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세의 노시인 이적요(박해일 분)와 패기 넘치는 30대의 젊은 소설가 서지우(김무열 분), 그리고 18살 고등학생 소녀 한은교(김고은 분)의 만남.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사건의 "순간은 하루보다도 더 크고, 그 하루는 일 년보다도 더 크다". 정지우 감독의 <은교>는 억겁의 세월보다도 더 큰 그러한 세 사람의 만남의 사건을 다룬다.
그 억겁의 세월 속에서 노인과 청년과 소녀는 서로 다르지 않다. 그들은 각각의 생명을 지닌 각각의 서로 다른 존재의 이미지들일 뿐이다. 그래서 문제는 억겁의 세월보다도 더 커다란 사건의 순간을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시와 소설과 영화는 사건의 순간을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사건의 노래요, 사건의 이야기요, 그리고 사건의 이미지들이다.
▲ 영화 <은교> ⓒ 정지우 필름 |
영화 <은교>에서 만남의 사건을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18살의 소녀는 여성이 되고, 70세의 노시인은 소설가가 된다. 그러나 30대의 패기 넘치는 소설가 서지우는 사건을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관습의 이데올로기에 찌들대로 찌들어 있는 그에게 세 사람의 만남은 사건이 아니라 단순한 사고일 뿐이다. 사고는 관습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게 너무나도 치명적이다. 그래서 소녀의 '여성되기'와 노인의 '시인되기'를 이루는 억겁의 세월보다도 더 커다란 사건 속에서, 사건을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서지우는 관습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치명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사고로 인한 당연한 결과이다.
영화 <은교>는 18살 소녀의 '여성되기'와 70세 노시인의 '소설가 되기'의 즐거움과 쾌락, 그리고 소녀와 노인의 '친구되기'와 '연인되기'의 아름다운 생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문제는 18살 소녀 은교가 아직 소녀이기 때문에 자신이 여성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반면에, 70세의 노시인 이적요는 단순한 노인이 아니라 항상 사건을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시인이기 때문에 억겁의 세월보다도 더 커다란 그 사건의 '순간'이 지니고 있는 생성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적요 시인이 몸이 늙어서 정신마저 늙어버린 평범한 노인이 아니라, 아침의 햇살과 풀잎의 이슬방울 그리고 허공에 선을 그으며 날아가는 새들의 이미지들을 모두 순간순간의 삶과 세상을 바꾸는 사건으로 받아들여 그것들을 이미지의 언어로 바꾸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적요 시인은 별이 다 똑같은 별이 아니라 서로가 다른 별일뿐만 아니라 하나의 별에도 무한의 이미지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앞에 나타난 소녀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하나의 소녀가 아니라 무한히 다양한 여성이 되어가고 있는 소녀이다. 그 소녀의 무한한 생성 앞에서 이적요 시인은 경건할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의 아름다움을 경탄한다. 그것이 사랑이고 우정이다. 이적요 시인은 은교의 무한한 생성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경탄하기 때문에 그 스스로 무한한 생성이 되고 생명의 아름다움이 된다. 그러나 소녀는 노인의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녀는 이적요 시인과 달리 스스로 생성하고 스스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것이 소녀의 '여성되기'이다.
II. 장편소설 <심장>과 단편소설 <은교>
▲ 운명적 만남과 디테일이 완성한 이정교의 집 ⓒ정지우 필름 |
영화 <은교>에서 소설가 서지우가 썼다는 <심장>이나 시인 이적요가 은교를 만나면서 쓴 소설 <은교>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하여 영화 관객들은 모른다. 그러나 관객들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장편소설 <심장>을 서지우가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지우는 은교에게 자신의 소설이 대중소설이기 때문에 그것을 읽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소설을 쓴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소설에 심장이 있고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적요는 18살 소녀 은교에게 소설 <심장>을 읽은 소감을 말해달라고 한다. 그녀가 소설 <심장>을 읽은 감동과 마찬가지로 그도 감동한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분명하다. 생산의 즐거움은 더불어 기뻐하는 것이지 부끄러워하거나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니다. 대중소설이든지 고급소설이든지 간에, 소설이나 문학은 단순 글쓰기의 재주가 아니라 심장과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의 것이기 때문이다.
서지우는 소설이나 시를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소설이나 시를 단순히 하나의 글재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중소설이나 고급소설이라는 말은 근대의 문학교육이 만든 허상의 이분법이다. 우리는 심장과 영혼이 있는 소설과 문학, 혹은 심장과 영혼이 없는 소설과 문학을 발견할 뿐이다. 문제는 심장과 영혼을 지닌 생명이다. 저 들판의 이름이 없는 꽃이나 온갖 과일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나무나 혹은 수많은 가지를 뻗어 그늘을 만들어주는 늙은 나무가 모두 각각의 생명인 것처럼 18살 소녀 한은교나 30대의 소설가 서지우나 70대의 노시인 이적요는 각각의 생명을 지니고 있는 각각의 서로 다른 이미지의 존재이다. 그 이미지의 존재가 의미를 갖는 것은 소설과 마찬가지로 그 이미지의 존재가 심장과 영혼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심장과 영혼은 몸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장편 소설 <심장>과 단편 소설 <은교>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 소설들이 모두 몸 과 더불어 두근거리는 '심장'에 관한 이야기요,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여성으로 생성되고 있는 은교의 몸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심장과 심장이 만나는 것, 그리고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것은 몸과 몸이 만나는 것처럼 친구가 되는 것이요, 또한 연인이 되는 것이다. 친구가 되는 것이나 연인이 되는 것은 몸과 몸이 만나는 것처럼 일대일의 관계이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진정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는 것이다.
18살 소녀 은교와 70세 노시인 아적요의 만남은 하나의 심장과 또 다른 심장의 만남이요, 하나의 영혼과 또 다른 영혼의 만남이다. 그것은 인간 그 자체로 구성된 언어의 교환으로 이루어진다. 18살 소녀 은교는 노시인 이적요가 이야기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 이승과 저승의 차이만큼이나 크다"라는 시적 언어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이적요는 은교의 "헐"이라는 다양하고 발랄한 시대적 생명의 언어를 받아들인다. 그들의 언어가 그들의 몸 자체일 때,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나 영혼과 영혼의 만남은 그것들이 소속하고 있는 그들의 몸을 생성시킨다. 그 생성은 은교의 심장과 이적요의 심장이 다르듯이 혹은 은교의 영혼과 이적요의 영혼이 다르듯이 소녀 은교의 몸을 여성의 몸으로 생성시키고, 노인 이적요의 몸을 청년 남성의 몸으로 생성시킨다.
여성의 몸이 '생명'을 잉태하는 생성의 몸이라면, 남성의 몸은 '세계'를 잉태하는 생성의 몸이다. 70세의 노시인은 은교를 만나면서 다시 태어나는 생성의 몸을 주체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은교>라는 소설을 쓴다. 그 소설 속에서 18살 소녀 은교는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적 생성의 몸이 된다. 그것은 아마도 은교가 대학에 들어가거나 혹은 이적요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노인의 마지막 친구이면서 연인이었던 은교에게 주는 선물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은교가 맞이하게 될 아름다운 여성되기의 순간을 근대적 관습의 이데올로기에 젖을 대로 젖어 있는 서지우가 훔쳐가 버렸다. 사건을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시인은 소녀의 몸이 여성의 몸이 되는 생성의 순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사물이나 존재의 다양한 이미지를 알지 못하고, 오직 사회적이거나 관습적으로 주어진 이름만으로 알고 있는 서지우는 생성의 순간을 알지 못한다. 그는 오직 섹스만을 알고 있지, 몸과 몸이 어우러지는 생성의 순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노시인 이적요는 분노한다. 몸의 아름다움, 몸의 생성, 그리고 은교의 '여성되기'를 단순히 섹스의 대상으로만 간주하여, 기계적인 섹스만을 하는 서지우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심장이 없고 영혼도 없이 오직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섹스를 하는 한은교에게 분노하는 것이다. 노시인의 분노는 서지우와 한은교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분노는 서지우를 그렇게 만든 자신의 동정심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며, 시와 소설을 단순히 영혼과 심장이 없는 상징과 은유로 해석하는 근대 문학교육과 문학제도의 권력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서지우는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마치 근대 자본주의의 청년들이 사랑이나 섹스를 심장이나 영혼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으로 간주하는 것과 똑같다. 그는 이적요가 자신을 따르고 보살펴준 '세경'으로 써 준 <심장>을 발표하면서 그 소설을 분명히 읽어보았을 것이고, 이적요의 서재에서 소설 <은교>를 읽으며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이적요의 '심장'을 알지 못하고, 소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은교의 영혼을 알지 못한다. 은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가 '공대생'이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교육과학기술부'나 '문화관광부'라는 이름이 암시하는 것처럼 근대의 문학교육과 문학제도가 문학이나 예술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학이나 과학으로 구성되어 있고, 삶의 문화와 예술을 단순한 자본의 관광으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지우에게 심장과 영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분명히 심장과 영혼이 있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심장과 영혼은 예술과 철학을 모두 과학으로 재단하는 대한민국 근대의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면서, 그리고 문학과 예술을 단순히 기념관과 시비로만 계산하는 문학제도와 문학권력에 빠지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는 장편소설 <심장>과 단편소설 <은교>를 심장과 영혼이 살아 있는 이미지의 생성으로 읽지 못하고 단순히 언어의 기교로만 읽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몸은 심장과 영혼이 없는 기계 덩어리의 감각만 있고, 그의 섹스는 기계적인 반복만 있을 뿐 심장과 영혼의 환희로 이루어진 생성의 사랑이 아니다.
III. 생성적 즐거움의 기억
은교가 떠난 노시인의 저택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은교를 만나기 전, 거울 앞에서 늙은 노인의 몸을 바라보는 이적요 시인의 고요함이 깃들어 있는 낡은 저택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은교와 이적요가 만나는 사건 이후로 생명의 빛이 들어오고, 노시인의 무한한 생성적 이미지의 언어와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은교의 순수한 생명의 이미지가 만드는 즐거운 환희의 집도 아니다. 그것은 죽음이 다가오는 어둠이요, 죽어가고 있는 생명이 없는 집이다. 그 집에 어느 날 문득 은교가 찾아온다. 은교가 장편소설 <심장>의 '심장'이 이적요의 심장이요, 단편소설 <은교>의 아름다운 영혼이 바로 이적요의 '영혼'이라는 것을 은교가 마침내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서지우에 대한 분노와 근대 문학교육과 문학제도에 대한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잘 가라, 은교야"라고 말하면서 편안하기 죽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적요는 마침내 은교가 아름다운 생성적인 여성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70세의 노인이 이제 갓 피어나는 소녀처럼 하나의 생명이듯이 죽음 또한 영영 이별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라 인간의 관습이나 언어로 이루어진 인간 중심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거대한 우주와 자연의 시각에서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을 생성시키는 새로운 탄생이다. 그 탄생은 소설가 이적요의 탄생일뿐만 아니라, 은교의 새로운 탄생이기도 하다. 이적요의 심장과 이적요의 영혼을 온전하게 자신의 심장과 영혼으로 받아들인 은교가 이적요의 장편소설 <심장>과 그의 단편소설 <은교>를 다시 찾아줄 것이 분명하고, 그러한 작업은 심장과 영혼이 사라져버린 근대 문학교육과 문학제도에 대한 싸움이기도 하다.
▲ 영화 <은교> 중 한 장면 ⓒ정지우 필름 |
소녀 한은교가 아닌, 여성 한은교의 사랑과 투쟁은 이적요와의 만남의 사건이 아름다운 생성적 즐거움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즐거움으로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안다. 사랑이 소유가 아니라 생성이고, 파괴적인 것들과의 투쟁이 분노나 적대감이 아니라 즐거움이라는 것을! 권력과 자본의 섹스가 아닌 우리 몸속에 있는 심장과 영혼의 울림이 있는 사랑, 그리고 문학과 예술과 지식을 관습의 이데올로기로 재단하려는 과학적 합리성의 기술과 기교로만 파악하려는 근대 문학제도와 교육제도에 대한 투쟁은 단지 영화 속의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은교의 몫만은 아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받은 것이 아니듯이, 나의 늙음 또한 나의 잘못으로 받은 것이 아니다"라는 이적요의 조용한 외침을 깨달음으로 받아들이는 영화 관객들과 이적요와 같은 노시인을 사랑했던 생성적 즐거움의 기억을 통하여 소녀에서 여성이 되는 수없이 많은 은교, 그리고 늙음이나 장애 등등으로 소외되어 있는 소수자들의 사랑과 투쟁이 근대의 교육과 제도가 잃어버린 심장과 영혼을 되찾게 해줄 것이다.
그래서 영화관 밖으로 나와 바라보는 대한민국과 이 세상은 단지 추함의 세계로만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이적요가 한은교를 만나는 사건처럼, 이 세상의 사건을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만든 정지우 감독과 그에게 노시인의 심장과 영혼을 불어넣어 준 소설가 박범신의 <은교>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이적요 시인과 같은 노시인과 만나 와인 한잔을 들고서 '뾰족한 연필의 슬픔'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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