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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멀고도 가까운

이강국의 '격동, 세계경제' <3> 일본경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라면 이른바 한류, 한국 문화의 힘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한국 연예인들이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끄는 걸 보면 으쓱해지기도 한고, 한류가 동아시아로 퍼져나가는 걸 보면 동북아 문화중심국가는 정말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잘 생긴 배우나 멋진 가수를 팔아먹는 것을 넘어서서 김구 선생이 일찍이 말한 대로 한국이 도덕성에 기초한 문화대국이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문화의 대유행과는 달리 경제면에서는 90년대 일본경제의 위기와 한국의 상황이 심심찮게 비교되는 듯하다. 작년에는 일본의 불황과 현재의 한국경제를 비교하는 보고서들이 제출되었고 몇몇 이들은 우리도 일본과 같은 장기침체로 들어설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으며, 한술 더 뜨는 언론들은 최근 일본의 경제회복과 비교하며 한국의 미래에 대해 더욱 어두운 전망을 던지기도 했다.

위기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가뜩이나 길을 잃은 경제개혁을 더 약화시키는 의도도 있을지 모르지만, 고도성장 이후 갑자기 침몰해 버린 일본의 경험이 주목을 받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경제는 일본식의 경제발전을 충실히 따라왔으며 그러다 벼락같은 위기를 맞지 않았던가.

정작 일본에서 보자면 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변화는 오히려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온갖 이해조정으로 인해 발목을 잡혀 지지부진하던 일본의 시장개혁과는 달리 화끈하게 공적자금을 쏟아부으며 금융부문을 칼질하고 노동시장도 앞뒤 재지 않고 유연화하는 한국의 미국식 경제개혁에 대해 한 일본 교수는 ‘역시 국민성이 달라서인가’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물론 우리는 위기의 쇼크와 IMF 등 외부의 압력이 압도적이었던 탓이겠지만 뭐든 한쪽으로 쉽게 쏠리는 우리네 성정도 좀은 역할을 한 듯도 싶다.

중요한 점은 멀고도 가까운 일본경제와 우리가 비슷하네 마네를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극적인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호들갑은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일본 위기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버블 붕괴와 메인뱅크 시스템**

일본 경제의 몰락이 다른 무엇보다도 버블의 붕괴에서 시작되었다는 데 대해서는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한다. 80년대 후반 폭등했던 일본의 주가와 지가는 90년대 초반 거의 반토막이 났고 그 이후 부실채권의 부담이 열도를 짓눌러 잃어버린 10년을 낳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버블이 심화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일본의 버블은 역시 일본경제의 구조적인 변화, 특히 고도성장을 떠받쳐 오던 금융시스템의 변모와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다.

전후 일본의 독특한 금융시스템은 흔히 메인뱅크 시스템(main bank system)이라 불린다. 메인뱅크는 기업의 주거래은행으로서 기업 경영을 감시하며 회사가 어려움에 빠질 때 자금을 지원해주고 경영자를 바꾸는 등 구제와 규율 기능을 수행한다. 기업과 은행은 보통 서로 주식을 보유하며 긴밀하고 돈독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일본의 관계중심적(relationship-based) 금융시스템은 정보교환에 기초한 효과적 기업 감시와, 장기적 시야에 기초한 투자 촉진 등으로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는 데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한국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국가가 은행을 조종하며 경제를 발전시키는 국가주도적 금융시스템으로 일본을 따라잡으려 하지 않았던가.

90년대 초반까지는 학계에서도 미국식의 시장중심적(market-based) 시스템을 비판하고 메인뱅크 시스템의 장점을 강조하는 논의 일색이었고, 일본의 성공은 미국에서 포터 등으로 대표되는 국제경쟁력에 관한 연구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90년대 일본경제의 침몰과 미국 경제의 부활을 배경으로 상황은 역전되어 동아시아식 금융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이제 활개를 치고 있다. 메인뱅크 시스템은 연성예산제약(soft budget constraint)으로 표현되듯 까딱 잘못하면 은행이 기업과 유착하여 시장신호를 무시하고 과다하고 비효율적 투자를 낳을 수 있으며 은행이 너무 힘이 세면 기업으로부터 지대를 뽑아가서 혁신적인 투자를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이 일본 경제위기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며 미국식의 자유화와 시장개혁을 역설했다. 이는 위기 이후 그 말을 고분고분 들었던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주장이다.

***금융시스템의 변모와 버블**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작 일본의 위기를 촉발시킨 것은 메인뱅크 시스템 자체의 문제보다는 그 구조적 변모라고 할 수 있다. 메인뱅크 시스템은 80년대를 거치며 큰 변화를 겪는데, 가장 중요하게는 은행의 중요한 고객이었던 대기업들이 내부이윤의 증가와 금융자유화, 투자 하락 등을 배경으로 금융조달구조를 다양화하여 은행으로부터 이탈해갔다는 것이다. 규제완화 이후 채권시장의 성장과 금융시장의 개방이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했고 주식시장의 호황은 자본시장으로부터의 자금조달을 더욱 손쉽게 만들어주었다. 실제로 일본 대기업들의 외부자금조달구조에서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70년대 중반까지는 80%를 넘었지만 이후 급격히 떨어져 80년대 후반에는 고작 10%에 불과하였다.

대기업 고객을 잃은 은행들은 이제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고 뭔가 살 길을 찾아야 했다. 경쟁의 압박을 받던 이들이 달려간 곳은 바로 부동산과 관련 소규모 금융기관이나 부동산 담보대출 혹은 주식시장 등 버블관련 부문이었다. 많은 기업과 은행들은 버블의 기대 속에서, 부동산을 담보로 맡기고 대출을 받은 뒤 다시 그 돈으로 부동산에 투자하고 또 대출을 받는 거래를 지속했고 해외부동산 등 온갖 자산관련 투자가 급증했다.

결국 80년대 후반 일본의 버블은 금융시스템의 변모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금융부문에 맡겨진 돈이 비생산적인 자산관련부문으로 흘러간 것이 주요한 배경이었던 것이다. 한편 버블로 부추겨진 기업들의 과다한 투자는 은행에 의해서 제대로 감시되지 못했고, 연성예산제약 문제는 오히려 쉽게 자금조달이 가능했던 자본시장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이렇듯 메인뱅크 시스템의 약화는 바로 위기의 씨앗을 뿌리는 과정이었다.

***버블 붕괴와 정부의 실기**

한없이 폭등했던 부동산과 주가는 지속불가능한 것이었다. 마침내 90년대 초반 버블이 터지고 스모 선수처럼 부풀어 오른 일본경제가 쓰러지기 시작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버블이 터지자 담보가치 폭락으로 금융기관들이 실질적으로 파산하고 부실채권이 금융부문을 강타했으며, 금융중개기능의 마비, 특히 중소기업 부문에 대한 대출 급락과 투자 저하로 이어졌다. 실제로 부실채권의 반 이상이 제조업이 아니라 버블과 관련이 큰 건축업이나 도소매업에서 발생했다는 데서 버블의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여파로 총수요가 악순환을 낳으며 위축되었으며 결국 10년이 넘는 장기불황으로 열도가 신음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남는 것은 과연 정부는 무얼 하고 있었던가 하는 점이다. 흔히 지적되는 정책의 실패는 역시 정부가 버블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고 거시경제의 관리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80년대 중반 이후 가속화된 금리인하가 시중의 돈을 넘치게 하여 버블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이 배경에는 85년 플라자합의 이후 국제적 조정의 문제를 일본이 짊어졌다는 현실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엔고 압력과 불황의 우려 속에서 일본정부는 확장적 통화정책에 매달렸던 것이다.

버블의 붕괴에도 정책의 실기가 한몫을 했다. 90년대 초 너무 급속히 이루어진 금리인상과 부동산 대출총량 강화 등의 효과가 눈사태처럼 나타나며 버블의 붕괴를 도왔다는 것이다. 당시 보수적이던 일본은행이 고금리정책에 집착한 면도 있었다고 지적되지만 버블은 일단 심화되면 정말 언제 터질지 몰라서 거시정책을 비난하는 것은 사후약방문 같기도 하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는 금융시스템의 변화를 제대로 관리하는 데 실패한 금융자유화와 개방의 시기와 은행에 대한 비대칭적인 규제 등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정부의 미지근한 대응이 불황을 더욱 장기화시킨 측면도 있다. 90년대 초 일본정부는 경기침체와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를 우려하며 구조조정을 밀어붙이지 못했고 이러한 늑장대응은 부실채권을 오히려 증가시켰다. 정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은 98년 이후였으며 2002년 하반기 이후에야 구조조정에 보다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재정정책도 stop-go 사이클을 보이며 정부의 부채만 늘여 지금은 정부부채가 OECD에서도 최고수준이다.

심화된 일본의 경제위기는 2000년 이후에는 아무리 풀어도 돈이 돌지 않는 이른바 유동성 함정에 가까운 상황까지 낳았다. 2001년 이후에는 이른바 제로금리정책을 통해 금리를 0에 가까울 정도로 낮추고 본원통화를 계속 방출하고 있는데도, 부실채권에 짓눌린 은행대출의 하락으로 인해 거시정책의 약발이 먹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확장적 거시정책과 금융구조조정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었던 것이다.

***일본식 경제시스템의 미래?**

10년을 넘게 끈 불황은 이제 끝나가고 있는 것일까. 2003년 이후 일본경제는 중국 등을 포함한 수출시장의 호황과 IT부문 등 제조업의 경쟁력에 기초한 투자회복 덕분에 완연한 회복세를 보여주고 있다. 부실채권도 작년부터는 상당히 감소되고 있으며 노동시장도 파트타임 비중이 30% 중반을 넘기는 등 상당한 구조변화를 겪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일본의 금융시스템은 어떻게 변화해갈 것인가. 이미 90년대 후반 대기업들의 투자는 거의 대부분이 내부자금으로부터 충당되어 은행의 금융조달 역할은 중소기업에만 치중되고 있다. 메인뱅크시스템의 핵심이었던 은행-기업의 상호주식보유도 90년대 후반 이후 상당히 감소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3년부터 소니나 히타치 등 몇몇 대기업들은 사외이사제도의 확대 등 미국식의 기업지배구조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하여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자유화와 미국식 시스템을 지향하는 듯하지만 일본식의 장점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도 작지는 않다. 도요타 등은 여전히 일본식 경영을 고수하면서 세계최고의 경쟁력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금융시스템의 미래에 대해서도 논의가 분분하지만 역시 아오키 등이 지적하듯 급속하게 미국식으로 변해가는 대신 기업규모별로 혹은 산업별로 분화된 하이브리드형 구조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금융시스템의 변화에도 상당히 균등한 소득분배나 주식과 기관투자가의 비중이 낮은 저축구조, 여전히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노동시장 등 일본사회의 특수성이 고려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일본의 경제체제도 그 곳 사람들처럼 외래의 요소들을 부분적으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천천히 변화해 가고 있는 듯하다.

***다른 길, 비슷한 문제, 한국경제**

최근 일본과 한국을 비교하는 표면적인 단서는 한국도 장기적 불황과 성장잠재력의 저하 그리고 부동산 시장의 버블이 우려되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한국도 위기 이후 가계대출의 급속한 확대와 부동산 부문의 급성장이 나타났다는 점이 유사하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은, 일본이 금융시스템 변모로 버블이 심화되고 그 붕괴로 투자의 급락이라는 고통을 겪은 반면 한국은 급속한 구조조정의 결과가 자금흐름 변화의 주요한 원인이었다는 점이다. 구조조정과 개방을 배경으로 한 기업의 투자저하, 외국계에 의해 주도된 은행부문의 기업금융 약화, 가계대출 확대에 기초한 내수부양책 등이 그 주요한 요인이었다. 한국 기업부문의 설비투자 자금조달에서 내부자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위기 이전에는 30% 정도였으나 이제 70%까지 상승했고, 고객을 잃은 한국의 은행들도 가계금융에 치중했던 것이다.

아무튼 일본과는 부동산 담보비율과 지가상승의 정도도 다르며 경제의 상황과 발전정도가 틀리다는 점에서 한국도 일본의 길을 따를 것이라는 억측은 그다지 근거가 없어 보인다. 다만, 일본의 경험은 무시무시한 버블의 위험과 손쉬운 경기부양의 유혹을 극복하고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한 노력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의 현재 상황이 개방된 주주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구조조정 자체와 관련이 있음을 고려하면 단지 부동산 부문에 대한 규제에 멈출 일이 아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비생산적 자금흐름을 최소화하고 생산적 투자를 늘이기 위해 구조조정과 금융시스템의 변화방향에 대한 진지한 재고가 필요할 것이다.

***다시 한번 정부의 역할은**

역사가 미래의 지침이 될 수 있듯이, 일본과 한국의 비교도 현재보다 과거가 더 흥미롭게 보인다. 80년대 후반 한국을 돌이켜보라. 당시에는 제2금융권과 자본시장의 성장으로 재벌의 금융지배력이 강화되고 정부의 금융통제가 약화되어, 재벌의 기세가 정부를 압도하며 국가주도의 발전 모델이 깨져나가고 있었다. 이후 규제도 규율도 받지 않던 재벌의 문제점이 지속되었고 이것이 내외적인 압력 속에 이루어진 금융개방과 겹쳐져 금융위기로 터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장하준 등의 학자들은 한국 위기의 원인을 기존 발전모델의 문제가 아니라, 규제완화로 이 모델이 약화된 사실에서 찾는다. 과다규제(overregulation)가 아니라 과소규제(underregulation), 시장에 손을 완전히 들어버린 정부의 역할 부족이 문제였다는 것인데 물론 그 배경에는 금융시스템과 정부-재벌 관계의 변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즉 일본에서 대기업의 은행으로부터의 독립이 시스템을 변모시켰던 것처럼 한국도 정부로부터 재벌의 독립이 나타났고, 재벌-은행-정부, 혹은 대기업-메인뱅크 간의 관계 변화가 관계지향적 금융시스템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또한 양국 정부 모두 이러한 금융시스템의 변화과정을 적절히 관리하는 데 실패했으며 그 여파가 위기로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일본과 한국의 경험은 기존의 체제가 약화된다고 해서 정부가 손놓고 자유화만을 추진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며, 언제고 변화에 대한 관리의 노력에 소홀하지 않아야 함을 잘 보여준다. 일본의 경험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정부가 언제나 시장과의 건전한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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