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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주사파다

[기고] 주체사상, 실체 알고 보면 별것 아니다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로 알려진 황장엽이 2010년 10월 사망한 직후 국립묘지 안장을 두고 찬반 논란이 일었다. 진보는 반대, 보수는 찬성의 구도를 보였으나 우파 진영 일각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반대론의 근거가 뜻밖이었다. 그가 남한에 와서도 주체사상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발전, 파급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일반국민에게는 황당한 말로 들릴만했다.

이 당시 이주천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는 라디오에 출연해 "황장엽 선생은 주체사상을 남한에서 발전시키려 했던 의도가 강했다"며 "주체사상은 북한 인권 문제와 다른 문제로, 차라리 주체사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강조한 게 아니라 주체사상을 남한에서 더 개선해 파급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혼란이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같은 지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보수우파 진영 일각에서 그가 주체사상을 왜 버리지 않느냐, 혹시 위장 전향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그는 강연이나 저술을 통해서 줄곧 '인간중심의 철학'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체사상의 별칭이다.

그가 남긴 저서에는 실업으로 어려움을 겪는 남한의 청년들에게 인간중심의 철학으로 도움을 주고 싶다는 대목이 보인다. 그가 말하는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철학은 고난에 처한 사람이 역경을 뚫고 목표에 이르게 하는 데에 큰 힘이 되어 준다. 그래서 북한의 현대사를 이끌어온 지배이념이 되었다.

주체사상을 막연히 북한의 독재를 합리화시켜준 괴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사갈시해온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말이다. 그런 것이라면 위험할 게 뭐가 있나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더구나 주체사상의 핵심인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말은 너무나 당연해서 하나마나한 말로 들린다. 그래서 오히려 이해하기가 어렵다. 주체사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전통적 좌파의 세계관과 비교해 봐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뒤집으며 탄생했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일정한 조건에서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될 일을 선택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합리주의이다. 이에 비해 주체의 인간들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하면 무모할 정도로 밀어붙인다. 그래서 신념의 인간이라 불린다. 이것은 주체사상의 3대요소인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 중 의식성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북한의 선전포스터에서 보이는 "우리는 한다면 한다"는 경구는 이 같은 특성을 잘 보여준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FIFA 랭킹 꼴찌였던 북한은 랭킹 1위의 브라질에 대등한 게임을 펼친 것도 소위 주체축구의 힘이라고 선전했다. 2대 1로 패하긴 했지만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같은 놀라운 힘의 원천인 의식성은 주체사상을 매우 독특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주체사상의 이 같은 특성은 우파적 관념적 성격을 띠고 있어서 80년대에 PD(민중민주 계열) 쪽의 비판을 받았고 유럽의 전통적 좌파에게 외면 받는 이유가 됐다.

이 같은 인간중심의 철학에 수령론, 유일사상 체계 등 정치적인 성격이 입혀져서 비로소 북한의 지배이념으로서의 주체사상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주체사상의 원형인 인간중심의 철학만을 보면 남한의 지배이념과 다르지 않다. 인간중심의 철학에서 나온 "한다면 한다"와 남한의 경제발전 시기의 지배이념이었던 "하면 된다"가 다를 것이 뭐가 있겠나. 그래서 황장엽은 전향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통일시대에 남북이 함께 가져야할 이념이 이처럼 쉽게 발견된다는 것은 더없이 다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과감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북한인민들도 '아이 캔 두이스트(I can do-ist)'이고 남한 국민들도 주사파이다.

▲ 통합진보당 김재연, 이석기 당선자 ⓒ연합

통합진보당 파동 중에 이석기, 김재연 등 구당권파가 버티는 모습을 보며 많은 국민들이 당황해 하고 있다. 기존의 정치상식에 비춰보면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여론이 불리할 때는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 전략을 써볼 만도 한데 그들은 무소처럼 밀고나간다. 도무지 정치를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놀라게 된다.

합리적으로 판단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북한과 꼭 닮았다. 미국이 그동안 북한과의 대결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합리적으로 접근할 때 이해가 잘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보기에 북한은 자기들이 손해가 되는 일도 자초하는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적을 알아야 이긴다는 병법에 비춰보면 미국이 북한에 쩔쩔매면서 끌려 다닌 것은 당연했다.

이석기, 김재연 등이 지금 국민들에게 보이고 있는 모습도 북한과 비교가 된다. 왜 진보진영에 손해가 되는 일을 그리고 자신들을 고립시키는 일을 자초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들은 바로 인간중심의 철학으로 훈련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온갖 난관과 어려움에도 맞서서 끝까지 버티며 마침내 목표한 바를 이뤄내고 마는 그런 모습이 그들의 로드맵이 아닐까. 그들의 고집스러운 모습을 자료로 삼아서 북한의 주체사상이 어떤 것인지 학습하는 기회로 삼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그것도 남는 장사가 아닐까.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낭만적인 아이디얼리스트의 발상으로 보일 법하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5월12일 통합진보당 사태를 주제로 한 KBS 심야토론에 나와서 한 마디 했다가 혼이 났다고 말했다. 평생 그때처럼 악명이 높았던 때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이 토론에서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뿐 아니라 주사파 정당까지 한국정치에 들어 올 수 있다면서 이것이 한국정치에 안정적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심야토론 게시판에 오른 시청자의 글 하나를 소개한다. "전국민이 수신료를 내서 운영되는 공영방송에서 북한의 적화통일을 돕는 주사파를 인정해야 된다고? 이건 고발대상입니다."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북한과 통일을 해야 한다. 아무리 겨울이 길어도 봄은 오듯이 북한이 아무리 싫다 해도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필자는 80년대 북한바로알기운동에 참여해서 북한 서적을 펴냈던 경험을 갖고 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차원의 북한바로알기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북한의 주체사상 별 것 아니다. 알고 보면 우리의 것과 비슷하다. 실체를 잘 모를 때에 불필요한 공포심이 생긴다.

북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이석기, 김재연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누구와 통일하겠다는 것인가. 앞으로 원조 주사파와 통일하려면 유사 주사파쯤은 받아들일 체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번에 백신주사를 맞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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