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건국의 아버지, 비폭력 불복종의 대명사. 동양 대국의 위대한 정치가 간디. 생김새는 깡마르고 힘없어 보이지만 그 속에 감춰진 엄청난 인내력과 집요함은 대영제국의 혼을 빼놓았고 결국엔 인도를 독립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간디가 영국에서 변호사 시험을 보러 가게 되었답니다. 그때 시험관이 이렇게 물었죠. “셰익스피어를 읽었습니까?"라고. 아니 법조인을 뽑는데 무슨 셰익스피어냐. 안 읽었노라고 대답. 그때 시험관은 인생도 모르면서 어떻게 남을 변호할 수 있느냐, 다시 공부하고 오너라 하여, 1년을 더 인생 공부하고 온 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답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인생도 모르는 20대 초반에 해당과목만 따르르 외어 시험에 합격한 후, 고생도 모르고 인생도 모르고 그저 남이, 부모가 부추기는 대로 우쭐대며 판검사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또 한분 위대한 정치가, 아니 철학자 네루, 그의 지성적인 단정한 모습과 조용한 눈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평화로워집니다. 한때 필자가 닮으려고 노력한 명상의 정치가 네루. 위 두 분을 동양의 성인으로서 인생의 스승으로서 존경합니다.
***간디 [1869.10.2~1948.1.30]**
서부의 포르반다르 출생.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다. 1887년 18세 때 런던에 유학하여 법률을 배우고, 1891년 귀국하여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893년 소송사건을 의뢰받아 1년간의 계약으로 부인과 함께 남(南)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이 남아프리카 여행은 간디의 생애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7만 명의 인도 사람이 이주해 있었는데 백인에게 박해를 받고 있었다. 이에 그는 거기에 사는 인도사람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결심하고 남아프리카 연방 당국에 대한 인종차별 반대투쟁단체를 조직, 1914년까지 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동안 진리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을 하였으며, 이러한 기반 위에 아힘사(ahimsa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를 중심으로 하는 간디주의를 형성하였다. 간디 자신이 전개한 인종차별, 압박에 대한 투쟁(사티아그라하:satyagraha) 및 자기실현을 위한 인격의 도야와 수양(修養)의 노력은 어느 것이나 훗날 간디가 인도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의 모형이 되었고, 또한 아슈라마(ashrama:修道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도인의 정신개조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최초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1906년 아시아인 등록법을 제정한 트란스발주(州)에서 일어났다.
이 투쟁은 그로부터 약 8년 동안 인두세(人頭稅)를 비롯한 여러 차별법에 반대하기 위하여 계속되었으며, 남아프리카의 여러 주로 퍼져나갔다. 특히 1913년에 44세가 된 간디가 선두에 서서 행진한 나탈주(州)에서 트란스발주까지의 ‘사티아그라하 행진’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간디를 비롯한 행진 참가자 4천명은 남아프리카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악법을 반대하는 주장은 세계적 여론의 동정을 모아 당국을 굴복시켰다. 결국 아시아인 구제법이 제정되어 인도인에 대한 차별법은 모두 폐지되기에 이르렀으며, 이 투쟁으로 간디는 남아프리카의 간디에서 일약 세계의 간디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사명을 다한 간디는 1915년에 귀국하였는데, 정치운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토지분쟁의 해결 등에 노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전쟁 후 영국의 배신과 1919년의 롤라트 법안(Rowlatt Act)과 같은 반란진압조령(條令)의 시행 때문에, 사티아그라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인도 여러 곳을 두루 순회하였고 수방(手紡:charkha)운동을 장려하였다. 1919년 인도국민회의파의 연차대회에서는 간디의 지도 하에 영국에 대한 비협력운동 방침이 채택, 납세거부 ·취업거부 ·상품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 저항을 실시하였다. 이듬해에 반영 ·비협력 운동이 선언되고 외국제 직물의 불매운동은 성공하였으나, 인도 각지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운동은 잠시 중지되었다.
그동안 간디는 투옥되었다가 풀려 나왔으며, 1924년부터 1년간 인도국민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수방운동으로써 인도인이 자력에 의한 농촌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1929년의 연차대회에서 국민회의파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독립을 선언하였고, 61세가 된 간디는 1930년 3월에 사티아그라하운동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소금세 신설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구금되었으며, 1931년 석방 후, 어윈 총독과 절충한 결과, 간디ㆍ어윈 협정을 체결하여 반영(反英) 불복종운동을 중지하였다. 간디ㆍ어윈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정책을 쓰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운동을 재개하여 투옥되었다가 1932년 석방된 이후부터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에 진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의 찬성을 얻지도 않고 인도인들을 전쟁에 투입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한 인도는 완전독립의 약속을 얻어내려고 노력하였으나, 상반된 이해관계로 타결을 보지 못하고, 1942년의 봄베이대회에서 국민회의파는 영국세력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여 공전의 대규모 반영불복종운동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해 간디는 73세의 노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전쟁 후에는 인도를 하나의 감옥으로 보고 전화(戰禍)와 굶주림으로 거칠어진 인심에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기 위하여 인도의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힌두 ·이슬람의 화해에 따른 인도통일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주권을 넘겨줌에 있어서 인도의 대정당인 국민회의파와 전인도(全印度) 이슬람 연맹이 인도를 둘로 분할 독립할 것을 협정한 결과 오히려 격렬한 힌두 ·이슬람의 대립소동이 벌어졌다.
1947년 7월 인도가 이러한 분란 속에서 분할 독립했을 때, 간디의 나이는 78세였으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소동이 가장 격화되어 있던 벵갈에서 힌두 ·이슬람의 융화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듬해인 1948년 l월, 이 활동의 행선지를 뉴델리로 연장, 뉴델리의 소요를 진압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1월 30일 반(反)이슬람 극우파인 한 청년의 흉탄에 쓰러졌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R.타고르의 방문을 받아 ‘마하트마(Mahatma: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고, 그 후로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그의 위대한 영혼은 인도민족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폭력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나, 인도에 있어서는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사상에 입각하여 평화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간디의 주저 《인도의 자치(自治)》에서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반서구사상(反西歐思想)은 그의 단편적인 편모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평화사상과 평화에 바친 업적은 실천면에서 볼 때 민주적 민족주의자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며, 특히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네루 [Nehru, Pandit Jawaharlal, 1889.11.14~1964.5.27]**
북인도 카슈미르의 부유한 브라만 가문 출신으로서 변호사인 P.M.네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5년 영국으로 유학, 해로학교를 거쳐서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를 졸업, 자연과학 학위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1912년 귀국하였다. 1916년 간디를 만나 그의 행동주의에 영향을 받아 국민회의파에 참가, 1920년 알라하바드에서 농민들과 직접 접촉한 후부터 정치적인 눈이 열리게 되었다. 간디의 비폭력·불복종의 원리에 완전히 심복한 것은 아니지만, 간디가 언제나 빈곤한 인도 농민 대중의 입장에 서서, 유사시에는 ‘밑바닥을 흔드는 급소 중의 급소를 발견하는 천재’를 가진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1921년 반영(反英)투쟁에서 처음으로 체포된 이래, 1945년까지 8차례 체포되어 9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간디 지도하의 반영(反英)독립투쟁에 사회주의적 강령을 도입하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1929년 국민회의파 라호르대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인도의 완전 독립이 결의되었다. 1937년 영국 통치하에서 처음으로 주(州)선거가 실시되자 인도 전국을 유세, 마침내 자치 8개주에서 국민회의파 내각의 조각에 성공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에스파냐민족전선·충칭[重慶]의 항일(抗日)국민정부를 격려하여 동분서주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돌발로 국민회의파 내각은 총사퇴하였다. 그 후 1942년 8월 영국에 대하여 인도로부터의 즉시 철퇴를 결의하자, 간디와 함께 체포되고, 인도 전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대전 종료 후인 1947년 8월 25일 인도가 파키스탄과 분리 독립되면서, 총리 겸 외무장관의 자리에 올랐다. 독립 2개월 후인 10월 카슈미르 출병, 이듬해 1948년 1월 간디 암살, 8월 하이다라바드 출병 등의 곤란한 사건이 잇달았다. 아시아 여러 국가의 연대 강화, 미·소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주의는 독립 이래의 외교정책이었다. 6·25전쟁이나 인도차이나전쟁의 조정, 반둥회의를 일관하는 평화공존 5원칙(판치 실라)은 네루 외교의 기치로서 평화지역의 확대에 공헌하고, 그의 명성을 높이기도 하였다.
대내적으로는 국가개발계획, 언어별에 의한 주 재편성(州再編成)을 거쳐 사회주의형 사회의 실현에 노력하였다. 제1차 5개년 계획(1951∼1956)은 농업개발과 식량증산에 중점을 두어 성공하였으나, 제2차 계획(1956∼1961)은 중공업 건설을 우선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국제경제의 변동과 인도 자체의 요인에 의한 자본 및 자재난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부딪쳐 미국의 원조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그 후의 외교정책도 미묘하게 변화해 갔다. 옥중에서 쓴 마지막 저서 《인도의 발견》에 표현된 조국에 대한 이해와 열정, 아시아·아프리카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올바른 평가, 평화공존에 대한 열의, 혁명을 단절로서가 아니고 지속으로서 생각하는 태도, 적도 친구로 여기는 휴머니티 등이 인도 국내외에서의 네루의 지위를 독자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민주적이고 친숙미 넘치며 솔직한 성격은 인도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저서로는 《인도의 발견》과 옥중에서 1966년 총리가 된 외동딸 인디라 간디에게 주는 형식의 《세계역사 이야기》 등이 있다.
운명 요소로 이 두 분을 비교합니다.
① 간디
생년월일 : 1869년 10월 2일 오시
운명요소 : 기사년 계유월 을축일 임오시 ( 己巳년 癸酉월 乙丑일 壬午시 )
② 네루
생년월일 : 1889년 11월 14일 해시
운명요소 : 기축년 을해월 갑오일 을해시 ( 己丑年 乙亥月 甲午日 乙亥時 )
***1. 소질 검색**
① 간디(己->癸->乙<-壬)
먼저 을과 계, 을과 임(乙<-癸, 乙<-壬)의 관계입니다. 천재감별법에서 기발 반짝 아이디어형과 자료수집 아이디어형에서 천재급에 속하는 소질입니다. 그의 비폭력, 불복종 아이디어가 바로 이 허(虛)를 찌르는 그의 천재성에서 나왔다고 보아집니다. 또한 명예를 존중하고 인정에 억매이는 성격도 이 소질에 기인합니다.
두 번째는 을과 기(乙->己, 己<-乙)의 관계입니다. 이 소질은 윗사람에게 마음으로 복종하는 소질입니다. 또한 교제 능력도 탁월한 소질로서 공공의 일을 보는 사람으로서는 필수적인 소질이죠.
② 네루(己<-乙<-甲->乙)
갑과 을의 관계는 자존심이 세고 모든 일을 꼭 자기가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소질입니다.
두 번째 갑과 기(甲->己, 己<-甲)의 관계입니다. 빈틈없이 찬찬하고 모든 일을 법대로 처리하는 철두철미한 소질입니다. 이런 소질은 기존의 이루어진 질서 속에서, 안정된 사회 속에서 빛을 발하는 그런 소질이죠.
③ 소질 종합 판단
간디가 혼란기에 비폭력 불복종 아이디어로 세상을 살아갔다면 네루는 간디가 이루어 놓은 안정된 사회를 이어 받아 법대로 집행해가는 법치 국가로 만든 공이 있습니다. 이 둘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인도가 제대로 건국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소질표**
***2. 욕망 검색**
① 간디(乙일에 酉월)
보스가 되려는 욕망이 강합니다. 특히 금(庚,辛)으로 투출되지 않아 더욱 집요한 그림자로 남습니다.
② 네루(甲일에 亥월)
명예욕이 많습니다. 특히 수(壬,癸)로 투출되지 않아 더욱 집요한 그림자로 남습니다.
***3. 본능검색**
***본능표**
***4. 개성 검색**
***개성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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