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와 불만의 궤적**
지금까지는 세계화의 가장 중요한 기둥인 무역자유화와 자본자유화의 경제적 효과에 관한 이론적, 실증적인 논쟁들을 살펴보았다. 개방의 효과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들이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이득만을 역설하기 때문에, 어쩌면 막대를 반대로 구부리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역시 세계화가 성장을 당연히 도와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은 그 근거가 튼튼하지 않고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며 세계화의 효과도 각국이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곳에서 세계화와 자유화의 축복을 굳게 믿으며 교과서와 같은 주장들에 기초해서 얼마나 많은 개방정책들이 별다른 고민과 대책 혹은 생각과 분별없이 도입되고 있는지.
하지만 세계화가 가져다주는 효과는 경제성장에 미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때때로 피부로 느낄 수 있고 따라서 사람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끄는 내용은 스티글리츠가 책 제목에도 썼듯이 세계화에 대한 여러 가지 불만일 것이다. 세계화 혹은 자본과 무역의 자유화는 단지 자본과 가진 자를 위한 것이고 노동자와 같은 돈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더욱 악화시키며 선진국이 후진국을 착취하도록 도와줄 뿐이라는 주장은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IMF나 세계은행의 총회가 열릴 때마다 수만이 넘게 몰려드는 반세계화 시위대들은 저마다 뭔가 자본만을 위한 세계화의 악영향에 저항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노조에 속한 미국의 노동자들은 국제무역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다고 소리를 높이고 개도국의 활동가들은 초국적기업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거리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감정에 호소하며 무엇보다도 복잡한 성장효과보다도 당장 당신의 생활과 직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도 때로는, 세계화를 지지하는 주장만큼이나 과장된 면도 없지 않다. 세계화와 개방을 무조건 악으로 재단할 순 없다는 점에서 보다 합리적인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아래에서는 세계화의 분배적 효과를 중심으로 우선 선진국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바닥으로의 경주?**
필자는 2000년 워싱턴의 월드뱅크 총회장 주변을 둘러싼 반세계화 시위대 중의 하나였다. 미국의 시위는 웬지 겁나고 폭력적인 한국과는 무척 틀려서 기껏해야 노래부르고 행진하는 정도였고, 최루탄조차도 식초냄새가 나서 코웃음을 치게 만들었다. 한국 얘기를 하며 으쓱해졌지만 같이 갔던 터키 친구 녀석은 자기 나라에선 데모 도중에 최근까지도 총을 맞기도 했다며 얘기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재미있는 장면은 시위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극우파 단체가 함께 했다는 점이다. 물론 반세계화 시위대란 거북이 가면을 쓴 환경보호주의자부터 온통 검은 옷을 입고 때로는 괜히 경찰을 건드려서 흔히 폭력을 조장하는 무정부주의자까지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하긴 하지만, 극우파 그룹에게는 웬지 눈살이 찌푸려졌다. 더욱 재미있는 장면은 이들의 주장이 AFL-CIO 노조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로스 페로나 뷰캐넌 등을 지지하던 극우파그룹과 미국의 노조가 모두 중국의 WTO 가입이 가져다줄 악영향을 걱정하며 함께 보호무역을 외쳤던 것이다.
조금은 아이러니컬하지만 이는 바로 세계화에 대한 선진국 노동자들의 불만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쟁점이 되는 것은 이른바 “바닥을 향한 경주(race to the bottom)”라고 표현되는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 저하에 관한 우려인데, 세계화가 이러한 경향과 큰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70년대 중반 이후 많은 비숙련노동자의 임금저하로 인해 시간당 실질임금이 9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 하락해왔고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 사이의 임금격차가 크게 증가해 왔다. 1980년대 동안 대학을 졸업한 노동자들의 임금은 그래도 연간 2%씩 조금씩 상승했지만 고등학교만 졸업한 노동자들은 시간당 실질임금이 총 20%나 하락했던 것이다.(Henwood, 2003)
많은 노동자들은 분노했고 그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몇몇은 물론 주로 멕시코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저임금의 비숙련노동자들의 이민, 즉 노동자의 세계화를 탓하기도 했지만 이는 실증적인 근거는 별로 없었다. 역시 가장 유력한 주범으로 국제무역이나 해외투자 등 세계화의 영향이 지목되었다. 특히 미국의 무역적자가 심화된 80년대부터 임금격차가 더욱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이들을 더욱 자극하기도 했다.
그림. ***미국 노동자간의 임금격차**
자료: Cline, 1997
최근의 중국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와 같은 개도국에서 값싼 상품들이 밀려들어오니까 가격경쟁력이 없는 미국의 회사들은 문을 닫을 정도로 압박을 받게 되고, 당연히 이런 산업에서 일하는 기술도 별로 없는 노동자들의 처지는 악화되지 않겠는가. 반면 미국이 비교우위가 있는 첨단기술과 같은 부문은 수출이 증가해서 이 부문의 노동자들은 오히려 이득을 얻게 되니까 임금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헥셔-올린 모델이 예측하는 바로 그 효과였으며 이 솔깃한 주장이 미국의 노조들이 보호무역을 외치는 그럴 듯한 근거가 되어 왔다.
게다가 해외직접투자가 늘어나면서 미국 기업들이 외국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공장을 옮긴다면 이는 고스란히 미국노동자를 약화시킬 것이다. 멕시코로 공장을 옮긴 디트로이트의 자동차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심지어 직접 공장을 옮기지 않더라도, 옮길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이른바 “위협효과(threatening effects)”를 만들어내어 노동자에게는 아무래도 큰 타격이 되지 않겠는가. 최근에는 통신기술의 발전과 함께 미국회사들이 소비자를 상담하는 콜센터(call center)를 인도로 옮기는 통에, 이른바 아웃소싱(outsourcing)의 효과가 사회의 새로운 쟁점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이는 미국의 노동자에게는 심각한 불만을 던져주고 있지만 기업에게는 값싼 인도의 노동자를 활용하는 세계화의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물론 소비자들은 인도 노동자들의 나쁜 영어 발음을 참아야 하겠지만.
***국제무역 vs. 기술변화**
그러나 일견 명백해 보이는 이러한 주장도 자세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경제학자들은 이미 국제무역이 미국 등 선진국의 임금격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여오고 있으며 위협효과를 포함한 FDI가 미치는 효과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심과 논쟁이 불붙고 있다.
국제무역이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먼저 노동경제학자들이 이슈를 제기했다. 버만 등의 고전적인 논문은 화이트/블루 칼라 노동자의 비중 변화를 산업간의 변화와 산업내의 변화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만약 국제무역이 중요하다면 노동자의 비중의 변화에 산업간의 변화가 더욱 중요할 것이었지만, 그들은 동일 산업내의 변화가 7-80%나 될 정도로 중요함을 발견하여 세간의 우려와는 달리 산업자체에 미치는 무역의 효과는 작다고 보고했다. 다른 비슷한 연구들도 이러한 결과를 대체적으로 지지해 주었다.(Berman, Bound and Griliches, 1995)
사실 스톨퍼-사무엘슨 정리가 맞다면 후진국에서 일하는 노동집약적 부문 노동자의 상대적 임금은 증가하고 후진국의 소득분배는 완화되어야 한다. 또한, 헥셔-올린 모델이 맞다면 선진국의 숙련노동집약적인 부문의 고용이 경제 전체에서 더욱 커져야 하고 비숙련노동을 사용한 수입품이 싸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변화는 별로 그렇지 않아서 이미 국제무역의 영향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이 힘을 얻은 바 있으며 이는 경제학자들로 하여금 모델 자체의 한계와 임금격차에 관해서도 다른 중요한 요인들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었다.
물론 노동경제학자나 국제무역을 전공한 학자들 사이에도 국제무역의 효과가 얼마나 큰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존재한다. 리머 등은 국제무역을 무시할 수 없으며 다른 노동경제학자들은 그 효과도 흔히 제기되는 주장보다는 클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렌스나 크루그만 등 국제무역 전문가들은 대부분 무역의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으며 임금격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기술적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크루그만은, 비록 미국의 제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0년대 이후 계속 하락하고 있지만, 미국과 후진국과의 무역비중은 선진국과에 비해 아직 낮다는 것을 지적하고, “꼬리가 개를 흔들 수 없다(tail can't wag the dog)”며 무역적자로 제조업의 하락 그리고 임금격차를 설명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크루그만은 페로와 같은 보호무역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이다.(Krugman, 1995)
이 논쟁에서 가장 유명한 연구는 <이코노미스트(2001. 9. 29)>에 인용되기도 한 클라인의 1997년 연구일 것이다.(Cline, 1997) 그는 무역과 소득 분배 균형 모델(trade and incomd distribution model)이라 불리는 경제전체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일반균형모델을 고안하여 1973년에서 1993년 기간 동안 임금격차의 변동원인을 측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임금격차가 균등화되는 요인과 불균등하게 되는 요인이 존재하는데 먼저 균등화되는 요인은 역시 수련노동자의 상대적 공급이 증가하는 것이고 격차를 확대시키는 요인으로는 무역, 노조의 약화, 숙련편향적 기술변화(skill-biased technological change) 등을 들었다.
현실이 보여준대로 역시 균등화 요인보다는 격차가 확대되는 요인이 더욱 강력하지만, 문제는 교통통신비용의 하락, 자유화 그리고 등을 포함하는 국제무역이 임금격차에 미치는 영향은 약 6% 포인트로 기술변화에 비해 겨우 1/5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웃소싱과 이민을 포함해도 겨우 9%.에 불과해서 세계화는 다른 요인들에 비하면 게임이 되지 않아 보였다. 즉 미국의 임금격차와 소득분배의 악화의 주요한 원인은 세계화가 아니라 기술혁신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조는 적을 잘못 골랐으며, 세계화 대신 컴퓨터에 반대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이 또한 우스운 일이긴 하겠지만. 이러한 경제학자들의 주장은 국제무역 지지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세계화를 지지하는 든든한 우군이 되었다.
***비판과 우려**
하지만 클라인의 연구에조차도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기술변화만큼이나 중요하며, 탈노조화나 최저임금의 저하 등도 노동자의 협상력을 약화시키는 무역이나 자본이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의 연구에서도 탈노조화, 최저임금 저하와 무역 효과들을 모두 합치면 기술변화의 1/2 가량으로 높아진다. 최근에는 최종재의 무역효과만이 아니라, 중간재의 무역효과와 대체효과를 고려한 주장들도 나타나고 있다. 즉 중간재나 원료의 수입으로 인해 비숙련노동자를 대체하기 더욱 쉬울 것이므로, 직접적으로 국제무역과 관련이 없는 부문에서도 비숙련노동자가 어려움에 빠져서 전반적으로 숙련/비숙련 노동자간의 격차는 더욱 심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쾨벨 등은 독일의 경우를 들어서, 이러한 효과까지 고려하면 국제무역이 임금격차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클 것임을 보여준 바 있다.(Koebel, 1998)
비판가들은, 더욱 중요하게는, 기술변화 자체도 국제무역이나 세계화와 중요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이 논쟁에서 가장 왼쪽의 극단적인 입장에 서 있다고 이야기되는 우드는 후진국으로부터의 수입 자체가 선진국 내부의 숙련편향적 기술혁신을 강제한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선진국 기업들은 무역으로 인한 경쟁 속에서 점점 더 비숙련노동의 수요를 줄이는 “보호적 혁신(defensive innovation)”을 추구하고, 이러한 가정과 승수효과를 고려하면 선-후진국간의(north-south) 무역의 효과가 임금격차를 거의 모두 설명할 수도 있다는 놀라운 결과를 제시하기도 했다.(Wood, 1994)
여전히 논쟁이 지속되고 있긴 하지만 다른 경제학의 논쟁처럼 좀처럼 합의점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발전된 계량적 기법을 사용한 연구들은 대부분 무역보다는 기술의 영향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국제무역의 전문가인 버클리 대학의 교수 해리슨은 많은 논의들을 검토한 이후, 역시 기술이 더욱 중요하지만 국제무역이 임금격차에 미치는 효과도 클라인의 보수적인 추정치보다는 높은 20% 정도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그녀는 최근 중국의 노동집약적 재화의 수출증가로 이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라 생각한다.
언제나 그렇듯 진실은 저 너머(out there)가 아니라 양 극단의 중간 쯤(in between)에 있는 것일까. 아무튼 국제무역과 세계화의 영향을 임금격차와 소득불평등의 주범으로 주장하며 보호무역을 외치는 감정적인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효과를 애써 과소평가하고 무시해 버리는 것도 문제가 있을 것이다.
사실, 기술혁신과 숙련의 미스매치(mismatch)가 임금격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이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 어떠한 숙련이 필요한지 정말로 높은 숙련이 점점 많이 요구되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때로는 스캐너 등 자동화로 인해 캐쉬어(cashier)에게 숙련은 정작 더 필요없어지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미국에서 나타난 임금격차의 확대에는 기술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정치경제적 변화, 특히 레이건 정부 이후 나타난 노조에 대한 공격과 생산조직의 변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독일이나 일본에 비해 미국과 영국이 임금격차가 가장 심각하게 나타난 것을 볼 때, 역시 임금격차도 노동시장의 제도나 무엇보다도 노사간의 권력관계에 큰 영향을 받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권력: 위협효과와 협상력**
세계화의 영향이 비숙련노동자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국제무역과 투자가 진전되어 뭐든 외국에서 사오거나 생산할 수 있다면 자본가들은 약간의 임금상승도 허용하지 않고 모든 노동자들에 대해서 더욱 빡빡하게 굴지도 모른다. 로드릭 등 많은 이들은 세계화의 진전이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협상력(bargaining power)”을 약화시키고 전후 확립되었던 노자간의 협조적인 관계와 안정적인 협상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해외직접투자 등으로 인한 공장 폐쇄와 이전, 그리고 아웃소싱 등이 노동자를 얼마나 약화시킬 것인가 생각해보라. 중요한 점은, 실제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 가능성만으로 자본가들이 노동자에 대해 현실에서 권력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위협효과(threat effect)”라고 흔히 불리며 최근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앞서 본 연구들이 주로 노동자간의 격차를 주목하는 데 비해 위협효과와 관련된 연구들은 보다 근본적인 갈등인 자본가-노동자 간의 협상력을 주목한다. 하긴 원래의 헥셔-올린 모델도 자본집약적/노동집약적 재화의 차이를 강조했으므로 이렇게 자본과 노동간의 소득분배에 더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이론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많은 학자들은 이론적인 차원에서 게임이론 등을 사용하여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협상에 관한 모델을 제시한 바 있다. 복잡한 수식은 생략하고 이들의 모델을 설명하자면,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서로를 필요로 하며 자신의 몫을 극대화하려 하지만 역시 외부의 선택가능성이 더 많아지면 협상력이 강해져서 상대로부터 더 많이 양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본가의 경우, 세계화의 진전으로 인해 생산의 국제화가 가능하다면, 공장이전이나 폐쇄와 같은 위협을 사용하여 노동자의 임금인하와 같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 양쪽 모두 비대칭적 정보를 가지고 서로 잔머리를 굴려서 협상에 임해서 균형을 찾아내지만, 세계화는 공장이전과 같은 위협을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어 자본가의 협상력을 강화시켜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델은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의 FDI 뿐 아니라 선진국 상호간의 양방향 FDI의 경우에도 확장될 수 있으며, 이 경우 결론은 역시 FDI가 없는 경우에 비해 균형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낮아지게 된다.
역시 세계를 맘껏 휘젓고 다니는 자본에 비해 발이 달려서 한 곳에 묶인 노동은 상대적으로 세계화의 피해자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동자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우울한 결론이다. 과연 실제로 이러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을까. 80년대 이후 해외직접투자와 다국적기업의 생산의 세계화가 점진적으로 성장한 미국에서는 노동자에 미치는 이러한 위협효과에 대해서도 관심이 커지고 있다. 작업장 수준의 위협효과가 얼마나 큰가를 계량적으로 보이는 것은 데이터 등의 문제로 인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몇몇 연구들은 서베이에 기초한 구체적인 조사를 수행하기도 했다.
***현실을 들여다보기**
그 중 가장 유명한 브론펜브레너의 연구는, 1993년에서 1995년 동안의 기간에 미국의 기업들이 노동자들의 노조조직화에 대해 공장폐쇄와 관련된 위협을 광범위하게 사용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노조를 결성하고 인증선거(certification election)를 치르는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약 50%의 고용주들이 공장 폐쇄와 명시적, 암시적으로 관련된 여러 가지 위협을 하였음을 발견했다.(Bronfenbrenner, 1997) 미국의 경우 공장폐쇄와 관련된 명시적 위협은 불법이었지만 고용주들은 때로는 개인적으로, 때로는 심지어 문서화된 위협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멕시코행 주소를 붙인 설비를 공장에 늘어놓는다든가 미국의 공장에서 멕시코로 화살표가 그려진 북미지도를 걸어놓는다든가 하는 온갖 묵시적인 위협을 행했다고 보고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제조업, 통신업 등 이동성이 높은 산업(mobile industry)의 경우가 공장폐쇄 위협의 빈도가 62%로 의료나 교육과 같은 서비스업과 같이 이동성이 낮은 산업의 36%에 비해 위협의 빈도가 훨씬 높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협은 정말로 효과가 있어서 위협이 있는 경우 노조 인증을 위한 선거에서 노조가 이긴 확률이 크게 낮았고 특히 문서로 위협이 있는 경우 그 확률이 더욱 낮았다. 또한 멕시코나 아시아 등에 공장이 있는 기업에서 위협의 효과가 더욱 컸고 특히 외국의 초국적기업의 작업장에서 위협이 더욱 자주 나타났다.
이후 그녀는 미 정부의 무역적자 조사위원회(the U.S. Trade Deficit Review Commissions)의 요청에 의해 1998-99년을 대상으로 비슷한 연구를 수행했는데 역시 이전의 연구와 동일한 결과를 얻었으며, 이동성이 높은 산업의 위협이 68%로 더욱 높아졌음을 보고했다. 이에 따라 그녀는 세계화와 관련된 공장폐쇄의 위협이 노조의 조직을 가로막고 이는 노동불안과 노동조건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Bronfenbrenner, 2000)
예를 들어, 플리스 의류를 생산하는 버지니아와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털텍스(Tultex)사에서는 1994년 노동자들이 공장폐쇄의 협박 속에서도 힘겹게 노조를 설립하여 90년대 노조운동의 최고의 승리라고 표현되었지만, 2000년 이 기업은 노조가 설립된 모든 공장을 폐쇄하고 시설을 멕시코와 자메이카로 옮겼으며 2600명의 노조원이 직업을 잃고 말았다. 2000년 텍사스의 잭슨빌에서는 38년 만에 처음으로 월마트의 정육부문(meat cutters) 노동자들이 노조를 설립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러한 노력이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자, 몇 달 후 월마트는 정육부문을 폐쇄하고 미리 가공된 정육(prepackaged meat)을 사용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자본가들은 세계화를 배경으로 “저항하라, 그렇다면 폐쇄하고 떠나겠다”라는 식으로 노동자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실태조사는 현실적으로 자본가가 세계화를 배경으로 협상력을 높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세계화로 인한 위협도 각국의 노조의 힘이나 노동시장의 제도에 따라 서로 상이할 것이다. 아직은 OECD 내에서는 세계화가 노동자의 힘을 약화시키고 각국의 노동시장을 동질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같지는 않다는 보고도 제시되므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연구들**
사실 세계화는 국제무역과 직접투자 외에도 무척 다양한 형태를 띠고 나타나며 이 모든 형태들이 노동자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최근에 와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는 세계화의 형태는 다국적기업이 그들의 생산을 해외에 하청을 주는 아웃소싱이다. 미국의 제조업의 아웃소싱은 1993년에 여전히 10% 미만이지만, 1974년에서 1993년 기간 동안 2배로 증가하였으며 유럽 등 다른 선진국들도 이와 유사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피엔스트라 등은 기술의 효과도 혼재되어 있긴 하지만, 아웃소싱이 늘어나는 기간 동안, 생산직 노동자의 임금은 크게 감소하였고 자본가가 가져가는 이윤몫은 상승했음을 지적한다.(Feenstra and Hanson, 1997) 또한 이들의 다른 연구는 아웃소싱이 미국내의 비숙련노동자 수요 감소를 30-50%까지 설명함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Feenstra and Hanson, 1996) 이러한 변화는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아웃소싱은 역시 선진국의 비숙련노동자들에게 상당한 악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한편 다른 연구들은 노동수요함수가 임금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탄력성(elasticity)의 변화를 살펴보기도 한다. 세계화와 자본이동이 진전되면 아무래도 자본가들은 이전에 비해서는 조금만 임금이 올라도 노동자를 덜 고용하려 할 것이고 이는 노동수요의 탄력성을 더욱 높여줄 것이다. 실제로, 슬로터는 1960년에서 1990년까지 미국의 경우 생산직노동자에 대한 노동수요의 탄력성이 꾸준히 증가해왔음을 보여준다. 특히, 미국 다국적기업의 자산, 해외지사의 고용, 아웃소싱 등 다양한 세계화 변수를 추가해서 확인해본 결과, 역시 아웃소싱이 그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발견했다.(Slaughter, 1997)
하지만, 재미있게도 시간을 독립적인 변수로 추가하자 아웃소싱의 통계적 유의성이 사라져 혼합된 결과(mixed result)를 얻었고 시간적 변화 자체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고한다. 이는 그도 스스로 지적하듯, 실제로 나타난 아웃소싱이나 무역보다, 그것이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커져 왔다는 사실 자체가 위협효과와 노동수요의 민감성을 심화시켰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기술의 위협효과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즉 세계화의 진전과 함께 무역이나 기술로 인한 위협의 가능성이 커지고 이것이 노동수요함수의 임금탄력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결과가 프랑스 등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하며 특히 국제무역이 큰 산업에서 더욱 뚜렷하다고 보고한다. 결국, 공장이전의 ‘가능성’이 협상력에 미치는 위협효과는 수량적 연구로 명확하게 살펴보기가 쉽지는 않지만 분명 현실에 존재하는 듯 하며, 보다 심층적인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남 일은 아닌**
이런 얘기들은 주로 미국 등 선진국의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후진국의 경우도 직접투자를 더욱 많이 받아들이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처지가 악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 경제발전 내내 FDI의 역할이 크지 않았지만, 각종 규제완화와 노동권의 억압 등 FDI 유인을 위한 최근의 여러 정책들은 이런 우려를 더욱 크게 불러일으키게 될지도 모른다. 외국인의 국내 직접투자는 1999년 이후 하락세에 있지만 경제위기 이후 개방과 함께 위기 이전에 비해서는 급등하였고 국내투자가 정체되는 상황에서 정부는 외국인의 투자에 목을 매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는 FDI 유출의 효과가 더욱 주목을 끌고 있는 듯 하다. 실제로 2003년 한국인의 중국 등 해외 투자는 35억달러로 전년보다 16% 늘었고 2004년 1분기에만 10억 달러가 나갔다. 그 가운데 중소기업의 해외 투자가 6억 달러나 된다. 2004 상반기의 해외 직접투자는 35억 달러로 작년 같은 기간의 66% 증가했고, 중국에 대한 FDI 액수에서는 홍콩 등 중국 자본을 제외하면 일본이나 미국보다도 많은 1위를 기록했다. 이제 한국에서도 공장을 중국 등으로 이전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공장의 노동자들은 더욱 약화될 지도 모르며 실제로 몇몇 다국적기업들은 공장폐쇄로 노동자의 요구를 박살내기도 하지 않는가. 이제 세계화가 선진국 노동자에 미치는 영향과 국내산업의 공동화가 우리에게도 더이상 남 일만은 아닌 것이다.
물론, 임금이 높아지고 원체 사업하기가 힘드니까 공장을 임금이 더 낮은 나라로 옮긴다고들 하는 목소리는 이해할 만 하다. 하지만 어떻든 중국같은 후진국과 임금을 경쟁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대답은 중국이 쫓아오는 만큼 산업구조의 사다리를 더욱더 높이 타고 올라가고 생산성으로 승부를 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뭔가 기술이나 교육 등에 기초해서 생산성을 높이는 전략을 사용해야 할 텐데, 문제는 위협효과와 노사관계의 악화가 생산성 향상을 오히려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노동자들이 약해지면 더 적게 주고 더 많이 일을 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역시 노동자 스스로의 숙련향상과 협조적인 노사관계가 필수적이지 않은가. 최근 작업장의 교대근무제의 전환을 통해 노동시간을 줄이고 노동자에 대한 교육을 향상시켜 생산성이 눈부시게 높아진 유한 킴벌리의 성공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서는 역시 공교육의 향상이나 기술훈련에 대한 정부의 지원 등, 혁신을 자극할 수 있는 여러 정책적 노력들이 필수적이다. 실제로 생산적인 FDI는 단순한 저임금이나 낮은 세금보다는 노동자들의 교육수준이나 사회의 여러 인프라스트럭처 등에 더욱 매력을 느끼기 마련이며, 최근 회자되는 이른바 산업 클러스터(industrial cluster)도 이렇게 혁신과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핵심은, 나가는 공장을 잡긴 쉽지 않겠지만, 저임금이 아니라 생산성 향상에 기초해서 새로운 경쟁력을 개발하고 더욱 생산적인 외국투자를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FDI의 유출과 공장이전의 가능성은 정작 그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노동자에게 부분적으로 나쁜 영향을 준다고 무조건 FDI를 반대하거나 보호무역을 외치는 것 또한 정당화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직접투자의 유입이나 국제무역이 소비자와 경제성장에 미치는 이득 등 다양한 효과들을 모두 고려하는 균형잡힌 시각이 아닐까. 실제로 직접투자의의 유출이 국민경제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중국에 대한 투자증가로 산업공동화를 걱정하던 일본의 경우 요즘은 일본기업의 중국지사들이 일본의 자본재를 더욱 많이 수입하기 때문에 성장하는 중국시장으로의 수출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한 때 위협이었던 중국이 이제 시장이요 기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언제까지 중국이 시장이 될 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최근 대중국 수출이 급증하고 있는 한국에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효과들을 모두 고려해야, 직접투자에 대한 과도한 환영이나 근거가 희박한 우려 모두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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