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팔레스타인의 넬슨 만델라가 되고 싶다"
아라파트, 당신은 지난 10월 초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는 아랍계신문 '아슈라크 알-아우사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남아프리카 백인정권의 흑백차별정책(apartheid) 아래 27년동안 옥고를 치르면서도 남아프리카에 희망을 빛을 비추었던 만델라는 당신의 마음 속 영웅이었지요. 그런 만델라도 당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는 자서전의 서문에서 당신을 가리켜 "난민 처지로 떠돌던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끌어올린 인물"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렇게도 열망하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당신은 지난 11월 11일 7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습니다.
***호치민이 베트남 통일 못 보고 눈감았듯...**
<사진1> 라말라 집무실에서 만난 아라파트. @김재명
당신은 20세기 민족해방운동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식민지 영토확장을 둘러싼 제국주의전쟁의 성격을 지녔던 제2차 세계대전 뒤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를 내놓지 않으려고 버텼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 사실상 30년을 끈 베트남전쟁에서 식민 세력들은 숱한 현지민중들을 희생시킨 다음 군사적으로 패배한 뒤에야 물러났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강압통치도 그런 희생의 탑을 쌓은 뒤에야 해결이 가능할까요.
안타깝게도, 당신은 베트남 통일(1975년)의 날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던 호치민(1969년 사망)처럼, 그런 독립의 날을 보지 못하고 갔습니다. 분명한 것은, 당신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도 60년이 다 되는 시점에서도 역사발전을 되돌리려는 (다시 말해 반역사적인) 이스라엘의 무단(武斷)통치에 맞서 좌절하지 않고 민족해방운동을 벌여온 의지의 정치인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아랍인들의 투쟁사에 이미 전설처럼 이름이 남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군의 무단통치에 신음해온 민중들, 그리고 요르단과 레바논을 비롯한 이슬람 국가들에 흩어져 돌아갈 날만 꼽아온 많은 난민들에게 당신의 죽음은 그야말로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권력을 오래 잡아 독선적이라느니, 아라파트 측근들이 부패했다느니 하는 말들을 합니다. 제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라말라에서 당신의 지지자들로부터 들은 우회적인 해명에 따르면, "대이스라엘 항쟁을 위한 무기구입, 알-아크사 순교여단 등 친아라파트 무장조직에 대한 재정지원 등 말 못할 항목에 큰돈들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게 사실이길 바랄 뿐입니다. 당신에겐 다행스럽게도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런 문제점들은 이스라엘의 선전공세에서 비롯된 모함이라고 여깁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일생을 대일 무장투쟁을 보내시다 돌아가신 높이 존경하듯이.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당신을 국부(國父)로 여기고 있습니다.
***"샤론은 부시를 방패막이 삼고 있다"**
저는 중동 유혈충돌 취재 때 두 차례 당신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2002년 6월 라말라 회교사원에서였고, 두 번째는 2004년 5월말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라말라 사람들이 '무카타'라고 일컫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집무실에서였지요. 그때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당신의 눈빛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저 사람 눈은 빛이 난다"는 말을 합니다만, 당신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얼굴은 주위 사람들에 견주어 창백해 보였습니다. 그 까닭은 2001년 말부터 거의 3년 동안 집무실인 '무카타'에 갇혀 지내왔기 때문일 겁니다. 당신을 평생의 숙적(宿敵)으로 여기는 동갑내기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군 탱크를 동원, 무카타를 향해 포격을 해대면서 "아라파트가 무카타 밖으로 나오면 생명을 보장 못한다"며 위협했습니다. 어쩌다 라말라의 회교사원에서 금요일 예배를 보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외출이었습니다.
75살 난 노인이 그렇게 사실상 감옥 아닌 감옥에서 지내다 보니, 건강을 지켜가기가 쉬울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연인 아라파트의 몸과 마음의 병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키워왔다"고 비난을 합니다. 제가 당신에게 "현 중동사태를 둘러싸고 미 부시행정부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다고 보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자, 당신은 이렇게 대답했었지요. "그 부분에 관해선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미국은 아리엘 샤론(이스라엘 수상)의 범죄행위를 덮어주어 왔다. 샤론은 (유엔에서 대 이스라엘 비난결의안이 나올 때마다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유엔총회에서 부표를 던짐으로써) 미국의 지원을 방패막이로 삼고 있다"
***알제리 독립전쟁의 영향**
돌이켜 보면, 당신은 일생을 대이스라엘 항쟁에 바쳐왔습니다. 1929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소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당신의 75년 평생은 투쟁가로서의 그것입니다. 카이로대학 토목공학과에 다니던 당신은 무슬림형제단에 가입, 이슬람운동에 뛰어들었고, 1959년 뒷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주류가 된 '파타'(Fatah) 저항조직에 참여, 평생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67년 6일전쟁 당시엔 특공대를 이끌고 이스라엘군과 맞서 게릴라투쟁을 벌이기도 했었지요. 당신이 2년 뒤 PLO 의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투쟁경력을 바탕으로 해서였지요.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정치기구인 PLO 의장에 오을 무렵 당신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유엔의 구호물자를 타기 위해 줄서 있는 한, 세계는 팔레스타인에 존경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그때까지 무장투쟁보다는 난민 구호활동에 관심을 쏟던 PLO를 무장투쟁의 전위대로 탈바꿈시켜 갔습니다. 그 무렵 당신의 투쟁전략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알제리독립전쟁(1954-1962년)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알제리 독립전쟁 투쟁이념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자주받은 자들』을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타협보다는 테러전술을 포함한 무장투쟁노선이었습니다.
알제리 독립전쟁을 제대로 분석한 책으로 정평이 나있는 앨리스테어 혼의 『평화를 위한 야만적 전쟁 : 알제리아 1954-1962』(1977년판)에 따르면, FLN은 테러전술을 폄으로써 '알제리아 사태의 국제화'를 노렸습니다. 당시 FLN 지도자였던 람다네 아바네는 "우리 알제리 인들의 투쟁이 세계로부터 '잊혀진 전쟁'이 돼서는 안된다. 테러전술이야말로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끌 수 있고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적을 10명 죽였지만 언론에 알려지지 않는 것보다는 적을 1명 죽이더라도 다음날 미국 신문에 알려지는 게 훨씬 낫다" 결과적으로 그런 투쟁전술은 옳았습니다. 프랑스 드골 장군은 끝내 알제리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제리 독립투쟁이 당신에게 끼친 영향은 엄청났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이렇게 털어놓았지요. "나는 1950년대부터 알제리 저항운동가들과 만남을 가졌다. 그들은 알제리가 독립되면 우리 팔레스타인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알제리 인들이 승리할 것이란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그들의 승리는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 여겼다"(알란 하트, 『아라파트: 정치적 자서전』1994년판).
***혁명가와 테러리스트의 차이**
당신은 기득권을 지닌 억압자들이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는 '자유전사'(freedom fighter)의 입장을 국제사회에 극적으로 표현한 인물로 꼽힙니다. 당신의 PLO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팔레스타인 저항단체 '검은 9월단'이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선수촌을 습격,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이 숨진 사건이 있었지요. 그 2년 뒤(1974년11월), 당신은 PLO 의장 자격으로 비정부기구 대표로서는 처음으로 유엔총회에 초대받아 이렇게 주장했었지요.
<사진2> 연금중이던 라말라 무카타에서 모처럼 외출, 회교사원에서 금요예배를 마친 뒤 지지자들의 열렬한 환호에 둘러싸인 아라파트. @김재명
"혁명가와 테러리스트가 다른 점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다. 올바른 투쟁동기를 지녔고, 침략자들과 정착민, 그리고 식민주의자들로부터 땅(land)과 자유를 지키려고 투쟁하는 사람은 테러리스트로 일컬어져선 안 된다"
그 연설 끝에 당신은 이스라엘을 향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경고를 남겼지요.
"나는 오늘 한 손에는 올리브나무 가지를, 다른 한 손에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가의 총을 들고 이곳에 왔다. 내 손에서 올리브 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 되풀이해 말한다. 내 손에서 올리브 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
당신은 이스라엘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망상에 빠진 국가라고 맹렬히 비난,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당신이 유엔에서 연설했을 때는 동서냉전의 시대라서, 서구 열강들은 제3세계 민족해방의 대의(大義)를 긍정적으로 보기보다는 적대세력인 소련의 크레믈린 당국과 그 첩보기관 KGB의 조종을 받는 것으로 보기 일쑤였습니다. 서구 사회의 안정을 해치려는 공산권의 음모가 뒤에 깔려있다고 보았지요.
사람마다 그러하듯 역사 속의 인물도 전성기-황금기가 있는가 하면, 쇠퇴기-몰락기가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유엔에서 연설하던 그 무렵이 당신의 황금기였습니다. 망명지를 떠도는 힘든 나날이었지만, 팔레스타인 민중을 당신을 믿고 따라주었습니다. 수천명의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당신에게 충성을 바치고자 몰려들었지요. 아랍권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서유럽의 정치지도자들도 아라파트와 함께 사진을 찍기를 은근히 바랬다고 합니다. 당신은 어느덧 세계적인 명사가 됐습니다. 그래도 당신에겐 늘 위기가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특공 암살대가 늘 당신을 쫓아 다녔습니다.
<사진3> 이스라엘군 불도저에 집을 잃은 팔레스타인 여인과 두 아들의 슬픔.(가자지구 칸 유니스 수용소)김재명
레바논에 머물며 대이스라엘 게릴라 투쟁을 이끌던 1982년도 위기의 해였습니다. 레바논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들 사이의 내전이 한창이던 그 무렵, 이스라엘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 지휘 아래 이스라엘 군은 레바논을 침공해 당신을 죽이려 나섰습니다. 그 무렵 이스라엘과 손을 잡은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들이 팔레스타인 난민촌 두 곳(사브라, 샤틸라)을 습격, 학살극을 벌여 세계를 놀라게 했지요(이 사건으로 샤론 국방상은 물러나 다시는 이스라엘 공무를 맡지 못할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18년 뒤인 2000년 9월말 야당인 리쿠드당 당수로서 동예루살렘 알-아크사 사원에 의도적으로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티파다(봉기)를 유도한 뒤, 그에 다른 정치적 혼란을 틈타, 그 다음해 선거에서 수상에 올랐으니 참으로 고약한 일입니다).
***"혁명가 시절의 각오는 잊어버리고..."**
레바논에서 생애 큰 위기를 맞았던 당신은 미국의 중재 아래 끝내 북아프리카 튀니지로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샤론 수상은 "그때(1982년) 아라파트를 죽이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는 말을 거듭 해왔지요. 1987년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봉기(제1차 인티파다, 1987-1993년)가 일어나자, 당신은 팔레스타인 내부의 파타당 조직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 다음해 당신은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선언하고, 망명정부를 세웠습니다. 바로 그 무렵 당신은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을 이뤘습니다. 유엔에 출석한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겠다"고 선언했었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PLO의 헌장은 이스라엘을 중동 땅에서 몰아낼 것을 명시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결과 당신의 측근들은 미국과 유럽국가(특히 노르웨이와 스페인)의 중재 아래 이스라엘과 비밀협상을 벌였고, 드디어 1993년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자치를 뼈대로 하는 오슬로 중동평화협정에 서명을 했습니다. 이로써 당신은 이스라엘 협상 파트너였던 이츠하크 라빈 총리,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었지요. 평화협정에 바탕, 1994년 팔레스타인 땅을 다시 밟은 당신은 1996년 팔레스타인 지역 내 선거에서 87%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자치정부 수반으로 뽑혔지요. 안타깝게도 그 뒤 당신에겐 좋은 일보다는 궂은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오슬로평화협정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후속 회담들은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고, 이스라엘과의 정치적 긴장과 무력충돌은 계속됐습니다. 클린턴 행정부가 임기 끝무렵에 적극 나섰던 캠프 데이비드협상 결렬은 큰 정치적 아쉬움으로 기록됩니다. 2000년 9월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나자, 당신이 보인 소극적인 대응에 실망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강경파 하마스(Hamas)에게 희망을 빛을 찾게 됐습니다. 여러 여론조사결과들은 강경파 하마스의 지지도가 높아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당신의 이미지는 내부적 비판으로 얼룩져 왔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만났던 한 병원의사는 "혁명가 시절의 각오는 잊어버리고 가죽 소파에 익숙해진 타협파"라고 당신을 비판하더군요. 권력배분과 부패척결을 요구하는 내부의 도전에도 부딪쳤습니다. 당신의 임기는 2002년까지였으나, 이스라엘군이 강압통치하는 상황에서 선거는 뒤로 미뤄졌습니다. 2001년 말부터 아라파트는 이스라엘 군에 포위돼 서안지구 라말라 집무실에 갇혀 농성을 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말년의 당신은 그런 고단한 상황에서 건강을 잃고 쓰러졌고, 끝내 역사의 무대 뒤로 퇴장했습니다.
***이스라엘 평화주의자들의 라말라 조문**
아라파트, 당신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립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언론들은 당신을 가리켜 "중동평화협상의 걸림돌이 되는 인물"이라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비판의 초점은 당신이 평화주의자가 아닌 파괴적인 테러전술에 매달려왔다는 데 모아집니다. 그러나 이슬람권은 물론 많은 국가들은 그렇게 당신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렸던 장례식에 많은 조문사절을 보낸 것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도 전 외교통상부 장관을 보냈습니다. 대대로 살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폭력적으로 몰아낸 땅에 세운 이스라엘의 집단농장들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멋지게 그려져 있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은 친이스라엘 노선을 걸어왔습니다. 그래도 전직 장관을 보내 당신의 마지막 길을 함께 배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마도 이슬람권의 눈치를 봐서 보냈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사진4> 생전의 아라파트가 묻히고 싶어했던 동예루살렘 알-아크사 회교사원 전경.@김재명
당신이 숨을 거두자, 이스라엘쪽 반응은 한마디로 "테러왕초가 죽었다. 잘됐다"는 싸늘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열린 공식 장례식에 조문사절도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살아서 아무리 원수로 지내다가도 죽으면 빈소를 찾아가 화해와 용서를 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일텐데, 이스라엘은 그렇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 당신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을 드리자면, 이스라엘 평화주의자들이 라말라로 몰려가서 당신이 묻히는 순간을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하며 조의를 나타내고 왔습니다.
당신도 잘 아시듯, 이스라엘에 오로지 아리엘 샤론 수상 같은 강경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평화'(Peace Now) 같은 평화주의자 조직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함께 공존해서 살아야 한다며, 우리 일제 식민지시절과 같은 가혹한 이스라엘군 무단통치를 철회하고 점령지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여왔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거듭되는 유혈투쟁 속에서 이스라엘 다수가 샤론을 지지하는 쪽으로 확실히 돌아섰고, 그런 평화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소수로 몰렸다는 점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평화주의자들을 배반자, 반역자로 비난을 하고 있는 게 서글픈 현실입니다.
***미-이스라엘, 압바스 지지공작 펼쳐**
당신이 지녔던 카리스마적인 정치력은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을 이끌어온 바탕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어떤 새 지도자도 당신이 지녔던 카리스마적인 정치력을 따라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현재는 일종의 과도기입니다만, 내년 1월 9일 선거에서 새 지도자를 뽑기로 돼 있습니다. 당신이 숨을 거두던 날 무하마드 압바스 전 총리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에 올랐습니다. 당신도 개탄했듯이, 그는 2003년 봄 부시 대통령-샤론 수상이 참석한 가운데 요르단 휴양도시에서 열린 중동평화협상에서 저자세를 보여, 많은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실망시킨 바 있습니다. 결국은 당신과의 권력투쟁에 밀려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긴 했습니다만...
문제는 그런 압바스가 미국과 이스라엘이 선호하는 지도자로 떠올랐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리인 아흐메드 쿠레이(68세)보다는 PLO의장에 갓 선출된 무하마드 압바스가 새 지도자로 뽑히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중도좌파 성향의 신문인 <하레츠>의 보도에 따르면, 샤론 정권은 압바스가 팔레스타인 새지도자로 나서는 것을 측면지원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고 합니다. 증거를 찾기란 어렵겠지만, 비자금을 팔레스타인 정치세력들에게 뿌려대 압바스 지지세를 강화하려는 정치공작에 나설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부시 행정부도 나섰습니다. 지난 4년 동안 부시 행정부의 중동정책은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를 걸어왔습니다. 이스라엘 강경파 아리엘 샤론 수상은 백악관으로 10번 넘게 초청을 받았지만, 당신은 미국 땅에 발을 내딛지조차 못했습니다. 그런 부시가 '2009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이란 새 이정표(road map)를 제시했습니다. 뒤집어보면, "평화와 독립을 바란다면 온건파인 (그리고 미국과 이스라엘에 고분고분한) 압바스를 찍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많은 중동문제 분석가들은 미국의 속내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부시행정부에서 힘을 지닌 유대인들과 신보수주의자들(네오콘)들의 대중동 시각이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을 보이지 않는 한, 중동평화 이정표가 자리잡아가길 바라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원래는 '2005년 독립국가'를 약속했다가 이번에 다시 수정판으로 나온 '2009년 독립국가설'도 결국은 부시와 그를 둘러싼 유대인 네오콘들의 시간벌기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년 1월 9일 선거를 통해 만에 하나 압바스가 자치정부 수반에 뽑힌다 하더라도, 강경파 하마스와 갈등으로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것으로 봅니다. 압바스가 이스라엘에 타협적인 자세로 양보를 거듭하면, 하마스의 대중적 지지도가 더 높아갈 것입니다. 그런 지지를 바탕으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정치권을 접수하려 들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사태를 이스라엘이 팔짱을 끼고 지켜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양쪽의 강경파들인 하마스와 샤론이 맞붙은 그런 빅 뱅(big bang)의 구도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강경파들, "팔 독립국가란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강경파들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란 없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6월 팔레스타인 현지취재 과정에서 만났던 팔레스타인 지식인들은 이스라엘 우파 정권이 팔레스타인 독립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 걱정했습니다. 그 같은 걱정은 터무니없는 게 아닙니다. 샤론 정권의 가자지구 철수안도 정치적 음모가 깔려 있다고 합니다. 샤론 수상의 속내는 가자 철수를 핑계로 "중동평화협상을 통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전망을 논의하지 않겠다"는 속셈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이같은 사실은 샤론 수상이 이스라엘 의회에서 극우파들이 가자 철수안을 놓고 맹공을 퍼붓자, 측근이 언론 플레이를 하는 과정에서 드러났습니다.
아라파트, 당신은 11년 전 오슬로 중동평화회담을 통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독립이 내다보이는 강가로까지 데려왔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 강을 건너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역사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대이스라엘 강경투쟁을 통해 팔레스타인 독립을 인류의 양심이 풀어내야 할 숙제로 띄워놓았다는 측면입니다. 그것만으로 당신은 20세기 민족해방운동사에 귀한 기록을 남겼다 할 수 있습니다.
아라파트여, 고이 잠드소서. 그리고 언젠가 팔레스타인 독립이 오는 날, 생전의 당신이 바랬듯이, 동예루살렘 알-아크사 사원으로 당신의 유해가 옮겨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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