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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대는 일본 근대의 사생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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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우리 근대는 일본 근대의 사생아일까?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8> 일본관-허동현 생각

***욕하면서 배우는 이율배반의 일본인식**

반갑습니다.

박노자 교수님

위풍당당한 통신사 행렬을 그린 옛 그림이 말해주듯, 앞선 문물을 뽐내며 전수한 통신사에게 일본은 미개한 야만국에 지나지 않았지요. 1748년 영조 때 일본 통신사로 갔던 조명채(曹命采)가 남긴 기행문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을 보면, 우리 문화에 대한 우월의식과 일본 문화에 대한 모멸감이 곳곳에 짙게 베어 있습니다. 조명채는 통신사를 맞이하는 일본인 태도를 보고 "왜인(倭人) 선비는 문답하며 필담을 나눌 때 우리를 황화(皇華, 천자의 사신)라 부르니 사모하여 따르는 마음을 알 만하다"며 우월감을 과시했고, 생김새가 다른 일본의 닭을 보고 "짐승이 닮지 않은 것도 오랑캐와 중화가 다른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일본을 야만시했습니다.

조선시대 유교 지식인들은 일본은 왜, 일본의 수도는 왜경, 천황은 왜왕, 관원들은 대차왜(大差倭)ㆍ호행왜(護行倭) 등으로 표현했지요. 이처럼 그들의 눈에 비친 일본인들은 사람이 아닌 "왜의 무리(群倭)"에 불과한 부정적 타자였습니다. 또한 멀리는 려말선초의 왜구(倭寇)와 임진왜란(1592-1598)으로부터 가깝게는 식민지 지배(1910-1945)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사람들 눈에 비친 일본은 끊임없이 재부를 약탈하고 생존을 위협하던 적대적 타자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한국인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겨준 남북분단의 비극도 그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에게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일본은 아직도 우리에게 가장 싫어하는 나라로 남아 있는 것이겠지요.

박노자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한국인이 일본을 증오하는 이유의 하나는 과거사의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지 않는 일본 주류사회의 오만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우리의 학교 교육과 언론매체들이 주도해 재생산되는 증오의 기억도 세대를 넘어 한국인들이 일본을 부정적 타자로 보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라고 볼 수 있겠지요.

"원수의 나라에 가는 너는 배반자야." 몇 년 전 교환교수로 일본에 체류 중이던 아빠를 만나러 일본에 온 초등학생 아들이 급우들에게서 들었다고 제게 전한 말입니다. 한국인들은 학교 교육을 통해 일본이 과거에 행한 악행을 누누이 배우기 때문에 그들을 증오하는 마음을 선험적으로 품게 됩니다. 반면 개화기 이래 한국인들은 일본의 앞선 문물과 제도를 본 떠 왔기에 그들을 선망하는 마음도 알게 모르게 품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오늘의 우리들은 선험적 지식에서 우러나오는 증오와, 체험을 통해 갖게 된 호감이 충돌ㆍ갈등하는 이율배반적 일본관을 갖고 있는 것이지요.

"욕하면서 배운다고 했던가요?" 이스라엘의 민족주인인 시오니즘이 나치즘의 또 다른 얼굴이듯, 식민지는 식민모국을 따라 배우기 마련입니다. 20세기 후반 남한의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추진된 국민국가와 국민 만들기는 "일본 따라잡기"의 한 모습이었던 것도 사실이지요. "해방후 한국민은 한편으로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증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을 본 따는 애증상반적 갈등(love-hate conflict) 증세를 무의식중에 표출"시키고 있다는 진단이 설득력을 발휘합니다(유영익, 「일제 식민통치와 한국의 근대화 문제」, 『한국근현대사론』(일조각, 1992)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개화기에 시동된 국민국가와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시절 아시아의 변방이었던 일본은 서세동점의 시대를 맞아 "서구의 충격(western impact)"에 발 빠르게 대응해 일본형 국민국가를 이루면서 지역의 중심으로 거듭났지요. 이후 일본인들의 눈에 조선은 부정적 타자의 이미지로 각인되고 말았지만, 조선 사람들의 눈에 비친 일본의 모습은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1882년 제3차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박영효(朴泳孝)가 남긴 기행문 『사화기략(使和記略)』의 제목은 이를 잘 말해줍니다. 이제 일본은 더 이상 왜(倭)로 멸시되는 대상이 아니라 따라 배워야 할 화(和)로 비추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나아가 근대 국민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의 위협, 다시 말해 "일본의 충격"은 세계질서의 변화에 눈 뜬 몇몇 지식인의 뇌리에 일본과 같은 국민국가를 수립해야만 한다는 목표를 심어주었던 것이지요.

"일본 사람들은 일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단연히 감행하므로, 잃는 바가 있더라도 국체(國體)를 세울 수 있었다. 청나라 사람들은 낡은 관습에 연연해 허송세월하며 날을 보낸다. 이로써 천하를 보면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행하는 자가 성공한다."

1881년 근대 국민국가로 거듭난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시찰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소위 신사유람단)의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이 남긴 말이지요. 1880년대 이후 선각한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형 국민국가를 모델로 조선에서도 국민국가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와 사상적 맥락을 같이한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은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불란서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었지요. 갑신정변의 근대 기획은 좌절되었고 10년 뒤의 갑오개혁도 물거품이 되어버린 참담한 실패의 역사를 우리는 쓰고 말았습니다.

"nation"은 국민으로도 민족으로도 번역됩니다. "국가를 정치적 표현물로 갖는 시민단을 뜻할 때는 '국민'이 되고, 공통의 문화와 역사적 전통을 토대로 영토적인 정치권력을 요구하는 집단을 뜻할 때는 '민족'이 되는 것"이겠지요(최갑수,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특성」, 『내셔널리즘 : 과거와 현재』(국제역사학한국위원회, 2003)를 참조했습니다.)

결국 조선왕조의 백성이자 대한제국의 신민(臣民)이었던 우리 선조는 자신의 힘으로 국민으로 거듭나지 못했지요. 일본제국의 식민지 국민이자 천황폐하의 신민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들은 자기들만의 국민국가의 국민되기를 소망하는 민족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개화기에 태동된 이 땅의 민족주의는 일제 식민통치를 거치며 강력한 "저항 민족주의"로 바뀌었으며, 이를 무기로 해방 후 한국인들은 일본 "따라잡기"를 시도할 욕망을 품게 되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저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개화기 선각들의 국민국가와 국민 만들기 노력은 과소평가되어서는 곤란하다고 보기에 헨리 임이나 신기욱 같은 재미학자들과 견해를 달리 합니다.

***야누스의 두 얼굴, 저항적 민족주의와 패배적 민족주의**

박노자 선생님 말씀대로 침략과 학살의 아픈 기억과 상처를 남긴 러시아와 미국의 악행에 대해 우리는 일본처럼 지속적으로 증오하거나 문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베트남전쟁에서 범한, 이라크전쟁에서 일어날 소지가 큰 "밖"에 대한 가해에 침묵하거나 눈을 돌리고 있는 것도 일본에 대해 우리가 꾸준히 제기하고 있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 요구에 견줄 때 형평이 맞지 않는 것이지요.

이러한 우리의 대외 인식의 어두운 부분이 일본에게 당한 피해의식에 기인한다는 선생님 진단에 저 또한 생각을 같이 합니다. 일본이 적대적 타자의 역할을 전담한 때문에 우리들이 러시아와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세력의 야수성에 대해 맹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우리가 "밖으로부터 받은 골수에 박힌 통념화된 피해의식"이 우리가 행한 "가해"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요.

민족주의는 항상 자민족의 우월함을 선전하기 위해 타자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근대 일본의 민족주의는 중국 특히 한국을 부정적인 타자로 삼아 이들에 대한 멸시를 통해 자민족의 우월을 증명하려 했지요. 그러나 피해자인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것의 역상으로 지금의 실패를 달래기 위해 고대의 영광을 노래할 수밖에 없었지요. 가해자인 일본보다 더 긴 "반만년"의 역사를 말하거나 고대 일본의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한민족의 자취를 강조함으로써 민족의 영광을 말하려 했지요. 고대사의 영광을 말하는 우리 정신의 깊은 곳에는 근대의 참담한 좌절에 대한 보상심리와 열패감이 꿈틀거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씨개명으로 상징되는 민족말살정책과 같은 일제의 폭압에 맞서 한민족의 생존을 지키려 한 일제 하의 저항 민족주의는 당시에는 건강한 민족주의 내지 민족의식이었습니다. 프란츠 파농이 말했듯이, 제국주의의 침략 아래 민족이란 존재는 이에 맞서 투쟁하는 소수자이기에 이들의 민족주의는 상대적 진보성을 갖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시공간이 변하면 민족주의의 역할도 바뀌어야 하는 법이겠지요. 산업사회를 이룬 오늘의 한국은 더 이상 침략당하는 제3세계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하나는 지난 세기가 남긴 숙제인 국민국가 만들기와 이를 넘어선 아시아와 더불어 살기이며, 다른 하나는 국민을 넘어 시민으로 거듭나기가 아닐까 합니다. 일제시대의 민족이 국민 되기를 소망한 자였다면, 해방 후 우리들은 시민 되기를 꿈꾼 국민이겠지요. 변화하는 현재에 맞춰 역사를 재해석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일 터. 오늘의 과제를 직시하며 시효가 지난 저항민족주의가 초래한 폐단을 곱씹어 보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일본만이 아닌 주변의 야수들―중국ㆍ러시아ㆍ미국―에게 받은 가해의 아픈 상처는 우리의 기억 속에 큰 상처를 남겼고 이것이 현재 우리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항 민족주의는 마치 야누스와 같이 패배적 민족주의라는 또 하나의 숨은 얼굴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양키", "쪽발이", "돼놈", "로스케". 우리 주변의 강자들을 낮추어 부르는 비칭들이지요. "베트남 사람" "방글라데시 사람", "몽골 사람", "티베트 사람". 우리에 비해 상대적 약자들의 호칭은 편안합니다. 그러나 강자와 약자에 대한 현실적 대접은 역전되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주소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격언이 새삼 가슴에 와 닿습니다. 뼈아픈 과거사의 소산으로 우리는 주위의 4대 강국에 동포사회를 갖고 있습니다. 고려인, 조선족, 재일동포, 재미동포. 우리 밖의 또 다른 우리에 대한 서열화된 차별대우를 보며 우리 민족주의의 편협성을 넘어 시대에 맞는 건강성을 다시 얻기 위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국가, 민족, 인종, 계급, 성차(젠더)를 둘러싼 모든 사회적 울타리를 넘어 나와 생각과 이해와 처지가 다른 타자들과 연대하고 공존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시민사회에 기반을 둔 새로운 민족의식의 창출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가 아닐까 합니다. 베트남에서 온 산업연수생들의 한국어 교재에서 "우리도 사람이예요. 함부로 때리면 안 돼요"란 표현이 사라질 날이 오길 기다릴 뿐입니다(『한겨레』 2002년 11월 26일자 보도를 참조하세요).

***식민지의 아픔만이 우리를 하나의 민족으로 상상하게 하였을까?**

통치의 대상이었던 민중들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역설을 이룬 프랑스에서는 왕과 귀족이 사라지고 민중들이 국민으로 거듭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천황대권(天皇大權)"을 규정한 일본의 "명치헌법"에는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각한 시민사회의 형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일본이나 이를 거울로 삼은 우리에게 "민족" 이나 "민족주의"는 "상상의 공동체"라는 상징기제를 이용한 위로부터의 의도적인 "국민 만들기"일 수 있습니다. 박노자 선생님의 지적처럼, "사족과 상한과 노복과 백정의 자신을 구별하지 않고 다 같이 태생적으로 열등한 통치의 대상물"로 다룬 일제의 "민족적 분류법"이 양반과 상한을 "상상의 공동체"로서 하나의 민족으로 묶는 통합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 즉 식민지의 아픔만이 우리를 "민족"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식민지의 민중이 "착취와 억압의 대상"에 머무른 우민이었다고 보지 않으며, 그들이 "민족"이란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된 것이 양반과 상인을 구별하지 않은 일제 지배정책의 우연한 선물이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백성, 신민(臣民), 민중은 타율과 동원의 대상에 불과한 우민이었을까요? 기생의 딸 춘향과 일급양반의 아들 이몽룡의 자유연애를 다룬 『춘향전』과 박지원의 소설 『양반전』이 웅변하듯, 18세기 이래 우리 사회에서는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자생적 노력이 있어 왔습니다. 이러한 평등주의적 사회변화의 추세는 사노비의 해방을 선언한 갑오경장(1894년) 이후 가속화되는 추세였지요. 그러나 민족 분열정책을 통치수단으로 택한 일제의 지배정책으로 인해 양반지주의 사회ㆍ경제적 지위가 철저하게 보장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세는 1930년대까지 저지당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조선 신분제 사회의 주변인들이었던 중인과 향리, 그리고 천민계층의 백정들의 사회적 상향이 눈에 띠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추세는 식민지 공업화의 진전과 외연을 양반층 밖으로 넓힌 일제의 친일파 포섭정책이 주효한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박노자 선생님 말씀대로 우리에게서 신분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6.25전쟁에 힘입은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민족이동으로 인한 동족부락의 파괴와 익명성이 보장되는 도시화의 진전이 전근대적 신분 차별을 없애는 데 한 몫을 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전통시대 특권신분층을 지칭하던 양반이란 호칭이 제3인칭 대명사로 바뀐, 모두가 양반이 된 오늘의 우리사회를 만든 동력의 주된 요인은 조선 사람들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평등사회 건설 노력에서 찾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래야만 해방 후 이승만정권의 문민독재와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 정권의 군부독재에 맞서 시민사회를 일구어 낸 우리 시민사회의 역동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반과 백정이 사라진 오늘의 우리 시민사회에 비해 한 때 우리 근대의 거울이었던 일본에 남아있는 3백만명을 헤아리는 부라쿠(部落)민의 존재가 이를 역설한다고 봅니다. 일본에서는 1871년에 에타(穢多)와 히닌(非人) 같은 천민이 평민으로 해방되고 평민과 화족ㆍ사족의 결혼이 허용되는 등 이른바 사민평등이 이루어졌다고 선언되었지만, 오늘날도 일본사회에는 여전히 천민의 후손들이 사회적 차별을 당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는 다음의 신문보도에 잘 나타납니다.

"부라쿠 해방동맹은 12만여명이 가입해 있는 인권단체. 다니모토 아키노부(谷元昭信) 부라쿠 해방동맹 중앙본부 중앙서기차장은 '19세기 후반 메이지(明治)정부 수립 후 신분차별 제도가 없어져 모두 평민이 됐지만 차별 의식·가문 중시 문화가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 있고, 법의 허점도 커 여전히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신분제도 철폐 후에도 호적에는 과거 신분·출신지역 등이 적혀 있고, 누구나 남의 호적을 열람할 수 있어 많은 개인·기업이 결혼·신입사원 채용 때 흥신소·사설탐정 등을 시켜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다니모토 차장은 '부라쿠 지역을 떠나고, 호적상 출신지를 바꿔도 호적에 원적지가 남아 있기 때문에 갓 태어난 아기도 원적지와 「부라쿠 지명 총감」을 비교하면 부라쿠 출신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부라쿠 지명 총감」에 적힌 6천여곳의 후손은 3백만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중앙일보』 2004년 3월 11일자)

***우리 근대는 일본 근대의 사생아일까?**

박노자 선생님께서는 한국 근대를 일본 근대의 강간으로 인해 세상에 나오게 된 사생아로 보시는군요. 물론 한국의 근현대사를 일제와 미제의 강간으로 일그러진 모습으로 비추일 수도 있습니다. 카터 에케트(Carter Eckert)의 <Offspring of Empire(Univ of Washington Press, 1996)>―통상 "제국의 후예"로 번역되나 "offspring"의 정확한 의미는 "후예"나 "사생아"라기보다는 "아비가 인지하지 않는 자식"이라는 의미가 더 정확한 것이겠지요―이나, 브루스 커밍스의 <Korea's Place In the Sun : A Modern History>에 보이는 바와 같이, 오늘의 한국이 이룩한 경제적 성공은 식민지 시대 일본에 의해 이루어진 산업화의 물적ㆍ인적 토대를 바탕으로 해방 후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에 기생해 종속적으로 성장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물론 일본 근대는 우리 근대의 거울이었기에, 한국 근대의 식민지적 기원을 부정할 수만은 없겠지요. 전체주의와 미성숙한 시민사회로 특징지어지는 일본 근대를 모방한 우리 근대의 난맥상―개발독재와 친일세력의 미청산 등―을 옹호하거나 미화하려는 생각은 저 역시 없습니다. 허나 이처럼 한국 근대의 식민지적 기원만을 주목할 때, 우리의 근현대사는 일제와 미제에 의해 종속적이고 타율적이며 기생적으로 전개된 타율과 종속의 역사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흡하긴 하지만 개발독재를 자력으로 극복한 현존하는 한국 시민사회의 성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물론 외생적 요소가 오늘의 우리를 이루는 데 큰 몫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적으로 시민사회를 일구고 경제적으로 산업화를 이루기까지, 개발독재와 맞서 싸우고 묵묵히 일한 우리 민중 아니 시민들이 뿌린 땀과 희생을 정당히 평가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박노자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일본 근대의 사생아인 전체주의의 유산, 배타적 민족주의, 패배적 민족주의를 넘어 세계와 더불어 살아갈 건강한 민족의식 아니 시민의식을 기르기 위해서는 열패감을 넘어 우리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자긍―자만과 준별되는―의 역사의식도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탈근대만을 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

민족주의는 사회적 강자를 위해 소수자와 약자를 희생하는 허위의식일 수도 있습니다. 박노자 선생님 지적처럼 민족주의는 국민국가의 희생양들에게 모순에 가득 찬 현실의 사회관계와 계급적 모순을 감추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기능합니다. 식민지 시대 여성들은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양날의 칼에 찔린 피해자였습니다. 근대 만들기란 거대 담론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와 같은 소수자와 여성과 같은 약자에게는 억압과 약탈의 기제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 역시 그 동안 간과되었던 개인의 발견과 젠더와 환경 같은 상대적으로 조그만 문제들에 관한 미시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 국가들이 두 세기 전에, 그리고 일본이 한 세기 전에 달성한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을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떠안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역사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지체로 인해 우리는 근대 이후의 문제와 더불어 근대의 완성도 꾀해야만 하는 이중의 책무가 우리의 위에 놓여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과 국가의 통합작업을 완수해야 하고, 진정한 시민사회를 구현해야 하며, 세계와 더불어 살기를 도모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국민국가의 완성이라는 근대과제와 약자와 타자와 더불어 살기라는 탈근대 과제를 함께 추구해야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연대와 공존의 새 시대를 바라며**

한국은 왜 일본을 따라 배우면서도 고마워하지 않고, 일본은 과거의 잘못에 대해 독일처럼 진솔하게 반성하지 않을까요? 한ㆍ일 두 나라도 독일과 프랑스처럼 해묵은 갈등과 반목을 넘어 화해와 연대의 새 시대를 열 수는 없을까요? 독일과 프랑스의 사례 외에도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약소국 핀란드의 경험은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과 시사를 줍니다. 핀란드는 1293년에 스웨덴 왕국에, 1809년에는 러시아에 합병되었다가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는 틈에 독립하였습니다. 이후 핀란드는 스탈린 시대의 소련과는 힘겨운 전쟁을 치러 주권을 지켰으며, 냉전의 와중에서 동ㆍ서 양 진영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중립정책을 펼쳐 번영을 일구어 왔습니다.

작년 겨울 헬싱키대학에서 열렸던 학술회의 기억나시지요. 그 때 저는 헬싱키 시내 한 복판에서 마주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Aleksandr II, 1818~1881)의 동상에 놀라고, 스웨덴어가 핀란드어와 나란히 공용어로 쓰이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치 서울 한 복판에 메이지 천황의 동상이 서있고 일본어가 우리말과 함께 국어의 지위를 누리는 것이나 진배없으니 말입니다. 한국과 핀란드가 한때 자기 나라를 지배한 식민모국들에게 대접하는 바가 어찌 이리도 다를까요.

속사정을 들어보니 우리들이 핀란드 사람들보다 속이 좁아서인 것만은 아닌 것 같더군요.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상은 러시아에도 없던 의회를 식민지에 허용해 자치권을 보장해 준데 대한 감사이자 그의 아들의 폭정에 대한 항의 표시로 세워진 것이며, 스웨덴어에 주어진 공용어로서의 지위도 스탈린 시대 소련과 맞서 싸울 때 수십만의 핀란드 아이들을 맡아 돌보아 준 스웨덴 시민들의 배려에 대한 보답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지도자 중 어느 누구의 동상도 서울에서 찾아 볼 수 없고 일본이 한국의 근대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이유가 자명해지지 않습니까?

일본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 동아시아에서 영국과 미국의 이익을 지켜주는 "집 지키는 개(番犬)" 노릇을 한 덕에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고, 어떤 제국주의 나라에 비해서도 철두철미하게 자국의 이익을 위주로 "혹독하고, 조직적이며, 강제 동원적인 식민통치"를 펼쳤습니다. 그렇기에 일본 덕에 근대화되었다는 말에 공감하는 한국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우리들의 편협함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현대 한국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를 준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6.25전쟁에도 일본이 져야할 책임의 몫이 크며, 전후 일본의 부흥도 6.25전쟁 특수, 즉 조선의 아픔을 딛고 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재일동포를 대하는 일본의 태도를 볼 때 그들이 존중받을 만한 선진국이라고 느낄 수 없게 만들더군요.

한국인은 프랑스가 독일에게서 받은 것처럼 아직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본의 사과를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한국 사람들이 품은 적개심은 독일과 달리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오만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독일이 프랑스에게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알렉산드르 2세가 핀란드의 자치를 보장한 이면에는 그들보다 먼저 시민사회를 이룬 선진 프랑스와 핀란드에 대한 열등의식과 수치심도 작용했으리라고 봅니다. 사실 독일도 비서구 국가에 대해 저지른 과거의 악행에 대해서는 사죄한 적이 없으니 말이지요.

그러니 일본이 반성하지 않는 것도 그들의 탓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프랑스나 핀란드가 그들의 점령자에게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대상이었던 데 비해 한 때 일본의 스승이었던 우리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동류(東流)하던 옛 시절의 영광만을 자랑하며, 오늘날 일본인들에게 "유의미한 타자"로 거듭나기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우리는 결코 일본사람들과 당당히 연대하고 협력하는 새 시대를 열지 못할 것입니다.

봄이 다가오는 수원의 연구실에서...

허동현 드림

***도움이 된 책**

강만길. 『21세기사의 서론은 어떻게 쓸 것인가』. 삼인, 1999.
권용립 등. 『우리 안의 이분법』. 생각의 나무, 2004.
사까이 나오끼 저, 이규수 역. 『국민주의의 포에이시스』. 창비, 2003.
야마무로 신이찌 저, 임성모 역. 『여럿이며 하나인 아시아』. 창비, 2003.
왕후이 저, 이욱연 외 역.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 창비, 2003.
유영익. 『한국근현대연구』. 일조각, 1992.
윤건차 저, 이지원 역, 『한일 근대사상의 교착』. 문화과학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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