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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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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4>

피마주밭을 가꾸며 글을 읽다

안국 지하철역에서 북쪽 별궁길로 들어가면 헌법재판소 뒤에 면한 기와집 일단이 있다. 큰길에서 돌아앉은 골목길을 몇 번 꺾어 들면 뜻하지 않게 넓어진 마당이 전개되고 화분이 많이 나와 앉았다. 길 양쪽 굳게 닫힌 대문들 사이 골목길은 적막감과 밝은 햇빛이 언젠가 와보았던 듯한, 오랜 기억을 불러온다. 높은 건물 사이의 음습한 골목길과는 사뭇 다른 풍광이다. 막다른 골목길에는 누가 여기를 알고 찾아올까 싶은 세련된 한옥가게도 있다.

어느 집에서 뜯은 구들장 돌이 나와있고 양옥 건물 담장 아래 한뼘 폭의 좁고 긴 땅은 수십년째 피마주 나무가 자라는 당당한 '공원'이다. 미국 카멜시티에서 모든 집과 가게가 담벼락에 바짝 붙여서라도 대나무나 꽃으로 가꾼 풍경이 아름다웠는데 이곳의 피마주도 20여 그루가 일렬로 서서 담장을 가리고 있다.

<사진> 안국동 한옥 동네 속의 한뼘 공원 피마주밭과 송영각선생. 피마주 지팡이는 아주 가볍다. 사진 하지권.

받침대를 대서 곧고 크게 자라는 것이 누군가가 돌보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지난 봄 그 좁은 땅에 비료를 넣어주는 송영각씨(76)를 보았다. 맞은편 굽도리(재목을 더 써서 천장을 높게 지은 집) 한옥의 주인이기도 했다.

송씨의 70년된 안국동 집은 45평 대지에 방이 다섯 개 있는 전형적인 중산층 한옥이다. 한가운데 잘 가꾼 마당이 있는 ㄷ자형에 사랑방이 있고 두꺼운 대들보가 대청마루에서 육중한 지붕을 받치고 있다.

송선생은 부산고, 명지대 등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다 은퇴했다. 일생을 한옥에서 사는데 명륜동 살다가 40년전 '더 조용한 데 살자, 책도 보고 손자도 가르치고' 할 량이 났다. 한적하고 고전적 기분들고 보도블럭 깐 좋은 길에 차도 안 닿고 집에 쓴 재목이 좋은 이 집을 골라 지금까지 살았다.

'대들보가 이렇게 좋은 집이 드물었어요. 외관은 수수해서 도둑이 들어올려고 안 해요. 굽도리 집이라 대문보다 안채가 더 높아 통풍이 잘돼 기와가 안 상하니 비가 안 새니까 37년동안 지붕 안 고치고 살았는데 인젠 흙이 많이 내려와서 3년 전에 본격적으로 고쳤소.'

부인 김애경여사의 말은 더 자세한 살림살이를 보여준다.

'전에는 방 5개에 하루에 연탄 28개를 갈았는데 지금은 도시가스를 들여 난방합니다. 두꺼운 춘양목 대들보는 내가 닦아서 늘 반짝반짝하게 하고 이불호청 풀먹일 때 잣 서너알 갈아넣어서 잣풀먹여 햇빛에 널어 말리고 사랑방 창문의 방범 창틀도 내가 늘 닦아주었어요.'

그전엔 구멍가게들이 더러 있었는데 '마트'다 뭐다 들어서서 다 없어지고 시장은 트럭이 들어와 거기서 낚아먹고 골목길에 파 마늘등 채소를 다듬어서 파는 할머니가 있다. 이 동네 직장여성 주부들이 많이 이용한단다. 큰 시장은 일삼아 나간다.

'여기는 부자촌 오렌지 기풍이 있는게 아니고 사대부정신의 아류랄까 점잖은게 맘에 들어서 살기 좋았는데 아 이거 죽겠어요. 술집 음식점 생기면서 몇 년째 꽝꽝 고치는 소리 나고 차가 다니면서 우리 담벼락을 들이받고 지옥에서 사는 것 같애요. 술먹고 주정하는 사람 없는 신사동네에다 조용하구 고상한 데라 사는건데 이렇게 물을 흐려놓는게 무어예요.'

가까이에 청와대와 정부청사, 윤보선 전대통령의 집이 있는 이 동네는 그전엔 정치중심지면서 고풍이 창연하고 그래서 긍지있게 살았다. ''강력한 어떤 힘으로 그런 정신적인 것 보존하면 좋을 텐데'' 라고 송씨는 생각한다. 그래야 안국동 맛이 나고 조선시대 사대부 서민 행정관 벼슬아치들 모여서 어떻게 살았다는 냄새가 난다. 몇백년 된 집들은 헐지 말고 보수하여 살릴 것 살려두어야 원천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 높은 양옥빌라 지어서 20년 지나면 슬럼밖에 무어 되나. 이웃에 술집이 들어오고는 새벽 2시에 떠들며 지나가는 교양없는 남녀들 땜에 시달린다.

별궁 길은 본래 3미터 폭에 차도 못 다녔는데 1993년 헌법재판소가 건립될때 8미터폭 직선도로로 확장되었다. 큰 한옥 몇 채가 날라가고 원주민들은 떠나갔다. 윤 전대통령집은 차마 못 허물어 그 집에서 길 확장이 멈췄다. 배우 남정임이 살던 한옥은 양옥 3층집이 되고 옛날 정치깡패 이정재의 측근이 사들였던 한옥 3채도 있고 이 동네가 좋아 못 떠나는 인사들의 집이 아직 남아있다.

좁고 긴 아주까리(피마주)밭은 30여년전에 생겼다. '내 땅은 아니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나 여기다 무얼심어 가꾸면 어떻겠냐고 그 근처 파출소, 동회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다 찬성했어요. 내가 무슨 이득을 보려구 심는 것 아니고 인간은 푸른 것 떠나 살 수 없으니 산소 많이 발산시키는 이파리 넓은 피마주를 종로 5가에 가서 사다 심어보니 의외로 잘돼요. 아주까리 30그루에 버팀대를 받쳐 키가 크게 올렸어. 가을엔 아주까리잎 나물을 해먹으면 취나물보다 부드럽고 맛이 좋아요. 동네사람들이 달래서 배급하다가 아주까리 대로 낚시용 찌와 지팡이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송영각 선생(별명과 호가 돌배라고 했다. 부산고 제자들은 탁자 위에 돌배를 갖다 얹어놓곤 했다)의 책과 오래된 책상이 있는 사랑에서 이제 한없는 인문학 이야기가 시작됐다.

'낚시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부목이 수면 위에서 움직이는 것 보는거지요. 내가 낚시를 좋아해 찌를 이것 저것 만들어봤는데 아주까리대로 만든게 제일 성능이 좋아요. 그걸로 만들면 고기가 물에서 쑥 올라와 솟구치는 힘이 멋있고 볼만해요.'

그러다 등산을 시작했다. '도봉산 북한산 많이 다니는데 아주까리 지팡이 만들어 짚고 다녀보니 딴 지팡이의 3분지 1 무게에요. 하나도 짐스럽지 않고 견고합니다.'

그동안 걷어들인 아주까리나무에서 지팡이로 쓸 만한 대를 골라 반년을 말린다. 그래야 휘지 않는다. 그 뒤 대의 껍질을 벗기고 페퍼질로 10번을 다듬고 글쓰고 락카칠 10번해서 지팡이 하나씩 만드는 중이다. 쪽마루 한쪽에는 이렇게 만든 지팡이 10여대, 찌 한웅큼, 말리는 아주까리대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얗게 탈색된 지팡이에는 독일 시, 제갈량의 출사표, 이백의 강상음(江上吟), 촉도난, 두보의 '당태종 능을 다시 지나가면서'등을 썼다.

'70살 넘어 한시를 읽기 시작했어요. 한시를 여러 수 해석해서 지팡이를 만들어 산에 올라가 쉴 때 한구절 죽 읽고 나면 피로가 풀리고 또 걷지요. 오늘은 지팡이 A, 내일은 B, C를 번갈아 짚지요. 시를 번갈아 읽어야 되니까.'

시 이야기가 한없이 뻗어나간다.

'어떤 시를 쓸까 그건 내 기분 내키는 대로 해요. 그래서 지팡이 많이 가지구 있지요. 지팡이에는 롤링펜에 그 전용 잉크로 써야 글자가 덜 번져요. 그 펜과 독일제 잉크를 사다놓고 내가 옛날 중학생 때부터 미술에 소질있던 것 살려 이태백 얼굴도 그려놓구요. 그걸 쓴다고 내깐엔 수양좀 했죠.'

당시(唐詩)와 독일시 번역이 지금 중요한 일과가 됐다. 지난 4,5년 동안 소동파의 적벽부, 백거이의 비파행, 삼국지 서문 등 200여편을 번역했다. 시중에 나온 삼국지 번역에는 오류가 보통 많은게 아니라 한다. 책이 높이 쌓인 책꽂이 한쪽이 당시, 독일시 번역한 원고로 채워져 있고 잉크병이 옛 학문의 냄새를 풍기는 듯하다.

'아이들한테 정확한 우리말 번역의 정신 가지고 살라고 넘겨줄라고. 그 정신이 인생의 지침과 학문의 출발점이 되거든요. 어떤 서예 전시회 가니까 시가 나오는데 빠진 글자 틀린 글자 있는데도 버젓이 잘 쓴 척 하구. 서예는 뜻을 알고 감정을 갖고 써낸 글이라야 하는데 그냥 그리는 것 같아요. 서예가 변한 게 북촌 변한 것과 같애요. 빈깡통 같아요."

독일어로 쓴 지팡이도 있다. '우리 학교 다닐 때는 전후의 피폐하던 때라 독일작가 슈트롬의 낭만적 글이 참으로 위로가 되었습니다. 임멘제(웅덩이) 원문을 안 읽으면 대학생 아니라고 했지요. 그 단편에 나오는 시를 내가 번역해 놓았어요.'

송영각선생이 번역한 임멘제의 시 한편은 이러한데, 나는 책에서 읽은 것보다 더 감정이 짙게 느껴졌다.

오늘, 단지 오늘만은
저는 아주 아름답게 보이고 싶으네요
내일, 오호! 내일이면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말 것이니
단지 이 시간만큼이
그대는 나의 사랑이지오.
죽을지어다, 오호! 죽을지어다
저 혼자만이 그럴 운명이니까.

갖가지 꽃나무가 심어진 오래된 한옥 사랑방에서 들은 이야기는 내키는 대로 동서양의 고전을 섭렵하는 한 교양인의 세계였다. 대문밖에는 올봄에 심은 피마주가 많이 자랐다. 번역된 원고를 가지고 복사집 나들이 가는 한 점잖은 노신사를 이 근처에서 만난다면, 그분이 바로 송영각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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