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대단히 높다. 재작년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정치권이 문제를 제기하더니, 얼마 전에는 국정감사장에서 다시 문제가 되었다. 한나라당의 권철현 의원이 금성출판사에서 발행한 고등학교용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친북ㆍ반미ㆍ반재벌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다시금 한국사 교과서를 공격한 것이다.
한국사와 한국사 교육에 대하여 뜨거운 관심을 갖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그 관심의 표현이 대단히 자의적이고 사실을 왜곡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 권 의원은 34개 항에 달하는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지만, 이는 대부분 문맥을 잘못 읽었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이 교과서가 친북 입장에서 서술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교과서는 북한에 대해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평가된다. 예를 들면, 정부 수립에 관하여 우익 성향의 이승만 정부는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북한 정부는 민주개혁이란 이름 아래 일제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민중의 요구를 수용했다고 기술하여 친북적으로 서술했다고 비판하지만, 교과서는 분단 책임이 북한에도 있다고 분명히 기술하였다. 1948년 6월 회의에 민족주의자들이 빠지고 북한을 지지하는 정당, 단체만이 참가했다는 점과 북한이 정부수립의 명분을 쌓아가다 남쪽에 정부가 세워지자 곧바로 정부를 세웠다고 서술한 것은 분단에 북한의 책임이 있고, 북한이 정부 수립 기회를 노리고 있었음을 비판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교과서에서 북한에 대한 서술은 매우 중요하다. 아직 북한에 대한 연구 성과가 충분하지 않아 서술에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북한에 관한 서술은 객관적이되 통일 이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 점과 관련하여 최치원의 발해에 관한 서술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남북분단 상태를 후대에 어떻게 부를지 알 수 없지만, 발해와 신라가 대치하고 있던 시기를 많은 역사학들은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며, 한국사의 일부로 발해사를 가르친다. 그렇지만 신라말기의 지성(知性) 최치원은 발해를 다른 풍속을 가진 미개한 오랑캐, 깨끗하지 못한 모래라고 하면서 군자의 나라인 신라와 대비하였다. 그리고 발해 건국을 죄를 짓고 도망하여 몰래 나라 이름을 도둑질한 것으로 묘사했다. 발해가 신라의 윗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발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당(唐)의 처사에 감사하는 신라 신하로서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발해에 대한 이러한 적대적 서술이 오늘날 중국학자들에 의해 발해는 신라와 전혀 관계가 없는 국가였고, 따라서 발해사는 한국사가 될 수 없다는 논거로 사용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교과서의 내용과 집필자의 반론을 보면, 반미(反美)니 반재벌이니 하는 주장의 근거도 매우 박약하다. 친미니 반미니, 친재벌이니 반재벌이니 하는 것은 상대적인 문제이며, 평가자의 역사관과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설사 이 교과서가 기왕의 교과서보다 덜 친미적이거나 덜 친재벌적으로 쓰여졌다고 해서 그것이 큰 문제인가? 한국사 교과서는 친미와 친재벌 입장에서 써야 하는가?
한국사 교과서는 사실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권철현 의원이 지적한 것과는 정반대의 각도에서 말이다. 교과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성향이 너무 강하고, 지나치게 남성중심적이며, 노동에 대하여 편파적으로 서술하여 자본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고 균형 잡힌 교과서를 만드는 일은 학계의 과제로 제기되어 있다.
‘친북’이라는 표현은 아직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말이다. 친북은 곧 용공을 의미하며,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복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검정의 과정이나 내용에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표현을 교과서에 붙이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는 검정제로 발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검정의 주체와 검정제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검정은 교육인적자원부의 의뢰를 받아 교육과정평가원이 관장하며, 교수와 교사, 장학사 등으로 구성된 검정위원들이 담당한다. 그러므로 평가원과 검정위원 모두를 문제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근거 없는 주장은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되돌리자는 견해와 맥을 같이 한다. 한국사 교과서는 7차교육과정에서 한국근현대사를 검정으로 발행하기 전까지 국정으로 발행했고, 지금도 고등학교 1학년과 중학교에서 사용하는 ‘국사’ 교과서는 국정으로 발행하고 있다. 국정제는 10월유신의 산물이며, 단 한 종류의 교과서만을 발행하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제도이다. 그러므로 국정제를 폐지하고 검정제나 인정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전부터 학계에서 계속 제기되었다. 교육부도 이러한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시세의 흐름을 반영하여 ‘국사’ 교과서도 검정제로 전환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 다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문제 삼는 것은 검정제를 국정제로 되돌리려는, 그리하여 보수적인 지배층이 한국사교육의 내용을 장악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교과서 공격은 결국 정치적 의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검정제와 검정기관, 그리고 검정의 최종 책임자인 교육부를 공격함으로써 정권에 흠집을 내려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정략적 싸움에 한국사교과서를 이용하는 것이다. 교과서제도나 내용에 대하여 상이한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크게 보면 획일적인 틀을 유지하려는 집단과 다양한 교과서를 제공하려는 집단 사이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것이 더 민주적인 사고를 가진 집단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획일적으로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역사교육의 목표를 교과서에 담긴 내용을 암기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역사교육의 목표를 무엇으로 설정해야 하는가 하는 데 대하여 터키의 역사교육을 견인해 온 터키역사재단의 주장은 경청할만하다. 터키 역사재단은 능력있고 창조적이며, 활동적이고 책임감 있는 시민 양성을 역사교육의 목표로 설정하고, 구체적으로 학생중심주의의 입장에서 학생의 독립연구 능력을 향상시키고, 학생들이 다각적 방식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국사와 지역사 이외에 세계사도 중시하는 방식으로 역사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과 접근법은 보수주의자들이나 광신적 애국주의자들에게는 별 호응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광신적 애국주의자들은 편협하고 폭력적인 투사들만 만들어 결국 지적 정치적 생활을 독점하려 하며, 역사의식을 변화의 도구가 아니라 변화를 막으려는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전근대적 역사개념을 타파하고, 자연과 역사환경을 존중하고 공정하고 과학적이며 명예로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역사를 활용하는 것이 역사교육에 대한 민주적인 접근임을 강조한다.
역사는 당리당략이나 정파의 입장에 따라 가르칠 수 없고, 교과서를 그렇게 편찬해서도 안 된다.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완미(完美)한 교과서는 없다. 그러므로 현재로서 최선의 방법은 서로 다른 관점에 선 다양한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사가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다양한 교과서를 제공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이며, 민주주의 정신에 부합한다. 교과서 발행에 국가가 간여하기는 하지만, 그 간여의 정도는 교육과정의 편성 정도에 그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발행제의 측면에서 본다면, 현재의 국정제와 검정제는 점차 인정제와 자유발행제로 변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관의 차이와 서술의 상이함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는 객관적이되 미래 지향적으로, 그러면서도 역사를 배우거나 가르치는 사람의 서로 다른 역사관을 존중하면서 쓰여져야 한다. 자기의 관점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독단이고, 비민주적인 사고이며, 그러한 사고는 역사교육을 황폐화시키고 학생들을 획일적인 피동형 인간으로 육성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오히려 집필과 검정의 기준을 완화하여 좀더 다양한 교과서가 출현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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