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똘레랑스(tolérance)’라는 프랑스어는 매스미디어나 책을 통해 제법 널리 퍼졌고, 일상 속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똘레랑스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중의 하나이다.
우리말로는 하면 ‘관용’쯤으로 번역되겠지만 똘레랑스의 본래적 의미나 역사적 연원 등을 살펴보면 자비나 관용이라는 의미에 머무르는 그런 용어는 분명 아니다. 우리 사회에 이 ‘똘레랑스’라는 프랑스의 사회적 가치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사람은 빠리의 망명객 홍세화씨였다. 지금은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 한겨레신문 기획위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저자 홍세화가 그의 책에서 그렸낸 프랑스 사회는 사회 저변에 다양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뿌리내리고 있는 똘레랑스의 사회였다.
물론 홍씨의 기구한 인생역정과 운치있는 글솜씨, 교훈적이고 참신한 내용이 잘 어우러져 폭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겠지만, 그의 책의 키워드인 똘레랑스가 중요한 담론거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독재와 군사주의, 흑백논리와 획일주의, 왕따문화로 점철되어 온 우리사회에서 ‘똘레랑스’는 그야말로 필요하고도 절실한 가치였기 때문일 것이다.
홍세화에 대한 평가는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겠고 그에 대한 비판도 존재할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는 우리사회에 ‘똘레랑스’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소개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출간되고 몇 년 후 그는 두 번째 에세이집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선보였다.
이 책에서도 홍세화는 프랑스적인 창의력과 독창성의 바탕에는 '개성존중'이라는 가치가 흐르고 있고, 개성존중이란 다름아니라 다른 사람은 나와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똘레랑스의 미덕이라고 역설했다. 백번 옳은 이야기다. 홍세화는 프랑스적인 똘레랑스의 예로 드골 대통령과 사르트르의,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었다.
알제리 독립운동이 한창일 때 사르트르는 스스로 알제리 독립자금 전달책으로 나섰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이 프랑스에 살고 있는 알제리인들이 갹출한 독립지원금이 들어있는 돈가방의 전달책임자를 자원했던 것이다. 프랑스 경찰의 감시를 피해서 그의 책임 아래 국외로 빼돌린 자금은 알제리인들의 무기구입에 필요한 돈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는 문자 그대로 반역행위였다. 당연히 사르트르를 법적으로 제재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골 측근들의 입에서도 나왔다. 이에 대해 드골은 이렇게 간단히 대꾸했다.
"그냥 놔두게. 그도 프랑스야"
(홍세화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44쪽)
샤를르 드골 대통령이 특별히 비범해서도 아니고 사르트르가 건드리면 큰일나는 지식인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드골의 이런 생각은 보통 프랑스인들의 보통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개성을 배우고, 서로 다른 가치관의 공존과 차이의 중요성을 교육받으면서 자란 프랑스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똘레랑스의 일상적인 한 면모일 뿐이다. 똘레랑스의 이런 힘이 프랑스를 개성과 독창성이 지배하는 문화강대국으로 일구어 놓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똘레랑스는 도대체 무엇일까. 프랑스인들에게 똘레랑스는 무엇이며 왜 중요한 걸까. 앞서 언급했듯이 똘레랑스에 해당되는 우리말은 '아량'이나 '관용(寬容)'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똘레랑스는 동양적 의미의 너그러움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ㆍ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똘레랑스'는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념과 신념이 귀중하면 남의 것도 똑같이 귀중하며 자신이 존중받기 바란다면 남을 존중하라는 것이 바로 똘레랑스의 요구인 것이다. 똘레랑스가 강조되는 사회에선 강요나 강제가 아니라 토론과 설득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똘레랑스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용인하는 것인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상대방의 의견이나 생각을 바꿀 수도 있지만 그대로 용인하는 것, 의도적인 용인(Philippe Sassier 필립 사시에의 책, 『Pourquoi la tolerance : 왜 똘레랑스인가』)"을 말하는 것이다.
똘레랑스는 "타자(他者), 타자성, 차이에 대한 존중과 서로 다른 가치, 믿음, 생각을 가진 개인 및 집단들 사이의 평화적 공존을 의미한다. 관대함이나 허용이 약자에 대한 강자의 여유를 암시하고 자비가 「가엽게 여김」의 의미를 지닌다면 관용은 다양성, 이질성, 복잡성을 존중할 줄 아는 정신적 태도와 지적 능력을 의미한다. 관대-허용-자비가 힘의 불평등관계를 내포한다면 관용은 힘의 평등관계를 전제한다"는 것이다.(도정일,'관용의 체제'로서의 문화, 경향신문, 1998년 12월 1일자) 요컨대, 똘레랑스는 약자에 대한 자비와 같은 인간적인 가치가 아니라 공동체의 사회적 관계를 뒷받침해주는 엄연한 사회적인 가치이다.
중요한 것은 똘레랑스가 방어적 개념이 아니라 적극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단지 이견이나 차이에 대한 의도적인 용인에서 끝나지 않고, 이견과 차이의 존중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의무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볼테르는 다음과 같은 경구를 남겼던 것이다.
“나는 당신이 말한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당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죽도록 싸울 것이다”
정적의 정치적 이견을 용인하고 공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의견과는 다르더라도 그 이견이 탄압받을 때는 죽도록 싸울 수 있는 자세가 바로 프랑스식 똘레랑스요, 프랑스 사회에서 이야기되는 사상의 자유이다. 그러므로 똘레랑스는 ‘자유의 사상’이나 ‘사상의 자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홍준 교수와 가진 대담에서 홍세화는 프랑스의 어느 철학 교수와 대화를 이야기하며 '똘레랑스는 민주주의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중앙일보 1999년 6월 14일자). 민주주의가 국민주권에 기반하고 있는 운영과 관리의 제도라면, 이 제도를 가능하게 해 주는 초석은 똘레랑스라는 철학이다. 똘레랑스가 없는 민주주의는 가진 자와 강한 자의 민주주의일 뿐이며, 그 속에서 전체의 의사에 배치되는 소수의견은 체제 전복 의도를 가진 불순한(?) 세력으로 간주되어 탄압받기 십상이다. 소수의견이 존중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전체주의이다. 이데올로기 규제, 사상범, 정치범, 사상검증(그것도 언론에 의한!), 반국가단체 규정 등은 똘레랑스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들이다. 오랜 동안 독재정치, 군사문화를 겪어온 한국사회인지라 더더욱 중요한 메시지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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