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러시아 연해주 우스리스크입니다. 인사도 못하고 고국을 떠나 왔습니다. 저는 내일 이곳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800킬로미터 떨어진 산악지대로 들어갈 겁니다. 시우테알랜 산맥 서북쪽에 흐르는 비킨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곳에 사는 고아시아족 우데게이족을 만나러갑니다. 저는 우데게이족의 문화를 답사하려고 왔습니다. 일전에 '데루스 우잘라'라는 책을 '김봉준의 붓그림편지'에서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데루스 우잘라의 종족입니다. 그가 1907년 러시아 최고의 인류학자 아르세니에프 탐사대와 여행하던 그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우데게이족이 사는 그곳은 연해주 깊은 숲입니다. 우데게이족은 극동아시아 최후의 '숲의 사람'들입니다. 아직 숲에서 나오지 않고 자급자족하며 사는 우데게이족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동아시아 최후의 숲 사람들을 찾아가는 민속 답사이니 제 마음도 설렙니다. 비포장도로로 비킨강을 거슬러 오르면 우데게이 마을을 만나는데 거기서 하루를 묵고 다시 보트를 얻어 타고 들어가 오지의 우데게이 사냥꾼을 만납니다. 이것은 한국인 최초의 탐사가 될 것입니다. 제가 소속한 동북아평화연대와 내일신문이 공동 기획한 고아시아족 답사 프로젝트입니다.
저는 이 연구를 토대로 연해주 우스리스크에서 연말에 '평화의 신화전'을 열 계획입니다. 고아시아의 신화를 주제로 한 창작 조형물을 가지고 우리리스크에 있는 고려인 문화센타에서 전시를 할 계획입니다. 한국 조각가들과 고려인 조각가, 우데게이 조각가들이 같이 할 겁니다.
우데게이는 흑수 말갈족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강에서 낚시를 주로 하는 종족은 나나이족, 숲에서 사냥을 주로 하며 사는 종족은 우데게이족이라고 부릅니다. 그 옛날 고구려와 발해를 배달민족과 함께 건국하기도 했고 옥저, 읍루라는 극동의 나라를 세운 종족이라고 합니다. 이들도 온돌을 사용하고 곰과 호랑이 신화를 가지고 살아 왔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퉁구스 어족에 속하니, 그야말로 우리와 아주 가까운 종족입니다. 이 근친족이 우리와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들어와서 우리가 중화사상을 강화하며 이들을 오랑캐로 배척하면서부터입니다. 한족(漢族)이 자기들 이외의 종족들을 멸시해 부르던 표현이 '오랑캐'인데 그 '오랑캐'들 가운데 우리가 먼저 그들을 적대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이제 와서 왜 이 종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겠습니다. 지난번 '데루스 우잘라' 라는 책의 독후감에서도 썼듯이 이들의 사람 됨됨이에 우선 관심이 많습니다, 세계 인류사에서 몇 안 남은 숲에서 사는 사람들로 그들의 숲의 생활양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고대적 숲 생활양식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큰 기대는 못하지만 총 2000여 명 남은 우데게이족 가운데 겨우 200명 정도가 자기 언어를 쓰고 숲에서 사냥하면서 살고 있다고 하니 멸종 위기의 종족입니다. 그곳을 답사하려는 첫 번째 이유는 고아시아족 최후의 숲 생활문화를 학습하고 싶었습니다. 우데게이 사냥꾼 오두막에서 생활체험을 할 겁니다.
두 번째로는 이들의 사유체계입니다. 현세·내세관은 물론이고 그 사유체계를 펼치는 샤만 의례에 관심이 있습니다. 신화와 의례를 수집하고 기록하고 싶습니다. 우데게이 자치회 회장에게 샤만굿 의례를 부탁해 놓았습니다.
세 번째로 그들은 연해주 극동아시아에 마지막 남은 고아시아족으로 이들이 오늘날 소련과 러시아가 강제한 문명세계를 적응하면서 살아남기도 했지만 어떻게 적응하며 살았는지 그 속내를 알고 싶습니다. 자치회 분들과의 토론으로 알아보렵니다.
네 번째로 그들의 신물, 도구, 연장, 의식주 물건 등을 살피면서 미적 세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조각으로 평화의 신화전에 출품할 작품 구상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 종족의 조각장이도 우스리스크에서 계획하는 신화전에 함께 하기를 청하려 합니다.
다섯 번째 기상학자이신 우리 아버지는 제게 숙제를 하나 더 주셨습니다. 그곳의 일년 중 기상상태를 측정한 기상조사보고서 하나 구해 달랍니다. 그곳의 기후를 연구하고 싶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스리스크의 고려인아리랑 무용단, 동해 연안 발쇼이까뮈의 라두가 러시아 민속무용단, 그리고 이 우데게이 샤만을 올 가을 동북아평화연대 '연해주길마중2006' 순회공연과 '실학축전2006' 초대공연에 초청하려고 합니다. 그들과 함께 연출회의를 하고 돌아가렵니다.
저는 이번 연해주 여행에서 모험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일전에도 동아시아에는 문명 아닌 문명이 전해 온다, 이것은 숲과 더불어 살았던 문명으로 세계의 다른 온대지역에서는 찾을 수 없는 거대한 숲에서 나타난 문명이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 주장의 근거로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몬순기후의 특징을 가진 동아시아 문명은 강수량이 많고 일조량이 풍부합니다. 연간 1200mm, 연해주1000mm 정도이니, 동고서저의 산맥에 막혀 극동쪽으로 공기가 상승하다가 비구름으로 바뀌어 자주 비가 내립니다. 만주보다 강우량 훨씬 많습니다. - 지구 빙하기 때 피해가 적었고, 여름의 많은 일조량과 풍부한 강우량은 숲에 풍부한 수종을 만들어 왔습니다. 수렵과 채집을 하기에 유럽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숲 지대를 이루어 왔습니다. - '인류문명의 앞에는 숲이 있었고 문명의 뒤에는 사막이었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처럼 4대 문명의 발상지는 인구 집중형 대규모 시장 중심의 도시로 발전했고, 그 도시의 설계는 중앙권력 집중형 궁전건축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극동은 숲과 더불어 살아온 문명이었습니다.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짓고 부서지면 자취 없이 사라지던 산개한 마을이 부족연방을 이루었습니다. - 4대 문명의 관점에서, 또는 오리엔탈리즘의 관점에서는 이곳을 문명지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숲을 베어버리고 인공의 대도시형을 이루는 것만이 고대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요. - 알타이문명, 바이칼문명, 홍산문명, 마야문명, 히타이트문명, 그리고 동아시아 고조선문명, 부여, 옥저, 읍루, 고구려 등의 역사는 고대문명이 아닌가요. 이들의 활동기도 4대 문명지 못지않게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다른 차원의 정신문명을 키워 왔습니다. - 대도시를 이룬 고대문명은 숲을 없애고 사막화의 길을 갔다면, 극동아시아의 '문명 아닌 문명'은 문명이 숲과 함께 자연친화형으로 이어 왔습니다. -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동아시아 고대문명은 자연에서 나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 자연순환형 문화, 대규모 도시형 문명이라기보다 숲에서 자급자족을 이루는 소사회공동체 문화였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 '숲의 문명'입니다. - 동아시아 문명을 이해하려면 기록의 역사나 중화주의를 벗어나 숲과 인간 사이를 교감한 동아시아 전통예술과 전통사상으로부터 다시 배워야 합니다. 중국의 근대미학자 서복관은 이를 '권력의 훈습을 벗어나 자연에서 움튼 반성적 문화라고 했습니다. - 동아시아의 민속춤 역시 동아시아 자연의 유전적 형질을 가지고 출현합니다. 그 지역의 문화는 그 지역의 자연과 인간의 관계로부터 나옵니다. - 세계문명사는 자연과 대립의 길을 갔느냐,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길을 갔느냐의 차이로 갈립니다. 동아시아의 문명사는 후자의 특징이 명백합니다. 부여 옥저 읍루 고구려 신라 백제 발해 고려의 문명은 '숲의 문명'을 이루었던 역사라고 저는 봅니다. -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의 문화사상과 학문과 예술은 숲의 영혼에 빚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번 '동아시아 평화의 신화전'은 동아시아 숲의 문명을 찬미하며 그 역사의 한과 어둠, 틈과 카오스, 자궁, 음의 세계와 양의 세계가 다시 천지조화를 하는 동아시아 근원의 문화를 신화와 민속 속에서 찾고자 합니다. - 범신 영혼론, 영혼 평등주의, 易, 無常, 太虛, 格調聖靈, 생명의 미학, 기운생동의 미, 薄明의 미, 연암의 冥心, 추사의 '怪의 미학' 등이 이룩한 동아시아 인문학이 고아시아의 숲의 문명과 어떤 인과관계에 있는지를 묻고자 합니다. - 동아시아 숲의 문명은 범신 영혼 무 공 역 태허의 사유체계와 관련한 문명 같습니다. 숲의 문명은 자연과 같이 나왔다가 태허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무상성의 사유세계입니다. 무상성이 이성적 사유라면 영혼주의가 감성적 예감입니다. 동아시아 숲과 문명은 無有相應, 虛實相生의 우주적 조화세계가 보입니다. 이는 우주적 공공심의 세계관으로 문명조차도 무상한 흐름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숲에는 무수한 생명이 살아 있으면서 무수한 생명이 죽어가거나 죽은 것의 영혼까지도 깃듭니다. 생성과 소멸이 집약된 현장이고, 숲 생활에서 터득한 삶과 비움의 문화가 동방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어 왔습니다. 이 지혜를 우리는 문명 아닌 문명 '숲의 문명'이라고 부르렵니다. - 빛이란 고대로부터의 신화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고대 수렵체취족인 만주족, 고조선족, 몽골족, 알타이족의 시조신화에 자주 등장합니다. 우리 땅의 지명인 한라, 태백, 백두 등에서도 남아 있듯이 천손족은 하늘의 빛을 숭상하는 신화적 상징을 가졌습니다. 빛은 희망이기도 합니다. 어둠은 한이기도 합니다. 동아시아 빛의 문화는 고대의 숲그늘 세계, 민중의 한의 세계와 유무상응하면서 보이는 역사의 이면사를 이룹니다. - 현대문명의 위기가 지구의 위기에까지 이르려 하고 있습니다. 위기의 현대에는 문명 아닌 문명, 동아시아의 이면사관, 비움과 재생의 순리인 '숲의 문명'으로부터 다시 배워서 위기의 현대를 넘어서는 삶의 지혜를 찾을 수는 없는지 성찰하고자합니다. - 위기의 현대가 생활양식, 소비양식을 바꾸어야 하는 시점에까지 와 있다면, 무한대의 욕망과 대량생산 대량소비, 자원낭비, 자원고갈, 생태파괴, 끝 모를 물질욕망의 부딪힘, 그리고 전쟁과 폭력의 지구촌은 더 이상 희망의 역사가 될 수 없습니다. - 인간의 주동성이 사적 욕망을 향하기만 해서는 희망의 지구촌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숲의 섭리대로 변하는 이치를 깨닫고 나와 이웃, 인간사회와 지구가 함께 사는 길을 찾아 자연과 친구하는 새로운 '숲과 사람의 공생문명'이 대안의 문명일 것입니다. 이는 생성과 비움의 무상성을 오히려 아름다움으로 받아 안는 역설인 동시에 진실인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일 겁니다. 우리도 숲처럼 모든 생명이 욕망을 절제하는 동시에 자제 시킬 것 없는 욕망이 아름다움의 출구를 찾아가도록 하는 화이부동의 문화를 찾을 수는 없을까요. 폭력을 무력화 시키는 아름다운 욕망 말입니다. 욕망이 아름다움의 출구를 찾아 친교하고 연대하는 것이 평화연대로 가는 길일 것입니다.
모든 현대 생활인들은 숲에서 나와 살고 있지만, 반대로 숲으로 들어가서 사는 사람들에게서 생활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잃어버린 자연과 친구하는 삶을 우데게이족으로부터 다시 배울 수는 없을까요? 숲과 결별한 도시문명은 자연과 결별하며 돌이킬 수 없는 지구의 생태 위기를 가져오고 있는데, 이것과 반대되는 인간형의 원형으로부터 저는 숲과 조화로웠던 문명은 없었는지, 그 지혜를 빌어 문명위기에 대안이 되는 생활과 문화를 일굴 수는 없는지 찾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문명이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인 자연과 벗하며 사는 삶의 양식을 만나고 싶습니다. 아, 내가 10년간 숲 속의 독공으로 만났던 숲의 영혼을 여기서 다시 확인하고 싶습니다. 동아시아의 숲도 나무 하나 하나가 연대하여 숲을 이루듯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이어져서 숲과 같은 영혼으로 싱그럽기를 바랍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기행문으로 붓그림 편지를 올리겠습니다. 7월 10일 경에야 귀국할 것 같으니 '김봉준의 붓그림편지' 연재가 늦어지더라도 양해해 주십시오.
연해주 우스리스크에서 6월25일 김봉준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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