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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아버지와 의경 아들의 '격포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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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아버지와 의경 아들의 '격포의 눈물'

[부안 르포] 반대 여론 제일 높은 곰소-격포항을 가다

"진압할 때 어르신들한테는 너무 심하게 하지 말아라."
"아버지......"

신상규(53, 자영업)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억장이 무너지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부안군에서도 가장 핵폐기물처리장 반대 여론이 높은 변산면 격포에서 반대 운동을 이끌고 있는 입장이지만, 부안에 진압하러 내려온 아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 의경 소속인 아들이 부안에 진압하러 내려온 것만 이번이 4번째"라며 "시위대에 있는 나도 진압하러 오는 아들도 가슴에 피눈물 나고 환장하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참담한 심정을 밝혔다.

***'격포의 눈물'**

<사진 격포의눈물>

신씨는 지난 10월10일간 부안에서 전주까지 '핵폐기물처리장 반대 삼보일배'에도 참가했다. 지난 10월10일 마지막 목적지인 전북도청에 도착한 그는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다. 주민들에게 '격포의 눈물'로 불리며 유명해진 그날 신씨의 사진은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었다.

"전북도청 앞에 갔어. 그랬는데 바로 앞에 아들놈 얼굴이 보이는 거야. 그 때부터는 눈물만 막 쏟아지더라구. 아들도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은 안했지만 그 녀석도 마음이 보통 마음이 아니었을 거야."

신씨는 말을 이었다.

"아들한테 여기 부안 내려온 전·의경들이 칠순 먹은 할머니들한테도 '이 XXX아' 하고 욕한다고 얘기했더니 아들놈이 펄쩍 뛰더라구. '어떤 놈이 그러냐고, 자기는 절대 안 그런다고.' 아들한테 얘기했어. 진압할 때 어른신들한테는 너무 심하게 하지 말라구."

신씨는 "곤봉과 방패에 맞아 두 번 입원한 후 지금도 물리치료를 받는다"며 "밤이면 잠이 안와 수면제를 먹기도 하고, 겨우 잠들어도 새까맣게 몰려든 경찰들한테 쫓기는 악몽을 꾼다"고 호소했다.

***"수입 20~30%로 줄어, 손님들도 '핵폐기장 들어오면 안 오겠다'"**

25일 오후에 찾은 진서면 곰소항과 변산면 격포항에서는 부안군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전·의경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부안군에서 위도와 가장 가까워 핵폐기물처리장 반대 여론이 가장 높은 이곳에 대규모 경찰이 주둔한다면 주민들과 마찰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경찰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씨는 "경찰들이 부안읍처럼 주둔한다면 충돌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격포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신씨는 "수입이 예년의 20~30%로 줄었다"면서 "주민들이 대개 다 비슷한 처지"라고 하소연했다. 신씨는 "오늘도 서울의 단골손님한테서 내려 가서 회를 먹어도 되겠느냐는 전화가 왔다"면서 "지금 부안에서는 외부에서 온 차는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전했다.

곰소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이영희(38)씨도 처지는 마찬가지다.

"매상이 3분의 1로 줄었어요. 봄과 가을의 농번기 때만 빼놓고는 장사가 안 될 때가 거의 없던 곳인데..."

***"사람들이 '보상금 때문에 이러냐' 물으면 서러워 말도 안 나와"**

신씨는 "'도대체 보상금을 얼마나 많이 받으려고 이 난리냐'고 손님들이 물을 때 가장 서럽다"고 전한다. "손님들이 '핵폐기물처리장이 들어오면 장사를 할 수 있겠냐'고 걱정하면서도 부안 주민들을 지역이기주의로 몰고 있다"는 것이다.

이씨는 이것을 "외지인들의 이기주의"라고 지적한다.

"서울에서 온 3명의 교사들이 손님으로 와서 '핵폐기물처리장이 그렇게 위험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교사들한테 '핵폐기장이 만들어지면 선생님들한테는 매일 무료로 회를 대접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대뜸 '그건 곤란하다'고 답하더군요. 부안 사람들 입장에서 조금만 생각해도 이렇게 얘기하지는 않을 텐데."

이씨는 "청와대 앞에서 시위할 때 지나가던 사람이 '아줌마, 얼마 받고 올라와서 이거 하는 거냐'고 말을 툭 던졌을 때, 너무 속상했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부안군민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데 이를 부추기는 외부세력이 있다는 말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로 답답하다"며 "부안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씨는 격앙돼서 말을 높인다.

이씨는 "사람들이 부안 주민들을 이기주의자, 폭도로 몰면서 '전기를 끊어야 한다'고 비아냥대는 것을 들었다"면서 "솔직히 부안 사람들과 서울 사람들 중에서 누가 더 전기를 많이 사용하겠냐"고 지적했다. 이씨는 "나는 고등학교밖에 안 나왔지만, 영광 핵발전소도 가보고, 매일매일 촛불집회에서 영상물도 많이 봤다"면서 "내 눈에는 핵발전과 핵폐기물이 명백히 위험해 보이는데, 그 사람들 눈에는 그게 안 보이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내소사 김종규 부안군수 폭행사건의 진실**

이씨는 바로 얼마 전까지 이런 인터뷰를 할 처지가 아니었다. 바로 내소사 김종규 군수 폭행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수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씨는 최근에 기소유예로 판정받았다. 그 동안 도망 다니느라, 자진출두한 뒤에는 경·검찰의 수사를 받느라 장사도 못하고, 6살된 하은이와 29개월 된 아이도 보살피지 못했다.

이씨는 "몇 달 전만 해도 언론이 왜곡보도만 일삼더니 요즘은 그래도 제대로 하는 것 같다"면서 "9월8일 내소사 부안군수 폭행 사건 보도도 빠진 부분이 많다"고 증언했다.

<사진 이영희>

"그날 대책위 분들이나 스님이 김종규 군수가 군민들 앞으로 나서는 것을 막았어요. 그런데도 자기가 군민들을 설득하겠다고 앞으로 나오더군요. 그 때 그렇게 군민들이 면담 요청을 해도 만나주지 않던 군수 얼굴을 2개월 만에 처음 봤죠. 군민들은 오전부터 2시경까지 뙤약볕에서 점심도 못 먹고 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그 미운 김종규 군수가 6개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전 부안군을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돌을 던지려면 던지시고 계란을 던지려면 던지십시오' 그러더군요. 피가 확 솟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 군수 별명이 '사탕군수'에요. 당선되기 전에는 아예 장화를 차에 싣고 다니면서, 논에서 일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한테 장화신고 들어가서 인사하고 사탕도 나눠주고 그랬어요. 혹시 못 만나면 트랙터나 차 안에 사탕을 놓고 가고. 그 때 군민들이 '젊은 사람이 참 열심이구나' 했습니다. 아마 안 알아줘도 열심히 하려고 하는 모습이 측은해서 찍어준 주민들도 꽤 많을 거예요. 그런 군수가 열 받아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저 하나도 잘못한 거 없다' 그러니 사람들이 화가 날 수밖에요."

"군민들이 '위에서 내려다보지 말고 계단 밑으로 내려와서 얘기하라' 하니깐 군수가 주위 사람들이 말렸는데도 내려오더군요. 그런데 또 그 소리를 하는 거예요. '돌을 던지려면 던져라. 난 조금도 생각의 변화가 없다' 그 때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김종규 군수님 학교에 가고 싶어요' 하고 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난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가서 군수를 때렸어요. 그 때 이거 가만히 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여자들이 군수를 둘러싸고 남자들을 떼어냈죠."

"그러고 나서 한참 여자들이 군수를 보호했습니다. 그 때 일부 성난 주민이 가스통을 들고 오더군요. 경찰들이 우루루 절 내로 들어왔기 때문이죠. 주민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김종규 군수가 쏜살같이 경찰들한테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외지에서 온 경찰들이라 군수 얼굴을 못 알아봤나 봐요. 경찰들이 곤봉과 방패로 군수를 막 때리더라고요. 그러다가 한참 뒤 군수가 들 것에 실려 가는 것을 봤습니다."

이씨는 "경찰들한테 그 사실을 얘기했으나 들은 척도 않았다"며 "내가 김종규 군수 바로 옆에서 몇 시간동안 군수를 보호했었는데, 나중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군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주장했다.

(이씨의 증언은 새로운 사실이다. 프레시안은 이에 당시 현장에 있었던 주민들의 증언을 추가로 확인한 결과, 김종규 군수는 이미 주민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할 때 타박상과 골절 등 부상을 입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이씨가 증언한 대로, 주민들로부터 벗어나 경찰들에게 다가갔을 때 그를 주민으로 오인한 전・의경들에게서도 상당히 심한 구타를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돌 갓 넘은 아이가 노란 깃발만 보면 '핵폐기장 반대' 팔뚝 흔든다"**

이씨는 "처음에 '부안 사람들 너무한다'고 했던 서울 사는 여동생도 이제는 실상을 다 알고 언론에서 잘못 보도해도 주위 사람들한테 '그것이 아니다'고 얘기해 준다"며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점점 실상을 알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는 끝까지 할 거에요. 끝까지. 아이들이 경찰 하면 '우리 엄마아빠 때려잡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제 두 돌 갓 넘은 아이가 노란 깃발만 보면 '핵폐기장 반대!' 팔뚝 흔드는 게 가슴 아파도 우리는 물러날 수 없어요."

신씨도 "이제는 끝까지 갈 수밖에 없는 싸움이 되었다"고 얘기한다.

"최근에 또 없는 돈을 모아서 45인승 버스를 1대 샀어. 오늘도 45인승 버스 2대를 포함해 3백여명이 차에 나눠 타고 부안 성당의 촛불집회에 참석하러 갔고."

신씨는 말을 이었다.

"우리도 양보할 만큼 했어. 주민투표를 받아들인 것만 해도 그래. 그런데 노 대통령이 그걸 거부했으니, 우리도 이제는 '완전 백지화'될 때까지 싸울 거야."

<사진 아이들>

곰소와 격포의 주민들은 카메라를 든 기자가 지나갈 때면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크게 터뜨렸다.

"이게 무슨 참여정부여. 5공, 6공 때보다 더 심혀. 전경들이 골목골목마다 지키고 있어서 밤에 무서워서 나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사람들 눈에 피눈물 나게 만드는 게 무슨 정부가 할 짓이여."

<사진 영업소>

<사진 페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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