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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촌' 없이 서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유경의 '문화산책']<20> 서촌 3 - 권력과 예술 사이, 송석원 미스터리

인왕산자락 청운동-옥인동-필운동 일대는 서울에서 손꼽히는 봄철 꽃구경의 명소였다. 지금은 집들에 가려 안보이지만, 웅장한 바위와 계곡에 흐르는 물, 살구꽃 복사꽃 버들이 어우러진 풍취는 글과 그림 글씨 등 문화적 역량이 응집된 예술을 이끌어냈다.

▲ 2012년 입춘 무렵 잔설이 남아 있는 인왕산 풍경 ⓒ이순희

안평대군이 꿈에 본 풍경을 안견이 그림으로 구현해낸 '몽유도원도'의 실제 배경이 이곳이었다 한다. 연산군이 봄날의 연회를 벌인 탕춘대도 이 부근 세검정지역이다. 정조도 인왕산에 올랐다. 그는 인왕산의 기세도 살피면서 '필운의 꽃 버들에 끌려 돌아가길 잊네' 라고 했다.

하지만 정조가 본 것은 꽃구경에 취해 몰려다니며 시 짓기에 열중하는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정조는 그 와중에 혼자 집안에 틀어박혀 글 읽는 사람을 눈여겨보고 어떤 조치를 취하리라고 시에 쓴다.

'송석원시사(詩社), 혹은 옥계시사'는 그런 정조의 시대에 출현했다. 서촌의 중요한 구성원이던 중인계층 지식인들의 모임으로 1786년 시작된 이 문예운동의 중심에 송석원이 있다. 그룹의 리더 천수경의 옥인동 집 이름이 송석원이고 이곳이 중요 모임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2011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웃대(서촌) 중인전'은 서촌사는 중인들의 존재와 당대 예술가들의 창작 시서화를 집중적으로 공개한 자리였다. 송석원시사의 일원이던 장혼의 시는 '사립문에 꽃 그림자 드리운 마을 고요한 한낮'을 말하는 섬세한 정감이다.

김홍도, 이인문, 임득명, 정선 등 여러 화가들 그림에는 점점이 꽃 더미가 묻어나는 산속 푸른 실버들이 날리고 바위의 웅장함과 계곡의 경치가 나온다. 야밤 휘영청 한 달빛 아래 갓 쓰고 흰 두루마기 입고 있는 남자들의 정취가 드러난다. 비 맞은 숲의 아름다움이 여러 번 강조된다. 비 온 뒤 개여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 숲이고, 비 갠 뒤 찬란한 햇살비치는 풍경을 담는다.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송석원시사가 열리는 장면을 저마다의 구도와 감성에 따라 달리 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특별한 흥미를 갖게 하는 문화사적 사건이랄 수 있다.

▲ 이인문이 그린 '송석원시사 아회도'. 송석원 글씨가 절벽바위 옆에 표시돼 있다. ⓒ개인소장

경치에만 몰입한 것은 아니었다. 정래교가 쓴 시 '서울 구석에서 머리 숙이고 살며 아전 노릇하기가 너무나 힘들어라'처럼 같은 풍경을 두고도 실존의 문제를 다룬 시가 나온다. 그는 '짐을 잔뜩 진 소가 길 가기 겁내다가 채찍 맞는 것 같은' 생활 속에 좋은 경치를 찾는 것에서 비로소 한순간의 위로를 얻는다.

거기에는 가랑비 내리는 아침 말 타고 달리는 서정도 곁든다. 물가에 와 '비로소 입을 벌리고 웃고, 옷자락 헤치고 길게 휘파람 불며 세상사를 생각한다'. 실존을 생각하는 그의 좌절에서 근대 프로페셔널의 감각이 느껴지며 중인계층의 전문성과 부르주아적인 취향도 엿보인다.

송석원시사의 구성원 10여 명은 대부분 30대 나이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작품을 활자로 찍어 남기고, '백전'이라는 시경연대회를 개최해 사회적 성격을 가미했다. 치밀한 사고력의 인물인듯한 장혼이 정조의 규장각 편찬사업에 참여하여 교정을 본 책은 모두 선본(오자가 없는 책)이었다고 한다. 선본(善本)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문화적 역량인지 아는 사람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 정조 때 역관(譯官)이자 대나무 그림도 잘 그린 임희지도 그 일원이었다.

▲ 김정희가 예서로 쓴 바위 글씨 송석원(松石園). 1950년대 김영상의 촬영으로 남은 유일한 근접 사진이다. 2004년 역사박물관 바위 글씨전에도 소개됐다. ⓒ김영상

1817년에는 통의동 백송(白松)이 있는 동네 살던 김정희가 5월쯤(음력 4월) 천수경의 회갑을 기념하는 시사에 와서 예서로 쓴 '송석원(松石園)' 글자를 바위에 남겼다. 이 사실은 오늘날 송석원을 되살리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다.

송석원시사는 30여 년이나 지속되었다. 흥선대원군이며 여러 선비들이 찾아왔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이를 계승한 시모임이 나왔지만 한말(韓末)이 되면서는 100여 년의 기풍도 사그라졌다. 천수경의 집터 송석원은 그새 김수항, 민태호를 거쳐 윤덕영 소유가 되었다.

▲ 송석원 별장의 마지막 주인 윤덕영을 찍은 사진에는 위쪽 바위에 김정희가 쓴 오래된 글씨 송석원과 윤용구가 갓 쓴 벽수산장 글씨가 나란히 보인다. ⓒ화봉 책 박물관

김학진이 쓴 '일양정기략(一陽亭記略)'에는 송석원의 주인이 바뀌는 이야기가 자세하다. 안동 김 씨네가 송석원 부근에서 여러대를 이어 살다가 민 황후의 일족 민규호가 병에 좋은 물을 먹기 위해 와서 살게 돼 주인이 바뀌었다. 그 뒤로는 순종비 윤 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이 송석원의 마지막 주인이 되었다. 모두 왕비 집안의 일족임을 내세워 좋은 터를 지니고 대단한 권력을 행사했다는 공통점이 달라진 시대를 대변한다. 중인계층의 다양한 개성이 결집되는 데서 떠나 권력자 개인공간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1913년에는 일본 총독 마사다케 일당도 송석원, 윤덕영 자작 별장에 왔다. 점심을 먹고 한일의 시인, 서예가들과 골동 서화까지 점검하고(관람했단다) 일양정(과거의 청휘각)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문화재 전문 한 블로거가 찾아낸 사실이다. 아직 윤덕영의 서양식 벽수산장은 지어지기 전이었다.

▲ 이용민 감독의 1956년 영화 <서울의 휴일>에 주인공(양미희) 넘어 배경으로 보이는 옥인동 송석원 벽수산장과 주변의 주택들. 북악산 능선을 배경으로 한 건물 오른쪽으로 돌출된 첨탑이 보이고 측면에는 정원에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다. 당시의 건물은 언커크(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가 사용 중인 때다. ⓒ정인엽

윤덕영이 인수한 송석원은 옥인동 47번지 일대 3000평의 터에(어떤 자료는 9000평이라고 한다) 있었다. 1914년부터 10여 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프랑스공사 민영찬이 파리에서 가져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독일인이 감독해 지은 222평의 저택 벽수산장과 한옥 등 14동의 건물군이 들어섰다. 송석원 산장은 서울 최고의 호화주택으로 당시 신문에도 여러 번 기록되었다. 정문을 돌기둥으로 세웠기에 서촌 사람들은 현대에까지 이 집을 '돌문 안 뾰족집'이라고 불렀다.

윤덕영 사후 1941-1945년간의 태평양전쟁 중 이 집은 일본 미쓰이 재벌이 점거했다. 해방되면서는 덕수병원이 들어 있다가 6.25가 나자 '조선인민공화국 청사'가 되었다. 그 후 유엔군장교 숙소를 거쳐 언커크(UNCURK,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가 썼는데 1966년 집수리 중 불이 나 타버렸다. 1973년 철거되기까지 지은 지 불과 50-60년도 못돼 그림자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 옥인동 주택가에 남은 송석원 정문의 돌기둥 2개. 하나는 땅속 깊이 묻힌 듯하고 낙서가 있는 기둥 위에는 보안등이 박혀있다. 다른 하나는 아예 집의 벽재로 쓰였다. ⓒ이순희

송석원의 흔적으로는 정문 문설주 돌기둥 3기가 옥인동 한 빌라의 벽과 길에 남아 있다. 건축가 '오월의 세상이야기' 블로거가 처음 밝혀낸 사실이다. 이 돌문에서부터 벽수산장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50-100미터 정도로 보인다.

일양정에 이어 벽수산장마저 화재로 폐허가 된 후 이 터에 남아 있던 난간석 5,6개와 둥근 테이블 같은 돌이 근접한데 있던 윤덕영 사위의 양옥집으로 옮겨졌다. 후일 화가 박노수 씨가 이 집에서 거주하며 테이블 돌에 당초문과 사슴이 뛰어노는 그림을 넣어 새긴 것이 남았다. 야트막한 난간석 돌은 가운데가 잘록한데 아랫부분이 더 큰 모래시계 모양에 하얗고 세련돼 보인다.

언덕 위 별장자리는 옥인동에서 가장 터가 넓고 고급인 주택들이 밀집한 주택가가 되었다. 주민들은 이 앞으로 난 넒은 길을 '엉겅크(언커크의 순화된 발음) 길'이라고 불렀다.

▲ 박노수 미술관 정원의 돌 테이블과 의자로 놓인 송석원 터 난간석. 박노수 화백이 여기에 당초문과 사슴을 조각했다. 올 가을 미술관이 개관하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순희

이 동네 사는 동양화가 이영복 씨는 "이 집이 불나기 전까지 송석원 프랑스식 저택은 세검정으로 나가는 자하문(창의문) 고갯길에서 하얗게 아주 잘 보였다. 언덕 위에 있어 안국동에서도 그 집이 보였다. 그런데도 가까이 가보거나 그림 그릴 생각은 안 난 게 그 당시 언커크란 유엔기구가 있는 건물이라 어딘지 낯설어서였던 듯하다'고 했다.

1956년 이용민 감독의 영화 <서울의 휴일>에 주인공이 사는 동네 배경으로 이 저택 외관이 여러 번 등장한다. 수표교, 석조전 동관 서관, 환구단 조선호텔, 파고다공원(탑골공원) 등 1950년대 서울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줄거리 속에 흥미롭게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송석정 별장은 특히 여러 번 보인다. 정인엽 촬영감독은 이 집을 산의 능선과 어우러지게 잡고 그 아래쪽 동네풍경과 인물을 앞 배경으로 전개해 간다.

하지만 친일파 윤덕영 사후에는 후손 누구도 송석원 저택을 유지하지 못했다.
"규모가 너무 커서 도저히 유지할 수 없었다" 하고 "재산문제로 하도 시달리며 살아 일가의 재산유지에 미련이 없어 모든 것을 포기했다. 송석원 일화는 그 영역 안의 한옥에서 거주가 이뤄졌다는 것만 전해 들었고 이 집이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전혀 모른다"고 후대의 한 사람은 말했다. 한 사업가가 이곳에 미국식 클럽을 만들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사실이 아닌 듯했다.

송석원에 대한 관심은 여러 분야에서 지속되어왔다. 1935년 문일평의 송석원 답사기에는 이 집 앞으로 시냇물이 흘러 사람들이 빨래를 하고 연못도 있었고 숲이 좋았다. 샘물도 솟아났다. 1959년부터 '서울 6백년'이라는 글을 쓴 김영상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부터 송석원 바위 글씨 사진이 나왔다. 1984년에는 윤평섭교수가 송석원 건물, 다리와 냇물 등 지적과 조경을 다룬 논문을 발표했다.

2010년에는 '화봉 책 박물관'에서 송석원과 벽수산장 글자가 암각된 바위벽 아래 별장주인 윤덕영이 있는 1930년대쯤의 사진이 공개됐다. 사진 속 바위에는 김정희의 가로로 쓴 송석원 각자 옆에 윤용구가 세로로 쓴 벽수산장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윤덕영은 그 앞에 모시 두루마기에 책을 받쳐 들고 앉아있다.

옥인동 47번지 일대의 지적, 권력과 번지수 분할 등을 연구한 논문도 여러 편이다. 서울역사박물관과 시민단체인 서촌주거공간연구회가 구석구석 찾아낸 인물사와 변화된 흔적 등 송석원에 대한 두꺼운 자료집이 꾸며질 만하다.

서촌에서 송석원은 문화사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도저히 생략하고 넘어갈 수 없는 존재이다. 재개발의 예민한 문제가 없지 않지만, 오랜 기간 서촌이 지녔던 문화적 역량은 송석원의 역사를 통해 부인할 수 없는 구조로 나타난다. 중인이라는 특수계층의 사회적 활동이 여기서 근대를 향해 용솟음쳤다는 것도 기억해두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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