 신문이 정보를 주면 되지 왜 자꾸 가르치고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느냐에 대한 불만이 주조를 이룬다. ‘독자(讀者) 시장이 바뀌고 있으며, 그런 변화의 흐름을 우리가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게 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판단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자기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다수 견해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흔히 범한다. 내가 그 오류에 빠져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저런 조사결과를 보면서 결국 그런 판단이 큰 방향에서 옳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썼던 정치 기사들이 조선일보에 부담이 됐다는 사실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런 판단을 수용하고 고칠 수 있는 과학적 근거가 마련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정확한 방향감각이 없으면 이 산으로 우르르 몰려갔다가 “이 산이 아닌가벼”라며 또 반대쪽 산으로 달려 가는 상황이 반복된다. 지난 몇 년간 우리도 그런 오류를 범해 왔다. 아무런 과학적 근거 없이 밖에서 들려오는 몇 마디 얘기들에 따라 지면 제작 방향이 흔들리는 현상들이 나타나곤 했다.

그런 점에서 포커스 그룹 조사, CU실 운영 등을 통해 과학적이고 제도적인 접근을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객관적이고 좀더 분석적인 독자조사가 정기적으로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치부에서 있으면서 몇 차례 큰 선거를 지켜봤다. 선거에서 지는 쪽의 대표적인 특징은 여론조사가 제시하는 과학을 믿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여론조사 결과가 나쁜 것은 ‘여태까지의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메시지다. 그러나 후보와 측근들은 그런 ‘과학의 훈수’가 달갑지 않다. 그래서 여론조사가 왜 틀리는지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등장한다. “정치는 내가 잘 아는데?”라며 직관에 의존한 ‘과학 때리기’가 진행되고 후보는 그런 말에 솔깃해 진다. 그러나 마지막 진실의 순간, 투표함을 열어보면 결과는 항상 과학이 옳았음을 입증하곤 했다.

노무현 정부의 예에서도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코드 정치로는 안된다, 좀더 중간으로 다가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때마다 노빠 부대들은 “그러면 망한다. 지지자들이 다 떠난다”고 아우성을 쳤다. 열렬한 지지층들의 목소리는 가까이서 크게 들린다. 정말 큰 일 날 것같이 불안해지고, 그래서 이 산으로 가다가 저 산으로 되돌아가는 오락가락을 거듭했다. 지지율은 끊임없이 떨어졌다. 집권 2년이 다 돼서야 노 대통령은 실용노선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다. 노 대통령의 지지율은 상승 곡선을 타고 있고, 노빠 부대들의 주장은 허구로 확인됐다.

조선일보가 위기라고들 한다.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 비관하지 않는다.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내가 아는 조선일보 맨 파워는 업계에서 으뜸이라고 믿는다. 오랜 세월 정상에 있으면서 해이해진 것이 사실이다. 독자(讀者) 시장의 흐름을 잘못 읽었던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위기를 인식했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과학의 훈수’도 들었다. 시간은 좀 걸릴지 모른다. 조선일보 위기가 시작된 것은 상당히 오래 전인데, 우리가 실감한 것은 최근 들어서다. 마찬가지로 정상 궤도로 재진입하는 것도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다. 좌표를 제대로 설정해서 일관되게, 그리고 서로 마음을 모아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만 하면 된다.

***<신문에는 부수가 과학이다>
-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

2월 18일자 노보의 1면 톱에 실린 김창균 논설위원의 ‘과학의 훈수’를 읽고 90년대 전반에 걸쳐 10여년간 조선일보 사설을 주관해온 사람으로 심한 자괴감을 금할 수 없었다. 조선일보가 오늘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사설이 크게 기여했으면 했지 방해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해온 지난날의 사설 필진들에게 ‘정치기사와 사설이 조선일보의 부담’이라는 사설유죄(有罪)론은 어이없는 논고였다. 그것도 여론조사라는 ‘과학’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가 내린 핵심적 결론은 “신문이 정보를 주면 되지 왜 자꾸 가르치고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느냐에 대한 불만이 (조선일보 비판의) 주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독자시장의 흐름이 바뀌고 있는데 그런 변화의 흐름을 우리가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고도 했다. 더 나아가 문제는 ‘논조 내지 이미지’라고 했다.

그로부터 2주일후인 조선일보 창간 85주년 특집 ‘인턴기자가 말하는 조선일보’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조선일보는 위에서 결정이 내려져서 일사불란하게 전달되고, 그것이 신문을 한 방향으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한달쯤 있어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오히려 그렇게 바라보는 쪽이 음모론에 빠져있지 않나 생각한다.” “일사분란하게 보이는 것은 조선일보 구성원들이 이념이니 원칙에 동의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음모론이나 ‘안티조선’이 생겨나는 것은 정치와 관련이 크다.” “(대학생들에게는) 무턱대고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다. ‘조선일보 뭐가 이상해?’라고 물었더니 이유를 대지 못했다.” “대학에는 권위에 대한 반감이 있는데 조선일보하면 왠지 기득권 보수 권력등이 연상되고 안티와 연결되는 것 같다.”

김위원이 말한 ‘과학’은 불특정 다수의 인상론이지만 인턴들이 말한 (그것도 기명으로) 것은 구체적 체험이었다.

김위원은 30~40대 독자의 말을 빌려 신문이 정보를 주면 됐지 독자를 가르치려들고 끌어들이려 한다고 했다. 신문에는 분명 주로 정보를 주는 보도기능이 있고 그 신문의 의견을 말해주는 오피니언 기능이 있다는 것을 김위원이 모를 리 없다. 독자들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사설은 신문의 의견과 주장을 얘기하는 마당이다. 신문에 의견이 없으면 그것은 ‘죽은 신문’이다. 그 마당은 우리보고 의견을 얘기하라고 할애된 지면이다. 그것이 우리의 본령이고 본업이다. 누구는 우리의 글을 당파성이 강하다고 한다. 당파성이 어느 정당이나 사람을 호불호(好不好)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비판하거나 반대의견을 내는 것을 말한다고 할 때 당파성의 핵심은 시시비비다. 시시비비는 신문의 생명이다. 논설과 사설에서 독자들이 제일 거들떠 보지도 않는 글은 시시비비가 분명치 않거나 있어도 그 논리가 치졸한 때이다.

우리는 우리 의견을 분명히 말할 뿐 누구를 가르치려 들지도 끌어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혹 그 결과로서 누군가가 ‘가르침’을 받았다면 기분 좋은 일이고 우리 의견에 ‘끌려들어왔다’면 더더욱 즐거운 일이다. 가르침을 받고 받지않고는, 유도를 받고 받지 않고는 독자의 몫이며 우리의 ‘잘못’이나 ‘탓’이 아니다.

정보분야도 마찬가지다. 정보를 ‘날덩어리’로만 줄 수는 없다. 불이 났을 때 부자동네에 난 불 다르고 달동네에 난 불 다르다. 달동네 불이 나서 가난한 이재민이 추위에 떨고 있다고 쓰면 그것이 유도성 홍보성 기사인가?

편집국이 만드는 수많은 기사 즉, 정치적 변화를 예고하는 뉴라이트 기사, 화두를 던지는 기획성 특집, 이웃사랑의 캠페인성 기사야말로 ‘따라와 달라’며 ‘끌어들이려’ 하는 기사 아닌가? 그런 기사부터 없애야 하는 건 아닌가? 조선일보가 정보를 주관적으로 색칠하고 사설 등으로 ‘가르치며 끌어들이는’ 기사를 써왔다고 보는 기자가 있다면 부디 나에게 어떻게 쓰는 것이 옳은 것인지 모범답안을 보여주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나는 근자에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의 근원이 조선일보를 파괴하려는 어떤 의도에 의해 조작되고 조직되고 있다고 본다. 이것이 조선일보를 상세히 읽어보지도 않은 많은 젊은 세대에 유행처럼 전파되고 세뇌되는 경향이 있다. 제대로 읽고 평가한 것이 아니라 ‘그렇다더라’라는 막연한 동조론이며 반복적 개념주입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일등을 깎아내리는 데서 오는 쾌감과 하향 평준화에 길들여진 근간의 세태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조선일보 또는 사설 비판자에게 구체적 지적을 요구했을 때 내가 고개를 숙일 정도의 정연한 논리를 접한 기억이 별로 없다. 파고 들어가면 결국 “너의 논조가 싫다”는 솔직한 시인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싫은 것과 나쁜 것은 다르다.

인턴기자가 재빠르게 지적했듯이 조선일보 구성원들이 동의한 이념과 원칙이 있다. ‘과학’의 이름으로 훈수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이념과 원칙을 같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비판이 두려워 ‘논조와 이미지’를 바꾸자는 것이 ‘과학의 훈수’인 모양인데, 그것이야말로 위험한 발상이다.

김위원은 한 두가지 여론조사(그것도 왜곡됐다고 보는)만을 근거로 오래 축적된 조선일보의 논조와 이미지를 바꾸고 산토끼를 잡으러 가자고 하는데 어디서 그런 확신과 자신감이 나오는가?

산토끼를 잡으러 가자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논조와 이미지를 바꾼다고 그 산토끼들이 우리에게 웃어줄까. 내 생각으로는 비웃어줄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시나부로 집토끼도 잃고 쫓던 산토끼도 우리를 비웃고 마는 상황이 온다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우리와 대비되는 다른 이념과 논조도 다뤄줘야 한다는 것은 신문의 당연한 도리다. 다만 그것이 욕설이나 비방성이 아니고 논리와 이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우리를 부수고자 하는 논리에 겁먹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독자의 비판 앞에 겸허해야 한다.

잘난 척 하는 소리가 아니다. 속된 말로 독자는 우리의 ‘밥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비판과 배경을 엄밀히 분석하고 치밀하게 따지지 않고 그것에 무조건 무작정 주눅들 이유는 없다. 그것이 음모적이고 조직적이며 정치적 배경을 지닌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국회의원은 여론에 의해 당락이 결정되지만 신문은 판매부수에 의해 그 선호도와 위상이 결정된다. 국회의원에게는 여론이 ‘과학’이겠지만 신문에게는 부수가 과학이다. 그리고 우리의 판매부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1등인지 오래고 앞으로 근거없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렇게 갈 것이다.

부디 스스로를 자학하지 말자.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허구적 주장들에 망연자실하거나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 우리를 ‘가르치고 끌어들이려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안티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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