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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축제를 찾습니다"

〈김봉준의 붓그림편지 24〉월드컵 축제 유감



▲ ⓒ프레시안

오늘 밤은 비가 오는데 다행히 어젯밤 축제에는 날씨가 참 좋았습니다. 하늘이 도와서 기분 좋은 축제의 날이 되었습니다. 나도 어제(13일) 광화문 네거리와 시청 광장에 갔었답니다. 2002년 기분을 되새기며 '붉은 악마' 축제를 즐기려고 갔습니다. 이럴 때는 애인이 있어야하는 건데 짝이 곁에 없습니다. 홀로 다니며 구경하기는 좋았습니다.

오늘은 '붉은 악마' 축제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붉은 악마 축제를 말하기 전에 두 가지 상반된 견해에 먼저 주목합니다. 한편에서는 월드컵 축제가 너무 상업적이라서 사회적 이성을 망각할 정도로 위태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월드컵 축구 구경으로 노는 걸 가지고 '집 나간 이성' 운운은 지나치다, 노는 건 노는 거다, 축제를 이성주의 시선으로만 보지마라는 것입니다.

저는 문화연대가 성명서까지 내면서 걱정하는 이유를 이해는 하지만 안티월드컵운동을 하면서, 놀고 싶어 하는 '붉은 악마'의 축제문화까지 도매금으로 비판하는 것은 경솔하다고 생각합니다. 2002년 있었던 붉은 악마의 새 축제현상을 시민운동은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인 시민광장축제, 창의적인 참여형 축제, 국민적 주제의 축제로 새 지평을 동시에 단번에 성취한 놀라운 현상을 대부분의 시민운동은 외면하고 차가운 강단비평만 앞세운 듯합니다.

축제를 지나치게 이성주의로 비판하거나 사회학적으로만 접근해서는 축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미 시대의 문화를 이끄는 한 축으로서 놀이의 주체가 생겼고 축제의 주제와 방식도 바뀌었습니다. 6월항쟁을 분기점으로 광장의 축제는 시국을 주제로 하는 거대한 사회담론 중심의 집회방식에서 '붉은 악마' 식이라고나 할까, 작은 주제로 즐기기 위해 모이는 시민광장의 문화로 바뀌었습니다. 놀이문화의 주체도 바뀐 것입니다. 그 주체가 노는 것 자체가 목적인 십대 또는 이십대로 바뀌고, 방식도 단순하고 작은 생활주제로 부담 없이 즐기는 거리로 바뀐 것입니다. '내가 좋아서 내 돈 들여서 내 멋대로 논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달라진 새로운 문화현상에 대해 시민단체는 아직도 사회학적 평가만 앞세우고 있는 사이에 언론은 이를 활용해 광고 늘리기에 급급하고, 자본은 상품시장만 보고 있습니다.

정말 축제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고 싶습니다. 축제의 본질이 무엇인가 주목하고 우리의 새 문화현상을 함께 키우려는 진지한 노력이 이제는 필요합니다. 축제는 본래 갇힌 질서세계를 이탈하는 본성의 몸짓입니다. 그러니까 '이성의 집'을 뛰쳐나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계몽주의적 인문학으로 대중의 마음을 읽거나 사회학으로 대중문화현상을 객관적으로 진단하려고만 한다면 축제의 감성과 영성의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축제는 더더욱 이성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기를 바라는 일종의 반란입니다. 일상의 권위로부터 일탈을 지향합니다. 이번 토고전 때 서울시청과 광화문 거리에서 펼쳐진 붉은 악마 축제는 이벤트사가 주도한 축제입니다. 2002년 애써서 시민이 성취한 자발성을 상업주의 자본과 언론이 주도권을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상업적인 이벤트가 축제를 주도하면서 시민의 주인의식이 실종 위기에 있습니다. 축제는 시민의 자발성이 보장되는 섬세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광고 대목을 노리는 홍보경쟁, 공중파의 보도독점 경쟁, 이윤창출만 노리고 사고책임은 피하려는 이벤트 회사의 비축제적 프로그램 운영 등이 붉은 악마 축제를 망치고 있습니다. 응원 도구를 대량생산해서 보급· 판매하고 콘서트를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축제의 자발적 아이디어를 차단합니다.

일부에서는 거리의 쓰레기가 넘치고 교통질서가 문란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들어서 시민의식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던데 그것도 일방적 평가입니다. 쓰레기가 넘친 것은 상업하는 회사들이 대량 공급한 광고상품과 판촉물들 때문이지 시민이 집에서 가지고 와서 버리고 간 물건이 주된 쓰레기가 아닙니다. 시청광장과 광화문에 쓰레기가 대량으로 나온 것만 봐도 그곳에 광고물을 집중 살포한 결과입니다.

또 하나, 축제의 진행을 대형이벤트사가 주관하고 붉은 악마 단장을 자처하는 사회자가 지나치게 개입하여 본래 축제의 의미를 죽이고 있습니다. 물론 축구경기 관람은 승패에 집착하게 되어 응원 열기가 뜨겁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국가주의에 경도된 파시즘으로 보는 이도 있으나 지나친 이념적 해석으로 우려할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오히려 훌리건도 없고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는 자정력을 나는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오히려 자발적 시민의식을 신뢰하지 못하는 당국자들의 면피성 행정이나 매사에 거리를 두는 이성주의 비판자는 축제의 질서가 빛나는 자기조직력의 결과라는 사실을 주시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책임이 두려워서 스스로 여흥을 즐겨 보려고 준비해 온 응원차림과 응원 프로그램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펼치는 시민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좀 놀만하니까 초를 칩니다. 사회자의 질서 타령이 끊이지 않고 경찰들의 통제는 신속히 이뤄집니다.

거리 전광판 주변에 관람자를 모이게 했으면 놀 수 있게 놀이광장도 만들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전광판 없는 거리에서는 경기가 끝나면서 승리감에 젖은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와 스스로 모여서 놀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오히려 쓰레기가 없었습니다. 놀든 말든 거리에서 젊은이들이 활갯짓을 하는 거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오랜만에 있는 일입니까.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저도 밤 늦도록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축제를 즐기고 싶었습니다. 참 재미있고 신나는 사람들과의 만남인데 그게 채 피기도 전에 져버린 싱거운 축제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많은 축제꾼들을 만났습니다. 홀로 북을 치고 괭가리를 치며 돌아다니는 자칭 시인도 만나고, 배꼽 티에 응원화장을 한 소녀들도 보고, 붉은 날개로 치장한 다섯 선녀들도 보고, 웃통을 아예 벗어버리고 태극기 문양으로 보디 페인팅을 한 청년들도 만나고, 태극기로 망토 차림을 한 청년들은 너무 많이 보고, 해병대 차림 옷에 각종 글씨를 자수한 두 청년도 보고,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들의 응원 모습도 보고, 붉은 악마 손수건을 흔들며 대한민국을 선창하는 아랍계 청년들도 보고, 그들과 손뼉 치며 농을 걸면서 노니는 소녀들을 보고, 드럼을 들고 치며 원무의 중심에 선 청년들, 아예 풍물악기를 갖추고 나와서 풍물굿을 하며 연신 응원 장단을 선도하는 친구 등등 구경만 해도 재미있는 광경을 많이 만났습니다.

이 자발적 신명이 모이면 진짜 축제가 됩니다. 이들의 신명을 배려하지 않고 일방이 일방을 이끌고 가는 것은 가짜 축제입니다. 축제는 다시 확인하지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입니다. 조셉 캠벨의 신화학을 빌릴 것도 없이 축제의 본질은 본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해명하는 이성의 교환이 아니라 느끼고 좋아해서 이해가 되는 판입니다. 이해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니까 이해도 되는 판입니다. 좋아하게 되니까 모든 것이 이해도 되고 허물도 덮는 판입니다.

악한 감정은 오해를 쌓이게 하지만 선의의 감성은 이성까지도 포용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고 축제와 예술의 마력입니다. 이성으로는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감성에는 명암을 분명히 하는 애증이 있습니다. 그중 악한 감성은 폭력과 전쟁을 일으키지만 선한 감성은 사랑과 평화를 만듭니다. 내가 이렇게 태어난 것도 선한 감성의 결과입니다. 부모님의 뜨거운 감성이 만든 사랑 만들기의 결과입니다.

지금은 축제를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거기서는 사랑의 힘이 잉태하고 있습니다. 은밀한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뜨거운 사랑의 씨앗이 축제의 생산성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축제는 이성주의가 아닙니다. 감성과 영성으로 세상이 하나임을 체험하는 아름다운 감동을 만들려는 마당입니다. 계몽주의가 축제를 망칩니다. 놀이판마저 지도하려 합니다. 그건 축제도 아니고 놀이도 아닙니다.

무질서를 두려워하고 훌리건이 걱정이 돼어 질서를 앞세운다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입니다. 남성적 폭력성을 지금처럼 은폐한 채 방치한 결과가 오히려 범죄를 더 쉽게 만듭니다. 옛부터 시골에 범죄가 없는 것은 통과의례 축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는 폭력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특히 남성적 야만인데, 버젓한 문명 천지에 오히려 범죄가 더 기승을 부립니다. 그러기에 폭력성을 은폐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밖으로 드러내 순화시키는 사회문화적 계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축제의 순기능입니다. 전쟁놀이, 승부시합, 대거리로 사회적 갈등을 푸는 것이 축제양식입니다. 오늘의 사회가 안고 있는 폭력의 은폐성을 훤한 달밤에 끌어내어 평화로 전복시키려는 것이 바로 축제입니다.

다시 축제는 부활해야 합니다. 사랑에 굶주린 남녀노소가 광장으로 뛰쳐나와 본래처럼 낯선 이들끼리도 친교하고 악수하며 춤추며 놀 수 있는 사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부족한 것도 허물없이 보이고 우정을 나누는 구체적인 신뢰의 삶이 평화입니다. 그리하여 위선에 찬 거짓된 강요의 질서를 자발적 우정으로 축제를 만드는 민간의 꿈이 평화입니다. 축제가 지향하는, 혼돈을 넘어서는 혼돈 속의 새 질서가 평화입니다.

강요된 질서를 깨는 것이 난장입니다. 질서를 폭력적으로 깨느냐 문화적 힘으로 평화적으로 무너뜨리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난장의 혼돈을 두려워해서는 기존질서를 깨지 못합니다. 새 질서로 들어가지도, 창조적 세계로 넘어가지도 못합니다. 평화는 삶과 삶의 관계가 벽을 부수고 만나서 창조하는 신화인지도 모릅니다. 평화의 여신은 용기 있는 삶이 만나게 됩니다.

밤 한시, 경찰의 해산에 못 이겨 광화문 거리를 빠져 나오면서 뒤끝이 영 개운치 않은 축제 아닌 축제를 보았습니다. 스스로 차리고 온 놀이도구와 장신구와 가면들이 제대로 놀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갑니다. 나도 있을 법한 부드러운 감성의 여신과 놀지도 못하고 어둠의 거리를 헤매다가 돌아왔습니다. 야심한 도시 밤 어디에도 나의 여신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신은 어제 밤 나와 꿈속에서 한 약속도 저버린 채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겠다던 기약도 없이 빌딩 숲으로 사라졌습니다. 나는 잃어버린 축제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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