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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없이 서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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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없이 서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유경의 '문화산책']<22> 서촌5 - 서촌을 찾는 재미, 보물과 샘물과 호랑이

서촌은 규모가 작고 조용해 이야깃거리가 적을 줄 알았다. 한데 볼수록 새로운 국면이 드러나곤 한다. 서촌을 찾는 재미가 이런 것이구나 싶고 글은 자꾸 길어진다. 믿든지 말든지 다음의 이야기는 실화다! 박광배 시인이 실제 주인공한테서 듣고 전해준 서촌이야기 하나.

20여 년 전 서촌 어느 한옥에 '강남구 대치동의 35평 아파트 한 채와 무조건 바꾸자'는 사람이 찾아왔다. 이러고저러고 한옥 주인은 자기 집을 그대로 보존해 살게 되었는데, 왜 그런 제의가 있었는지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정묘호란(인조5년, 1627)에 왕실이 급히 강화도로 피난 떠날 때 어떤 공주의 귀중품이 궁녀를 통해 솥에 담긴 채 서촌의 어딘가에 묻히게 됐다. 그 후 어떤 연유로든 그 물건들은 원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그 사실은 내막을 아는 이들을 통해 대대로 전해졌다. 이제 와서 그 장소가 이쯤이라고 추측한 사람이 보물 생각에 집을 바꾸자고 한 것이다'라고.

역사와 궁궐이라는 배경에다 보물, 대를 이어 남모르게 소곤소곤 전해 들었을 이야기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인조 때 왕실은 두 번이나 강화도로 남한산성으로 청나라군을 피해 떠났었다. 가마솥이나 돌확에 귀중한 것들을 땅속에 묻어두고 간 것은 가깝게 6.25 한국전쟁 때에도 숱하게 있었던 일반적인 보관법이다. 400년 가까이 그 비사가 전해진 과정 자체가 흥미롭다. 사실일 수도 있지만, 환상적으로 부풀려져서 공주라는 신분으로, 또 묻힌 보물이라는 것으로 전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동네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서촌은 대궐일 하던 관리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이고 산속에 있는 동네라는 것이 더욱 간단치 않은 배경을 만들어 낸다. "우린 이런 이야기들이 많아요. 잘하면 흥미진진한 영화도 드라마도 되잖겠어요?"

▲ 필운동 골목 안의 (전)이항복 대감집 솟을대문 남은 모습. 사랑채 자리엔 빌라가 들어섰고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행랑채가 시작된다. ⓒ 이순희

서촌 필운동에는 오성 이항복 대감집으로 불리는 큰 한옥도 있다. 골목 안에 솟을대문이 있고 그 안에 행랑채가 가로로 길게 펼쳐진다. 행랑채 문을 들어가면 또 문이 나오고 그렇게 겹겹이 기와집들이 세 겹쯤 들어서 있다. 그 뒤로는 가파른 언덕을 담으로 두른 후원 안에 정원으로 나가는 일각문과 정자 같은 별당이 있다. 이런 구조가 고스란히 남은 집은 정말 귀하다. 서울에 단 하나 있는 집인지도 모르겠다.

몇백 년 된듯한 회화나무가 있어 이곳이 평범한 이의 집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110평 대지의 사랑채는 2006년에 헐리고 그 자리에 커다란 빌라가 들어섰다. 집터는 주변의 여러 건물까지 포함하고 있다가 다른 소유자에게 내주며 줄었다. 어설픈 눈짐작으로 지금 집터만도 500평 이상 될 것도 같고 원래 터의 경계를 이어보면 애초엔 지금보다 세배쯤은 됐으려니 짐작된다.

지날 때마다 골목길에 언뜻 보이는 별당과 나무가 고색창연한 모습이어서 눈이 가곤했었다. 옛 조상들이 이 별당 정자 주위에서 한순간씩을 보내는 모습이 그림에서처럼 상상이 됐다. 지금도 잎이 무성한 회화나무는 그런 과거를 다 새기고 있을 것이다.

이 동네에서 제일 오래 산 주민 최순식 씨에 의하면 이 집 대문 앞 한 건물터가 마구간이었고 대장간도 붙어 있었다. 집 앞으로 인왕산 계류가 흘러 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펌프를 박아놓고 동네 공동 우물터로 쓰다가 근년에 복개했다고 한다.

▲ 후원의 정원 풍경. 왼쪽으로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다. ⓒ 이순희

▲ 일각문과 별당 주변 ⓒ 이순희

이곳이 이항복의 집이었다는 사료는 전혀 없지만, 필운동은 그가 살았던 곳이고 그의 자취가 서린 필운대 암벽도 남아 있기에 그 아래 99간 이 집을 '오성 대감집'으로 보는 것 같다. 건물에 대해서는 최근 서울시가 인수하면서 확인한 대들보 상량문에 '갑술년(1934년) 갑술시에 상량'한다고 적혀 있는데, 그전부터 다른 건물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지금 한옥은 짓고 나서 한 번도 손을 안 본 집같이 낡았지만 큰 규모라서 여러 세대가 모여 산 듯하고 지하 시설 같은 굴이 두 개, 우물터 등이 대단하다.

'대감'급 서촌 거주자로 조선말 심상훈 판서도 서촌에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누상동 초가집에서는 최초의 여성비행사가 된 숙명 여학생 이정희가 살았다.

▲ 이항복의 자취가 있는 필운대. 웅덩이 두 개에 맑은 물이 고였다가 흘러나간다. ⓒ 이순희

이 한옥도 필운대 암벽도 지금은 건물에 막혀 옛날 같은 주변 환경은 잃었다. 그래도 그 앞에 다가섰을 때 옛 분위기를 떠올릴 순간이 있었다. 필운대에는 이항복의 후손이 찾아와 쓴 시가 있고 그 아래 바위벽에서 배어 나오는 물이 고이는 웅덩이가 두 개 연이어 있다.

웅덩이 안에는 갈색 나뭇잎이 가득 잠겨있었다. 문득 1910년대 황해도 장련에서 산속 물웅덩이의 낙엽을 헤치면 그 안에 지네가 들어 있어 놀라곤 했다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백 년 전 산속 절에 가던 길, 큰 나무 옆 웅덩이의 물을 두 손으로 떠올리던 한 법학자의 행적은 오래된 그 분위기에서 앞으로 모험이 전개되리란 어떤 예감과 함께 서정적인 환경도 느끼게 하던 것이었다. 이항복의 시대에도 이 웅덩이에는 이렇게 나뭇잎들이 잠겨 있은 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필운대 암벽은 학교건물 뒤편으로 처박히듯 막혀버린 대신 그 위쪽 산속으로 통하는 길목에는 현대에 와서 지은 듯한 팔각정이 하나 있다.

서촌이 흥미진진한 것은 단순한 주택지를 넘어서 인왕산이라는 산을 끼고 있어 그런 것 같다. 한국인에게 산에 간다는 것은 단순한 등산 이상의 뜻을 가진다. 인생을 더 말하는 장소인 것이다. 산 가까이 있는 누상동 백호정 터를 찾아갔을 때는 인왕산 호랑이의 흔적까지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 백호정의 현재모습. 엄한붕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 아래 인왕산 호랑이가 마시던 샘물이 지금도 있다. ⓒ 이순희

백호정은 호랑이와 관련이 있다. 그 옛날 인왕산에 호랑이가 많던 시절, 병이 든 흰 호랑이가 와서 샘물을 마신 뒤 회복되어 바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걸 본 사람들이 백호정 약수를 찾기 시작했는데 물맛이 좋고 맑았다고 정평이 났다. 이 물을 마시면 모든 병, 특히 폐병에 좋다고 해서 더 유명해졌다.

한때 손꼽히는 활터였다지만 지금은 좁은 면적의 터만 남았다. 높이 솟은 바위에 숙종 때 명필 엄한붕(안내판에는 '엄한명'으로 잘못 표기함)이 쓴 '백호정' 글씨가 있다. 바위에는 그런 기백이 서려 있지만 비바람과 개발에 시달려 외롭고 훼손된 모습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이 이젠 존재도 희미해진 호랑이 신세 같다. 1920년 신문기사에는 이곳 정자에서 낮잠을 자던 사람이 정자가 갑자기 무너지는 바람에 그만 죽었다고 났다. 알게 모르게 호랑이의 기세가 느껴진다.

▲ 서촌 외진 곳에 있는 샘물이 있는 동굴의 출구 ⓒ 이순희

그 아래 바위에 면한 샘에는 지금도 맑은 물이 고인다. 빌라들이 숲처럼 들어선 동네 깊숙한 곳에 이만한 터와 글자와 샘물이 아직 보존돼 있다는 사실이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동네 사람들은 샘물에 철문을 달아주어 보존하고 있다. 비록 황폐해진 모습이지만, 현대인들에게 인왕산 호랑이의 야성과 맑은 샘물의 기를 고스란히 실물로 보여주는 이런 명소는 서촌의 보물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나무 대신 건물의 숲에서나마 좀 더 깊이, 멋있게 바라볼 터전이 많은 데가 서촌이다.

샘물의 원천자리는 여러 군데 남아있어 그것들을 확인하는 답사가 있었다. 몸을 굽히고 들어가는 굴속에도 샘물이 있었다. 주변에 한 암자가 있어 청결하고 엄격히 굴 입구를 간수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보통 샘물 이상의 곳인 듯 했다. 15미터쯤의 굴은 'ㄱ'자로 꺾어지는데 굴 한중간 깜깜한 바닥에 샘물이 있다. 시멘트로 정비한 테두리에 물 뜨는 바가지와 그릇이 놓여 있었다. 요즘이니 핸드폰에 있는 손전등으로 비춰봤지만, 옛날에는 횃불 또는 등불을 들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그 물을 떠 마시고 '이 동네 샘물 중 가장 맛이 좋다'고 했다. 그는 시인이었다. 샘물에서는 동굴 다른 끝의 출구가 보였다. 거기까지는 굴의 천장이 더 낮아져서 땅을 짚고 몇 미터를 기어 나왔다. 나와 보니 그 바깥은 사방이 산으로 막힌 곳이었다. 어린애였다면 이 동굴 속 샘물을 마시는 일이 대단한 모험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 글로 인해 이 장소가 훼손될까 봐 두렵고 그렇지 않기를 바라마지않지만, 서촌이 가진 산속의 순수한 야성적 매력이 이토록 의연히 남아 있을 줄은 오래된 서울사람이면서도 몰랐다. 서울, 그리고 인왕산 동네의 야성을 간직한 이런 곳이야말로 도시 속의 보물이 아닐까.

또 다른 샘물은 완전히 드러나 보이는 계곡 안에서 흘러나왔다. 이 동네에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 샘물을 식수로 마셨다고 한다. 파이프를 연결해 쓰기 좋은 넓은 터에 물을 이끌어냈는데, 안 쓴지 오래라 녹이 슬고 이용하는 이들도 거의 없는 듯 주변은 풀꽃만이 가득했다.

▲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샘물. 수도가 놓이기 전까지 누상동 주민의 식수원이었다. ⓒ 이순희

서촌 연구자 김한울 씨와 함께 이곳을 가보던 날, 웅덩이 맑은 물속의 낙엽은 세월의 퇴적처럼 느껴졌다. 호랑이가 마시던 샘물, 동굴 속 신성한 샘물, 바위굴에서 쏟아지는 환한 샘물, 오래된 한옥의 우물, 어느 집인지 묻어놓았다던 가마솥의 보물, 그런 것들은 서울 일부분으로 남아 있었다. 그 샘물을 짚어보며 다니다가 다시금 차들이 가득한 옥인동 길로 나왔을 때, 조선말 격변기에 정반대 인생을 살았던 두 사람의 흔적이 보였다.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으려고 수만금의 전 재산을 써가며 만주로 독립운동하러 간 이회영 형제기념관과, 거기서 몇 걸음 떨어진 필지에서 화려하게 살았던 이완용의 집터였다. 이회영 형제6인 중 5인은 광복을 못 보고 만주에서 비극적으로 사망했다. 생명까지, 모든 것을 다 바친 열정과 비극이 독립을 더욱 숭고하게 만들었다. 이회영 형제의 서간도 체류는 부인 이은숙 여사의 기록으로 남았다.

근대 6백여 년의 역사는 맑은 샘물과 호랑이의 정기서부터 역사가 잘못될 때 그에 대한 저항과 매국의 모습까지 서촌에 간직돼 있다.

▲ 서촌에 있는 우당기념관의 이회영 흉상과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날 것을 결의하는 형제 6인의 그림 ⓒ 이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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