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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무현정부에 '인권'은 있는가?

<주장> '위선의 권력'에 대한 저항은 시대적 필연

민주화된 시대를 내세우고 있는 노무현 정권에게 <인권>은 없다. 이는 민주주의의 근본이 상실된 현실을 의미한다. 노무현 정권은 “위선의 권력”으로 자기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권은 천부적(天賦的) 권리가 된다. 이 권리를 포기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권력의 지속적인 속임수와 공권력을 빙자한 폭력,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인권탄압은 그 권력의 정통성을 자신이 무너뜨리는 것이자, 그와 같은 권력의 교체를 향한 변혁운동의 발생을 필연적으로 가져온다. 노무현 정권은 지금 그 지점을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인권탄압, 민중의 저항 필연적**

이는, 지난 해 봄부터 이 땅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던 서민대중들의 새로운 역사적 각성과 그 각성의 정치적 관철과정인 민주혁명의 결실로 태어난 정권이 그 혁명의 정신을 하나씩 배반하고 반동화(反動化)하면서 도달하게 된 비극적 현실이다. 그러나 그 반동의 역사를 수수방관하면서 그대로 허용할 정도로 이 나라 민중들의 힘이 더 이상 무력하지 않다. 민중의 숨결과 함께 하지 않은 권력이 민중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완벽한 오산이다.

오늘의 위기가 개혁정치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거대한 반격으로 인한 것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진상의 중심에는 기득권 세력 내부의 패권 장악을 위한 권력투쟁을 개혁으로 위장하고, 정작의 개혁과제의 요구에 대해서는 귀를 막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기만과 대응의 포악성이 존재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노동자ㆍ농민들의 시위와 파병반대, 부안 사태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시국과 관련하여 “지금이 정부에 대한 저항권을 발동할 시기인가?”라면서 이른바, “민주화된 시대의 현실을 퇴행시키고 있는 시위문화 비판론”을 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대화와 타협의 틀을 넘어서고 있는 저항운동의 시대적, 윤리적 모순을 지적하고 나선 셈이다.

그러나 대화와 타협의 틀 자체를 근본적으로 파괴한 것은 정의를 요구하는 양심과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이들의 분노에 대하여 기만적인 대응과 반인권적 폭력 진압으로 일관한 노무현 정권 자신이다. 시대착오적 행태를 보인 것은 다름 아닌 노무현 정권이다. 원인과 결과를 호도하고 폭력적 진압에 대한 정당방위적 대응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오만과 관료주의적 독선으로 사태 악화**

가령 현재 핵폐기장 설치문제로 격렬한 진통을 겪고 있는 부안의 경우, 중앙권력의 횡포에 대한 민중들의 정면 도전과 이에 대한 권력의 - 군사주의 통치시절에서나 볼 수 있는 - 반민주적인 긴급조치식 대응이 대치하고 있다.

부안사태의 핵심적 책임은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민주적으로 반영하는 노력과 과정 없이, 정치적 오만과 관료주의적 독선으로 소위 “국책사업”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환경 파괴를 초래할 위험도 높은 사안을 억압적으로 밀어붙이려 한 노무현 정권에게 있다. 노무현 정권은 오늘의 위기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제공자인 동시에 사태악화를 자초하고 있는 당사자인 것이다.

비밀 경찰력의 강화와 이로 인한 인권유린사태를 낳고 있음이 비판되고 있는 미국의 테러방지법을 본뜬, <치안유지법>에 해당하는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는 상황도 노무현 정권이 이러한 법이 가져올 인권파괴의 가능성에 대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는 파시스트 권력으로 변화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국제사회의 제3세계 테러리즘은 미국의 제국주의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주시할 때, 테러의 근본원인은 미국의 정복주의적 지배정책의 폐기로 제거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부 폭력적 양상으로 나타나는 민중들의 저항은 이들의 요구에 대한 외면과 정치적 독선에 근거한 <진압정책의 철폐>에서 우선 그 원인의 제거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테러방지법 통과 등으로 권력의 폭력성 강화 조짐**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자신의 폭력은 정당화하고 그에 대한 자기방어적 대응은 불법적 행태로 규정함으로써 사태의 악순환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권력과 민중의 대대적 충돌로 점화해가고 있는 위기가 내다보이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신념과 인권수호를 위한 헌신적 자세가 공백인 상태에 있는 권력의 추악한 선택의 결과이다.

노무현 정권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세는 대외정책의 사유방식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국가테러>의 완결판으로서 침략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미국 부시정권이야말로 국제 테러리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실이 그러함에도 미국 부시정권은 자신의 이라크 침략전쟁이 “중동지역의 민주화정책을 위한 선택”이라고 온 세계 인류의 양심에 맞서서 강변하고 있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이에 입을 맞추어 “미국의 노력에 의한 이라크의 민주화 운운”으로 파병결정을 정당화했다. 민주주의가 누구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지 현실에 눈을 감고 있는 자의 비굴한 발언이다.

소위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라는 노무현 자신의 정체성조차 스스로 배반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이 “위선과 폭력으로 무장한 권력”의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역사의 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는 지점으로 어쩔 수 없이 몰리고 있다. 이는 우리가 결코 원했던 바가 아니었으나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일대 결단을 취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하수인이 되기를 결연히 거부하지 않고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자본의 패권체제를 일방적으로 방어하며, 농민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면서 서민대중들을 비롯한 빈민들의 생활개선을 위한 정책제출은 방기하고 지역 주민들의 자치적 역량에는 철퇴를 가하고 있는 정부가 우리에게 필요한가? 게다가 한 지식인의 사상의 자유까지 냉전시대의 폐물인 “전향논리”로 강제하려는 구태를 혁파하지 못하고 있는 권력을 우리는 정당한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인가?

***반인권적 권력 비판 공유, 확산되어가야**

애초부터 역사의 육성에 귀를 기울일 자세와 역량이 없는 인물을 변혁의 지도자인 줄로 잘못 알아본 우리의 책임이 더욱 크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는 그대로 침묵할 수 없는 것이다. 권력의 폭력적 행태를 단 하나라도 인정하고 지나가는 순간, 그것은 어느새 권력의 일상적 본성이 되어 민주주의를 기어코 질식시키고 만다는 점에서 이 나라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한 저항의 결단은 피할 수 없다.

권력의 논리에 그 사회를 복종시키려는 일체화(conformity)의 폭력에 대하여 미국의 20세기 최고 지성의 한 사람인 스캇트 니어링(Scott Nearing)은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한 저항의 성패는 그 사회의 중앙무대에서만이 아니라, 작은 마을 단위, 작은 직장을 포함하여 도처에서 권력의 논리에 대한 반대토론이 용기 있고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폭력적인 권력의 논리에 불복종하는 연대가 이루어질 때, 그 사회는 이미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야만이 지배하게 할 것인가?**

오늘날의 노암 촘스키 선배 격이 되는 진보적 지식인 스캇트 니어링은 그의 부인 헬렌과 함께, 1950년대 미국의 냉전체제가 강화되어가면서 매카시즘이 미국 전역을 휩쓸었던 시기, 3년간의 겨울동안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권력의 야만적 논리에 대한 저항의 동력을 확산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USA Today>: Maine, Social Science Institute, 1955)

그 과정에서 그는 권력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공유되어가는 과정의 중요성을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인류의 양심에 대한 충성이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우선이다. 이를 역전시키려는 권력을 거부하지 못할 때 그 사회에는 야만이 지배한다. 그리고 그 야만은 어느 사이에 그 사회의 본성으로 자리잡아가게 된다.”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을 권력의 야만에 길들이게 할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권리를 지켜내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될 것인지, 그 기로에 서 있다. 인류적 양심과 역사의 육성에 귀를 기울이면, 그 선택은 누구에게도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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