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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친위대 하나회의 경복궁 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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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 친위대 하나회의 경복궁 회동

[박정희 권력의 DNA]<4> 전두환의 12.12군사반란 흉계

정치군인 하나회 경복궁 30경비단에 집결하다

1979년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
한겨울의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경복궁에 수도권 인근의 군 실력자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경복궁은 청와대를 호위하는 30경비단의 병영. 이날은 청와대를 호위하는 이른바 '특정지역' 위병소의 위세도 보이지 않았다. 위병장교는 모여드는 손님들에게 깍듯이 경례를 붙였다. 이날 30경비단에 집결한 장성들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초대한 손님들.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육사 16기, 후에 청와대 경호실장, 안기부장)은 이날 오는 손님들에게 전에 없이 잘 모실 것을 특별지시했다.

맨 먼저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5공정권 안기부장, 민정당 민자당 국회의원)과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5공정권 교통부장관)이 들어섰다. 이어 1공수특전여단장 박희도 준장(육사 12기, 후에 육군참모총장)과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육사 13기, 후에 합참의장과 국방장관), 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육사 12기, 후에 총무처장관)이 나타났다.

전두환과 함께 이날 군사반란의 또 한 주역인 9사단장 노태우 소장은 직속상관인 1군단장 황영시 중장(후에 육참총장, 감사원장)과 함께 약간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20사단장 박준병 소장(육사12기, 후에 민정당 민자당 사무총장)도 뒤따라왔다.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30경비단장실이 군사반란의 아지트였다. 내로라하는 별자리들이 모인 자리에 영관급은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과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후에 육참총장) 두 사람뿐이었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 대령이 들어왔다. 조홍은 전두환의 지령을 받아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본 헌병감을 연희동 비밀요정에 발을 묶어놓는 임무를 수행한 후 곧바로 들어온 것이다.

이날 모인 장성들 중 전두환 노태우보다 위인 중장급들은 정규 육사가 아니어서 하나회가 아니지만 하나회와 가까운 인물들로 후에 5공과 6공에서 출세의 길을 걷는다. 소장 이하 정규육사 출신과 대령인 30단장 장세동과 33단장 김진영도 모두 하나회 핵심이었다.
▲경복궁에서 12.12군사반란 음모에 가담한 정치군인들은 모두 5공과 6공에서 장관과 국회의원 이상의 고위직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80년 7월18일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이 후임인 유학성에게 자리를 인계했다. 유학성은 이어 중정 간판을 바꾸어 단 안기부의 초대 부장이 됐다.
이렇게 군사반란 아지트를 30경비단에 설치한 것은 외부 공격으로부터 방어에 유리하고 비상통신망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12.12 군사반란 계획은 일주일 전인 12월 5일 보안사령관실에서 머리를 맞댄 전두환과 노태우 둘이서 짰다.

전두환은 이때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참총장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결심했다. 정신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올라 있는 상황이었다. 노태우가 먼저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우리가 영향력 있는 장성들을 모아놓고 그 자리에 정승화 총장을 초치해 김재규 수사에서 드러난 의문점을 들이대는 거야."
"그렇잖아도 수사관들은 정 총장을 연행해 조사하자는 거야. 그러나 이 판국에 현직 육군총장에다 더구나 계엄사령관인 사람을 수사요원이 막무가내로 연행할 수도 없고…."

말꼬리를 흐리는 전두환은 얼굴 표정이 어두웠다. 두 사람은 결국 자신들이 그동안 상관으로 근무 인연을 맺고 하나회에 우호적인 고위 장성들을 30경비단으로 포섭해 들이기로 했다. 물리력을 동원하기 위한 병력은 정예부대인 30경비단과 공수특전부대에 의존하기로 했다. 30경비단에는 일반 병력 외에 무술특공조가 있는데다 장갑차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청와대와 지근거리에 있는 이 지역을 웬만해서는 다른 군부대가 공격해 오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보안사는 이날 육군본부 정규 지휘계통의 병력 지휘관인 수경사령관 장태완과 특전사령관 정병주, 그리고 육본 헌병감 김진기를 부대에서 이탈시키고 교란시키기 위해 술자리 유인책을 썼다. 연희동 비밀요정에 자리를 마련해놓고 만찬 초대를 한 것이다. 반란군 집단은 수경사령관 장태완을 가장 큰 위협세력으로 보았다. 장태완은 10.26 직후인 11월 16일 정승화 육군총장이 발탁해 수경사 지휘권을 맡긴 그의 직계 야전통이었다.

수경사령관 장태완과 하나회의 악연

장태완은 1973년 3월 윤필용 사건으로 수경사에서 하나회 장교들을 솎아내는 작은 개혁이 없었다면 청와대 근위부대에 발을 들여놓을 처지가 못 되는 '철조망 군인'이었다. 6.25전쟁 때 소대장,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종합 및 갑종 등 그의 동료들은 전쟁이 끝난 후 기습공격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진지 구축과 철조망 공사로 군생활의 태반을 보냈다.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철조망 세대'라고 불렀다. 그러던 장태완이 수경사 참모장이라는 핵심보직을 받아 근위부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윤필용계 장교들이 잘려나간 직후인 1973년 4월 말 수경사의 인사쇄신 덕분이었다.

호랑이 장군으로 유명하던 한신 1군사령관 아래서 작전처차장을 지낸 그는 진지공사 등을 점검하는 지휘검열단장으로 사령관의 암행어사 노릇을 했다.

1971년 1월 준장으로 진급한 장태완은 육본 군사연구실장을 거쳐 5군단장 이병형 중장의 참모장으로 들어갔다. 이때 5군단 예하 8사단 21연대장이던 노태우 대령과 어설픈 인연을 가졌지만 직속 상하관계는 아니었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성격이 괄괄한 장태완의 이름은 이미 야전군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수경사 참모장을 순수 야전 출신으로 물색하는 가운데 그는 별 어려움 없이 그 자리에 발탁된다. 신망 높은 이병형 군단장이 신임 수경사령관 진종채에게 그를 천거한 것이다.

그런데 수경사 참모장으로 부임한 장태완 준장은 하나회와 그만 악연을 맺고 만다. 훗날 12·12쿠데타에서 전두환계 하나회 장교들과 대결하게 되는 감정의 씨앗이 이때에 뿌려진다.

1976년 6월 어느 날, 부임한 지 두 달이 채 안 된 장태완은 서울 서부지역의 수경사 방공진지 공사현장에 순시를 나갔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별판을 보고 놀란 위병은 뒤늦게야 신호 버튼은 눌렀다. 그래서였는지 장 참모장이 한참 공사판을 걸어서 들어가는 동안 아무도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거의 막사 앞에 이르렀을 때야 방공포 대대장 김상구(호주 대사, 민정당 국회의원 지냄) 중령이 나와 경례를 했다.

김 중령은 육사 15기의 하나회 핵심. 더욱이 그는 박정희의 총애를 받고 있던 하나회의 보스 전두환 당시 1공수여단장과 동서 사이로 중견장교 중 실세였다.

김 중령을 앞세워 벌컨포 설치공사 현장에 가본 장 준장은 울화가 치밀었다. 전방부대 장병들이 순전히 손발로 하는 일을 중장비로 편하게 하면서 진지의 은폐 · 엄폐를 위한 잔손질은 적당히 얼버무린 태만한 공사로 보였다. 괄괄한 장 준장은 김 중령의 면전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모자란 놈이 어떻게 대한민국 장교가 됐나?"

그러자 김상구는 자존심이 확 상했다.

"저도 4년제 육사에서 배울 만큼 배우고 임관한 장교입니다. 장교의 명예를 짓밟는 그 말을 취소하십시오."

김상구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대들었다. 장태완은 어이가 없었다. 애송이 중령이 감히 상급부대 장군에게 대드는 것은 하나회라는 뒷배경 때문이려니 생각하니 더욱 괘씸했다. 더 거친 언사가 장장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놈아, 제대로 일도 못하는 놈이 누굴 믿고 건방지게 굴어?"

그러나 김상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일개 영관이 장군에게 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대거리를 서슴지 않았다.

"내가 당신보다는 군사학을 더 공부하고 임관했소."

화를 풀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령부로 돌아온 장태완은 사령관 진종채에게 이 사실을 낱낱이 보고하고 '겁 없는 하나회 장교'를 징계위에 회부할 것을 주청했다. 그러나 진종채는 영남군맥의 후배인 김상구를 징계할 생각이 없었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장태완을 달랬다.

"내일 내가 불러서 기합을 줄 테니 그만 참아주시오."

하지만 장태완은 강경했다. 화를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이런 군기 문란한 장교들을 그대로 두고선 함께 못 있습니다. 저를 내보내든지 김상구를 구속시키든지 택일하십시오."

결국 김상구는 이 일로 영창에 들어갔다가 전역하고 만다. 하나회 계열 장교들이 장태완에게 깊은 유감을 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 후 장태완은 전두환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 1979년 11월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보안사령관인 그를 계엄업무회의에서 만났다. 전두환이 손을 내밀었다.

"형님, 축하합니다."

이에 직선적인 장태완은 과거지사를 넌지시 떠보았다.

"전에 김상구 일로 내게 아직 유감이 있소?"
"아닙니다. 다 지난 일인데요, 뭘. 그 친구가 몸가짐이 좀 그래서…."

그러고 나서 바로 운명의 날 12월 12일에 만찬 초대를 받은 것이다. 이 만찬 초대가 군사반란을 행동에 옮기는 흉계의 시작이었다. 흉계는 이렇게 실행에 옮겨진다.

보안사령부 대 수도경비사령부

1979년 12월 5일 오전 10시, 서울 필동의 수도경비사령부 정문 앞에 세단이 멈춰 섰다. 위병이 다가간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님이시다. 너희 사령관께 방문인사 약속이 있다."

운전석 옆의 수행 장교가 앉은 채로 차창만 반쯤 내린 채 말하자 위병소 헌병은 차를 들여보내고 안에 보고전화를 건다. 허화평(후에 민정당 의원)의 이날 방문은 사전에 연락이 가 있었다.

하루 전인 4일 국방부 군사법정에서 열린 계엄사 보통군법회의가 첫 김재규 재판을 한 날이어서 어수선할 때였다. 박정희 살해사건이 계엄령 이전의 행위라는 사실을 들어 변호인들은 민간법정에서 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보안사 수사관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서울에 위치한 실세부대인 보안사와 수경사의 관계는 사령관들의 개인적 친분에 따라 협조관계 아니면 알력관계로 갈렸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 박정희의 신임도와 총애 여부가 두 군부 권력자의 힘겨루기를 결정지었다.

1970년대 초, 김재규 보안사령관과 윤필용 수경사령관 시절에 두 부대는 갈등이 심했다. 수경사 안에 있던 보안부대 사무실이 정문 밖으로 쫓겨난 일도 있었다. 윤필용의 전화를 보안부대원이 도청하다가 들통이 났는데, 수경사에서 보안부대 사무실에 못질을 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실 병력을 가진 수경사는 물리력에서는 단연 앞서긴 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에서 더 센 보안사보다 늘 한 수 아래였다. 더욱이 1973년 3월 윤필용 수경사령관의 구속사건으로 수경사는 위세가 크게 눌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윤필용 후임으로 영남군맥의 대부 격인 진종채가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하고, 이어 수경사 내 하나회를 조사하던 보안사령관 강창성이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당하면서 수경사의 사기도 그런대로 유지됐다. 그러면서 두 부대 간의 긴장관계도 계속됐다.

수경사에 나와 있는 보안부대 장교로부터 허화평의 방문인사 전갈을 받은 데 이어 그 자신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을 때 장태완은 그런 껄끄러움을 없애보려고 그러려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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