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에 밥을 굶는 아이가 몇 명입니까. 그런 아이 있으면 저한테 연락주세요. 단언하건대 한 명도 없습니다. 언론이 왜 이런 문제를 들쑤셔 사회불안을 조장하는 겁니까."
본지가 지난 25일 <"정부, 결식아동 점심지원비 대폭 삭감" 파문> 제하의 보도를 내보낸 것과 관련해 서울시교육청의 한 예산담당 간부는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짜증부터 내며 한 말이다.
그는 "내년도부터 교육예산에 들어가는 국가부담금이 사실상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추경예산을 짜면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결식아동 점심지원비가 깎여 문제가 되면 그때 또 예산을 짜면 되지, 뭐가 문제냐는 식이었다. 수화기 저편 너머 그의 속내에 '아무것도 모르는 기자 따위가 괜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교육관료의 '이중 플레이'**
기자는 그 간부에게 "서울시교육청이 잘못했다는 소리가 아니다. 교육인적자원부에서 그렇게 예산을 짜 내려 보내면 어쩔 수 없다는 내용 아니냐"며 기사를 다시 한번 읽어주길 요구했으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서울시교육청과 관련한 내용을 "모두 빼달라"는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기자로부터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조치하겠다'는 말을 듣고서야 오랫동안 잡고 있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27일 이른 아침부터 기자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됐다.
기자가 받은 전화통화 내용은 앞서 보도를 위해 서울시교육청의 분위기를 알아보았을 때와는 상이했다. 뭔가 놓친 게 있나 싶어 다시 찾은 서울시교육위원회에서 기자는 '항의전화의 내막'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말들을 들을 수 있었다.
본지의 25일 보도 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들의 반응은 실상은 오히려 '환영 일색'이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기자에게 "항의전화를 한 간부도 들어 있었다"고 교육위원들은 전했다. 그의 태도가 바뀐 것은 그 다음 일이라고 했다.
본지의 기사내용이 교육부총리실까지 전달되자 교육부가 발칵 뒤집혔다. 교육부는 당연히 결식학생 중식비를 대폭 삭감해 문제를 일으킨(?) 서울시교육청을 닥달하기 시작했고, 그후 그 간부는 교육위원들 앞에서는 "힘내라"고 해놓고, 뒤에서는 기자에게 "교육위원들은 정치인들 아니냐"고 교육부 편에서 서서 교육위원들을 폄훼했다.
이중플레이에 능한 '관료의 속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왠지 오전에 친절히 받았던 전화까지 억울해졌다.
***교육관료의 더없는 '안일함'**
다시 앞으로 돌아가 저소득층 자녀들의 중식지원비가 내년에 28%나 삭감된 대목에 대해 따져보자. 서울시교육청은 내년도 예산을 짜면서, 저소득층 학생 중식지원비를 올해 2백73억5천여만원에서 1백97억여원으로 28% 삭감했다. 깍인 예산은 76억원. 액수만 놓고 보면 수조원대 교육재정 전반과 비교할 때 극히 '미미한 금액'이다.
교육부나 시교육청의 주장대로 나중에 추경예산을 투입한다면, 아니 그에 앞서 '교육감의 의지'만 있어도 능히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다.
바로 여기에 교육관료의 더없는 '안일함'이 배어 있다. 현재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인 점을 감안한다면 저소득층 자녀 가운데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점심을 굶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현재의 '깍인 예산'대로라면 굶은 아이들이 속출할 게 분명하나,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추경예산을 짜면 된다"는 교육관료 말대로 사회적 비난여론이 일면 곧바로 추경이 짜질 것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문제는 결식아동 중식지원비 삭감사태를 바라보는 교육관료의 더없는 '비교육적 자세'이며, '탁상행정'이며, 사회현실을 모르는 '맹목'이다.
***학교현장의 증언**
기자는 평소 친분이 있는 초등교사를 만나러 27일 오전 서울 S초등학교를 찾았다. 과연 서울교육청의 호언대로 결식아동이 없는 것인지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내년에 결식아동 점심지원비를 대폭 삭감해도 밥 굶는 아이들이 없을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서 기자는 몇몇 교사들로부터 저소득층 자녀들의 실상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A교사는 "저소득층 자녀들에 대한 국가의 시책은 '눈가리고 아웅'식"이라고 했다. 그는 "학교에 나온 이상 점심을 굶게 할 수는 없지만 그 아이의 아침과 저녁식사는 학교가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교사의 세밀한 관심이 없는 한 하루에 한 끼를 먹는 아이들도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자기가 알기로도 굶은 아이들이 상당수 있다는 증언이었다.
B교사는 저소득층 자녀들이 중식지원을 받기 위해 내야 하는 '까다로운 서류절차'에 대해서도 문제점을 제기했다. 어느 부모치고 "내 자식이 굶고 있다"며 동사무소 등 여기저기를 찾아가 생활보호대상자 증명 등 여러 증빙서류를 마련하러 다니는 일이 워낙 굴욕스러운 일인만큼 굶는 아이들의 실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C교사는 '월평균 2만원대'인 급식비를 어렵게 내고 있는 아이들의 실상도 안타깝다 했다. 서울의 극빈층이 밀집한 지역의 학교에서는 급식비를 내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앞서 B교사의 말처럼 부모된 입장은 어떻게 해서든 급식비를 내고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려 애쓰다가, 사정이 정말 어려우면 급식비를 제때 못내는 경우가 적지 않고, 이럴 때마다 담임은 안면에 철판을 깔고 아이들에게 급식비를 독촉해야 한다 했다. C교사는 "급식비가 밀린 아이에게 독촉 역할을 해야 하는 교사 입장도 얼굴이 화끈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토로했다.
교사들의 현장 경험담은 방학에 이르러 절정을 이뤘다. 그들은 한결같이 "돕더라도 티를 그만 좀 냈으면 한다"고 입을 모았다. 방학이 되면 정부는 전지분유며 농산물 상품권을 나눠준다. 하지만 방학식 때 담임이 저소득층 자녀들만 따로 남으라고 해, 바깥에 들고 나가면 금방 눈에 띄는 전지분유 등을 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는지 교육당국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탓에 심지어 몇몇 아이들은 받는 즉시 이를 버리고 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돕더라도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몇번이고 그 방식을 숙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여기에는 교사들의 신중함도 더없이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청와대의 대응을 기다리며**
도스토옙스키의 대작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보면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나 가난한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은 죽어도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인간의 속성은 본디 이처럼 이중적인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대불황기에 결식아동들의 점심지원비를 대폭 삭감해 놓고도 "뭐가 잘못된 거냐"고 큰소리 치는 관료들을 보면, 인간의 속성에 대한 실망을 넘어서 절망을 느끼게 된다.
서울시내 초등학생 가운데 밥을 굶는 아이들은 정녕 없단 말인가. 교육당국은 알량한 학교급식만으로 모든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인가. 학교를 책임지는 교육부 주장대로 "서울교육청 관할이지 우리 관할은 아니다"인가.
노무현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겨울방학때부터 결식아동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의 말을 '허언'으로 만든 이들은 누구인가. 청와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이런 사태가 발발했는지 조사라도 하고 있는가. 향후 청와대의 대응을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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