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싸움을 지지하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부안을 찾은 독일의 물리학자 오다 베커, 줄리아 벤슨과 프랑스의 환경운동가 장 이봉 랭다크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내내 이구동성으로 "부안의 싸움은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라면서 "부안 주민들의 저항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한국정부, 지역주민 배제하고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을 것"**
부안은 이제 국내뿐 아니라 국제 시민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는 지역이 됐다. 부안에서는 25일부터 이틀 동안 '반핵 국제포럼'이 열린다. 부안주민들의 반핵싸움을 돕고, 동시에 부안사태를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참가자 가운데 부안 성당을 제일 먼저 찾은 오다 베커, 줄리아 벤슨, 장 이봉 랭다크 등 세명은 평생을 핵발전소와 핵폐기물처리장 반대 운동에 동참해온 이들이다.
오다 베커는 독일의 핵물리학자로서 핵발전소와 핵폐기물처리장에 반대하는 NGO(비정부기구)들을 이론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해왔고, 오스트리아 정부의 핵에너지 정책을 자문하고 있다. 대부분의 핵물리학자들이 핵산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길을 걷는 현실과는 달리, 그는 인터뷰 내내 핵발전이 왜 위험한지, 핵에너지 정책은 왜 철회돼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강조했다.
오다 베커와 함께 방한한 줄리아 벤슨과 장 이봉 랭다크는 경력부터 예사롭지 않다.
벤슨과 랭다크는 "1살 때부터 어머니 손에 들려 반핵 집회에 참석했다"면서 "반핵 운동과 함께 일생을 같이했다"고 당당하게 밝힌다. 물리학 박사과정 학생인 벤슨은 최근 독일에 국한하지 않고 캐나다 우라늄 광산에 대한 환경단체들의 반대 운동과 연대해왔다. 랭다크는 그린피스 등 6백50여개 환경단체의 네크워크인 '프랑스 핵발전 폐지 네트워크'의 대변인으로 20년 이상 반핵운동에 참여해왔다.
이들은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핵발전소나 핵폐기물처리장을 반대하는 지역 주민과 NGO, 학자들이 나섰을 때 정부는 경찰을 2~3만명씩 동원해 억압했지만 결국 저항을 막는 데 실패했다"며 "한국정부는 지역주민을 배제하고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독일과 프랑스의 투쟁 경험을 소개하면서 "부안 주민들을 고립시켜서는 안 된다"며 "핵에너지에 반대하는 전국의 시민들이 부안에 모여서 싸움에 동참해 한국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번 부안의 싸움이 단순한 핵에너지 반대 운동을 넘어 풍력, 태양 에너지 등 재생가능 에너지로 전환하는 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오다 베커, 줄리아 벤슨, 장 이봉 랭다크와 부안 성당에서 24일 저녁에 이루어진 인터뷰 전문.
<사진 1>
***70년대 말 프랑스 서부의 작은 마을, "권총에 맞선 돌"**
프레시안 : 핵발전소나, 핵폐기장과 관련해서 프랑스에서도 부안과 같은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 움직임이 있는가?
장 이봉 랭다크 : 물론이다. 1970년대 말 프랑스 정부는 서부 브르따뉴 주에 있는 인구 3천여명의 작은 마을 플로고프(Plogoff)에 핵발전소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때 정부의 핵발전소 건설에 반대하는 전국의 10만여명이 플로고프에 와서 반대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처음에는 환경운동가와 교회를 중심으로 반대했으나, 점차 지역의 농민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싸움이 장기화될수록 외부의 연대도 두드러졌다.
<사진 플로고프>
프레시안 : 플로고프 주민들이 반대한 이유가 무엇인가? 부안의 경우에는 정부가 주민들의 의사를 묻지 않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랭다크 : 어느 나라나 정부가 하는 행동은 비슷한가 보다. 플로고프에서도 정부는 주민의사를 전혀 묻지 않았다. 플로고프는 브르따뉴주 안에서도 5번째로 선정된 후보지였다. 플로고프 주민의 의사를 묻지 않고 정부가 강행한 것에 대해서 브르따뉴주 전체에서 큰 반발이 있었다. 어느 날은 브르따뉴주의 모든 도로 이정표를 흰색 페인트로 지우고 'PLOGOFF'라고 써서 연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프레시안 : 정부 결정이 철회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가? 결정적인 철회 계기는 무엇이었나?
랭다크 : 4년이 걸렸다. 주민들은 그 기간동안 일관되게 "NO!, NO!, NO!"를 외쳤고, 그 과정에서 반핵운동에 앞장선 시장 후보가 90%이상 지지를 받아 당선되는 일도 있었다. 계속 주민들을 강압적으로 억압해온 정부도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정부 결정은 철회됐다. 후보 시절 핵발전소 건설 결정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던 미테랑 대통령을 압박하기 위해서 플로고프와 브르따뉴 주민들은 그의 연설회에서 "플로고프"를 외치면서 그의 대답을 끌어냈다. 물론 주민들은 거의 매일 집회를 가졌다.
***독일 정부, 23년간 10억 유로를 쏟아 붓고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겠다" **
프레시안 : 독일의 경우는 어떤가?
오다 베커 : 골리븐은 독일 북부 니더작센주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 독일 정부는 1977년에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건설할 계획을 발표했다. 주민들과 전국의 시민들은 즉각 반대하는 움직임을 조직했고, 1979년에는 10만여명이 골리븐에서 1주일 동안 대규모 집회를 벌였다. 학생들은 자전거를 타고, 농부들은 트랙터를 타고 니더작센주의 주도인 하노버까지 행진을 했다.
<사진 골리븐>
프레시안 : 결과는 어떠했나?
베커 : 골리븐의 핵재처리 시설 건설 계획은 2년만에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1977년의 건설계획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다. 다만 정부는 주민을 비롯한 국민들의 신뢰 회복이 핵시설을 짓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쏟아 부은 10억 유로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논의를 전면 무효화하는 결정을 내렸다. 부지선정 조사를 비롯한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그러한 정부의 결정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베커 :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로 인해 독일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30여년 이상 지속된 반핵운동도 독일 국민들이 핵에너지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정부도 반핵운동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고 단계적으로 핵발전을 줄이는 정책을 펴고 있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1982년에 건설을 시작한 핵발전소를 마지막으로 1991년 이후에는 핵발전소를 전혀 건설하지 않았다. 또 11월 14일 최초로 핵발전소 1기를 폐쇄했다. 독일에서 핵발전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부안문제, 외부와의 연대와 전반적인 반핵 인식 확산이 해결의 열쇠"**
프레시안 : 부안 주민들이 현재 상황을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1980년 광주' 운운하는 것은 그 당시와 비슷한 철저한 고립감이 큰 이유이다. 플로고프와 골리븐 같은 경우는 외부의 연대와 지지가 컸던 것 같다.
오다 : 독일에서는 핵에너지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골리븐에 모여 지지 활동을 벌였다. 한국에서도 모든 반핵 세력들이 부안에 모여 함께 싸우는 것이 관건이다.
골리븐에서는 사람들이 참 흥겹게 싸웠다. 어린애들부터 할머니까지 참여한 집회에서는 언제나 각종 재미있는 음악과 퍼포먼스들이 이어졌고, 사람들은 싸움에 참여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보다는 즐거워했다. 이런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가 싹텄고 이것은 계속 싸움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부안의 싸움은 '에너지 민주주의'를 위한 첫 걸음**
줄리아 : 현재 부안 주민들의 싸움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에너지 민주주의'를 획득할 것인가 아니면 핵에너지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다. 부안 주민들의 싸움은 바로 한국에서 '에너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첫 걸음이 될 것이다.
더구나 핵폐기물은 수천년 동안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현 세대는 100% 안전을 확신할 수 없는 관리의 짐을 후손들에게 떠넘길 권리가 없다. 대신 우리는 그들에게 핵에너지 외에 다른 재생 가능 에너지를 남겨야 할 의무가 있다.
<사진 광대>
프레시안 :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반핵운동과 재생 가능 에너지에 대해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신뢰를 얻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프랑스는 현재 핵발전 의존도가 70%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 독일이 점차 대안에너지로 방향을 돌리는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랭다크 : 당신 지적이 맞다. 프랑스 정부는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핵에너지 정책을 국민들에게 홍보하고 또 그것을 계속 확대해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거짓말을 국민들에게 해왔다. 이에 저항해 환경단체들은 정부의 거짓말들을 계속 지적해왔고, 핵에너지의 문제점을 계속 알려나가면서 국민들의 신뢰를 쌓아왔다. 이런 과정을 통해 프랑스 국민들은 핵에너지에 관한 한 정부의 말보다는 환경단체의 말을 더 신뢰한다.
한 가지 역설적인 상황은 프랑스 국민들의 61%가 새로운 핵발전소에 반대하는 반면, 프랑스 의원들의 77%는 추가적인 핵발전소에 찬성한다는 것이다. 핵산업계와 의원들 사이의 부패의 끈을 상상하지 않고서는 나는 이런 일을 이해하기 힘들다.
사실 프랑스 정부가 국민들의 점증하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핵에너지 정책을 밀고 나가는 것은 프랑스가 핵무기 보유를 원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프랑스 정부의 핵에너지 확대 정책을 추종한다면, 그것은 매우 불행한 결과를 나을 것이다.
베커: 독일에서는 핵에너지에 대한 반대 운동과 재생 가능 에너지 등 대안에너지 운동이 함께 나아가고 있다. 30년에 걸친 반핵운동의 경험은 유럽에서도 가장 선도적으로 풍력과 태양력 등 재생 가능 에너지 개발로 이어졌고, 독일은 현재 그 분야에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 산업 성장 가능성도 매년 높아가고 있는 추세다.
나는 5년 전부터 범유럽 차원의 태양에너지 프로젝트에 참여해 왔는데, 이 역시 끊임없는 반핵운동과 대안에너지 운동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 정부, 지역 주민 배제하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프레시안 :한국정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랭다크 : 1980년대에 프랑스 정부의 핵폐기물처리장 장소를 물색하기 위한 모든 시도가 거부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곧 자기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핵폐기물을 둘러싼 가장 큰 문제점은 과학적·공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문화적인 것이라는 점을.
더군다나 내가 듣기에 한국 정부는 최소한의 과학적·공학적 근거마저도 주민들과 공유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 신뢰성도 매우 의심스럽다. 이런 상태에서 주민들에게 "안전하니 따라오면 된다"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주민들을 설득할 수 없다. 정부와 주민 사이에 핵폐기물처리장이나 핵에너지 정책에 대한 철저한 정보 공개와 사전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베커 : 독일과 프랑스에서 핵발전소나 핵폐기물처리장을 반대하면서 지역 주민과 NGO, 학자들이 나섰을 때도 정부는 경찰을 2~3만명씩 동원해 억압했지만, 결국 저항을 막을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지역 주민을 배제하고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부안 사람들의 인상적인 투쟁에 끝까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