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래로 야기되는 온갖 만행과 고문이 날을 거듭할수록 잔인해지고 있다. ‘전쟁과 폭력’ 속에서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인간성의 붕괴’가 우리들을 경악케 하고 있다. 전쟁이 얼마나 인간들을 황폐화시키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끊임없이 낳고 있는 여자들은 또 얼마나 위대한가! 필자는 20년 전 서울에서 목격했던 어떤 장면을 다시 떠올려보면서 당시 서울의 “염천교 다리 위에서 아이를 낳던 여자가 바로 인간과 인류의 미래다!”라고 했던 생각을 모아 프레시안 글마당에 올린다. 적어도 여자들―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가 다름 아닌 ‘여자’였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에. 그렇다. 그 어떤 전쟁도 신(神)으로부터는 용서받을 수 없다. 필자
1984년 여름 어느 날 밤이었을 것이다. 서대문 쪽에서 한 잔을 걸친 우리들은 중앙일보 사옥 옆을 지나 염천교 쪽으로 걷고 있었다. 50여 일 동안 숙소로 얻어 놓은 남산 밑 여관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우리들은 각 지방에서 올라온 교사들로 남산에 있는 독일문화원에서 이른바 독일어 과목 1정 연수를 받고 있는 터이었다.
<삽화1> 김준태
“제기랄, 가봤자 텅 빈 여관방인 걸. 이런 밤엔 차라리 곰보라도 좋으니 여편네가 곁에 붙어있다면 좋겠어. 말인즉 야옹 야옹 소리를 내는 고양이 같은 여편네면 또 어때!”
우리들 중 누군가 그런 푸념을 하는 소리를 들으며, 흔들흔들 막 염천교를 건너려는 순간이었다. 아마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는 그런 시각이었을 것이다. 다리 오른 켠 인도 위에, 아 그런데 저게 뭐야!? 어둠 속에서 무슨 시커먼 물체가 뒹굴고 있었는데 아무리 달리 생각하려 해도 그 모습은 분명 여자일 것임이 틀림없었다. 우선 가까스로 들려오는 앓는 소리가 그런 짐작을 가능하게 했다.
이미 집집마다 지어미와 새끼들을 거느리고 있는 우리들은 무슨 인정이 발동했는지 그 검은 물체, 아니 여자 곁으로 바짝 다가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분명 급박한 어떤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의 경우도 몹시 긴장을 한 나머지 여자가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 서서 쩔쩔매는 마음뿐이었다.
<삽화2> 김준태
아아, 아아아!!! 여자는, 아니 글쎄, 염천교 시멘트 바닥 위에서 아이를 낳으려고 자신의 온몸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축구공을 넣은 듯이 불룩 튀어나온 배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진통을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전 재산일 것 같은 보잘 것 없는 옷 보따리 하나 곁에 놔두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긴 보자기 위에다 아이를 낳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몸 속에 넣고 다니던 아이가 황급하게 밀고 나오는 터라 그만 다리 위에 주저앉아 분만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야밤중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는 서울의 한복판 다리 위에서 여자는 누군가의 아이를 낳고 있었다. 아니 이미 누군가라고 말할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의 아이를 낳고 있는 중이었다.
응아! 아이는 사내아이였고 여자는 미혼모였다. “버리지 않을 거예요. 예, 저는 이 아이를 잘 키울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유산시키지 않았던 것이에요. 참, 잘 우는군요. 태어날 때 큰 소리로 울어야 앞으로 건강하게 커나갈 수 있다는군요.”
진실로, 여자란 저런 것인가. 하느님께서 이미 그녀에게 질기고 질긴 모성애를 넣어주었단 말인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자신이 낳은 작은 아이에 대한 지독한 사랑과 놀라울 정도의 집착력, 그리고 지구 전체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종족 보존능력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다는 듯이, 아이의 배꼽에서 탯줄을 끊으며 여자는 웃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들은 각자의 호주머니를 털어 그 여자와 갓난아이를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다 주었다. 날이 밝으면 근처 산부인과라도 옮겨줄 생각으로 돈을 조금씩 더 모았다. 서울 한복판, 염천교 인도 위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하늘의 축복이 있기를 빌었다. 짐작컨대 전라도나 경상도 어느 산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공단에 다니다가 어느 날 극장에서 우연히 만난,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어떤 빌어먹을 사내녀석과 눈이 맞아 하룻밤을 같이한 결과 임신했을지도 모르는 그 여자!
우리들은 아이를 버리지 않고 끝끝내, 혼자 힘으로 출산에 성공한 이 여자를 위하여 기도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때 나는 한 장면도 가위질이 안된, 귄터 그라스 원작 [양철북]이란 영화를 머리에 떠올렸다.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총부리를 피해 도망치던 사내가 들판에서 감자를 캐는 늙은 여인네(주인공 오스카 외할머니)의 긴치마 속에 숨어 목숨을 건져내는 장면부터 시작되는 이 영화에서 여자의 영원한 힘과 아름다움을 느꼈던 순간들을 기억해냈다.
그런 일을 목격한 며칠 후 나는 남산 여관방에서 한 편의 ‘이야기詩’를 썼다. 제목이 ‘양철북과 여자의 길고 넓은 치마’란 시가 그것이었다. 시인 괴테가 불후의 명저 [파우스트]에서 노래한 '영원히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저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린다'라는 세계관에 당시 나의 정신세계가 맞닿고자 하는 그런 몸부림의 일환으로 씌어졌는지 모를 그런 시였다. 1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30년 전쟁(1618~1648)의 결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거칠어진 독일 시민사회 속에 죽임이 아닌 살림(생명)과 부드러움의 차원에서 여성성의 미학을 불러들이고자 했던 괴테―바로 그가 저 1980년대의 한국인 나에게까지 줄기차게 평화적 개념과 사상의 실체로서 여자 혹은 여성성의 의미와 큰 뜻을 안겨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해 여름 나는 남산 독일문화원에서
귄터 그라스 원작 [양철북] 영화를 보았다
첫 장면부터 쾅쾅! 쾅쾅쾅! 총알과
폭탄이 날고 마을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사람들이 흙덩이처럼 내팽개쳐지고
아, 그때 한 젊은이가 살 맞은 짐승처럼
미친 듯이 다리를 끌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가 도망치는 곳은 너무나 드넓은 감자밭
눈앞을 가리는 폭탄 연기 속의 감자밭일 뿐
몸을 숨길만한 가까운 숲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때마침 감자를 캐는 늙은 여인네 하나
둥근 달처럼 지평선 끝을 눌러 앉아있었다 길고도
넓은 치마로 대지를 덮어주었다 바르르 떨고 있는
젊은이를 병아리처럼 감싸주는 여자의 넓은 치마
끝간데 없이 씨앗을 다져 넣는 여자의 광막한 자궁―
치마 속에 숨어든 젊은이는 그렇게 살았다
그 해 여름 나는 남산 독일문화원에서
귄터 그라스 원작 [양철북] 영화를 보면서
남자들의 전쟁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여자들의
숨결과 아름다움, 여자들의 사랑과 평화, 여자들의
젖가슴 설레임, 아 여자들의 긴치마가 드디어는
하늘가를 찰랑찰랑 스치는 것을 가까스로 느꼈다
죽은피는 쏟아내며 생피는 자궁에 밀어 넣는 천리만리 여자여!
종달새 날아오른 밭고랑에 빠짐없이 솨아솨아 오줌을 누어주고
저 하늘 위에다는 별들의 수많은 노래라도 뿌려 놓는 여자여!
이제 눈먼 사내들의 앞을 먼저 가며 등불을 켜고
세상의 모든 총구멍 속에다 철철철 오줌을 누어라
그대들의 뜨거운 뜨거운 오줌줄기가 끊이지 않는 한
피묻은 칼집과 총구멍은 영원히 녹슬어 버릴 것이다
여자여! 여자여! 여자여! 여자여! 여자여!
1984년 여름 염천교에서의 행복한 사건(?) 이후, 나는 한동안 방치해 두었던 나의 정신세계와 시적 세계관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동료교사들과 함께 서울에서의 독일어 연수를 무사히 마치고 광주에 내려온 나는, 80년대의 그 어두컴컴한 미로 속에서 ‘여자’라는 희망의 실체를 발견하고 그에 따른 철학적 혹은 미학적 명상의 끄나풀을 줄기차게 잡아 다녔다.
그때 읽었던 '여자의 몸'에 대한 정보는 정말 눈부신 것들이었는데 그중 몇 대목은 실로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가령 거친 남자들에 비해 여자의 몸은 천지간의 신들이 탐할 정도로 신비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반신(半神)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여자의 몸―오늘날 현대 과학이 찾아낸 것만을 들춰내 읽어보아도 경탄스러운 대목이 너무도 많았다.
인체 학자들에 따르면, 여자의 피부는 1평방 인치에 평균 1950만개의 세포, 1300개 근육조직, 78개 신경 조직, 650개 땀구멍, 100개 피지선, 65개 털, 20개 혈관, 178개 열감지기, 13개의 냉감지기가 분포해 있다고 한다. 피부는 4주마다 완전히 새 피부로 바뀌고 있으며 일평생을 통해, 1,000번 이상의 피부를 갈아입는다. 심장은 매분 4.7리터의 피를 퍼보내고 있으며 잠자는 동안도 심장은 매 시간 300리터의 피를 퍼내는데, 평생에 걸쳐서는 2억8천만번의 심장박동을 하면서 총 227만 리터의 피를 퍼낸다.
7년마다 몸 전체의 모든 뼈가 새 조직으로 바뀐다는데, 근육은 650개, 관절은 100개 이상이며 뼈의 숫자는 260개 정도라고 한다. 겨우 1평방 인치에 불과하다는 눈의 망막 속엔 130만 개의 감광세포가 들어있고, 125만 개의 간상세포가 흑백을 감지하고, 7만 개의 원추세포가 원색을 감지하는데 실제로 이 원추세포는 150가지의 색을 구분해 낸다고 한다.
눈은 뇌의 뒷부분과 100만 개의 이상의 신경조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한번 눈을 깜박거리는 데 40분의 1초가 걸리고 1분에 평균 15번, 한 시간에 900번, 일평생 3억 번이나 눈을 깜박거린다. 몸엔 10조 개의 세포조직, 8만 킬로미터의 혈관(모세혈관을 합하면 지구를 두 바퀴 반을 도는 길이), 피 속에는 산소를 운반하는 적혈구가 25조 개, 질병과 싸우는 백혈구가 250억 개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자동차를 만드는 데 1만3천 개의 부속품이, 하늘을 나는 보잉 747 여객기를 만드는 데 3백만 개의 부속품, 우주선을 만드는 데는 5백만 개의 부속품이 들어간다고 하니, 인간의 몸, 특히 여자의 몸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노할지 모르지만 반신(半神)에 버금간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아 그래서 그랬을까. 18세기의 시인 괴테가 그랬던 것처럼 20세기 프랑스 시인 루이 아라공도 그의 시 ‘미래의 노래’ 속에서 여자 혹은 여성성에 대하여 찬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1984년 어느 날 밤 서울의 염천교 위에서 목격했던, 그리고 분명한 확신 속에서 체득하였던 그런 희망을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루이 아라공 시인이 먼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온몸이 전율할 정도로 그 어떤 아름다운 생명력이 가슴팍을 파고 들어오는 ‘미래의 노래’란 시 일부를 읽어보자. 아라공은 역시 여자란 대상에 엄청난 상상력을 부여하고 있다. 아이를 낳고, 거친 남자들과 세상을 늘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여자들...그렇다. 나는 1984년 그 해 여름 서울 염천교 인도 위에서 아이를 낳던 여자가 바로 인간과 인류의 미래란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미래를 생각하면 나는 취한다 / 미래는 나의 술잔이다 애인이다 / 입술에서 연지를 벗기듯이 미래는 나의 머릿속에서 윙크하고 있다 /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자는 남자의 혼을 장식하는 채색이다 / 여자는 남자를 활기 있게 해주는 떠들썩하고 우렁찬 소리이다 / 여자가 없으면 남자가 거칠어질 뿐 나무 열매나 열매 없는 핵에 불과하다 /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태어나고 사랑을 위해 태어나는 것이라고!”
*김준태 : 1948년 전남 해남 출생. 1969년 [시인]지로 나옴.
시집으로 [참깨를 털면서] [국밥과 희망] [불이냐 꽃이냐] [칼과 흙] [지평선에 서서] 등. kjt48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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