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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 이번엔 전투부대 보낸다며?”

김재명의 '중동 현지르포' <7> 시아파 성지 나자프를 가다

***"우린 수니도 시아도 아닌, 이라크인"**

바그다드의 아침은 우울한 소식을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제 시내 어느 곳에서 폭탄차량이 터져 몇 명이 죽고 다쳤고, 미군에게 몇 명이 잡혀갔다는 따위의 소식이다. 이라크에서 머문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이라크 사람들에게 "당신은 수니파냐, 아니면 시아파냐?"를 묻는 것은 결례라는 걸 깨닫게 됐다. 민족주의 감정이 강한 이라크 사람들은 그런 물음에 대해 "나는 수니도 아니고, 시아도 아닌, 이라크 사람"이라 말한다. "우리는 같은 이라크 민족"이란 얘기다. 그러면서 필자에게 "북한에서 왔느냐, 남한에서 왔느냐?"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은근히 가르쳐준다. 맞는 말이다. 남북 구별 없이 "코리아(Korea)에서 왔다"고 해야 정답일 것이다. 우리도 피를 나눈 한 민족이 아닌가.

사진설명@김재명
1.2. 바그다드-나자프 사이 힐라 마을 도로가에 버려진 이라크 장갑차들.

이라크 사람들에게 "우리는 한 이라크 민족"이란 의식을 불러 넣어준 한 계기는 2004년 4월 미국의 이라크 점령 1년을 맞아 격화된 팔루자 투쟁과 나자프 투쟁으로 꼽힌다. 올 들어 반미투쟁의 두 축은 팔루자와 나자프다. 특히 팔루자 투쟁은 오랫동안 수니-시아로 갈려 미묘한 감정대립을 해오던 이라크의 두 아랍세력이 반미라는 큰 틀에서 공동전선을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팔루자에서 많은 사상자가 생겨나고 마실 물을 비롯한 생필품이 부족해지자, 바드다드 시아파 사람들은 팔루자 사람들을 돕겠다고 팔을 걷어 부쳤다. 팔루자를 삥 둘러쌌던 미군조차도 그런 움직임을 막지는 못했다.

수니파가 주축이 된 팔루자 투쟁과 시아파의 나자프 투쟁으로 미군 사망자 숫자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이에 따라 11월 재선고지를 앞둔 부시 미 대통령을 밤잠 못 자도록 만들었다. 미 점령당국이 이라크 점령정책의 주요 뼈대인 '탈(脫) 바트 정책'(사담 후세인의 집권당이었던 바트당의 간부들을 군․경찰․교사 등 공직에서 물러나도록 하고, 이라크 재건과정에서 제외시킨다는 정책)을 버린 것도 올 봄 들어 더욱 높아진 반미감정과 팔루자-나자프 투쟁의 불길을 잡아보려는 궁여지책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진3. 나자프로 이어지는 길목에 포진한 미군 병력.

***"한국, 이번엔 전투부대 보낸다며?"**

나자프는 바드다드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두시간 반쯤 달리는 곳에 있다. 인구 60만의 대도시인 나자프에는 이라크 시아파 성지로 여겨지는 이맘 알리 이슬람사원이 자리잡고 있어, 해마다 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닿은 곳이다. 나자프에는 예언자 마호멧의 사촌이자 사위로, 제4대 칼리프이자 시아파의 정신적 주춧돌을 놓은 이맘 알리의 무덤이 있다. 바드다드 동부의 빈민가로 바드다드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알-사드르 시티의 젊은 반미 성직자 모크타다 알-사드르(30)와 그를 따르는 마흐디 군(Mahdi Army)은 지난 4월8일부터 나자프와 이웃도시 쿠트, 카르발라 일대에서 점령군인 미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여왔다. 약 3천명 규모인 마흐디 군은 AK-47 소총에 RPG(로켓추진총류탄) 정도의 빈약한 무장으로 미군에 맞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런 나자프를 취재하려 떠나려는데, 바그다드에서 사귄 외신기자들이 걱정을 해주었다. 외국인 피살 또는 인질사건이 나자프를 중심으로 한 이라크 중부일대에서 걸핏하면 일어나는 탓이었다. 나자프와 이웃도시 쿠트 일대에서 미군과 전투를 벌이며 많은 사상자를 내온 마흐디 군은 외국기자들에게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외국인들은 모두 첩자라는 잘못된 믿음 탓도 있지만, 그런 믿음이 틀렸다고 보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일부 미국 기자들은 미군 당국에게 마흐디 군의 배치상황과 형편을 알려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으로 은근히 신경이 쓰인 부분이 곧 있을 자이툰부대 파병 관련이었다. 필자가 만난 이라크 사람들은 한국군의 파병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전투부대가 아닌, 의료 공병 부대가 온다고 대충 둘러대면, 다음과 같이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부대는 이미 나시리야에 와 있잖아? 이번엔 전투부대를 보낸다며?" 나자프에서 그곳 무자헤딘들에게 한국기자라고 명함을 내밀 경우, 자칫하면 자이툰부대 파병 반대를 내걸고 필자가 볼모로 잡힐 수도 있을 터였다.

사진 4. 미군과 마흐디 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진 쿠트 시가지에 나붙은 알-사드르 포스터.

그렇지만 딱 하나 믿는 구석이 있었다. 사다르 시티에서 영향력 큰 이슬람성직자 카심 알-카비가 필자에겐 써준 소개장이다. 필자의 취재노트 한 면 가득히 써준 알-카비의 소개장은 "이 편지를 지닌 한국기자의 취재를 도와주고, 케이스 알-하잘리(알-사드르의 대변인)와의 인터뷰를 주선해 주라"는 내용과 함께 글 아래 부분에 그의 직인을 찍고 서명을 한 것이었다. 이라크 군 하사관으로서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도 참전했던 운전기사 케림(62), 옛소련 시절 피터스부르크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던 교사 출신의 통역 카짐(53)도 "그런 소개장이면 크게 걱정할 것 없다"며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사진 찍어 미군에 갖다줄 거냐"**

바그다드 시내를 벗어나 서남쪽으로 쭉 뻗은 도로를 달리는데, 이라크 군의 파괴된 무기들이 가득 쌓인 곳이 보였다. 미군에게 폭격을 맞아 찌그러진 탱크며, 대포들이 수북히 쌓여있다. 카짐에게 물어보니, '힐라'라는 이름의 마을 가까운 곳이다.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50대 후반의 현지인이 화난 얼굴로 다가왔다. "그런 사진을 왜 찍느냐. 미군에게 갖자줄 거냐"며 시비를 건다. 카짐은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필자를 차안으로 밀어 넣더니, 케림에게 빨리 시동을 걸라고 재촉했다. 자칫하면 총알을 맞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나자프 이웃도시인 쿠트 입구 로타리에 들어서자, 미군과 시가전을 벌인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버스정류장 가까운 한 건물은 포격을 맞아 허물어졌고, 담벼락엔 총탄 자국이 어지럽다. 한 작은 이슬람 사원의 첨탑에도 총탄 자국이 뚜렷하다. 그런 가운데에도 하루하루 생존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노점상들은 바나나며 양말, 담배 등을 팔려고 40도 넘는 햇볕 아래 줄지어 앉아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진 5. 미군-마흐디 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던 시아파 이슬람 최대의 공동묘지 '평화의 계곡'.

곧 나자프 시내로 들어섰다. 쿠트에서는 받지 않았던 검문을 받았다. 총을 매지 않는 평복 차림의 마흐디 군으로부터였다. 통역 카짐이 다른 긴 얘기 없이 곧바로 이슬람성직자 카심 알-카비가 필자에게 써준 소개장을 내보였다. 처음엔 험상궂은 표정을 짓던 마흐디 군의 얼굴이 부드러워지는 걸 느꼈다. 다시 이맘 알리 이슬람사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또다른 검문소다. 이번엔 아예 차량통행이 어렵도록 차단기를 내린 검문소다. 다시 소개장을 내밀었다. 마흐디 병사는 무전기로 어디론가 보고를 하더니, 다른 안내원 한사람을 차에 함께 태운다. 차단기가 올라갔다. 마흐디 군의 본거지로 다가가는 길이다. 안내원은 이맘 알리 이슬람사원이 보이는 골목 입구에 차를 세우도록 하더니, 기다리란다.

***암살 당할까 신경 쓰는 알-사드르**

그 골목 입구엔 마흐디 군 경계병이 오가는 사람들의 몸과 가방을 뒤진다. 마흐디 군 비표를 지닌 사람이라도 어김없이 검색한다. 이슬람 성직자들조차도 마찬가지다. 미 점령군은 반미 투쟁의 기수인 이슬람 성직자 모크타다 알-사드르를 체포 또는 사살하겠다는 뜻을 여러번 밝혀왔다. 골목길 검색을 지켜보면서, 알-사드르 쪽에서는 자객을 몹시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어딘가에 알-사드르가 은거하고 있겠거니...하는 생각을 하는데 마흐디 군 하나가 다가온다. 필자가 걸터앉아 있는 커다란 나무상자를 열겠다는 표정이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AK-47 소총과 RPG(로켓추진총류탄)이 가득 들어있었다. 마흐디 군은 오후가 되면서 혹시나 있을 미군 공격에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사진 6. 이라크 시아파 이슬람 최대 성지인 나자프 이맘 알리 사원. 최근의 긴장 사태로 오가는 사람의 발길이 뜸하다.

다시 안내원이 다가온다. 이맘 알리 사원 안에서 알-사드르의 측근이자 대변인인 아흐메드 알-시바니를 만날 수 있다는 통보였다. 알-사드르는 두 사람의 대변인을 두고 있다. 사드르 시티의 이슬람 성직자 카심 알-카비가 필자에겐 써준 소개장에는 케이스 알-하잘 리가 쓰여있지만, 필자가 만난 대변인은 30대 중반의 젊은 이슬람 성직자 아흐마드 알-시바니(34)였다. 그는 필자와 악수를 나누자말자 "나는 한국인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왜 그런가 물어보니, "한국 젊은이들이 미국에 반대하는 데모를 자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다"고 짧게 말했다. 그와의 만남은 약 30분쯤, 이맘 알리 사원 안에 있는 천정이 놓은 매우 커다란 방에서 이뤄졌다. 아래는 통역 타짐의 도움으로 그와 나눈 대화의 줄거리.

***"우리의 반미투쟁은 도덕적으로 옳다"**

-먼저 알-사드르와 마흐디 군의 반미투쟁 배경을 말해달라.

"지난해 4월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뒤 우리 이라크 사람들은 미국의 여러 약속들에 기대를 품었었다. 그래서 점령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의 약속은 거짓임이 드러났다. 그들은 역시 이라크 석유를 비롯해 자기네들의 이해관계를 챙기려고 온 점령군이었다. (탁자 위에 놓인 아랍어 신문에 보이는 아부 그라이브 감옥 칼라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런 일들이 당신 나라 한국에서 일어난다면 당신들은 침묵하겠는가? 미국 병사가 한국여인을 강간했다고 치면 가만있겠는가? 반미감정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물론 우리의 반미투쟁은 아부 그라이브 감옥 학대사건이 불거지기 이전부터 벌어졌지만, 아부 그라이브 사건은 우리 마흐디 형제들의 반미투쟁이 도덕적으로 옳았음을 드러냈다"

-지난 4월 이래 펼쳐진 알-사드르와 마흐디 군의 반미 투쟁은 성공적이라 보는지?

"미군은 압도적인 전투력을 지니고도 우리 마흐디 형제들을 이기지 못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따랐다. 그런 우리의 희생과 투쟁으로 미국은 그동안의 강압적인 점령정책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됐다. 아부 그라이브 감옥에 갇힌 형제들을 풀어주는 것도 한 보기다. 그동안 미 중앙정보부(CIA)는 거짓 정보를 들어왔다. '알-사드르의 지지자들은 소수이고, 마흐디 군은 보잘 것 없다'는 투로 말이다. 이번 투쟁에서 우리는 미국에 교훈을 주었다. 이라크 민중의 저력을 우습게 봐선 안된다는 교훈이다"

-이번 반미 투쟁에서 얼마나 많은 마흐디 군이 희생당했나. 구체적인 숫자를 말해달라.

"나와 얘기가 끝나면, '와디 살람'이라 일컫어지는 '평화의 계곡'에 묻힌 무덤으로 가봐라. 그곳엔 이번 반미투쟁에서 숨진 약 150-200명의 순교자들이 묻혀있다. 미군 대변인인 키미트 준장이 지금껏 발표한 숫자를 모아보면 1천명 가량 죽은 걸로 돼 있다. 그런데 럼스펠드 국방은 마흐디 군이 약 1천명 규모라고 말했었다. 미국의 계산법으론 우리 마흐디 형제들이 다 죽고 없어야 한다. 허허"

사진 7. "아부 그라이브 사건은 우리 마흐디 형제들의 반미투쟁이 도덕적으로 옳았음을 드러냈다"고 주장하는 알-사드르의 대변인 아흐마드 알-시바니. 뒤의 포스터는 나자프 반미투쟁의 주역인 알-사드르.

-지난 6월4일 이곳 나자프에서 미군 병력이 물러나는 조건으로 마흐디 군도 나자프에서 물러나 바그다드의 사드르 시티로 돌아가기로 미군 쪽과 합의했다고 들었다. 언제 돌아갈 것인가.

"돌아가다니? 이슬람 성직자 알-사드르를 따르는 많은 마흐디 군은 이곳 사람들이다. 나도 이곳 나자프 출신이다. 물론 일부 바드다드에서 온 일부 형제들은 그곳으로 돌아가겠지만, 우리는 예전처럼 여기 머물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덧붙인다면, 이곳 나자프엔 외국 출신 무장요원은 한사람도 없다"

***"알-사드르 망명설은 헛소문"**

-사담 후세인 정권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후세인이 미국의 괴뢰정권이었다는 것은 길거리의 어린애들도 알고 있다. 후세인은 미국의 아들이었다. 후세인정권은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에 유리한 정책을 펴기 위해 미국이 만든 정권이었다. 후세인은 이라크를 파괴하기 위해 잇따라 전쟁을 벌였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전쟁, 19990년대 쿠웨이트 침공 등이 그러하다. 그런 전쟁들은 후세인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 조작한 전쟁들이었다"

(지난 번 회교성직자 카심 알-카비와의 인터뷰에서 드러났듯, 이라크 시아파 이슬람성직자들은 후세인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지 못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여기에는 같은 시아파인 이란과의 관계, 시아파를 탄압해온 후세인에 대한 적개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필자 주).

-사담 후세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티파다(봉기)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1-2만 달러의 조위금을 보내는 등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원한 아랍권의 몇 안되는 지도자로 꼽혀왔다. 그런데 미국과 이스라엘을 위해 일했다니, 무슨 말이냐.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를 도운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적 조작이었다. 내막은 알려진 바와 다르다. 후세인은 이라크 민중들을 위해 일한 게 아니라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증거들이 있다"

(알-사드르의 대변인이 꼽는 증거란, 필자가 듣기엔, 설득력이 아주 약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제1차 걸프전쟁 당시 미 중부군사령관 슈와르츠코프 대장이 그의 회고록에서 "당시 나는 후세인을 공격하지 말고 보호하라는 '아주 이상한 명령'을 받았다"고 적었다는 것 등이다. 이런 서술이 '후세인 정권은 미국의 괴뢰정권'이란 주장을 뒷받침할 수는 없다. 시아파 성직자들이 지닌 반 후세인 논리의 결함이 이들의 반미 논리를 훼손하는 것으로 비쳐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필자 주).

-앞으로 알-사드르의 반미 투쟁계획은 어떠한가. 이란으로 망명한다는 소리도 들리는데...

"(빙긋이 웃으며) 나도 그런 소문을 들었지만, 전혀 말도 안되는 헛소문이다. 미 CIA가 그런 얘길 퍼뜨리는 걸로 알고 있다. 1999년 후세인정권에 피살 당했던 알-사드르의 아버지 이맘 모하메드 사드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라크 땅은 투쟁의 땅이다. 패자가 이 땅을 떠난다' 알-사드르는 패자가 아니다. 알-사드르에게 어떤 자리를 맡기겠다는 제의가 이라크 임시정부 쪽에서 들어왔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이라크 임시정부를 미국 점령자들의 꼭두각시로 여긴다. 그는 이번 나자프 투쟁을 밑거름 삼아 이라크 민중을 위한, 민주화된 정권이 바그다드에 들어서도록 힘쓸 것이다. 그렇지만 알-사드르는 종교지도자다. 정치인으로 대통령이 되거나 수상이 될 생각을 품고 있지 않다. 그는 이라크 사태가 안정을 찾는대로 종교 공부에 더 힘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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