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기간 터진 북한의 '핵 보유 및 6자회담 불참' 선언에 각국이 분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태의 흐름을 보면 일단 중국의 대북 회유에 기대를 걸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중국이 북한을 달래고 다시 회담장에 나오기까지는 지리한 줄다리기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런데 필자에게 있어 이번 사태는 북한이‘강짜’를 부린 그 순간부터 이미 승자와 패자가 정해져 있었다고 여겨진다.
먼저 승자 클럽(Winners’ Club).
이번 사태로 가장 많은 것을 취한 쪽은 역시 북한이다. 북한으로서도 이번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지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다. 일이 잘못되어 경제지원 단절, 국제고립 심화로 이어지면 북한 내부의 동요 및 이로 인한 정권붕괴로까지 파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은 이번의 짜증을 통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경제 보상과 2003년 8월 이후 지금까지 지리하게 이어져 온(북한에게 전혀 실익이 없었던) 북한 핵무기에 대한 보상 논의를 촉진시키는 등의 소기 목적을 달성한 뒤 물러서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 예상된다. 북한의 이번 선언은 또한 중국의 체면을 세워줌으로써 향후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든든한 방파제 확보라는 이득도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이번 사태는 북한의 전면적인 승부수나 가장 위험한 벼랑끝 전술이 아닌, 그동안 북한정권이 즐겨 사용해 온 단지 또 하나의 일거다득용 협상전술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다음은 중국.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쥐게 된 중국 또한 결과적으로는 입지를 강화함으로써 대미관계를 위시한 향후 국제관계에서 더욱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었다. 그런데 국제사회가 중국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의 중국 또한 북한에 대해 여하한 심각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경제제재 등을 통한 북한 정권 조르기는 결국 북한사회의 약자들만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독재정권은 반사적인 인민 지지의 획득을 통해 더 한층 위험한 행보로 치달을 수 있다. 이는 경제성장에 사활을 걸고 있는 중국에게 대단히 바람직스럽지 못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볼 때 대북 협상에 나서는 중국이 가능한 역할은, 단지 줄 것은 주고, 들어주고 다독거리며 국제사회를 대신해 약속하는 정도에 국한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런데 다행히 이는 북한의 의도와 일치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돌발변수가 발발하지 않는 한 중국의 중재역할은 무난히 수행될 것이며 이를 통해 중국의 입지 또한 강화될 것이라 예상된다.
한편 이번 사태로 일본 역시 호시탐탐 갈구하던 호기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표면상 일본정부는 6자회담 복귀를 촉구하는 냉정한 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뜻하지 않은 이득에 대해 쾌재를 부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즉 이번 사태는 일본의 군비 재무장 뿐 아니라 핵무기의 필요성이라는 일본식 대의명분까지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은 북한의‘가짜 유골’사건으로 대북 감정이 상당히 격앙된 상태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일본인들이 가장 껄끄럽게 여기며 두려워하는 북한에 의한 핵무기 보유 선언까지 불거져 나왔으니 일본인들의 대북감정과 안보불안감은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북한선박의 일본영해 침범, 일본열도까지 거침없이 날아드는 대포동 미사일 등의 북한발 소동은 상대적으로 일본정부의 헌법개정과 군비확장 움직임에 대한 일본국민의 저항을 누그려뜨리는 데 적잖이 기여해 왔다. 실제로 북한에 의한 열도의 안보불안이 대두될 때마다 일본인의 평화헌법 개헌 지지율은 그만큼 상승하는 추세를 보여 왔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때 이번 사태는 일본정부에게 군비강화와 핵개발이라는 더할 나위없는 명분을 제공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은 패자 클럽(Losers’ Club).
우선 미국이다. 어설픈 공명심으로 북한 조이기에 혈안이 되어 온 워싱턴은 결국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보잘 것 없는 작은 나라에 온갖 자존심이 구겨진 만큼 내심이야 융단폭격도 불사하고 싶겠지만 한반도 상황은 이라크나 이란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아무리 미국이라도 함부로 주먹을 휘두를 수는 없는 형국인 게다. 바로 이와 같은 점을 잘 간파하고 있는 북한은 언제든지 또다시 미국을 우롱할 수 있으니, 미국의 실(失)과 자존심 손상은 다름아닌 워싱턴 자신의 단순 이분법적 사고가 바뀌지 않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한국. 이번 강짜의 최대 패배자는 바로 한국일 것이다. 이번 사태로 노무현 대통령의 L.A. 연설(2004년 11월) 이후 북한 핵에 관한한 주도적 역할을 자임해 온 우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운명조차 결정못하는 무력함에 한탄만 해서는 안된다. 이번 사태를 통해 적어도 한가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 북한의 핵 보유선언에 대해 “공식선언이 아닌 공식주장일 뿐”이라는 식의 말장난만 일삼은들 존재하던 핵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없던 핵이 갑자기 생기겠는가. 그러지 말고 현행 논의 구도의 비효율성이 다시 한번 재확인된 만큼 더 현명한 대응방법 모색에 주력해야 한다. 북한 핵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 조바심 내지 말고 더욱 장기적인 차원에서 다양한 전술을 활용, 지속적으로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패러다임 개발에 착수하라는 메시지이기도 한 것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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