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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의 중국관-박노자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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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근-현대 한국의 중국관-박노자의 생각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5>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아마도 한국 역사 전체를 거시적으로 본다면 한국인에게 있어서 중국만큼 중요한 이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지역적 헤게모니가 파괴된 근대에 접어들어서, 한국인들의 중국관(觀)에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과거의 지적인 교류가 단절되거나 약화되고, 중국을 열등시하거나 하나의 "경제권"만으로 보는 것이 안타깝게도 일반화된 듯합니다.

전통 사회 말기의 개방적인 노론 지식인 그룹, 소위 "북학파"의 핵심적인 특징이 "청나라를 배우자"는 개혁 프로그램이었음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건륭 (乾隆) 시대 (1736-1795)의 완숙한 문물 제도는 "비루한" 조선이 지향해야 할 좌표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북학파의 거성이라 부를 만한 연암 박지원 (1737-1805)은, 그의 명작 <열하일기>에서 산해관에서의 중국 관료들의 엄중하고 공평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세관(稅官)과 수비(守備)들이 관 안의 익랑(翼廊)에 앉아서 사람과 말을 점고하는데, 전에 봉성의 청단(淸單 : 調査書)에 준한다. 대체 중국의 상인과 길손은 모두 성명과 사는 곳과 물화(物貨)의 이름과 수량을 등록하여 간사한 놈을 적발하며 거짓을 막음이 매우 엄하다. 수비들은 모두 만주인인데, 붉은 일산과 파초선(芭蕉扇)을 가지고 앞에 병정 백여 명이 칼을 차고 늘어섰다." ("馹汛隨筆", - "山海關記").

박지원은 만주인들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중국의 관료 제도의 운영을 일종의 모범으로 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물론 조공 사절의 많은 수가 보여 주는 1780년도의 청나라의 위력을, 박지원이 간과할 리는 없었습니다:

"차츰 열하에 가까워 지니 사방에서 조공(朝貢)이 모여들어서, 수레ㆍ말ㆍ낙타 등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우렁대고 쿵쿵거려서 울리는 수레바퀴 소리가 마치 비바람 치는 듯하다. (…) 삼도량에서 잠깐 쉬고 합라하(哈喇河)를 건너 황혼이 될 무렵에 큰 재 하나를 넘었다. 조공 가는 수많은 수레가 길을 재촉하면서 달린다. 나는 서장관과 고삐를 나란히 하며 가는데, 산골짝 속에서 갑자기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두세 마디 들려 온다. 그 많은 수레가 모두 길을 멈추고서 함께 고함을 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할 듯싶다. 아아, 굉장하구나" ("漠北行程錄", 8월8일甲寅).

청의 문물에 큰 존경심을 갖고 있었던 박지원이 소중화주의와 존명 (尊明)대의의 비현실적인 공론 (空論)에 빠진 대다수 조선 지식인들의 청에 대한 무지각을 아주 안타깝게 여긴 것은 잘 알려 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청에 대한 그의 관심과 호의를, 과연 요즘 한국의 일부 관벌 (官閥)이나 매판적인 학상배 (學商輩)들의 무조건적 숭미주의와 같은 차원에서 놓고 볼 수 있겠습니까?

요즘 한국의 수구적인 숭미파는 상전 나라의 이라크 침략과 같은 노골적인 강도 행각을 변호하고 거기에다가 한국 젊은이들의 피를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그야말로 미제의 지역적인 대리인다운 아부를 서슴지 않지만 연암 선생께서 청나라 관료제의 부정적인 측면 – 예컨대 총신들의 부정행각과 중앙 관료의 아첨 등 – 을 결코 좋게 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컨대 건륭 황제 말기의 중앙 관계 (官界)의 분위기에 대한 박지원의 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해내가 태평하고 임금의 자리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시새우고 사납고 엄하고 가혹한 일이 많을뿐더러, 기쁘고 성냄이 절도가 없으므로 조정에 선 신하들은 모두 그때그때 잘 꾸며대는 것을 상책으로 삼고, 오로지 황제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만을 시의(時義)에 맞는 일인 줄로 안다 (…)" ("太學留館錄", 8월9일 乙卯).

아니면, 그 당시 청나라의 총신의 권세의 상징이라 할만한, 수억 양의 뇌물을 받아 먹은 중국 사상 최악의 간신배 중의 하나 사람 만주인 화신 (和珅: ? - 1799)에 대한 연암 선생의 평을 들어 보면 어떨까요:

"그는 눈매가 곱고 준수한 얼굴에 기운이 날카로웠으나, 다만 덕기가 없으며, 나이는 이제 서른하나라 한다. 그는 애초 난의사 (鑾儀司: 황제의 의장대) 호위 군졸 출신으로, 성격이 몹시 교활하여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었으므로, 불과 대여섯 해 사이에 갑자기 귀한 자리를 얻어서 구문(九門: 수도 수비대)을 통령하는 제독이 되어, (…) 언제나 황제의 좌우에 붙어 있으므로, 그 세력이 조정에 떨쳤다.

(…) 사람들이 함부로 눈을 뜨고 바로 보지 못한다. 그리고 황제가 이제 여섯 살 나는 딸을 화신의 어린 자식에게 약혼시켰는데, 황제의 나이가 늙어서 성격이 점차 조급해져 노염이 잦으므로 좌우에게 매질하기가 일쑤였으나, 그가 이 어린 딸을 가장 사랑했으므로, 황제가 크게 성낼 때면 궁인이 번번이 이 어린 딸을 껴안고 와서 황제 앞에 놓는다. 그러면 황제가 노염을 그친다 한다" ("太學留館錄", 8월12일 戊午)

이와 같은 촌철살인 격의 정확한 비판을, 요즘의 친미 인사들이 과연 건륭 황제보다 백배 더 무능한 폭군 부시의 월포비츠나 체이니 등의 – 화신에 비해서 천하에 훨씬 더 큰 해악을 끼치는 - 부하들에 대해서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선조들의 중국관(觀)과 요즘 수구주의자들의 대미관(觀)을 "사대주의"라는 같은 용어로 같이 묶을 수 없을 듯합니다. 통찰력과 비판 능력의 수준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선비들의 통찰력과 양심에 기반한 박지원과 같은 선구자들의 다면적인 중국관(觀)에서는, 우리가 과연 타자를 잘 보고 다(多)차원적으로 이해하는 기술을 배워야 되지 않을까요?

북학파의 중국관의 여맥을 이은 것은 1880-90년대의 소위 온건 개화파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윤식 (金允植: 1835-1922) 등을 중심으로 한 이 그룹은, 그 당시의 청나라 "양무" (洋務) 운동의 각본대로 유교 사회의 기본틀을 보존하면서 청나라의 "보호" 아래에서 "서양 오랑캐"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서구 기술을 일단 받아들이는 것을 지향했습니다(<陰晴史>고종18년12월27일條).

중국의 "양무 개혁"보다 일본 메이지 모델에 훨씬 더 경도한 것으로 평가 받는 실무 개화파 인사 어윤중 (魚允中: 1848-1896) 만 해도, 고종에게 상무 (商務)진흥의 방법으로서 19세기 후반 중국의 관료 자본주의의 상징인 초상국 (招商局: 정부에서 출자하여 이홍장이 직접 나서서 1872년에 상해에서 세운 선박 회사)을 내세운 적이 있었습니다 (<從政年表>, 고종18년12월14일條). 그런데 온건 개화파의 중국 헤게모니의 현실 인정은, 생각 없는 맹신과 추종을 결코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이 그룹의 정신적인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박규수 (朴珪壽: 1807-1877)는, 1872년에 사신으로 중국에 두 번째 갔다 온 뒤에 다음과 같은 소감을 한 개인적인 편지에서 밝히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사대부들도 러시아 세력을 우려하고 있으나 만주 계통의 관료들은 그냥 음식을 배불리 먹고 술을 즐기면서 아무 일 안하고 (豢酣無爲), 한인 계통의 관료들은 문약에 빠져 [현실적인] 일을 멀리 한다 (文弱疎逖). 천하의 일이 결국 어떻게 될는지 알 수가 없다. [거기에다가] 도처에서 물가가 폭등돼 (錢輕物重) 우리 나라보다 훨씬 심하다" (<박규수전집>, 상권, 書牘, 與溫卿). 물론 그 당시의 온건파 선비들의 정보 수집 능력과 통찰에 분명한 시대적인 한계도 있었지만 비판적이며 분석적인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했던 것을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청나라가 결국 더 급진적인 서구화를 지향한 일본으로부터 1894-95년간에 엄청난 패배를 당했다는 결과를 아는 우리는, 목적론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양무" 운동의 "전근대적 한계성"부터 지적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조선인의 눈으로 본다면, 박규수-김윤식 식의 중도 정책이야말로 조선 사회의 반상 (班常)이 적어도 어느 정도 함께 납득할 수 있었던 "합의의 정치"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온건 개화파도, 급진 개화파도 추구했던 것이 궁극적으로 서로 약간 다른 형태의 권위주의적인 주변부형(型) 관료 자본주의이었다는 점, 둘 다 지주 출신의 극소수 중앙 관료를 중심으로 형성된 점 등으로 봐서는 둘 다 반(反)민중적인, 억압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94년의 갑오 내각을 이룬 온건 개화파 출신들이 일군 (日軍)에 의한 동학 말살을 적극 긍정했다는 것은, 한국의 "위로부터의 개혁"의 역사에서 엄청난 오점으로 남을 듯합니다.

그런데, 서구인보다 더 서구적으로 되려고 애쓰던, 조선인들을 "열등 종족"으로 규정했던 윤치호 형(型)의 오리엔탈리즘적 "급진주의자"들보다, 그나마 조선의 종래의 생활 패턴과 문화를 존중할 줄 알았던 "온건주의자"들은 일종의 "차악" (次惡)으로 생각되시지 않으십니까? 급진 개화파의 악질적인 서구 중심주의는, 역시 그들의 중국관(觀)에도 그대로 반영된 셈입니다.

온건 개화파가 중국의 경험을 배우고 중국으로부터 근대 기술 (전기, 전신, 무기 제조 등)을 대량 수입하는 반면에, 윤치호나 서재필과 같은 급진 개화파의 대표자들이 극단적인 반청 (反淸) 감정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둘 다 청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가 조선에 "독립"을 안겨주었다고 생각했으며 "부패한 청나라"를 "약육강식 시대의 부적자 (不適者)"로 인식했습니다.

물론 중국의 조선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그들의 반청 감정을 크게 자극한 듯했습니다. 1884년부터 조선에 대한 "예속화 정책"을 편 청나라는 고종의 독립적 외교의 시도들을 막고 중국 상인의 조선 침투를 장려하는 등 대표적인 "이차적 제국주의"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중국이 전통적인 온정주의를 버리고 고압적이며 착취적인 – 그러면서도 미국과 같은 선진 제국주의와 달리 교육, 의료 등의 선진 문물 이식의 효과를 내지 않는 - "후진 형 제국주의"로 돌아서자 조선의 근대 지향적 지식인들의 중국에 대한 반감이 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반감의 실질적인 모습을, 아마도 <윤치호일기>에서 가장 여실히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임오 군란 때 서울에서의 유혈 진압을 잔혹하게 단행하고 대원군을 납치하고 그 뒤에 매사에 내정 간섭을 자행해 온 중국의 거만한 관료에 대해서 윤치호가 맹렬한 거부감을 가져 중국군을 "도야지 군대" (豚卒: 1884년1월4일)로, 중국 조정을 "오랑캐 조정" (胡廷: 1884년1월21일), 그리고 내정 간섭의 주범인 원세개 (袁世凱)를 "도야지 원" (豚袁: 1886년10월17일)이라고 각각 불렀습니다.

조선의 임금이 1884년의 갑신 쿠데타의 실패 이후에 거의 "오랑캐의 포로" (1884년12월21일) 신세가 되고 관료로서의 윤치호의 담당 분야이었던 외교부터 중국의 거의 무한한 부당 갑섭을 받은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분노를 어느 정도 정당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중국의 간섭이 부정적인 측면들이 많음에도 일단 다른 – 훨씬 더 위험한 – 야수들의 조선 침략 야욕을 아직 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한 유길준 ("중립론")이 윤치호에 비해서 보다 지혜롭고 판단력이 좋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윤치호의 심정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 않습니까?

요즘 일에 관한 여담이지만, 티베트의 평화적 민족 운동을 탄압하고 미안마의 군사 독재를 적극 후원하는 등 다소 폭력적인 지역적 패권 국가의 태도를 취하는 현재의 중국의 현대판 "이차적인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반미적 성향이 뚜렷한 한국 진보적 지식인마저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똑같지 않습니까? 군사력을 내세워 동아시아에서 패권 정책을 추진하는 미국이 미워도, 지난 100년 동안 제국주의적 가치를 충분히 내면화한 중국이 만약 미국을 동아시아에서 퇴진시킨다면 과연 평화와 안정만을 지향할는지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기 생산 늘리기를 통한 경제 위기의 일시적인 만회와, 몰락해 가는 패권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지구 곳곳에서 발악적인 침략을 자행하고, 잘못하면 한반도에서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미국에 비해서야, 일단 지금으로서 경제 개발을 중점을 두고 권내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 (일본, 한국, 대만)에 대한 우선적으로 경협 정책을 내세우는 중국은 특별히 시급한 위협으로 전혀 보이지는 않지만 "모방적 제국주의"에 대한 경계 태세를 완전히 풀 수 없는 게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윤치호 류의 "반청론" (反淸論)이 단순히 현실적인 역학 관계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닌, 담론적인 차원에서 서구와 일본의 멸시적인 중국관(觀), 즉 그들의 악명의 오리엔탈리즘을 모방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국주의적 성격이 짙어 져 갔던 원세개의 "중화 중심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던 윤치호 등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들이 중국을 포함한 모든 비(非) 서구 지역들을 다 영원한 "기형아", "발달의 불능자"로 치부하려고 했던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담론적인 무기를 빌린 것이, 과연 결국 그들의 대(對)중국 저항을 서구의 침략주의적 논리에의 포획 (捕獲)으로 둔갑시킨 것이 아니었습니까?

<윤치호일기>의 초기 부분 (1880년대)만 보더라도 1883년부터 서구인, 미국인들과 일상적으로 접촉해 온 그가 그들의 중국 인식을 어떻게 체화 (體化)했는지를 잘 지켜 볼 수 있는 듯합니다. 그는 이미 1884년에 고종에게 "구미 국가들이 중국인들을 다 노예처럼 생각하고, 인정이 두터운 미국에서마저도 그들을 좇아 낸다"고 아뢰는 (1884년9월24일) 등 구미인들의 인종주의적 억압을 "중국의 완고함"에 대한 "당연한" 반응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 오리엔탈리즘적 중국 멸시론이 심해지기만 했습니다.

그는 유럽인 못지 않게 "입만 벌리면 개똥과 같은 더러운 냄새 나고, 이빨을 딱지 않고 허풍 떨고 떠들어 대는 것만 좋아하고 게으르고 뜻 무의미한 고전이나 시가 (浮文) 만 잘 읽는" 중국인 (1885년2월15일)들에 대한 거의 체질적이다 싶은 인종적인 반감을 가지게 되고, 서구인 전용의 상해 공원에 중국인들의 출입 금지에 대해서 "호인 (胡人: 오랑캐)"의 탓으로 돌리고 (1885년5월24일), 프랑스에 의한 베트남의 식민화 라는 서구 제국주의의 강도질까지도 "베트남이 중국을 상국 (上國)으로 섬겨 의지한 탓" (1885년11월17일)이라는 상식을 벗어난 정세 인식을 보입니다 (그러면 베트남이 중국과 절교했다면 프랑스를 이겼겠습니까?).

189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사회진화론을 "최고의 진리"로 받들게 된 그는, 미국 내에서의 중국인에 대한 억압과 인종주의적 배제를 옹호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아무리 "유럽인보다 더 유럽적으로" 중국을 짓밟는다고 해도, 본인도 비(非)서구 출신인 윤치호는 자신도 서구인의 인종주의적 멸시를 결코 면치 못했으며, 그 멸시로 인해서 입은 상처가 그를 결국 "소신 친일파"로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한 모양입니다. 이외에 그가 첫 부인을 기독교 신도 출신의 – 매우 서구화된 - 중국 여성으로 맞이하는 등 적어도 개인적인 인간 관계의 영역에서 서구의 인종주의자들과 상당히 다른 대(對)중국 태도를 보인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나 서재필 등의 초기 친미적 급진 개화파들이 보인 중국에 대한 담론적인 오리엔탈리즘은, 결국 한국 사회의 새로운 "주류"로 부상한 서구 중심적 "신교육"의 수여자의 세계 인식의 하나의 기초가 된 셈이었습니다. 지금 한국 자본이 투자되거나 직접 지은 현지 공장에서 고용된 약 1백만 명 이상의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착취, "중국"이라는 범주에 들어가게 된 동포인 조선족에 대한 극단적인 멸시와 배제, 일본이나 서구의 문학 등에 대한 과열된 관심과 대조되는 중국의 현재 문학 등의 고급 문화에 대한 상대적인 무관심, 박정희 등의 역대 정권의 화교 박대 등의 오늘날의 대(對)중국 태도의 여러 문제점들은 상당 부분 바로 이와 같은 우리들의 "모방적 오리엔탈리즘"과 무관하지 않는 듯합니다.

물론, 서구 지향적 개화파가 중국을 열등시하고 불신했다 해도, 중국과의 지적인 교류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안창호 (安昌浩: 1878-1938)이었지만, 그도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개화 논객 양계초의 문집을 정독하고 학교 교과서로 삼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했습니다. 인종주의적 색채가 뚜렷한 오리엔탈리즘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른 윤치호마저도, 조혼의 피해를 논 할 때 청나라 논객들의 의견을 참고하는 (<대한자강회 월보>, 제2호, 1906년8월, 58-59쪽) 등 중국 지식인과의 지적 대화를 완전히 끊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시절에도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의 사상적인 움직임들을 예의주시했습니다. 현대 중국의 대문호 노신 (魯迅: 1881-1936)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광인 일기> (狂人日記)를, 안창호의 국내 제자들이 운영했던 잡지 <동광>의 제16호 (1927년8월)에 변역, 게재한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국내 지식인들에게도 중국은 "가까운 이웃"이었지만, 중국에 가서 독립 운동을 전개하신 분들에게 중국 지식인들과의 연대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예컨대 김규식 (1881-1950?) 선생이라는, 중국을 무대로 삼은 독립 운동가는, 미국에서 서구 중심주의적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여러 유수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중국 현대 시인들의 시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중국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양자강의 유혹"이라는 영문 시집을 내는 등 두 나라의 문화 교류에 아주 특별한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사 선생과 같은 지중파 (知中派) 지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본 중국과 우리의 지적 교류의 흐름은 두 번 크게 단절했습니다.

1937년 이후부터 중국이 일본 제국의 "적국"이 된 뒤에 중국 관련 보도가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된 일이 있었고, 1949년의 중국 대륙의 공산화와 1950년의 중국군 한국 전쟁 참전 이후에 "중공"과의 교류가 끊겼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이 심한 윤치호는 그나마 중국에서의 풍부한 체류 경험과 중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라도 가졌지만 그를 계승한 남한의 친미적인 "주류"는 그것마저 없었던 셈입니다.

1990년대초부터 한중 관계에서 경제적 교류가 "붐"을 이루었지만, 중국을 열등시, 후진시하는 현재 한국의 오리엔탈리즘적 풍토는 서재필이나 윤치호의 서구 편향적 사고와 별 다름이 없어보입니다. 그리고 동시대 중국의 지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는 아직 식민지 시절만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100년 전에 존재했던 동아시아의 지적인 공동체를 새로운 시대에 알맞게 새로운 차원에서 복원하는 것이 우리의 급선무이지만, 지식인의 "중국"은 여전히 우리에게 너무나 "먼 이웃"인 듯합니다.

위와 같은 굴절과 단절들이 많은 근대적인 대(對)중국 인식 변천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제 생각 같으면 첫째 중국의 현실적인 위치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 그리고 중국 문화의 장점에 대한 큰 관심을 가지면서도 – 중국 관료제의 모순들을 정확하게 파악, 비판한 박지원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할 듯합니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중국 자본주의의 이면 – 즉, 박정희 시절을 빼닮은 중국 현재 지배층의 반(反)민중적인 행각과 서민층의 붕괴, 커 가는 약자들의 고통 –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허울좋은 "중국 자본주의의 성공" 신화를 믿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면직자, 무직자, 빈농 등의 고통의 심화가 결국 지금의 통치 집단의 권력 명분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 우리가 현실적으로도 기억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민중의 고통을 심화시키는 권위주의적 자본화에 유럽과 미국의 재벌뿐만 아니라 한국의 재벌들도 피비린내 나는 이득을 얻고 있는 부끄러운 현실을 잊으면 안될 듯합니다.

둘째는, 윤치호 류의 오리엔탈리즘의 유치한 구각을 벗어나 중국 문제의 실체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세계 체제의 맥락에서 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서구에서 가장 많이 문제로 삼는 중국의 티베트 민족 억압 정책이 중국의 어떠한 "본질적인 패권 야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서구인 자신들의 식민주의와 개발주의를 철저하게 본 딴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 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현재 지구에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평가되는 중국의 환경 문제도, 모택동 이후의 역대 통치자들의 "사람이 능히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식의 서구 근대의 왜곡된 무분별한 개발주의적 신념, 정책과도 관계가 있다는 사실, 중국에서 영업하는 서구, 미국, 일본, 한국 재벌들이 이 환경 문제를 보다 심화시킨다는 사실 등이 밝혀 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언이폐지 (一言以蔽之)하자면 중국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이 결국 오늘날의 구미 중심적인 세계 체제의 지구적 문제들의 지역적인 반영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계 자본주의적 체제가 철폐되지 않는 이상, 서구 형 복지 국가를 만들 만한 착취자의 여유가 어차피 생길 것 같지 않은 중국 안에서의 빈익빈부익부 현상과 내륙 지방, 노동자 등의 차별 대상자들의 고통이 끝날 날이 없을 듯합니다. 결국, 신자유주의로부터 피해를 입고 있는 모든 세계인들이 연대를 해서 이 체제의 본격적인 지구적 해체에 나서지 않는 한, 그리고 – 모택동 사상을 지하 서클에서 이미 다시 학습하고 있다는 일부의 중국 노동자들이 이미 하는 것처럼 – 중국에서의 자본주의 피해자들이 드디어 계급 의식을 확실히 갖고 중국 형(型) 박정희들의 죄를 강력하게 묻지 않는 한 오늘의 중국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풀릴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중국의 노동자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계급 의식과 연대, 그리고 조직을 갖고 있는 한국 민중이 중국 민중의 성장에 각종의 긍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한국 민중 운동의 가장 큰 역사적인 사명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캄캄해진 영하 10도의 오슬로에서 박노자 삼가 드림

도움이 된 책:

구선희, <한국근대 대청 (對淸) 정책사 연구>, 혜안, 1999
김명호, <열하일기 연구>, 창작과 비평, 1990, 81-98쪽.
송병기, <국역 윤치호 일기>,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1, 제1권.
이광린, "서재필의 개화 사상", - <동방학지>, 제18호, 1978.
이정식, <김규식의 생애>, 신구문화사, 1974, 94-124쪽.
총성희, <근대 한국 지식인의 대외 인식>,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0.
한국 근현대사회 연구회 편, <한국 근대 개화 사상과 개화 운동>, 신서원, 1998, 35-155쪽.
허동현 역주, <유길준논소선>, 일조각, 1987.
권혁수. "김옥균과 중국: 대중국인식의 시기적 변화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제80호.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Yur-Bok Lee. "Politics over Economics; China's Domination of Korea through Extension of Financial Loans, 1882-1894".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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